동학과 민족종교 운동에서 본 민족운동사

 

 

 

들어가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당시의 민족종교라 함은 항일 구국 운동과 동의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타 종교와는 달리 혈연, 지연에 근거해 탄생한 것으로서 구성원 거의 전부가 한(韓)민족이라는 특수성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도덕성과 신앙적 종교성 이외에 일제의 강압에 의한 주권 침탈과 식민 통치라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듯 1920년 조선 총독부 칙령에는 ‘종교라 함은 신도, 기독교, 불교를 말함이다’라고 정의하며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자생적인 민족 종교(천도교, 대종교, 보천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 우리의 역사를 장식한 동학과 제 민족종교(천도교, 대종교, 보천교)의 관점에서, 절실하고 처절했던 독립운동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Ⅰ. 동학운동과 민족종교

 

 1894년(고종 31년)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학정과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내세워 동학교도와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으로 출발했으나 조병갑의 폭정을 계기로 민중과의 결합을 통해 정치운동으로 성장한 후 1년여 간 명맥을 이어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및 김개남 등은 동학의 대의(大義)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 일명 ‘무장동학포고문’을 발표하는 등,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애초부터 일부 지역에 국한한 민란의 성격에서 벗어나 반침략·반봉건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즉 주권을 침탈하는 외세와 부패하고 무능한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강력한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 건국 이후, 반상(班常)의 대립이 불러온 누적된 사회 모순과 정조(正祖) 사후 외척을 등에 업은 관료집단의 부패와 무능이 야기한 민중들의 삶은 피폐함을 넘어서 참혹함 그 자체였다. 그러한 현상에 대한 반작용은 변화를 넘어서 변혁을 요구하는 외침으로 민심을 결집했는데 동학운동은 결집한 민심의 구체화된 상징으로서 만인의 지지와 성원을 받으며 세력을 급속하게 넓혀나갔다.

 들불과 같은 동학농민운동 세력의 항쟁을 관군의 힘만으로는 제압하기 어려워지자 권력유지에 급급하던 왕실과 정부의 요청으로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청국이 조선에 파병하고 이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한다. 그리고 일본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입성한다.

 

 식민지 침탈에 열을 올리던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자기 목소리를 내던 청·일 양국은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자 동학농민운동을 구실 삼아 파병을 했고, 제 3국인 조선에서 청·일 양국은 정작 당사자를 배제한 채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마침내 외세의 부당한 개입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은 더 이상 내부의 문제가 아닌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할 혁명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의 국체(國體)와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사의 주연으로 등극한다.

 

 절대 다수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개입으로 위기감을 느낀 전봉준은 원정서(原情書)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에게 제시한다. 강경진압으로 일관하던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두 세력은 6월 11일 극적으로 전주화약(全州和約)1)의 성립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지도부의 오판과 권력 유지를 위한 시간벌기에 성공한 왕실 및 그들과 결탁한 외세의 간섭에 의해 동학농민운동은 맨 처음의 빛나는 결의와 그에 대한 전 국민적인 호응을 이어가지 못하고 초기의 세력유지에 실패, 결국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주1 -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하고 정부와 맺은 조약이다. 전라도 지방의 개혁 사무를 담당할 자치 기구인 집강소의 설치와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 실시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입으로 농민군이 다시 일어나면서 이 합의는 파기되었다.)

 

 동학운동과 그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동학농민운동은 결과적으로 비록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한일 병탄 후 해방이 될 때까지 식민지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실의에 찬 민중들의 자발적이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제 민족 종교-천도교, 대종교, 보천교-에 끊임없이 인적, 물적, 정신적인 자양분을 제공한 원천으로 톡톡히 자리매김하는 독립운동의 ‘젖줄’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국권 침탈 후 항일의병 항쟁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맥락은 역사에 길이 남을 3·1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어 그 면면을 계승해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르고 있다.

 

 

Ⅱ. 천도교의 독립운동사

 

 일부 친일 인사와 그들의 활동으로 오점을 남기기는 했지만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선 공로가 분명한 민족종교. 일제가 조선병탄(朝鮮倂呑)을 위해 친일 교도 이용구 등을 내세워 유신회를 조직, 동학을 분열시키자 이에 동학의 제 3대 교주였던 손병희가 1905년 을사조약 후 진보회를 조직해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 민족 종교로서 독립 운동에 전력을 다하였다.

