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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김재영,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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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김재영,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문학박사

 

 

최근 들어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주목받고 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을 말한다. 이 같은 발언의 배경은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를 강대국에 의한 5개 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찬탁운동

 

결의안 중 신탁통치 조항은 사실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으나 국내는 소련의 제안으로 왜곡되어 보도되었다. 단순 오보인지, 미국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이로써 반소운동, 반공운동에 이용되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한반도는 자치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우리는 자치를 해보지도 않고 탁치를 하려는 것은 민족적 자존과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며 적극 반대하였다. 또 다수의 민중은 신탁통치는 일본의 식민통치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지배국이 1개국에서 다수의 나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문제를 두고 좌익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중심의 반탁운동이 극심해지자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국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정읍동초등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은 발언 전날인 6월 2일 정읍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언한 당일 숙박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숙박한 장소도 지금은 노인복지시설로 사용되고 있는 이현옥(씨교1길)의 소유저택이라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근처 한상진이 소유한 기와집이었다는 주장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현옥의 저택은 구 한일여관으로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이 발언 이후,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그해 12월부터 1947년 4월까지 미국으로 건너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이고 돌아왔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갖는 의미

 

이승만의 이 같은 발언은 미군정을 종식시킨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통일정부가 아닌 남한만의 정부수립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이를 토대로 북한(북진통일)을 통일하려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발언이 분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좌우합작 노력이 한창 수반되던 중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된다는 주장을 이승만이 처음으로 공론화했다.”며 “이승만은 분단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한편에서는 1946년 2월 이미 북한지역에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정읍발언은 분단과 무관하다고 보기도 한다.

 

 

왜 ‘정읍(井邑)’인가

 

문제는 이 중차대한 발언을 서울도 아닌 ‘왜 정읍에서 했느냐’이다. 순회 도중 우발적 으로 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된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왜 정읍인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의도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정읍은 독립운동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중심지였다고 보고 있다. 보천교에서 5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조달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임정에서는 수립 초기 인도인을 고용해서 수위로 세우기도 했었는데 임시정부 청사 집세 30원과 20원도 되지 않는 고용인 월급을 주지 못해 번번이 소송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5만원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독립운동 자금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회생자금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이밖에도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한 갖가지 사례를 여기서 일일이 제시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시가 200억이 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아마도 이를 의식한 이승만이 정읍 사람들을 먼저 이해시키고, 통일정부에 대한 여론을 잠재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고 한 백범 김구의 발언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후인 1948년 2월 10일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글에서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다. 

 

 

백범 김구가 해방 이후 태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부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전후사정을 염두에 둔 발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다른 두 민족 지도자가 시차를 두고 특정지역을 방문, 중대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어찌 우연일 수가 있겠는가. 김부곤 가옥에 최근까지 딸 김금숙과 사위 곽규 선생이 살고 있었다. 현재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제1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서남저널」, 2023년 5월 24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 전라북도지편찬위원회, 『전북도정 50년사』, 신아출판사, 2000 ;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6 ; 태인 김부곤 선생의 딸 김금숙과 사위 곽규선생의 인터뷰, 2015년 10월 31일 ;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 「한국일보」, 2015년 11월 9일자 ; 정읍문화원, 『정읍시 향토문화유산 자료조사』, 2019; 「서남저널」, 2023년 5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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