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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유산 아리랑(Arirang), 지역이 중심이다 (연재2편), 김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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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유산 아리랑(Arirang), 지역이 중심이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한국인 소녀가 공공 피아노 앞에 앉아 ‘아리랑’을 연주하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Amazing Grace’를 함께 연주하는 영상을 보았다. 전혀 다른 이 음악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 

 

아리랑은 이제 전 세계적인 음악이 되었다. 방탄소년단(BTS)이 아리랑을 재해석해서 불렀고, 미국 미시건주 에비뉴(avenue) 교회에서는 아리랑 멜로디에 성경 구절의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세계 유명합창단이 아리랑을 불렀고 변주곡만 전 세계에 3,600곡이 넘어 2012년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대를 거쳐 지속적으로 재창조되고 있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과 결속을 다지는 데 아리랑의 역할이 컸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것은 정선아리랑과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도이다. 이와 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아리랑도 정선, 밀양, 진도와 같이 ‘지역이 중심이다.’ 헌데 이 같은 3대 아리랑도 가사만 알고 있을 뿐 우리는 아리랑이 담고 있는 가사의 뜻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아리랑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 이전, 정부에서는 아리랑에 관한 자료조사 뿐만 아니라 아리랑의 리듬을 기본으로 한 작곡과 편곡을 세계적으로 시도한 결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악기와 형식으로 된 아리랑이 나왔다. 

 

지역적 특색이 뚜렷한 우리나라 3대 아리랑

 

한·중·일 삼국 간 문화갈등이 심각하다. 당연한 사실을 소제목에 굳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이라 한 것은 2011년 중국에서 국가무형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아리랑도 자기네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하얼빈의 조선민족예술관에서는 아리랑을 조선족 고유의 문화로 소개하고 있다. 가서 보니 개관연도가 1950년이다. 한자도 우리가 쓰는 아리랑(阿里郞)을 그대로 쓰고 있고, 심지어 아리랑 따라 부르기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이는 중국도 사실은 아리랑이 한국문화라는 것을 내부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면 해외에서는 어떤 반응이 일어날 지 한번 찔러본 것이다. 중국은 아리랑 말고도 봉황(鳳凰)도 중국의 상징이다. 심지어 윷놀이, 농악, 판소리, 씨름까지도 일찌감치 국가무형유산으로 등재해 놨다. 한때 김치의 원조격이 ‘기무치(キムチ)’라고 일본이 주장하더니 이제는 김치도 원래 중국음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치는 중국에서 소금에 절인다는 의미에서 ‘파오차이(泡菜, Pàocài)’라는 이름으로 이미 자리 잡았지만 우리식 김치는 ‘신치(辛奇, xīnqí)’라는 이름으로 구분된다. 중국에서 5성급 호텔을 제외하고 현지화된 김치라 할지라도 우리식 김치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콘텐츠가 국제적으로 뜰만하면 이렇게 다 자기네 것이라고 하니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다. 제발 이런 염치없는 짓 좀 그만 했으면 한다. 돌솥비빔밥은 4년 전에 이미 길림성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상태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아리랑은 서울아리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3대 아리랑은 강원도 정선아리랑과 경상도의 밀양아리랑, 전라도의 진도아리랑 등 아리랑도 지역이 중심이다. 경기아리랑을 넣어 4대 아리랑이라고도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충청도를 대표하는 아리랑이 없는 것이 의아하다. 그간 3대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리랑만이 국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12년에는 아리랑 전체가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선아리랑은 정선군에서는 ‘충신불사이군의 노래’로 인식하고 있다. 『정선군지』에 따르면 정선아리랑이 불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일곱 명의 선비들이 불사이군의 충성을 다짐하면서 송도에서 은거하다가 정선으로 옮겨 와 일생동안 산나물을 캐 먹으면서 임금께 충절을 맹세하였다 한다. 그때 선비들이 비통한 심정으로 불렀던 한시로 된 율창을 후대에 이 지방 선비들이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날의 정선아리랑 가락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정선아리랑은 ‘아우라지’가 배경지이듯 송소희가 부르는 정선아리랑은 유장하게 흐르는 강을 닮았다. ‘아우라지’는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물이 합류되는 것을 말한다. ‘떼돈을 벌었다’는 유래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강과 강, 두 강이 만나는 곳,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바다와 바다가 만나는 곳은 어디서든 특별한 의미로 인식된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서식하는 고창의 풍천장어는 장어 중의 장어다. 두물머리로 유명한 경기도 양평에서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복원하여 시회(詩會)를 재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Kuala Lumpur)’는 두 강이 만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한 나라의 수도가 자리 잡았다.