 

 천도교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3·1운동의 준비와 실행에 있다. 손병희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인물 중 한 명으로서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손병희 선생 이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 14명이 천도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비록 불발되기는 했으나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이종일이 작성한 제2독립선언문의 일부다.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민중 여러분 우리 대한은 당당한 자주 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지난 기미년의 독립만세 운동은 곧 우리의 전통적인 독립의 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것이고, 국제 정세의 순리에 병진하는 자유, 정의, 진리의 함성이었습니다. …… 이하 중략

                                          <이종일, 제2독립 선언문, 1923년>

 

 

 그로 인해 대종교 및 보천교와 함께 대표적인 민족 종교로 낙인 찍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만주로 이동해 무장독립항쟁에 주력했던 대종교와 달리 천도교에 대한 탄압은 채찍과 당근을 이용해 천도교의 내부분열을 획책, 친일 집단으로 변질시켜 천도교 본래의 목적을 희석하고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손병희 사후 기존 독립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의 구파(舊派)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新派)간 갈등을 악용, 신파의 거두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최린으로 하여금 자치론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받아들여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이는 곧 천도교의 본질이 겉으로 드러난 지도부의 일제 야합과 달리 민족종교로서 독립운동을 지향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천도교의 독립운동은 신파와 달리 반일적 성향이 강한 구파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2)이 대표적이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심화되던 1936년에 천도교 제4대 대도주였던 박인호(朴寅浩)는 8월 14일 주요 두목들을 불러 민족정신사의 회복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 주2 - 무인멸왜기도운동 : 천도교에서 1936년부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매일 아침, 저녁 식고(食告) 때 외도록 하고 유사시에 대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던 운동) 

 

 그 결과 전국 각지에서 일제의 패망을 기원함과 아울러 유사시에 대비한 독립운동자금으로 특별성금 모금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후반에는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일제 패망’이라는 문구 대신에 ‘동양평화의 기초가 하루 빨리 확립되도록 기원한다’는 내용이 새로 삽입되었다.

 

 그러던 중 1938년 2월 17일에 이와 같은 사실이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적발되면서 전국적으로 천도교 교역자들의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황해도 지역의 연원을 대표하던 홍순의(洪順義)와 장로 최준모(崔俊模)를 비롯하여 중앙 간부 여러 명과 전국 각지의 교역자 수백 명이 피검되었고, 대도주 박인호는 노환에도 불구하고 병상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구속된 교역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출감 직후 고문의 여독으로 4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질병을 얻게 되는 등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이 사건이 크게 번질 경우 해외에서 천도교의 기도운동을 지원하거나 국내에서 거국적인 저항운동으로 확대될 우려가 있음을 감지한 일제는 사건의 확대가 중일전쟁 수행에 불리하다고 판단, 일반 교역자는 모두 석방하고 최준모, 김재계(金在桂), 한순회(韓順會), 김경함(金庚咸), 홍순의 등 5인만 치안유지법으로 구속 송치하였다가 그들도 70일 만에 석방하였다.

 

 신문화운동의 정신적 이념으로서 역할을 자임했던 천도교는 독립 교육에도 앞장서서 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학원을 운영하며 한 민족의 역사와 자긍심을 가르쳤다

 

 일제 항쟁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주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부분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손병희는 정부로부터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를 추서 받았다.

 

 

Ⅲ. 대종교의 독립운동사

 

 1907년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주도하여 국권회복의 의지를 내외에 천명했던 홍암 나철(羅喆)3)이 1909년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망했으나 정신은 존재한다)’이란 명분을 앞세워 중광(重光)4)한 민족종교. 창시 1년만인 1910년 교도 수가 2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종(大倧)은 천신이란 뜻으로 대(大)자는 천(天)에 속하며 우리말로 '한'이란 뜻이고 종(倧)은 신인(神人)이 합쳐진 글자로서 우리말로는 '검[神]' 또는 '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한얼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주3 - 나철 : 1905년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佰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 (三一誥)>와 〈신사기(新事記)〉를 전해 받고, 1908년 도쿄[東京]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단군교포명서 (檀君敎佈明書)〉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나철은 종교적 구국 운동을 펼치다가 구월산에서 순교조천(殉敎朝天)하였다. 건국훈장 독립장(1962)이 추서되었다.)


(주4 - 중광 : 나철 대종사가 교를 처음 창립한 것이 아니라 면면히 내려오는 민족 신앙을 다시 밝힌다는 의미.)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정훈모를 비롯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해 교단의 내분이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기도 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로 옮긴 후 1911년 5월 백두산 기슭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고 무장을 통한 항일 구국 운동에 앞장선 대표적인 민족종교이자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한민족의 고유 사상의 근간인 단군을 매개체로 하는 대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두려워한 일제는 1915년 10월 총독부령 제83호 '종교통제안'을 만들어 대종교를 종교단체로 가장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라고 불법화시켜 버렸다. 이에 나철의 뒤를 이은 김교헌(金敎獻)5)은 일제의 박해를 피해 천도교와 달리 1917년 총본사를 만주 화룡현으로 옮겨 만주 동포들에게 포교하는 한편 1918년 11월에 신도 및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결집해 독립운동지도자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 일명,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했다. 이는 1919년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국내의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주5 - 김교헌(金敎獻) : 1868~1923. 1916년 나철 선생에 이어 대종교의 제2대 교주가 된 분으로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으로 옮긴 뒤 제2회 교의회를 소집하여 홍범규칙을 공포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썼다. 대종교의 종리(倧理)라 할 수 있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

