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10편), 박종렬

문서관리자 0 7,284

 

제5장  '『시대일보』사건'과  보천교의 분열

 

1.시대일보」 인수와 후유증 / 189
2. 보천교 혁신운동 / 204
3. 반민(反民) . 부일(附日)행위의 진상 / 216
4. 시국대동단 사건 시말(始末) / 218
5. 차천자(車天子)의 죽음 / 234

 

3. 반민(反民) . 부일(附日)행위의 진상 / 216

 

일제 당국이 회유정책을 쓴 것은 보천교라는 거대한 종교집단을 폭력과 억압으로 완전히 박멸시킬 수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에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월곡에게는 신통묘술이 있어 장차 조선을 독립시켜 천자(天子)로 등극한다는 선전이 계속 이어졌고, 실제로 당시 만석꾼이라는 부자들 10여명이 모든 재산을 바치면서 입교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수백만 교도들이 바친 재산이 얼마나 많은 것이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교도들이 헌납한 재산의 대부분은 일본 관헌에 대한 무마 공작비로 사용되었다. 또한 교단에 바치기 위하여 매각하는 토지, 기타의 재산이 대부분 일본인 재벌들에게 헐값으로 넘어가는 것이 예사였다.

월곡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족 경제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일제의 식민정책에 직 · 간접적인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이같이 월곡은 많은 재산을 관에 바치고 빼앗기면서도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에는 공개적인 지원이 없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결국 월곡은 한민족의 재산을 수탈하여 일본 정부에 바치는 식민지 정책의 조력자가 되는 셈이었다.


월곡은 교세가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자기에게 천자가 될 운수가 주어져 있다는 신념에서였던 초기와 달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 등에 별로 동조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가 도피생활을 계속한 이면에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도 했지만 독립투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다.

특히 대동단을 조직한 뒤 월곡이 시모오카 다다하루(下岡忠治) 총독부 정무총감을 면회하러 가는 길에 독립단의 잠복과 신문기자의 출현을 두려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제 총독부는 체포령을 내린 월곡에게 밀사를 보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체포하지 않았다. 뒤에 회유정책으로 종교활동을 성화시켜 보천교에 대동단이란 친일단체를 결성케 한 것 등은 모두가 월곡의 반민족(反民族) 행위를 그대로 침략정책에 이용한 것이었다. 또 보천교 내부의 분열은 조선총독부가 고도의 정치적 조종을 시도한 결과였다. 
 

 

64c8b5f28e25ec9c09784bfb3e86dc19_1511950 

전남 나주에서 보천교 집회장면 기사.  보천교도에 대한 비판적 보도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아일보 1934. 4. 29) 

 

4. 시국 대동단 사건 시말(始末)


보천교라는 교단을 신비적 종교 체험을 통해 조직화 해내고, 탁월한 조직 원리를 통해 확장했던 월곡으로서는 교단의 내부 분열과 외부 탄압이라는 이중고에 놓이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 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잠재적 위협이 지속되거나 가 시적인 위해가 드러나면 종교 교단은 자체 종교의 교리를 수호하고 교단 조직을 보존하는 수단으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강화하거나 현실 타협 내지 체제 내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시국대동단’의 창설로 교단의 방향을 설정한 월곡은 후자의 경향으로 전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하’라는 비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종교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제반 현실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결국 기 만일 수 밖에 없고, 또 현실 참여의 기능을 강화하면 교단의 수호 자체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월곡은 현실 타협의 길을 택한 것이다.

 

보천교  간부,  일본  천황 생일 참가


1924년 6월 총령원장 이상호 형제와 경성 진정원장 이달호 등이 보천교의 혁신운동을 전개하고, 교주 월곡의 비행을 성토함에 따라 보천교는 사회적 규탄과 내부 신도 간에 반목이 심한 처지에 놓였다. 동시에 배교도가 속출하여 교주의 비리를 들춰 내려 하는 등 내부의 분열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고, 일제는 사찰과 위압을 점점 강하게 취해올 뿐 교주체포령을 취소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월곡은 관헌을 무마하기 위해서 막대한 공작비를 사용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헤쳐 나갔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월곡은  언제까지나  지하에서  은둔생활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차라리 정부에 수만금을 바쳐 당시 김태식의 동광회(東光會)처럼 1 등 친일단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광명천지(光明天地)에 떳떳하게 나가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하고 싶은  층동이  머리 속을 맴돌기 시작하였다.