밀양아리랑은 빠르고 경쾌한 아리랑이다. 장단은 ‘세마치’ 장단으로 ‘메나리토리’를 바탕으로 한 선율구조다. 논매는 소리인 ‘메나리’와 같은 음악어법이다. 한마디로 신명나는 아리랑이다. 박애리가 부르는 아리랑은 그 느낌을 살리고도 남는다. 밀양아리랑은 그 경쾌한 리듬과 달리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전설과 관련된 슬픈 전설이 바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밀양은 삼한시대 3대 저수지로 알려진 수산제(守山堤)와 한 여름에도 냉기를 뿜는 ‘얼음골’로도 유명한 곳이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비석이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가 있고, 영화 「암살」과 「밀정」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창동이 감독한 「밀양」이라는 영화도 있다. 아리랑과 함께 해당 지역의 역사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훌륭한 역사공부가 될 것이다.

 

진도아리랑은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논매기를 하면서 부르던 「산아지 타령」을 변형한 것으로 남도아리랑으로도 불린다. '육자배기' 선율을 사용하며 노동요에서 나타나는 메기고 받는 선후창 형식의 돌림노래로 되어 있다. 그래서 진도아리랑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 영화 「서편제」(1993)에서 불렀던 아리랑이 바로 진도아리랑이다. 「서편제」는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명을 넘겼다. 이 영화로 슬로시티 청산도가 더 유명해졌다. 이 아리랑을 감칠 맛나게 부르는 건 역시 진도 출신 가수 송가인이다. 

 

내가 사는 곳에도 아리랑이 있었다.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정읍 신태인 아리랑이 발전하여 순창 아리랑이 되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아라린가 스라린가 영천인가”라는 형태의 영천아리랑이 되었다 한다. 영천아리랑의 원조는 순창아리랑이며, 영천은 용천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있다. 영천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영천 지역과 만주로 이주한 영천 사람들이 불렀던 아리랑을 말한다. 북한에서 사랑받는 민요다. 

 

전 세계를 이어주는 아리랑의 음악성

 

악보가 없었던 아리랑을 1896년에 채보하여 처음으로 알린 이가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였다. 이것이 최초의 아리랑 악보다. 하지만 오늘날 아리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아무튼 누구보다도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일찍이 알아 본 그의 선견지명이 놀랍기만 하다.

 

그간 내가 모은 아리랑만 해도 헐버트의 ‘아르랑’을 비롯,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편곡 연주한 아리랑, 국악기와 색소폰, 전자오르간, 트럼펫, 드럼으로 연주하는 ‘퓨전 아리랑’이 있고, 비발디(vivaldi)가 작곡한 사계의 세계적인 연주자 이무지치(I musici)가 연주하는 ‘아리랑 판타지’, 집시음악의 거장 세르게이 트로파노프(sergei trofanov)가 들려주는 아리랑도 있다. 그는 구소련 몰도바공화국 출신인데도 한국가곡만으로 음반을 낸 적이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다. 북한 오케스트라로 듣는 아리랑과 1930년대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백고산(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종신 심사위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 아리랑 변주곡도 있다. 

 

뿐만이 아니다. 해금 명연주자 리윤찬의 해금 독주도 있고, 재일교포 피아니스트 김정숙의 피아노 독주 변주곡도 있다. 어떤 것을 들어도 가슴에 와 닿는다. 전 일본 합창콩쿠르 전국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우타오니 합창단이 부르는 ‘합창 아리랑’도 있다. 의미는 있으나 합창시간이 다소 짧은 것이 아쉽다.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은 음악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기도 한다. 