 

 

   (출처: http://blog.naver.com/goguli/90043157600)

 

 

 대종교는 당시 조선에서 행해지던 애국 계몽운동(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운동)을 관제적 타협 운동이라 규정하고 실력 양성은 독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독립전쟁론을 주장하며 중광단(1911년), 정의단(1919년 3월), 북로군정서군(1919년 9월)을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선 서일(徐一)은 나철의 제자로서 김좌진 등과 중광단(重光團)이라는 대종교 교도 중심의 독립운동 단체를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함께 모아 1911년에 조직하고, 3·1운동 직후에는 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한 별도의 대한군정서, 일명 군정회를 조직. 북로군정서(北路軍政暑)라는 독립군 부대를 편성해 1920년 10월 2,500명을 이끌고 5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한 청산리 전투에서 길이 빛나는 대승을 거두었다.

 

 청산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의 전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6월 봉오동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둔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었다. 당시 청산리 계곡에는 화전민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주로 대종교 신도들이었다. 그 결과 만주에 침투한 일제의 보복과 박해 때문에 총본사를 다시 소만(蘇滿) 국경으로 옮기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만들어지자 대종교의 북로군정서는 임시정부의 군대로 참여하였고, 이후 민족학교 설립, 민족사학의 정립, 한글 지키기 운동, 그리고 해방 후 건국운동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사상적 토대이자 실천적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대종교의 항일 무장투쟁은 당시 일본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중국 둥산성(東三省) 지배자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협약인 미쓰야 협정에서 미쓰야 미야마스 경무국장은 “대종교의 간부인 서일이 독립군의 수령으로 그 교도를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군단의 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 단체이다. 이 단체가 중국의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책임지고 해산시켜야 한다.”라고 말하며, 당시 중국 최대 군벌 장쭤린에게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스와 중국 최대 군벌 장쭤린이 체결한 미쓰야 협정문

 

 

 이와 같이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특히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에서는 이동녕, 현천묵, 계화, 윤정현, 황학수, 김승학, 홍범도, 김혁, 김좌진, 윤복영, 이범석, 여준, 이홍래, 정신, 이동하, 한기욱 등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당시 민족사회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몰고 왔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규식도 대종교의 시교사 자격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그는 ‘한국민족의 부흥은 반드시 대종교가 발전하는 데 있다’는 신념하에 박찬익, 조성환, 유동열, 조완구, 이상설 등 대종교의 중심인물들과 활발한 외교활동독립운동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국무위원급 이상으로 참여했던 대종교 인물은 이시영, 박은식, 이동녕, 신규식, 이상룡, 조완구, 박찬익, 조성환 등을 망라하여 20여 명을 헤아린다.

 

 대종교인들의 독립운동이 이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혹은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홍암 나철 대종사가 1916년 자결로써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데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자결로 대종교의 무장투쟁과 항일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나철의 죽음은 나중에 30만 대종교도 가운데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0만 여명이 항일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순교한(학계 추정) 독립운동의 기폭제였던 것이다.  

 

 일제 항쟁기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서 자주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나철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Ⅳ. 보천교의 독립운동사

 

 

 보천교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증산교(甑山敎) 계열의 신종교로서 동학에 뿌리를 두고 독립운동을 한 신흥 민족종교다. 동학혁명 실패 후 조직이 와해된 상태에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북접(北接)6)과 달리 동학의 근대화 노선에 가담하지 않은 남접(南接)7)의 일부가 강증산(姜觀山)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보천교는 태생적으로 동학의 대의(大義)를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매개자의 역할로 등장하는 존재가 바로 동학과 불가분의 관계인 강증산이다.  

 

(주6 - 북접(北接) : 동학 교단조직의 하나로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충청도 지역의 조직)

(주7 - 남접(南接) : 동학 교단조직의 하나로서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라도 지역의 조직)

 

 보천교의 독립운동은 크게 차경석의 생전과 차경석의 사후로 나뉘어 살펴볼 수가 있다.

차경석 생전 보천교의 독립 관련 활동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차경석이 천자등극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1920년대 초반의 활동은 3·1독립만세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민중을 제위설로 일거에 집중시켜 독립운동의 기반 강화를 목적으로 조직을 재정비 및 세력화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시대착오적인 퇴행이 아니라 난국돌파를 위한 승부수로서 새롭게 조명,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 관점에서 보천교의 각종 활동이 내포한 반일적 성향, 즉 반일성(反日性)의 각종 증거는 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8)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충분히 검토, 증명할 수가 있다.

 

 (주8 - 온라인 국가기록원 : 국가기록원에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과 관련한 법원의 판결문을 모아 놓은 웹사이트)

 

1> 보천교의 조직운동이 1918년 10월에 있은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의 배경

 

2> l920년대 초반에는 극동 피압박 민족회의에 참가하는 일부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보천교의 차월곡이 여비를 지원

 

3> 일명 워싱턴회의(1921)를 앞두고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에 보천교 대표 2명 포함

 

4> 김좌진에게 자금 지원(1922)을 한 정황

 

5> 1923년에는 보천교 대표 2명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 보천교 대표라 자칭한 배치문(裵致文)과 강일(姜適;姜弘烈)이 참석했다. 이들은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義烈塵)에 가입했다.

