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와 정읍의 ‘석탄사’,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다
서울 은평구 하면 한옥마을로 유명하지만 이곳에 진관사(津寬寺)가 있고, 북한산이 있어 서울에서도 자주 찾는 곳이다. 2019년 MBC TV에 설민석과 유준상이 진관사를 찾아 독립운동가였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의 독립운동과 그가 사찰에 숨겨두었던 태극기에 관한 이야기가 전파를 타면서 감동을 주었다. 하지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34년 정읍 석탄사에 머물면서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여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아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城) 스님과 함께 불교계 항일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임에도 진관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아마도 제작진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초월의 출생지가 경남 고성이지만 정읍과 인연이 있는 것은 초월이 한때 진관사에도 있었고, 말년에는 정읍 석탄사(石灘寺)에 머물면서 이곳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 석탄사 대웅전(정읍시 산내면 허궁실 2길)의 모습(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진관사는 원래 한양 근교의 4대 사찰로 일컬어질 만큼 이름난 사찰이었으나 최근까지는 사찰음식을 제공하는 비구니 도량 정도로만 주목 받았다. 그러다가 태극기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발견되면서 이곳이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사찰에서는 이를 상징하듯 한옥마을에서 진관사까지 약 1km의 길을 ‘백초월 길’로 명명하였다. 진입로 부근에 ‘종교를 넘어…’ 라고 새긴 현판이 눈길을 끈다. 진관사가 불교 교리나 이념에 국한하지 않고 종교를 뛰어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한 호국사찰이었음을 이것으로 대변하고 있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 때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조선시대에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해 재를 올리는 ‘수륙재(水陸齋)’를 국가 차원에서 거행하던 유명사찰로 2013년에는 진관사 수륙재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진관사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비구니 진관(최진관)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대웅전은 사찰에서 보기 드문 청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종각으로 동정각(動靜閣)이 있다.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민족종교인 정읍의 보천교 본소에도 청기와로 이은 정화당 건물이 있었고 종각으로 동정각이 있었다.
민족항쟁기 백초월 스님의 독립운동
백초월은 어렸을 적 이름이 백학명(白學明)이었고, 본명이 백인영(白寅榮)이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불교계 대표로 모시려고 했을 만큼 그는 민족의식이 대단했고 불교계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높았다. 하지만 초월이 지방에 있어 교통문제 등 여러 사정으로 민족대표에 포함되지 못했다. 초월은 대승불교의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강조했다. 중생 구제를 승려 및 계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초월의 독립운동의 이념이 바로 불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불교계 민족대표였던 백용성과 한용운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초월은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인 ‘한국민단본부’를 결성하여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그가 민단본부를 조직한 것은 기독교와 천도교도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뛰어든 데 반해 불교도는 이에 무관심한 것을 개탄하면서 중앙 차원의 불교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었다.
초월은 진관사에 주재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25일은 음력으로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그는 개천절 기념 만세운동을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과 공동으로 추진하였다. 이 만세운동 선전문에 초월이 민족대표 33인으로 나와 있다. 3·1운동 이후에는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진관사 승려들을 비롯한 불자들로 ‘의용승군’을 조직하려다 일제에 피체되었다.
*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진관사 칠성각(사진 중앙).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이다.
수리공사 중 벽 속에서 태극기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는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초월은 일제의 여러 차례 고문으로 손톱이 다 빠졌다. 척추가 부러지고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신이상으로 거의 반미치광이 상태의 폐인이 되었다. 물고문과 비행기 타기 고문을 당했고, 머리는 인두로 지짐을 당해 후유증으로 항상 머리가 아팠다.
1939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용산은 만주와 하얼빈으로 출발하는 군인과 군속, 군수물자의 출발지점이 되었다. 이에 초월은 육군지원병 제도를 반대하면서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울 목적으로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조선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케 했다. 초월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징역형을 당했고, 동지 70여 명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초월과 뜻을 같이 했던 일월회 동지들로 여겨진다. 일제의 고문으로 숨지는 동지가 나왔고, 초월은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43년 3월 3일 출소하였다.
초월은 출옥 후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지원 혐의로 청주교도소에 다시 투옥되었다. 당시 한인 간수였던 전인식의 증언이다. 초월은 수감된 교도소 내에서도 저항을 계속했다. 밥이 들어오면 밥을 다 먹은 뒤 빈 밥그릇에 대변을 누는 기행으로 저항을 계속하였다.
진관사 칠성각 벽 속에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발견되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뒤쪽에서 3·1독립만세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국내에서 발간된 항일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과 「자유신종보」,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단재 신채호가 독립신문에 맞서 발행한 「신대한신문」, 「경고문」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3·1독립만세운동 및 상해임시정부와 불교계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물들이다.(김광식).

* 2009년 진관사 칠성각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태극기(가로 89㎝, 세로 70㎝)로 202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025년 6월 5일 이재명 대통령이 첫 국무회의 주재 시 이 태극기를 문양으로 만든 배지를 착용해 화제가 되었다.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선물한 것이다.(출처 : 중앙일보).