 

모두 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밖에도 아리랑을 편곡한 ‘새야 새야 아리랑’, 한국계 네덜란드인 하피스트 라비니아 마이어(Lavinia Meijer)가 연주하는 아리랑, 유키 구라모토가 연주하는 아리랑, 세계적인 재즈 가수 나윤선이 부르는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을 몽골음악으로 편곡한 아리랑, 카자흐스탄의 민속악기로 연주하는 아리랑, 인도네시아 풍으로 부르는 아리랑,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춤곡 양식인 ‘자핑(Japin)’에 기반을 둔 진도아리랑도 있다. 아시아 동남부 보르네오 섬 북서해안에 브루나이(Brunei)라는 나라가 있다. 브루나이 출신의 모하메드 압도(Mohammmad Abdoh)의 아리랑을 들어보면 왜 아리랑이 세계적인 음악인지 알게 된다.

 

민족음악 ‘아리랑’의 뜻과 내용

 

‘아리랑’의 뜻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무려 30종에 가까운 설이 있으나 아직도 그중에 어느 것 하나를 정설로 보는 것이 없어 보인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편찬한 『국어대사전』에서조차 아리랑의 어원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아리랑을 향가 또는 산스크리트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아리 쓰리’는 ‘아리고 쓰리다(broken at heart)’는 뜻으로 해석해서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으로, 또는 아리라는 님과 함께 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 아리랑의 ‘랑’을 고려시대 「청산별곡」의 머루랑 다래랑 먹고 할 때의 ‘랑’과 같은 ‘-와 함께’의 뜻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너랑 나랑’할 때의 ‘랑’과 같은 의미다. 

 

신용하 전 서울대학교 교수는 ‘아리랑’의 ‘아리’는 ‘고운’의 뜻이고, ‘랑’은 ‘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아리랑’은 ‘고운 님’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우리말에 ‘아리땁다’ ‘아리따운’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아리’가 아름답다는 뜻이니 신용하 교수의 주장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여러 설 중에 대원군 시절, 경복궁 중건 공사에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願納錢)’을 강요하자 백성들이 살아남을 길이 없다 해서 차라리 ‘내 귀가 멀어 원납전이라는 소릴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뜻의 ‘아이롱(我耳聾)’이 ‘아리랑’으로 전화되었다는 일제 의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아리랑의 가사와 대입해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는 대원군과 같은 조선의 통치자들이 백성을 착취하고 압제함으로써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제의 식민통치 논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아리랑은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자 십 리도 가기 전에 발병이 나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내용의 ‘한(恨)이 섞인 노래’이다. 하지만 제목은 같아도 내용은 지역마다 다르다. 도회지로 팔려 나오는 시골 처녀나 일본으로 품팔이를 위해 떠나는 농민을 노래하거나, 왜란과 호란 같은 전쟁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근대문명인 기차의 개통이나 전등 설치, 시어머니에 대한 반항을 노래한 것, 황금만능주의 등 근대 시민계급과 노동자·농민의 생활상이 반영되기도 한다. 

 

​아리랑은 2012년에, 북한은 2013년에 세계무형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북한은 2014년에 김장문화, 2018년에 씨름이 세계무형유산으로 추가로 등록되었다. 한국은 현재 21개가 무형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아리랑은 남북 문화교류의 첫 장을 여는 곡

 

남북공동성명 발표 다섯 돌이 되는 2005년을 맞이하면서 그 당시 남북문화 교류의 첫 행사곡이 남측 KBS 교향악단과 북측 국립교향악단이 합동 연주했던 ‘아리랑’이었다. 북한은 광복 후 온 나라의 양악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두루 모아 1946년 8월 중앙교향악단(현 국립교향악단)을 창설했다. 초창기 연주곡은 주로 인민음악의 뿌리인 민요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관현악 편성에 맞게 교향시, 교향곡, 협주곡 등이 작곡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서양의 오케스트라를 조선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오케스트라와 민족 악기의 배합 편성을 통해 지금까지 없었던 제3의 음색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음악에서도 북한식으로 ‘주체’를 내세웠던 것이다. 