 

6> 3.1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임규(林圭)가 라용균(羅容均)을 통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 5만원을 전달. 당시의 임규는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衝平司長)이라는 간부인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측 회원

 

7> 보천교인 신찬우는 김좌진의 밀명으로 차월곡을 만주로 데려가려고 1923년 5월에 잠입하였다가 검거됨

 

 학계에 널리 알려진 위의 사항 외에도 근래에는 독립운동가 주익, 고용환, 임규, 배치문, 조만식, 박자혜 등의 행적이 보천교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인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인 『산업계』를 발간하는 등의 계몽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다음의 표는 보천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의 키워드와 건수 및 일제강점기 당시 각 종교별 항일활동을 기사화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표1> 보천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 건수(2014년 6월 6일 기준)

검색 단어

보천교

차경석

선도교

태을교

우치교

강증산

계(명)

건수

74

256

36

123

303

27

819


 [표] 일제강점기 종교별 항일기사 건수

종교명

종교일반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보천교

청림교

기타종교

보천교

태을교

흠치교

항일기사

6

 23

2

18

15

32

 83

9

55

17

11

합계

6

23

2

18

15

32

147

17

11

 

 

 

 

 

 상기 표1, [표] 출처 :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판결문’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민족운동 학술대회 자료집, 안후상(安享相), 2016*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보천교(계열 포함)의 항일활동 관련 기사가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당시 공인 종교였던 불교와 기독교의 항일 관련 활동에 대한 기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실적’에도 불구하고 왜 보천교는 차경석 사후 8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단과 사이비로 세간에 회자되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3·1 독립만세 운동을 모의하고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과 몇몇을 제외하고 변절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는데도 그들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매국노가 아닌 애국자로 둔갑한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는 관련 부처와 학계는 과연 어떤 답을 할 것인가? 모든 답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1924년 무렵 일부 사회단체가 보천교 박멸운동을 펼치던 것과 무관하지가 않다.

 

 그 결정적 원인 제공은 바로 일본에서 귀국한 보천교 일부 간부들이 일본정부와 총독부의 권유로 친일단체인 각파유지연맹(各派有志聯盟)과 함께 1926년에 조직한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 때문이었다. 시국대동단은 동아시아가 한 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9)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는데 이는 사회지도층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한테도 엄연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천황을 대신하여 보천교가 조선을 통치할 것이라는 대리통치설(代理統治說)이 대두되면서 더 큰 악재를 불러왔다.

 

(주9 - 대동아공영권 : 서양세력이 동양을 침입하는 때를 당하여 동양 황인종은 상호간 대동단결로써 세력을 공고히 하자라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주의 정책을 정당화 하는 논리)

 

 보천교는 그 여파로 정치·사회 활동의 참여범위를 놓고 그동안 누적된 현안에 대해 혁신운동이 일어나 내분에 휩싸였는데 우리는 여기서 일제가 직간접으로 개입했음을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가 있다. 즉,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지속적으로 가하는 한편, 회유 과정에서 종교활동 보장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분열과 이간을 획책했던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보천교가 민족운동 또는 민족종교운동을 했다는 견해가 다수인 반면에 근대성과 민족성이 없는 보천교의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일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24년 『시대일보』 인수와 같은 사회활동과 보천교의 취지 가운데 하나인, 전근대적인 신분질서 타파를 공론화한 점을 상기한다면 이와 같은 견해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3·1만세운동 직후의 일제는 한국의 신종교인 민중종교 또는 민족종교의 조직운동에 민감하게 대응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600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보천교의 각종 활동을 3·1만세운동의 재현으로 인식했다. 그 이면에는 보천교의 후천선경(後天仙境),  신정부(新政府) 건설운동을, 독립운동으로 간주한 인식이 존재한다. 그것은 항구적인 식민통치를 염원하는 일제에게는 치명적인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실례를 확인해보자. 다음은 1921년 6월 2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경북 영양의 이정호(李廷浩) 외 3인의 판결문의 내용 가운데 일부다.  

