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에 대한 단상 ■ ■ ■
홍성! 진치만에서 차일혁까지
안후상 / 문학박사, (사)노령역사문화연구원 원장
2023년 7월 1일(토) 정읍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박사님과 함께 월곡기념사업회 회원님들을 모시고 정읍시 입암면의 의병(義兵) 진치만(陳治萬)의 출생지이자 사적지를 탐방하였다. 탐방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충청남도 홍성(洪城)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였다.
▄ ▄ ▄ ▄ ▄
충청남도 홍성(洪城)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가 ‘구국 의병’이다. 나라가 멸렬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홍성에서 여러 지역의 의병들이 거병(擧兵)하였다. 김복한(金福漢), 이용규(李容珪) 등은 당시 구국의 의병으로서 그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나라와 임금을 잃었지만, 일제강점기에 한용운이나 김좌진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홍성에서 나왔다. 홍성을 ‘구국의 의향’이라 칭할만하다.
홍성에서 의진(義陣)을 구성해 일제와 맞서 싸운 이 가운데 진치만(陳致萬, 1876-1925)이 있다. 이용규 의진에서 활약한 진치만은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川原里) 영안마을 출신이다. 진치만이 왜 정읍이 아닌 홍성에서 의병 활동을 했는지? 흠치교(보천교의 전신)의 포교를 내세워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인지? 이러한 묵직한 의문들은 향후 과제로 두겠다.
진치만의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여양은 오늘날의 홍성이다. 호는 월정(月汀), 다른 이름은 진치만(陳治萬)이다. 국권회복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정읍 일대의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경에는 홍성으로 들어가 흠치교, 즉 보천교와 연계하여 국권회복운동을 도모하다가 붙잡혀 거주제한을 당하였다. 당시의 관련 자료들은 진치만의 의병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천원리 253번지(영안마을)에서 1876년 7월 25일에 태어난 진치만은 기삼연(奇參衍)·기우만(奇宇萬)으로부터 수학하였다. 을미의병 당시 기삼연·기우만 의진에 참여하기도 한 진치만은 국권회복운동을 도모하기 위해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1912)한 임병찬(林炳贊)의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 뒤 진치만은 관향인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이용규(李容珪), 윤병일(尹炳日), 이만식(李晩植), 이래수(李來修), 김태영(金泰泳), 전용규(田鎔圭), 손진형(孫晉衡)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충남 홍성에서 이용규, 진치만 등은 신통술에 능한 임자문(林子文)과 함께 국내 거주 일본인들을 부적 및 신통술로써 죽게 하겠다며 일본인들을 불안감에 떨게 하였다.
임자문은 흠치교(뒤에 보천교라 함) 교인이며, 당시 흠치교는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였다. 이용규, 진치만 등은 흠치교의 비밀결사 조직에 몸담으며 고종의 칙명서(유명서라고도 함)와 마패를 이용하여 전국 각도의 애국지사들을 상대로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1917년 6월경에 흠치교의 비밀결사 조직이 탄로가 나면서 전치만 등 7명은 1917년 7월 7일 평안북도 신모도(身彌島)로 1년간 유폐(거주제한) 당하였다.
1년 뒤에 귀향한 진치만은 이용규 의진에 다시 가담하였다가 검거돼 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진치만은 정읍(井邑)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피,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랜 은둔 생활 끝에 1925년 8월 7일에 사망한 진치만의 당시 나이는 49세다. 1)
|
1917년경 충남 홍성으로 간 진치만은 이용규, 윤병일 등과 의진을 구성하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그리고 흠치교의 주문과 부적 등을 이용해 일본인들을 불안감에 떨도록 한 혐의로 유폐당하였다. 1919년에는 정읍에서 3·1운동에 가담했다가 긴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25년에 사망한 진치만의 유해는 고향인 정읍(井邑) 입암산(立岩山)에 안장되었다. 1994년 한국 정부는 진치만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진치만의 묘소는 입암산에서 국립현충원으로 옮겼다.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 영안마을 경로당 자리가 진치만의 출생지이다. 영안 마을 동구에다 여양진씨 영안 문중은 1998년 7월에 「항일애국의사진치만공적비(抗日愛國義士陳致萬功績碑)」를 건립하였다.
1920년대 보천교는 경성에서 전개된 경제적 민족운동인 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초기 기관지 『산업계』를 보천교에서 발간하였을 정도였다. 보천교의 목표는 후천선경(後天仙境) 신정부(新政府) 건설이다. 후천선경이란 갈등도 전쟁도 차별도 불평등도 없는 이상적인 세계를 말한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내내 “순 조선산”을 쓰자며 토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첫 번째 운동이 개시된 곳이 충남 홍성이다.