 

‘본조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과 ‘경상도 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

 

아리랑 중에서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다. 북한 콩쿠르에서 공훈예술가 최성환(1936-1981)이 작곡한 ‘본조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아리랑 환상곡)’이다. 북한에서 만든 곡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볼 일이 아니다. 도입 부분이 마치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연상케 한다. 이어 우리 민족의 힘찬 도약을 의미하는 연주로 확산되었다가 평온한 연주로 다시 이어지는 정말 우리 정서에 딱 맞는 연주다. 후반으로 가면서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듯 아리랑이 밝고 힘차게 연주되면서 끝을 맺는다. 8분 15초 연주가 짧게 느껴질 만큼 음악성이 뛰어나다. 아리랑은 민족통합을 위해서도 필요한 노래다. 곡명에서 ‘본조’란 리듬 본위가 아닌 주선율 위주로 편곡한 것을 말한다. ‘아리랑을 주제로 한 창작곡’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곡이 만들어진 2년 뒤인 1978년 일본에서 ‘본조아리랑을 주제로 한 아리랑’이 연주되었을 때 재일동포들이 엄청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여기에다 음악을 통한 남북교류를 염원했던 ‘윤이상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경상도 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을 빼놓을 수 없다. 오케스트라로 듣는 관현악 아리랑으로서는 쌍벽을 이루는 곡이다. 이상 두 곡이 신나라레코드 발매 앨범, 「아리랑 환상곡」 집에 실려 있다. 신나라레코드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다. 헌데 신나라의 뜻이 ‘신난다(신나다)’는 뜻이 아닌 ‘신(神)의 나라’라는 뜻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회장이 아가동산 교주 김기순이었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주로 어렸을 적 겪었던 일들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만든다는 전수연(1978- )의 (情)아리랑도 듣기에 좋다. 2005년에 발표한 앨범 「sentimental green」에 실려 있다. 아이들의 동심을 피아노 선율로 녹여내는 이 연주가의 곡은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다. 맑고 영롱한 피아노 음률이 우리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하다. 일본의 뉴에이지 음악을 이끄는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 1952- )나 유키 구라모토(倉本裕基, 1951- )의 음색을 닮았다. 성인 가수가 부르는데도 음색이 맑고 깨끗해서 마치 동요 같이 느껴지는 노래도 있다. 이미랑이 부르는 ‘무등아리랑’은 1991년 광주 MBC의 ‘무등산을 살리자’의 캠페인 송으로 만들어진 노래다. 책을 잠시 덮고 유튜브에서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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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구민사(救民祠)를 답사 참배한 후암미래연구소 차길진 이사장(사진 중앙)과 

  월곡차경석기념사업회 이훈상 이사장(사진 뒤쪽). 

 

민족음악 아리랑 보급을 위해 평생 아리랑을 사랑했던 이가 있다. 후암미래연구소 고 차길진(車吉辰, 1947-2019) 이사장은 2015년 아리랑 보급에 남다른 애정을 인정받아 한겨레아리랑연합회가 시상하는 '2015 아리랑 상'을 받았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아들이다. 아버지 차일혁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 ‘카르마(Karma)’를 남겼다. 카르마는 보통 ‘업’으로 번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인연’이다.

 

 

 

〈자료 1〉 북한에서도 허용한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노래, ‘홀로 아리랑’

 

독도와 관련된 대중가요로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 땅’, 한돌의 ‘홀로 아리랑’ 안치환의 ‘외롭지 않은 섬’, 김안수의 ‘독도야 말해다오’ 등이 있다. 연주곡으로는 영국 출신의 마이클 호페(Michael Hoppe)가 작곡한 ‘독도를 위한 기도(Prayer for Dokdo)’가 있다. 다케시마[竹島]가 아닌 ‘독도’라는 지명을 쓴 것은 작곡가의 역사해석을 말해주는 것으로 독도문제가 평화롭게 해결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연주곡도 좋지만 이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노래는 ‘홀로 아리랑’이다. 북한에서도 허용한 노래다. 서유석이 불러 유명해졌지만 원래는 한돌이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불렀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가수가 지금은 왜 활동을 접고 있는지 안타깝다. 그 가사를 여기에 적는다. 노래와 함께 가사 내용을 음미하다 보면 이 노래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로 가는데 

우리네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보자

 

한돌이 남북통일을 염원하며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곳을 홀로 섬 독도로 보고 작사 작곡한 노래이다. 