 

 “...... 수십만의 신도의 대단결이 재작년 소요 당시와 같이 일제히 일어나고 소요에 있어서는 독립의 목적을 관철하는 일이 장래에 있을 것이다. 재작년과 같이 적극적으로 소요할 때……”

 

 상기의 독립운동판결문에 나타난 보천교의 두드러진 성향은 반일성(反日性)을 바탕으로 한 민족성(民族性)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 후천선경(後天仙境)10), 신정부(新政府) 건설운동을 허무맹랑한 미신사교 놀음이라 비난하였다. 그러나 천심(天心)의 대변자인 절대 다수의 민중은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론을 조선의 독립과 새로운 정부수립 등의 민족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일제가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10 - 후천선경(後天仙境) : 갈등과 원한의 선천시대가 아닌 상생(相生)이 지배하는 후천(後天)의 이상사회를 의미)

 

 

 보천교가 1910년대 말부터 줄기차게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는 비밀결사적인 조직운동과 독립운동을 병행, 전개하게 된 배경에는 후천선경의 신정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타민족의 지배, 즉 일제의 강점을 걸림돌로 분명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천교는 일제와 애초부터 양립이 불가능한 적대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다. 보천교에 덧씌워진 악의적인 ‘친일’의 굴레는 대종교에 대한 파괴공작과는 다른 차원에서 진행된, 일제의 주도면밀한 공작정치의 산물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일제는 보천교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부터 확신을 갖고 보천교를 종교 단체가 아닌 “종교로 위장하였으나 사실은 조선독립운동단체이다”라고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차월곡이 1924년, 갑자년에 천자로 등극한다는 소위 천자등극설은 스토리텔링적인 이벤트로써, 그 이면에는 바로 3·1만세운동의 실패 이후 실의와 좌절에 빠진 민중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그 역량을 결집해 주권회복이라는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보천교 수뇌부의 고육지책이 자리한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차경석 사후의 독립운동은 보천교의 잔여세력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특징이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 1938년 보천교 신자 일부가 조직한 ‘신인동맹’에서는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2> 선도교의 일망예언(日亡預言; 1935년)

 

 3> 원군교의 멸왜집회(滅覆集會; 1941년)

 

 4> 미륵불교신인동맹의 일망무지(日亡無地; 1941년)

 

그 외에도 1940년대까지 황극교(皇極敎), 신인동맹(神人同盟), 무극대도(無極大道), 삼산교(三山敎), 선교(仙敎), 천자교(天子敎), 원군교(元君敎), 선도교(仙道敎), 조선건국단(朝蘇建國團) 등이 비밀리에 조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1920년대에는 주로 제령 제7호11)의 위반으로 실형이 선고된 것과는 달리, 1936년 차경석의 사후 유사종교 해산령을 공표한 뒤부터 신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어 1940년대에는 보안법 위반이나 육해군 형법 위반 등이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주11 - 제령 제7호 :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동년 4월에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관련 특별법. 제령 7호의 제1조는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코자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이를 선동한 자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선고 형량도 징역 6년까지 올라갔는데 그것은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전시 총동원령 체제에서 보천교(계열 포함)의 후천선경⸱신정부 건설운동을, 일제의 통치이념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중대 사상운동’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보천교의 잔여세력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에 나타난 보천교의 독립운동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4>  '독립운동관련판결문'에 나타난 보천교의 독립운동(1921)


주요활동시기
/활동지역

사건명
(주소와 판결시기, 판결기관)

관련 인물의 판결 정보(나이/주소/죄명/주문) 외

2(복)

1919-1920.7/경북청송, 안동

경북안동의 손재봉(孫在鳳)
판결문(1921.4.22.,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손재봉(38세, 경북안동, 제령제7호 위반, 징역4년) 외 25명 / 경북청송 11명, 경북안동 10명 / 제령제7호 위반 / 징역1년은 17명, 징역2년은 8명,징역4년은 1명

1920/경북청송, 안동, 김천등

경북안동의 손재봉(孫在鳳) 외 49인
 판결문(1921.11.26., 대구복심법원)

손재봉(38세, 경북안동, 제령제7호 위반, 원판결취소 면소) 외 49명 / 경북청송 12명, 경북안동 8명, 경북군위 8명, 경북영덕 8명, 경북영양 8명, 경북김천 3명, 경북달성 1명 경북경주 1명, 경북의성 1명 / 제령제7호 위반 / 공소기각 또는 원판결 취소 면소는 50명

3

1920/경북안동

경북영덕의 권영기(權寧畿) 외 17인
 판결문(1921.5.16.,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권영기(24세, 경북영덕, 제령제7호위반, 징역2년) 외 17명 / 경북영덕 12명, 경북안동 2명, 경북영양 2명, 경북의성 1명, 경북청송 1명 / 제령제7호위반/징역1년은 17명, 징역2년은 1명

4

1920/경북영양, 의성

경북영양의 이정호(李廷浩) 외 3인
 판결문(1921.6.2.,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이정호(26세, 경북영양, 제령제7호위반, 징역1년) 외 3명 / 경북영양 3명, 경북청송 1명 / 제령제7호위반 / 징역1년은 4명

 

*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 민중운동


5(직접관련없음)

1919~1920/ 중국, 경성

경성홍파동의 한우석(韓禹錫) 외 20인
판결문(1921.6.21., 경성지방법원)