월곡은 1924년 9월 29일에 보천교의 공명정대한  종교적 취지를 밝혀 관민 (官民)의 오해를 풀게 한다는 이유로 1천5백원을 총정원 문정삼과 총령원장 임경호 두 사람에게 줘 일본정부의 이해를 촉구 하도록 부탁하였다.17) 

 

17) 『보천교연혁사』 상, 92쪽 참조

 

그런데 임경호가 홀로 귀국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동경에 들어가 신임 조선 정무총감의 수족인 채기두(蔡基斗)와 같이 하감(下岡)을 면회하고 보천교의 취지와 방문한 뜻을 말하니, 총감이 그 면 우리 선생님을 방문하여야 될 일이라 말했다.


그래서 그 신생님이 누구인지 성명올 물으니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 로 있는 가토오다카아키(加藤高明)라, 총감과 같이 수상관저에 들어가 상을 면회하고 보천교의 취지와 주의를 진술하니 수상도 크게 웃으며 선과 일본간에 큰 바다가 격하여 구식 선박으로는 교동이 불편하므로 반 문화교육상 부동의 유감이 많더니 만일 금일과 같은 기선이 상고로 터 있었으면  조선과 일본은 고래로부터 단함, 융화하였을 것이라 하고 출발기일을 물으므로 1,2 일 후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수상이 크게 놀래어 ‘천장절(天長筋 일본 천황의 생일)'축일이 수일간에 있는데 축하도 아니하고 돌아가려 함은 어떤 연고인가? 축하를 마친 후 돌아가는 것이 좋다 하여 부득이 응낙하고 퇴출하였다.


정무총감의 비서관 오가와(小河)를 면회하여 일반축하의 예절을 물으니 헌상품을 봉정하는 의식이 있다하므로 헌상품의 정도를 물으니 많고 작음의 정액은 없으나 최소한이라도 3천원 가치의  물품은 준비해야 된다 하기로, 임시 축하 헌상품을 진열한 상점에 가서 열람한 즉 헌상품은 호피(虎皮)로 포장하고 정찰을 붙였는데 최저품이 3천원이라 적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 물품을 정부에 봉헌하면 정부에서는 그 물품을 상점에 반환하고 대금으로 3 천원과 기타 교제비 조로 1천원을 청구하는 바이다. 


이 뜻을 전해들은 월곡은 임경호를 불러서 사실을 확인한 후 이렇게 문책했다. 

 군(君) 등이 금번 여행함은 우리 교(敎)의 취지를 선전함이 목적이지 천 장질 축하장에 참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데, 임의 목적인을 면회하여 취지를 설명하였으면 가위 목적을 도달한 것인 바, 바로 귀환함이 가하 고 또한 축하식장에 종교가가 참가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고 여비가 부족한데 어찌 문정삼과 같이 오지 않고 네가 홀로 귀국하느냐?

 

이에 대해 임경호가 경위를 설명했다.

 축하식장을 배견(拜見)한 즉, 관료석과 종교석이 구분되어 있는데 금전 부족으로 참여 불능이라고 말하려 하다가 조선에서 600만 대중를 끌어 안은 종교로써 차마 금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미 총감의 비서관에게 승낙하고 상점주와 예약을 체결한 바 문정삼은 일본에 체재하고 소자는 다른 볼일이 있는 것같이 비밀히 돌아왔사오니 사태로 보아 이를 중지시키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월곡은 이에 “사람에게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서기 어려운데 하물며 외국인에게 믿음을 잃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총정원에 가서 협의하라”고 하였다.

이 때는 천장질 축일이 사흘 뒤였으므로 김정곤, 김홍규 두 사람이 경북 김천군 정교부(正敎部)로 출장을 가서 부장 이병철과 상담하 여 2천원을 차입하였고, 마침내 임경호는 모두 합하여 5천4백원을 가지고 동경으로 가 문정삼을 만났다.
그들은 동경에서 천장절 일을 기다렸다가 거액(당시의 3천원 상당)의 예물을 헌상하였다.


이 때 일본정부에서는 보천교를 강압하여 아주 박멸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포용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부에 효과적으 로 이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던 듯하다.