近來 洪城 普天敎會에서는 그 敎徒 一般에 對하여 土産을 獎勵하기 爲하여 衣服 飮食을 舊 正月 一日부터 朝鮮 産으로 實行하기로 하였다더라.(洪城) 2) |
위의 기사는 홍성 보천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을 상대로 토산 장려를 강조하면서 “순 조선산”을 사 쓰겠다는 일종의 결의이다. 짧지만, 당시에 강렬했던 경제적 민족운동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당시 보천교는 비밀리에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홍성 출신 김좌진(金佐鎭)은 보천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보천교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1923년 김좌진의 부하 유정근(兪政根)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차경석을 만주로 데려가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유정근은 “김좌진이 장작림(張作霖)의 이해 아래에 북만주 지역에서 김좌진의 부하로 보위단을 조직하고, 군비를 충실히 한 다음 먼저 적로군을 격퇴한 후에 조선 내에 침입하여 독립에 착수하기로 하였으나, 그 보위단이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는데 자금이 없기때문에 약 300만의 신도를 보유하고 자금이 풍부한 보천교주 차경석을 북만주로 데리고 가서 협력하면서 신도 중 이주한 자를 군적에 넣을 수 있을 것이고, 무기 구입 자금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므로, 차경석을 데리고”3) 가고자 경성에 잠복했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신문에도 이것과 관련한 기사를 남겼다.
…… 兪政根은 중국 吉林省 寧安縣에 있는 金佐鎭의 사명을 받아 가지고 얼마 전에 경성으로 들어와서 시내 모처에 체재하며 …… 독립 군자금을 모집하려던 사실이 동대문경찰서에 탐지된바 …… 또는 보천교도 申鉉大가 鷄林電氣公司를 표방하여 가지고 …… 즉시 김좌진에게 돌아가서 말하기를 자기가 普天敎에서는 牛耳를 잡았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시 김좌진에게 지금 조선에는 경비가 엄밀한즉 도저히 武力으로는 침입하기 불능한즉 차라리 교묘한 수단을 가지고 가만히 경성에 들어가서 한편으로는 그대의 證明과 文書를 가지고 성내에 있는 귀족과 또는 부호를 달래고, 또 한편으로는 3만의 보천교도를 거느리고 거액의 부호로 지목하는 車京錫을 옹호하여 가지고 …… 여러 가지로 곤경으로 지내는 김좌진이가 …… 스스로 경성 안에 있는 귀족과 부호에게 보낼 公凾을 작성하고 …… 김좌진의 사면을 맡아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온 실상을 이야기한 후 즉시 시내에 사는 朴泳孝, 韓圭卨, 李鍾健, 閔丙承, 張吉相, 車京錫 등 제씨에게 공함을 보내기로 하고, …… 전기 계획하고 있던 것을 시내 東大門 경찰서에 탐지한바 되어 전부 체포된 것이라는데 …… 4) |
위의 신문 기사는 김좌진의 부하 유정근과 보천교인 신현대(申鉉大)가 당시 박영효, 한규설, 차경석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김좌진의 공함(公函. 필자 주 : 공적인 문서나 편지)을 가지고 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미수에 그친 사건인데, 1924년 김좌진이 보천교로부터 2만여 원을 받아 무장 활동에 썼다는 내용이 담긴 일제 기밀문서가 근래에 발굴되었다.