특히 「경고문」에는 일제의 압제에 맞서 민중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는 광목천에 태극 부분을 도려내고 뒷부분에서 다른 천으로 만든 태극을 덧붙여 정교하게 박음질 한 것이었다. 태극의 양에 해당하는 적색 부분 위에 청색을 덧칠한 점으로 미루어 일장기에 청색을 칠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초월의 일본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태극기 왼쪽 아랫부분에 불에 탄 흔적과 총알에 찢긴 듯한 구멍이 나 있어 독립만세운동 당시 현장에서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모두 백초월 스님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몰래 숨겨 둔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는 현재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자료 1〉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의 ‘일심회’와 석탄사(石灘寺)
석탄사는 칠보면 사자산 용태봉 암벽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당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짓자 한 제자가 왜 이렇게 궁벽 진 곳에 절을 지어 고생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의상은 학승이나 선승은 배가 고파야 공부가 되는 법이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597년(선조30)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50년(영조26)경에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이 중건했다. 박잉걸은 조선시대 실존인물로 자선사업가로 유명하다. 이야기가 잠깐 빗나가는 것 같지만 그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지역사를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냥 넘어간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정읍 태인에 대각교(大脚橋)라는 다리를 놓고, 구절치(구절재)와 굴치라는 고갯길을 닦아 사람들의 통행을 편하게 했으며, 비보풍수의 일환으로 칠보 원백암 마을 입구에 남근석을 세웠다.(자세한 내용은 경북 경주의 ‘여근곡’과 전북 정읍의 ‘남근석’을 참고할 것). 그가 평소 길 가던 행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다 쓸 수 있도록 짚신이나 옷을 나뭇가지에 걸어 놨던 그곳을 사람들은 지금도 ‘걸치기’라 부르고 있다. 백암리에 가면 그 이름을 딴 걸치기휴게소와 걸치기 방앗간이 있다. 남을 도운 그의 선행이 후대에 널리 알려져 칠보면 백암리 흥삼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승에서 쌓은 공덕으로 사후 중국의 어느 황태자로 환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가 중건한 석탄사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거점이 되면서 또다시 소실되었다. 1934년 10월에는 백초월(1878-1944)이 이곳 석탄사에 머물면서 동지 다섯 명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였다. 한국인 3천만이 한마음(일심)이 되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 다섯 명은 박동진(朴東鎭, 평북 박천), 유창섭(柳蒼燮, 충북 옥천), 조정원(趙貞元, 강원 고성), 박수희(朴洙熙, 서울 마포), 박수남(朴壽男) 등이었고 이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1939년 일심회원들은 용산에서 출발하는 수송열차에 대한독립을 염원하는 글씨를 쓰는 방안을 협의하고, 주도적인 역할은 용산철도국 작업부로 일하던 박수남이 맡기로 결정하였다. 박수남은 1916년생으로 거사 당시 나이 24세였고, 초월은 63세였다. 박수남은 드디어 1939년 11월 봉천으로 가는 화물열차에 조선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라는 큰 글씨를 백묵으로 썼다. 이것이 발각되어 박초월과 박수남은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일제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박수남은 1940년에, 박초월은 1944년에 사망하였다. 초월이 사망한 6월 29일은 공교롭게도 한용운이 입적한 날짜와 동일하다. 1990년 백초월 스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으나 그의 시신은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2007년에는 박수남에게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백초월에게 한때 배운 적이 있는 신촌 봉원사의 송암 스님은 초월이 김구와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했고,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까지 전부 다녔다는 증언을 하였다. 이는 일월회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자 했던 백초월의 사전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스님이 염불이나 불공은 드리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 보니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똘중’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직원 모집은 아랫사람들이 찾아가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는 방식이었다. 동학사에서 초월에게 배운 금암 스님은 초월이 계룡산 신도안의 용화사에 있을 때는 공주 갑부인 김윤한을 한밤중에 찾아가 육혈포로 위협하고 군자금을 받아왔다는 비사를 털어놓았다. 생전에 초월을 친견한 금봉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초월은 독립의지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주련 글씨는 초월의 작품이었다. 초월은 한때 봉원사 강원의 강사였으며 서예와 사군자에도 능했다. 봉원사로 출가한 만봉스님은 초월의 글씨는 신들린 듯하여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초월은 “계란으로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 리가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 민족을 삼각산에 비유한 것으로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가 결국은 물거품이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공주 원효사 주지였던 정영희 스님은 초월은 신문을 보다가 일본천황 사진이 나오면 손톱으로 천황의 눈을 긁어 없앴다고 회고하였다.
석탄사는 일제강점기 태인 유지였던 가산거사(伽山居士) 김수곤(金水坤)이 다시 세웠으나 6·25전쟁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김수곤은 최초 여류서예가 김진민(자세한 것은 최초의 여류 천재서예가, 태인 출신의 몽연 김진민을 참고할 것)의 아버지다. 현재 석탄사는 탄월(灘月) 조병준(趙秉晙)이 197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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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사용 추정되는 태극기’, 「조선일보」, 2009년 8월 10일자.
‘독립운동가 초월 스님 종손, 진관사에 유물 기증’, 「불교신문」, 2009년 8월 17일자.
정혜정, ‘이 대통령 가슴에 단 찢어진 태극기 배지, 어떤 의미 지녔나’, 「중앙일보」,
2025년 6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