가토(加藤) 층리는 보천교로 하여금 일본인과 대동단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성의를 보여준다는 약속 아래 보천교의 이른바 양해를 허락한 것이다. 결국 보천교 사절단은 총감의 요구를 받아들여, 보천교에서 ‘광구단(匡救同)’이라는 명칭으로 ‘내선일체(內,祥一體), 대동아의 평화를 주장하는 일본의 정책에 협찬하는 운동’을 전개할 것을 약 속하고 돌아온 것이다.

 

문정삼, 임경호 2인이 귀국하여 하강 총감의 말을 보고하였다.

 보천교는 기원이 천근磯近)하고 아직 확실한 기반을 잡지 못한 이상 특별한 원조를 할 수 없으니,

 보천교 안에 별도의 기관을 설립하면 극력으로 원조할 것인 바 ‘시국광구단’을 조직하라.

 
월곡,  시국광구단을  개명해 시국대동단으로 설립


보천교가 특별기관인‘시국광구단’을 조직하면 탄압하지 아니하고 적극 원조하겠으며, 오가와(小河) 비서관은 “조선인 대부분은 매사가 시작만 있고 끝이 없어 확신할 수 없으니 광구단을 조직하려면 제반 설비와 그에 준하는 강연비로 금 3만원을 먼저 은행에 적립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월곡은 이견을 제시했다.

 광구단이라 칭함은 우리 동양 도덕상으로 보면 너무 무례하지 아니한가?

현금(現今) 대세(大勢)가 대동(大同)이 아니면 평화할 수 없고 더구나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을 침하니 이때를 당하여 동양 황인종은 상호간 대동단결로써 세력을 공고히 하지 아니하면 백인종의 화를 면키 어려울지라.


이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대세를 추측한 고로 임술년(1922년) 정월 도에 12계명을 교시하였는 바 친목동인(親睦同人) 이라는 일구(一句)가 바로 그 뜻이요, 동인(同人) 은 즉 대(大) 동양민족을 지칭함이니 그러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 칭하라 

 

이어 월곡은 대동단 조직의 책임을 문정삼과 임경호 2인에게 위임하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조선 13도에 강연사(講演師)를 선정하는 방법은 각 도에 3인씩 도합 39 인을 정하되 3인 중에 1인은 우리 교(敎)의 방주(方主)로부터 정하고 2인 은 교외인(敎外人) 으로 조행(操行)이 방정하고 선구지식이 유여(有餘)하고 언어에 한숙(?熟: 익숙)한 사람을 선정하라.


선정된 이들은 경성 가회동 진정원에서 입교식을 거행하고 신도가 된 후에 대동단의 주의와 오교(吾敎)의 진리를 학습하였다가 강연할 시는 비위원이 먼저 출발하여 설비를 완료한 후에 교인 중 강사가 연단에 먼 저 올라 교리를 설명한 후에 외인 강사는 ‘대동단’의 취지를 설명하라.


대동인도, 몽고 등에 재(在)한 각 신문기자를 매사에 2인씩 또 사회단체 수뇌자 외 총독부 이하 고등관 전부를 초대할지며 발회식(發會式)  행시에는 교중간부도 다수 참석하여야 할 터이니 발회식 거행일을  예
(豫)히 본소에 보고하라.

또 대동단 취지서를 내가 검열한 후에라야 인쇄할 터이니 원고를 작성하거든 곧 본소에 부송할 지어다.

 

이어 월곡은 발회식 준비비, 취지서, 인쇄비, 신문기자 및 관리 초대비, 강연회비, 강연 여비 등을 정산하여 금 3만원을 지급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시국대동단(時局大同園)’이라는 사회 단체가 출범 하게 되었다.


이때 이달호(李達濠)가 경성 진정원장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문정삼, 임경호가 일본으로부터 경성에 온 이후로는 임경호의 사저인 경성부 냉동에 칩거하고 진정원에는 왕래가 없으므로 의혹이 일어 2인이 동경에서 한 행동과 그들이 쓴 비용 내용을 탐문 조사했다. 문정삼은 그 뒤로 병이 나서 10 여일 간 앓다가 본소로 돌아가고 임 경호는 채기두와 공모하여 보천교의 흥망을 되돌아보지 않고 금전만 편취할 뿐이었다.

또 보천교 대중을 배경으로 당국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교묘한 수단으로 이달호를 매수, 3인이 한 몸이 되어 중앙명령에도 불구하고 발회식 일자도 통지 안하고 취지서도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인쇄 했다. 또 강사 등도 교단 간부 중에서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고 저의 단원 중에서 임의로 선정해 각지에 통지했다.