 

한돌은 1953년 거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그는 이 산 저 산을 돌아다니면서 노래 만드는 작업에 열중 했다. 성공회대학교 고 신영복 교수는 이런 노래 작업을 ‘노래를 캔다.’고 표현했다. 그의 노래를 듣다보면 이 땅의 소중한 자연과 소외된 이웃,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작사 작곡한 ‘개똥벌레’는 아름다운 노랫말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캔 노래들은 홀로 아리랑을 비롯한 터, 여울목, 못생긴 얼굴, 외사랑, 꼴찌를 위하여 등 백여 곡에 이른다.(한돌 CD 부클릿). 한돌은 ‘한 개의 작은 돌’이라는 뜻이라 하는데 아니다. 내가 보기에 ‘큰 돌’이다. 

 

신영복은 그가 찾아 나선 것은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아픈 역사이고 우리의 상처 난 현실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오래전부터 찾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진실을 만나고, 그의 노래를 만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산천과 우리의 삶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료 2〉 영화 나운규(1902-1937)의 아리랑

 

아리랑은 항일정신을 상징하는 우리 민족영화의 진수다. 원작에서 각색, 주연, 감독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를 만든 나운규는 1926년 22세의 나이에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른바 레지스탕스 작품인 아리랑을 완성하였다. 당시 아리랑은 민족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흥행에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그가 주연한 인물 영진은 전문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철학을 공부하다가 미쳐버린 지식인이다. 이는 당시의 현실이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말해준다. 작달막한 키에 굽은 허리, 달라붙은 목에서 풍기는 독특한 용모, 이러한 그의 신체적 구조는 마치 일본인들에게 짓눌린 한국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나운규가 분장한 영진은 곧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한민족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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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운규(1902-1937) 아리랑 포스터사진 출처(나무위키).  

 

이 영화는 모든 한국인의 가슴 속에 맺혀 있는 울분을 시원하게 뿜어 내 주는 화산의 분화구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방황하는 우리 민족에게 저항의 힘을 불러 일으켰다. 이 영화에 감동을 받아 심훈이 「먼동이 틀 때」라는 시를 썼고, 현제명은 ‘희망의 나라’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아리랑은 민요에서 민족의 영화로, 민족의 영화에서 다시 민족의 시로 승화된 것이다.

 

영화에 삽입된 아리랑은 그가 어린 시절 함경북도 회령에서 들었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고, 악보는 단성사 악대에 의뢰한 것이다. 편곡은 1920-30년대 영화감독 겸 작곡가인 김영환이 하였다. 이 아리랑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이다. 아리랑이 오래 전에 만들어진 민요라는 주장이 있지만 영화 ‘아리랑’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아리랑과 가장 유사한 가사가 영화 ‘아리랑’에 나오고, 그 이전 기록에서는 유사한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운규가 “옛날에 들었던 아리랑 노래의 기억을 더듬어 만들었다.”고 한 만큼 오늘날 아리랑 이전에 불리어진 민요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아리랑은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 아리랑 연구가 조용호는 그 시기를 여말선초로 보고, 아리랑 고개는 땅 위의 고개가 아닌 물결을 뜻하는 ‘곡애(谷涯)’의 발음이며 ‘십리도’도 십리나 되는 먼 거리를 뜻하는 ‘십리도(十里道)’였던 것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미세한 변형이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문헌》

 

최은진, 「아리랑 소리꾼 최은진의 다시 찾은 아리랑」, 신나라 뮤직, 2003.

이원석, 「영천아리랑」, 『디지털 영천문화대전』, 20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위키피디아』, 『유네스코와 유산』.

권희덕, 『아리랑 민족 예술사』, 삼호출판사(서울), 1991.

유현목, 『한국영화발달사』, 책누리(서울), 1997.

조용호, 『아리랑 원형 연구』, 학고방(고양), 2002.

유네스코 ‘아리랑 상’ 제정 기념 음반, 「아리랑의 수수께끼」, 미디어 신나라, 2005.

신나라 뮤직, 「아리랑 환상곡」, 2005.

김영조, ‘북한 아리랑을 들어 보세요’,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16일자.

이영훈,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휴앤스토리(고양), 2021.

송기순, ‘100년 전부터 사랑받은 정읍아리랑’, 「새전북신문」, 2023년 6월 16일자.

송기순, ‘정읍아리랑을 아십니까’, 「서남저널」, 2023년 6월 22일자.

윤현종, ‘돌솥비빔밥이 중국 문화유산? 이미 3년 전 지린성 유산으로 지정’, 「한국일보」, 

2024년 9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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