김좌진 군자금을 얻다 근년에 김좌진은 자금 부족으로 부하를 해산하고 오로지 활동 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나, 금년(필자 주 : 1924년)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어 지난 10월 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에 와서 금 2만여 원의 군자금을 줌으로써, 이 돈으로써 구(舊)부하를 소집하고 삼분구(三盆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하고 동지를 거느리고 동녕현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최진동의 동현 지나 관리 때문에 체포되었기에 두려움을 품고 영고탑에 들어와 연락자를 구하여 동현 지사의 매수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함. 김은 종래 독립단의 두목으로서 상당한 인망이 있으므로 그들이 상당의 군자금을 준비하고 부하를 소집하고 있어 다수의 참가자가 있겠으므로 보천교의 배경으로서 행동하려고 하는 그들의 장래는 상당히 주의를 요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5) |
1924년 일제 경찰이 유정근을 붙잡아 심문한 결과 유정근이 보천교로부터 2만여 원을 받아냈으며, 그 돈은 한국 독립군의 무장 활동으로 썼다는 내용이다. 앞의 ‘유정근 관련 판결문’ 과 김좌진 관련 정보보고서 7) 등의 내용은 같은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1920년대 보천교는 한국 민족운동가들에게 적지 않은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국내외 한국 민족운동 단체와도 협력 관계에 있었다. 보천교가 한국 민족운동 단체를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간파한 일제는 수시로 보천교의 주요 기관을 급습하거나 압수수색을 단행하였고, 관련 인물들을 연행하였다. 8)
1910년대 충남 홍성에서 흠치교의 주문과 부적으로써 일제를 물리치려는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정읍 출신의 진치만이 합류하였다. 1920년대 충남 홍성에서는 보천교가 주도하는 경제적 민족운동이 맨 처음 전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동시에 보천교는 홍성 출신인 김좌진에게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하였다.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알려진 차일혁(車一赫)이 태어난 곳이 충남 홍성이라는 설이 있다. 전주라는 설도 있으며, 본적지는 전라북도 전주(全州)다. 어쨌든, 충남 홍성의 ‘홍성공업전수학교’를 다니던 차일혁이 1936년에 한국인 교사를 연행하던 일본인 고등계 형사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차일혁의 나이는 17세. 17세의 나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고등계 형사를 폭행한 일로 차일혁은 홍성을 떠나야 했다.
홍성을 벗어난 차일혁은 강원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만주를 거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 후 차일혁은 독립운동가 김지강(金芝江)의 소개로 김구, 김원봉, 윤세주 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난징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무장 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서 활약하였다. 이러한 얘기들은 차일혁과 관련된 여러 책에 들어있지만,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광복 직후 중국에서 귀국한 차일혁이 고향인 전주(全州)에서 건국을 준비하는 모임인‘대동청년단 전북도단부(大同靑年團 全北道團部)’의 결성에 나섰다는 기록을 발굴하였다. 그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全州) 客年(필자 주 : 1947년) 十月에 祖國의 理想的 獨立國家 建設을 爲하여 解放後 ○出○ 靑年 團體를 統合 更○하여 출발한 大同靑年團 全北道團部는 指導 理念의 …… 常任委員 金金石, 任匡淳, 車載吉, …… 監察委員長 車一赫, 監察局長 李在詳 …… 9) |
1947년에 "조국의 이상적 독립 국가 건설"을 위해 '대동청년단 전북도단부'를 결성한 이들은 김금석(金金石), 임광순(任匡淳), 차재길(車載吉) 외, 차일혁, 이재상 등이다.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은 1947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이 전국의 청년 조직 32개를 통합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결성 당시 단장은 지청천, 부단장은 이성주(李成株)와 오광선(吳光鮮)이다. 대동청년단은 막강한 조직을 갖추고 반공 및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의 명령으로 해산된 대동청년단은 '대한청년단'에 흡수, 통합되었다.
차일혁이 전주에서 결성했다는 ‘대동청년단 전북도단부’는 대동청년단 전라북도 지부 격이다. 중국의 조선의용대 출신들 대부분이 조선의용군으로, 광복 후 북한으로 갔던 데 반하여 차일혁이 남쪽에서 우익의 선두에 서게 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대동청년단 전북도단부'의 차일혁은 감찰위원장직을 맡았다. 바로 아래의 감찰국장에는 바로 이재상(李在詳)이 맡았다. 이재상의 전력을 살펴보니, 중국에서의 조선의용대 활동을 하였던 차일혁과의 공통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재상의 본명은 이초생(李初生)이며, 일제의 검거 당시 그는 중국 난징에 주소를 두었다. 난징에는 1935년 당시 중국 관내 최고의 독립운동 단체이자 좌우민족통일전선을 취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결성되었다. 이재상의 관련 판결문 일부를 발췌하였다.