 

시국대동단,   월곡의  설립  취지  벗어나 운영


한편 본소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전혀 알지 못하고 경성으로부터 보고를 매일 고대하고 있었는데, 경북지방 간부들이 포교차 대구진 정원에 도착해 보니 청중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고 있었다.

집회의 이유를 물으니 "명일은 시국대동단 강사가 대구에서 강연 하는 일환인 고로 각지 교도가 청강하기 위하여 내접하였다”하므로 본소에서 출발한 간부 등은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타지방에서 청강하러 온 교도가 대절한 자동차로 진정원에 와서 "금번 강연에서 대동단 주의는 터럭만큼도 없고 11단체연맹 강연을 함은 무슨 연고이냐”고 물었다.


영문을 모르는 진정원 간부는 "강사 등이 11 연맹의 강연을 할진 댄 즉시 그 자리에서 어찌 쫓아내지 못하였느냐?"고 묻자 교도들이 분개하여 강사들이 대구역에 하차할 즈음 양측이 맞붙어 싸우다가 강사들이 묵고 있는 여관을 포위하고 강사들을 불러냈다.

강사들은 깜짝 놀라 여관주인으로 하여금 경북 진정원에다‘‘교도 의 공기가 험악하여 임의로 출입하기가 불능하니 우리도 금후로는 전일과 같은 언론을 하지 않고 대동단 위주로 선전할 것이니 교도를 잘 위무하여 왕래의 편의를 봐달라."고 통지했다.

이에 당시 경북 진정원장 민영성이 강사를 불러 들여 기만의 죄책하고 다음날 강연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동년 12 월말 각지를 돌며 강연한 강사 등과 임경호와 이달호가 본소에 모였다. 월곡이 임경호를 불러 그 동안 거짓말한 죄를 질책하자 이렇게 변명했다. 

 

 그때에 오가와(小河)가 말하되, 현금(現今) 제국의회(帝國議會)의 기(期)가 절박하였으니 귀교에서 대동단 강연을 속히 거행하면 금반 국회에 총감 이 부임한 지 수 개월에 600만 대중을 응한 보천교와 악수하여 조선 민심을 안정하겠다는 소이이다.


총감이 총독만 되면 보천교도 장래 유리하리라 하기에 사유하건댄 교리 강연하기를 결정한 바에 일정을 속히 정하여 강연하는 것이 피차에 유리하겠기로 발회식 일자와 및 강연 일정도 보고치 못하고 대동단 취지서 원고의 검열도 받을 여유가 없어 그리되었습니다.

 
월곡이 전일에 대동단 설립 및 강연비로 지불, 양도한 금 3만원 지출한 결산서 내역을 검열하니 모호한 점이 많았으나 이미 소비한 것을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월곡이 시국대동단을 설립한 취지를 설명하는 연사들은 월곡의 말을 이렇게 부연하여 설명했다.

 보천교의 최고 목적은 대동에 있는데, 현하 세계정세로 비춰 볼 때 이 대동이 아니면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현금의 서세동점(西勢束浙)을 막기 위해서는 대동아 황인종간의 대동단결이 선행해야 한다.


차교주가 교시한 12계명(誠命)중에서 친목동인(親睦同人)은 대동양민족(大東洋民族)의 친목단결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 가운데에는 일본과 조선은 동일민족이기 때문에 서로 화목단결해야 한다.

 

이런 논지는 일제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고 특히 선정된 연사는 모두가 당시 친일단체 '11 연맹’에서 어용시되던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강연은 친일사상 고취 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시국대동단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민족적 감정에서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대동단이 가는 곳마다 청중들은 연단에 뛰어 올라 연사에게 모욕을 주며 구타를 하는 등 수라장을 만들었다. 심지어 보천교의 친일행위를 규탄하면서 교당을 파괴하며 교도를 능욕 구타하는 것이 예사였다.

 

친일사상  고취한  시국대동단   강연…   민족  감정  통분

 

특히 부산에서는 수만 명의 청년들이 모여 보천교의 정교부를 격파하며 교도들을 난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목격하고도 이를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교사(敎唆)하고 고무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당시 관청에서는 보천교를 친일파로 이용하여 사회의 질시를 받아 자체 내의 분열과 내부 소모전을 조장하여 자멸하도록 하는 유도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월곡이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친일 주구행세를 해도 관헌의 동정이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던 상황이었다.