한우석(31세, 주거부정, 강도 살인예비 제령제7호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취제령위반 공문서위조 공갈취재미수 사기,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부침) 외 20명 / 경성 12명, 충남부여 1명, 주거부정 7명 / 강도 살인예비 제령제7호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취제령위반, 공문서위조, 공갈 취재미수 사기 / 경성지방법원의공판에 부침은 15명, 면소나 방면은 5명, 미상은 1명

6

1920/경북안동, 의성, 청송등

경북청송의 박주한(朴住翰) 외 26인
판결문(1921.6.22.,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박주한(29세, 경북청송, 제령제7호위반, 징역1년) 외 26명 / 경북안동 14명, 경북성 6명, 경북군위 4명,  경북청송 2명, 경북영덕 1명 / 제령제7호위반 / 무죄는 5명, 징역1년은 17명, 징역2년은 5명

1919/경북안동, 의성, 청송등

경북청송의 박주한(朴住翰) 외 54인
판결문(1921.11.26.,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박주한(29세, 경북청송, 제령제7호위반, 원판결취소 면소) 외 54명 / 경북안동 21명, 경북의성 10명, 경북청송 7명, 경북문경 7명, 경북군위 6명, 경북영양 3명, 경북영덕 1명 / 제령제7호위반 / 공소기각·면소무죄는 27명, 징역1년은 7명, 징역2년은 21명

7

1919~1920/경북의성

경북문경의 강석희(姜錫凞) 외 13인
판결문(1921.6.27., 대구복심법원형사제2부) 

강석희(29세, 경북문경, 제령제7호위반, 징역2년) 외 13명 / 경북문경 9명, 경북의성 2명, 경북군위 2명, 경북청송 1명 / 제령제7호위반 / 징역1년 집행유예4년은 2명, 징역1년은 4명, 징역2년은 8명

8

1920/경남진주

경남진주의 경영필(姜永弼) 외 1인
 판결문(1921.7.1., 대구복심법원)

강영필(49세, 경남진주, 제령제7호위반, 공소기각) 1명

9

1920/경북안동

경북안동의 권영재(權寧宰) 외 1인
 판결문(1921.7.2.,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권영재(34세 경북안동, 제령제7호위반, 징역2년) 외 1명 / 제령제7호위반 / 징역1년 집행유예3년은 1명, 징역2년은 1명

10

1919~1920/경북안동, 영양

경북영양의 안규석(安圭錫) 외 13인
판결문(1921.7 .4.,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안규석(19세, 경북영양, 제령제7호위반, 면소) 외 3명 / 경북영양 2명, 경묵의성 1병 / 제령제7호위반 / 면소 3명, 징역1년 1명

11

 1920~1921/ 경북군위

경북군위의 이치균(李致均) 외 2인
판결문(1921.7.8.,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이치균(40세, 경북군위, 제령제7호위반, 무죄) 외 2명 / 경북군위 1명, 경북청송 1명, 경북의성 1명 / 제령제7호위반 / 무죄는 1명, 징역1년은 2명 

12

 1920/ 경북군위

경북 김천의 이군명(李君明) 외 11명
판결문(1921.7.8.,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이군명(34세, 경북김천, 제령제7호위반, 정역1년) 외 11명 / 경북군위 8명, 경북김천 3명, 경북달성 1명 / 제령제7호위반 / 징역1년은 10명, 징역2년은 2명 

13

 1920/ 경북안동, 청송

경복청송의 조용원(超鏞元) 외 25인
판결문(1921.7.11., 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조용원(23세, 경북청송, 제령제7호위반, 징역1년) 외 25명 / 경북안동 23명, 경북청송 3명 / 제령제7호위반 / 무죄는 4명, 징역1년 집행유예3년은 12명, 정역1년은 8명, 징역2년은 2명 

14(복)

1920~1921/함남덕원

함남덕원의 이성린(李成麟) 외15인
판결문(1921.7.27., 경성복심법원)

이성린(40세, 함남덕원, 제령제7호위반, 원판결취소 징역6월) 외 15명 / 함남덕원 4명, 함남영흥 3명, 함남정평 2명, 함남고원 2명, 전북정읍 1명, 전북옥구 1명, 충남논산 1명, 전남영광 1명, 전남무안 1명 /  제령제7호위반 / 무죄는 13명, 징역6월은 2명, 징역1년6월은 1명

15

1919~1920/강원강릉

전북진안의 김태주(金泰周)
판결문(1921.7.28.,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 

김태주(56세, 전북진안, 보안법위반, 징역6월) 1명

16(복)

 1919/강원강릉

강원강릉의 박희백(朴羲伯; 朴南喆) 외 1인
판결문(1921.10.12., 경성복심법원)

박희백(42세, 강원강릉, 제령제7호위반, 원판결취소 징역 10월) 외 1명 / 강원강릉 2명 / 제령제7호위반 / 무죄는 1명, 징역10월은 1명

 1919/강원강릉

 강원강릉의 박희백(朴羲伯; 朴南喆) 외 1인
판결문(1921.11.19., 고등법원형사부)