(이유) 피고 이초생(李初生, 李在詳)은 소화 2년(1927) 2월 경성 중동학교 제1학년을 중도 퇴학 …… 소화 13년(1938) 3월 1일 사천성 석보새(石寶賽)에서 혁명당 주최하에 거행된 조선 독립 만세 소요 제20주년 3·1 기념식에 참가하여 당원 60여 명과 함께 대한국 애국가(우리가 조선국 만세 이러쿵저러쿵)를 합창하였고, 조선 독립 만세를 제창하였으며, 기타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행위를 하고 …… 이상규(李尙奎)에게 위의 조선민족혁명당의 목적을 설명하고 입당할 것을 권유하여 이에 가입시켰다. …… 동당 주최하에 거행된 조선독립운동의 거두 안창호(安昌浩)의 추도회에 참례하고, …… ‘안창호 선생의 생전에 행한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 등을 말하고 ‘동인의 유지를 계승하여 분투하자’는 뜻의 연설을 찬동하여 위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10) |
차일혁과 이재상은 1947년에 건국 준비를 위한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 전북도단부’에서 감찰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재상이 중국 난징에서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돤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35년에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은 1937년에 중국 내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이재상과 차일혁이 함께 조선의용대에 몸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차일혁이 다녔다는 1927년에 개교한 홍성공업전수학교는 광복 이후 대전공업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뒤에 대전공업대학으로, 2001년에는 한밭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한밭대학교가 어딘가? 바로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車吉辰)의 대전 유성의 ‘후암선원’이 있는 곳 아니던가. 그리고 바로 근처에는 진치만과 차일혁이 안장된 국립현충원이 있지 않는가.
홍성공업전수학교의 원래 교명은 ‘홍성공립공업전수학교’이다. 지금의 홍성군 홍성읍의 홍성의료원 자리에서 개교한 홍성공업전수학교는 광복 이후 대전(大田)으로 이전하면서, 그 빈 자리에 도립병원에 이은 지금의 홍성의료원이 설립되었다. 현재 홍성의료원에는 ‘한밭대 옛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홍성의료원 자리는 다음 탐방지로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 ▄ ▄ ▄ ▄
돌고 돌아 다시 홍성(洪城)이다. 충청남도 홍성을 떠올리면서 진치만의 의병운동과 흠치교, 보천교의 토산 장려 운동, 김좌진에게 보천교의 경제적 지원, 그리고 차일혁의 조선의용대, 차일혁과 홍성공업전수학교, 한밭대학교, 그리고 유성의 ‘후암 선원’ 등이 머리에서 가시질 않는다.
그리고 전치만과 차일혁이 안장된 국립현충원 등이 계속해서 나를 엄습한다. 이러한 주제나 소재들이 연구 과제로 와 닿는다는 뜻이다. 이번 탐방을 계기로, 연구 과제를 잔뜩 짊어지게 되었으니 숙명이다, 생각하면서 받아들여야겠다.
*각주 1) 「居住制限處分ノ件」(「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內地二」, 高發第11227號-秘-受7282號, 發信日1917.7.7. 受信日1917.7.10), 『2집 騎驢隨筆』(宋相燾, 국사편찬위원회, 1955), 『現代史資料25, 朝鮮(一) 三一運動(一)』(姜德相, みすず書房, 1966), <월정진치만애국의사유적비(月汀陳致萬愛國義士遺蹟碑)>(1999년 7월 25일 건립), <공훈전자사료관>(국가보훈부).
*각주 2) ‘普天敎土産獎勵’ 《동아일보》 1923.2.16.
*각주 3) 만주 길림의 兪政根 판결문(1923.8.27., 경성지방법원) ;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Ⅲ』, 197쪽.
*각주 4) ‘軍資募集의 計劃, 着手도 前에 發覺되어 被逮. 김좌진의 사명을 받아가지고 온 유정근이 사건에 중심이 된 모양…’《조선일보》1923.8.2.
*각주 5) 「金佐鎭軍資金ラ得」(機密第1148號, 192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ノ部-在滿洲ノ部40』에 편철돼 있는 앞의 문서에는 關東廳警務局長發信 亞細亞局長受信, 1924년 11월 26일 발신, 1924년 12월 3일 수신 등이라고 돼 있다. (2021.9.3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주 6) 만주 길림의 兪政根 판결문(1923.8.27., 경성지방법원) ;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Ⅲ』, 197쪽.
*각주 7) 「金佐鎭軍資金ラ得」(機密第1148號, 1924).
*각주 8) 1923년 9월 동대문경찰서는 보천교경성진정원 간부 두 사람을 체포하면서 가택을 수색하였고, 진정원 내 보광사에서 인쇄한 ‘교헌’과 ‘선포문’ 등을 압수하였다.(‘被捉事件一束’《독립신문》1921.5.7. ; ‘家宅을 搜索. 書類도 많이 押收’《조선일보》1923.9.25. ; ‘普天敎幹部 檢擧 原因은 內訌의 中傷인 듯. 不日不時에 압수 등, 자세한 것은 경찰 당국의 비밀’《동아일보》1923.9.26.).
*각주 9) ‘대동청년단 재○○’《群山新聞》1948.8.18.
*각주 10) 중국 남경의 李初生(李在詳)의 판결문, 1939.12.19. 경성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