이 예증으로써 제주도사건을 들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1916 년 24방주제도 선포 뒤 많은 교인이 포섭되어 1921년에는 도민의 6~7할이 보천교인이라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교인들은 장차 월곡이 제왕으로 등극할 것을 믿고 보다 나은 직첩 을 얻기 위해 가산을 기울여 성금을 바치기에 주력, 자연히 도민의 생활에 적지 않은 위협을 가져와 관헌에서는 이를 단속하기에 고심하였다.


보천교는 1922년 총독부의 양해를 얻은 뒤 제주도 최남단인 모슬포에 정교부를 설치하여 당당히 교권을 집행하게 되었고, 1924년 에는 연사들을 이끌고 시국대동단의 취지를 선포하면서 이에 동조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격분한 청년들이 보천교 성토회를 조직하고 보천교를 비방하는 연극을 공개 상연하는 등 보천교의 박멸을 위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관에서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연극내용은 이렇다.

 월곡이 교도들에게 수령방백의 관직을 주겠다는 구실로 교도들로부터 거둬들인 거액의 성금을 심복 문정삼에게 주어 관헌을 매수하여 교주의 체포를 방지시킨 뒤 월곡 자신은 관헌의 눈을 피해 생활하는 반면, 교인 들은 대부분 파경에 이르러 걸식 유랑생활을 한다.


이런 비참한 교도들의 생활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침내 교주가 체포되어 혹세무민하고 사인취재(詐人取財) 했다는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진다.

 

이러한 모습을 대중 앞에 공개한 후 청년들은 정교부의 간판을 떼어 바다에 던지고 교도들을 포위 구타하여 중상을 입게 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방조하는 태도를 취하였다고 하니, 이로써 당시 보천교에 대한 관민의 감정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월곡은 시국대동단이 조직된 이듬해 1925년 정월에는 보천교의 대동단 조직의 공적을 알려 동정을 구하기 위한 계책으로 보천교인 3명과 대동단원 9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여비로 5천원은 임경호에게, 기타 예비비로 2만원은 김홍규에게 각기 보관하라 하고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제군의 금번 여행은 오교藩敎)에 대하여 중대한 책임을 부하였으니 군은 마땅히 신중한 태도와 공명정대한 언동으로 외국인에게 수치를 이지 말며 또는 소리(小利)를 견하여 대의를 망치 말며 재정의 권리를 호 침해치 말며 무용의 용품을 망령되이 사지 말며 만일에 서로 합의 지 못한 일이 있을지라도 서로 양보하고 참아서 화평의지로 용무를 완 히 보고 속히 돌아오라.

 

동경에 도착하여 대동단원 9인과 임경호 등이 김홍규의 예비 전부를 분배하자고 김홍규를 협박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들 매일 4 5회씩 식당에 드나 들며 비용만 소비할 뿐 본연의 일은 두에 두지 않고 있다가 이달호가 중간에 매개자로 중재한다며 각 에게 자금을 나누어 주어 활동하도록 하자고 권유하였다.

부득이 그들의 요구대로 채기두(蔡基斗) 3,500원, 고희직(高義閔) 1,500원, 김창환(金昌煥), 오태환(吳台煥) 각 1,300 원, 이풍재(李豊約), 은성하(殷成河) 각 1,200원 그외 6인은 각 700원씩으로 분배하니 합계 14,200원이었다.

 

일본  대의사  수백명 초대,  보천교 취지 설명


당시 보천교의 상황은 진퇴양난 그것이었다. 국내에선 이미 친일파로 지목되어 공격이 심해졌고 일제 당국이나 관청의 압박 역시 더욱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정세도 살펴볼 겸, 또 일본 조선에는 이미 보천교를 선전하였으나, 만주 및 몽고 등은 포교 불모지여서 새롭 게 뻗어나갈 대책을 강구하고자, 보천교 본소에서는 간부 전병덕( 田炳惡)을 동경에 파견했다.


그러나 전병덕은 대동단원들이 비상 예비금을 나눠 써버려 업무 진행의 어려움을 목격하고‘‘만주 강연에 대한 일은 총감의 말이 수 삭 후에는 귀임할 터이니 그때 다시 협의하자 하더라”는 말을 전했 다. 이에 본소에서는 1만원을 은행위체(銀行爲替)로 다시 송부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보천교 간부들은 45 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당 시 대의사(代議士) 수백 명을 두차례 초대, 연회석상에서 보천교 취 지 및 대동단 조직의 취지와 공적을 설명하고 보천교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을 촉구하였다.