박희백(42세, 강원강릉, 제령제7호위반, 상고기각) 1명

17(복)

 1920~1921/강원 양양

강원양양의 김홍식(金鴻植) 외 13인
판결문(1921.11.16., 경성복심법원) 

김홍식(47세, 강원양양, 제령제7호위반 도주, 원판결취소 징역6월) 외 13명 / 강원양양 14명 / 제령제7호위반, 도주 / 무죄는 9명, 징역3년 집행유예2년은 1명, 징역6월은 4명

 

 

<표5> '독립운동관련판결문'에 나타난 보천교의 독립운동(1922~1926)

 

주요활동시기
/활동지역

사건명
(주소와 판결시기, 판결기관)

관련 인물의 판결 정보(나이/주소/죄명/주문) 외

18

1921/전북정읍, 김제

경남함양의 김영두(金英斗) 외 2인
판결문(1922.10.16., 전주지방법원합의부)

김영두(43세, 경남함양, 제령제7호위반, 징역2년 미결구류일수 중 150일산입) 외 2명 / 경남함양 1명, 전북정읍 1명, 전북김제 1명 / 제령제7호위반 / 징역8월 집행유예3년은 1명, 징역1년은 1명, 징역2년은 1명

19

1921/전북진안, 무주

전북임설의 심상훈(沈相勳) 외 1인
판결문(1923.5.21., 전주지방법원금산지청)

심상훈(27세, 전북임실, 사기 보안법위반, 징역1년) 외 1명 / 전북임실 1명, 전북무주 1명 / 사기 보안법위반 / 징역6윌은 1명, 징역1년은 1명

20(복)

1922/전북정읍, 충북제천

충북단양의 박운업(朴雲業)
판결문(1923.5.25., 경성복심법원) 

박운업(27세, 충북단양, 제령제7호위반, 공소기각) 1명

21(복)

1922/충북제천

충북제천의 이용운(李用運)
판결문(1923.6.4., 경성복심법원)

이용운(33세, 충북제천, 제령제7호위반, 공소기각) 1명

22

1923/경북울진

전국김제의 김혁진(金爀珍)
판결문(1923.11.21., 대구지방법원울진동지청) 

김혁진(28세, 전북김제, 보안법위반, 무죄) 1명

23(복)

1923/경북영일

경북경주의 이인석(李寅錫)
판결문(1924.12.15., 대구지방법원) 

이인석(23세, 경북경주, 공갈미수, 징역8월) 1명

이인석(李寅錫)
판결문(1925.3.17., 대구복심법원)

이인선(24세, 주거부정, 공갈미수, 징역8월미결구류일수60일 본형에 산입) 1명

24

1923/충남논산

전북익산의 임재근(林在根)
판결문(1923.12.24., 공주지방법원) 

임재근(37세, 전북익산 제령제7호위반 구류29일) 1명

25

1923/경성

경남합천의 구여순(具汝淳) 외 5인
판결문(1924.1.25., 경성지방법원)

구여순(32세, 북경, 제령제7호위반 횡령, 당법원 공판에 부침) 외 5명 / 북경 2명, 전남목포 1명, 경남합천 1명, 경남동래 1명, 경기고양 1명 / 제령제7호위반/ 당법원 공판에 부침은 4명, 당법원 공판에 부침 횡령은 면소는 1명

1923/경성

경남진주의 구여순(具汝淳) 외 5인
판결문(1924.2.28., 경성지방법원)

구여순(32세, 경남진주, 제령제7호위반, 징역4년) 외 5명 / 전남목포 1명, 경남합천 1명, 경남동래 1명, 경남진주 1명, 경북안동 1명, 경기고양 1명 / 제령제7호위반 / 면소는 1명, 징역8월은 1명, 징역1년은 1명, 징역2년은 2명, 징역4년은 1명

26(복)

1924/경북상주

경북상주의 김영생(金泳生)
판결문(1925.7.4., 대구복심법원)

김영생(39세, 경북상주, 보안법위반, 징역8월) 1명

27

1924/경북영천, 청송

경북청송의 조성복(趙性復)외  1인
판결문(1926.1.30., 대구지방법원)  

조성복(57세, 경북청송, 보안법위반 사기, 면소) 외 1명 / 경북청송 1명, 경북의성 1명 / 보안법위반, 사기 / 면소는 2명

 

 *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 민중운동


28

1925/만주, 경성, 경북, 전북

전북정읍의 한규숙(韓圭淑)외 4명
판결문(1926.7.19., 경성지방법원)

한규숙(38세, 전북정읍, 제령제7호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강도예비는 경성지법공판에 부침 제령제7호위반은 면소) 외 4명 / 전북정읍 2명, 경남진주 1명, 경성 1명, 주거부정 1명 / 제령제7호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 경성지법공판에 부침 제령제7호위반 면소는 1명, 강도예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은 경성지법공판에 부침 제령제7호위반 면소는 3명, 제령제7호위반 강도예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강도피고사건 면소는 1명

전북정읍의 한규숙(韓圭淑)외 3명
판결문(1926.11.18., 경성지방법원)

한규숙(38세, 전북정읍, 강도예비, 징역1년 미결구류일수200일 본형에 산입) 외 4명 / 전북정읍 2명, 경성 1명, 주거부정 1명 / 강도예비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 징역8월 1명, 징역1년은 3명

 

<표6> '독립운동관련판결문'에 나타난 보천교의 독립운동(1938~1945)


주요활동시기
/활동지역

사건명
(주소와 판결시기, 판결기관)

관련 인물의 판결 정보(나이/주소/죄명/주문) 외

29

1938경/경기장단, 고양

경성북아현정의 김중섭(金重燮) 외 17인
판결문(1938.9.30., 경성지방법원)

김중섭(42세, 경성북아현, 치안유지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 부침) 외 17명 : 30대 3명, 40대 11명, 50대 3명, 60대 1명 / 황해도 6명, 함북 4명, 만주간도 2명, 경성 2명, 강원이천 1명, 경기장단 1명, 주거부정 2명 / 치안유지법위반 / 면소는 8명,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은 10명

30

1935~1937/전북정읍, 경성

만주봉천의 채경대(蔡慶大) 외 7인
판결문(1939.5.23., 경성지방법원)

채경대(50세, 만주봉천, 보안법위반,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 외 7명 : 20대 1명, 30대 2명, 40대 3명, 50대 1명, 70대 1명 / 경기고양 3명, 만주 2명, 경성 1명, 전남무안 1명, 충북옥천 1명 / 보안법위반, 사기 사기횡령 /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부침은 4명, 면소는 4명

31

1936~1937/제주

제주중문의 강승태(姜昇泰) 외 19인
판결문(1940.12.4., 광주지방법원형사부)

강본승하(46세, 제주중문, 불경 보안법위반, 징역6년 미결구류일수중 300일 본형에 산입 벌금200원 환형유치일수 200일) 외 19명 : 30대 1명, 40대 5명, 50대 11명, 60대 2명, 70대 1명 / 전원 제주 / 불경 보안법위반, 치안유지법위반, 육군형법위반, 수렵규칙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위반 / 징역10월은 1명, 징역1년 이상은 7명, 징역2년 이상은 8명, 징역3년 이상은 1명, 징역4년 이상은 1명, 징역6년 이상은 1명

32

1936~1940/전북정읍

경기부천의 용본춘영(龍本春榮) 외 2인
판결문(1942.8.13., 경성지방법원)

용본춘영(50세, 경기부천 치안유지법위반, 징역2년) 외 2명 : 50대 2명,60대 1명 / 경기부천 1명 경기용인 1명, 경기행촌 1명 / 치안유지법위반 / 징역2년은 3명

33

1938~1942/미상

제주애월의 원변호찬(原邊鎬燦) 외 1인
판결문(1942.11.12., 광주지방법원제주지청)

원변호찬(60세 제주애월, 조선임시보안령위반, 공소기각) 1명

34

1935~1942/전남낙안

제주제주읍의 양원붕진(良元鵬進) 외 3인
판결문(1943.2.16., 광주지방법원목포지청)

양원붕진(53세, 제주해안, 보안법위반, 징역10월 집행유예2년) 외 3명 : 30대 1명, 50대 3명 / 전원 제주 / 보안법위반, 조선임시보안령위반, 공무원강요 봉인무효 공갈, 육해군형법위반 / 징역10윌 집행유예2년는 4명

35(고)

1943/황해도 웅진

황해도웅진의 최도성(崔道成)
판결문(1945.3.12., 고등법원형사부) 

최도성(58세, 황해도웅진, 치안유지법위반, 상고기각) 1명

 

 

 

 

상기 표 4, 5, 6 출처: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 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판결문’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민족운동

학술대회 자료집, 안후상(安享相), 2016*

 

 

 

마치면서

 

 이상과 같이 동학을 중심으로 발흥한 천도교, 대종교 그리고 보천교의 일제 강점기 당시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현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는 작업은 일면 객관적인 것 같아도 당시의 절실함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세상에 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공인종교 세력들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와 같은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위선의 세월을 보내던 것과 달리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민족종교인 보천교와 그 잔여세력들은 불과 해방을 얼마 앞두고, 한때는 깊은 지지와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었던 민중들로부터 외면 받은 채 그렇게 쓸쓸히 잊혀져갔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동학 이후 탄생한 이 땅의 모든 민족종교의 예정된 운명이었음을 지금에서라도 후손들이 조금이나마 자각한다면 이제 우리 각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되리라 믿는다. 그것만으로도 이 주제에 헌신한 많은 이들의 노력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마친다.

 

 


 

  

<출처 및 참고문헌>

 

1>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 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민족운동 학술대회자료집, 안후상(安享相), 2016*

2>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민족운동 학술대회자료집, 김재영(金載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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