행사에 참석한 일본 측 대의사들도 면면이 보천교 및 대동단의 장래를 축복했는데 대의사 나카아라까와 고로(中荒川五郞)는 이렇게 화답했다.

 근자에 조선의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정객과 접촉하면 반드시 요구 또 는 원하는 바가 있더니 지금에 보천교의 취지와 대동단의 주의에 대하여 연일 심문하여도 무구무욕(無求無悠)하고 불요불급하니 이와 같은 단체와 제휴하여 일본과 조선간의 문제를 해결치 못하면 조선과 일본은 영원히 분리할 줄로 확신하노니 이 자리에 참석한 만장의 여러분은 특히 주의하여 보천교와 악수하여 일선(日鮮) 문제 해결의 신념을 확립하기를 바란다.

 

보천교 간부들이 일본을 방문해 동경에 체재하는 중에 총리대신 을 지낸 기요우라 게이코(淸浦奎吾: 1850-1942), 전 조선 정무총감 미즈노랜따로(水野鍊太郞), 전 조선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기치(九山鷄吉)외 수인의  발기로  보천교 특파원  등을 초대하는  만찬회를  3월 1일에 개최한다는 신전지 수천 매가 살포됐다. 선전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보천교와 악수하여 일선문제를 해결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각에는 영원 히 해결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하노니 유지(有志) 제씨(諸氏)는 참가 회비 7 원을 휴대하고 참석하기를 바라노라.

 

일이  꼬이느라고  총감은 ‘참석이 불가하다’고  말해  김홍규가 그 의미를 물어보자 이렇게 답했다.

 만일 그 만찬 초대를 받으면 헌정회(憲政會)와는 동정(同情)이 없으리니 숙량(熟量)하여 처리하라

 

김홍규는 여관으로 돌아와 일행에게 “우리의 주지(主旨)는 일방적인 동정을 얻자는 목적이 아니오, 대동양 대동주의를 목표하는 바 어떤 정당은 악수하고, 어떤 정당은 배척할 필요가 없는 즉, 초대에 응하는 것이 가할 듯 하다”고 하자 대동단 일행은 전부  불가( 不可)를 주장했다.  

보천교 간부 일행은, 시모오카 다다하루(下岡)총감이 극력으로 참석을 반대하자 3월 1일까지 동경에 체재한 뒤 초대에 불응하면 실례가 된다고 판단, 2월 29일에 동경을 출발하여 본소에 귀환하니 전후비용이 3만 5천원이었다. 그 뒤 채기두 등도 경성 황금정(黃金町) 시국대동단 간판 아래 사무를 집행한다는 구실로 많은 교금을 소비했다.


일제 당국은 시국대동단을 선전함과 동시에 일반 민중이 보천교를 친일파라 지명하여 각지 강연장에서는 혹독하게 모욕도 하며  교의 간판을 부수고 교도를 무례하게 구타하여도, 이를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도리어 교사(敎唆)도 하며 혹은 청년들이 교도들과 충돌할 때 경관은 교도만 억제하고 암암리에 그들올 원조하여 난타 당하게 했다.

이같이 관청과 일반 민중이 서로 손올 잡고 보천교를 핍박하려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부산 정교부 사건18)과 제주도 성토 사건19 )이었다.


일본 경찰, 보천교도 구타 수수방관


한편 같은 해 4월에는 월곡 자신이 직접 상경하여 총독부 미쓰야(三矢)경무국장과 총감을 민회하고 대동단 재조직 문제와 만주로의 이동문제를 협의한 바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월곡은 그 동안의 은둔생활을 면하였다고는 하지 만, 이미 민중들로부터 친일파라는 규탄과 비판이 심하였으며, 관에 서는 포교상의 활동과 의성금(義誠金) 20) 징수의 취재(取財)를 철저히 조사하며 다각도로 압박하였다.


이리하여 보천교는 관과 민간으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얻지 못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침체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 에 대해 친일과 관련해 차경석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실 당시 국내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오?

 

당시 일부 종교단체들이 항일을 했다며 민족종교라고 내세우지만 보천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고 민족의지를 강조한 집단이나 종교가 어디 있었습니까?

보천교는 그래서 일본 총독부가 ‘유사종교’라는 애매한 용어로 희석시키며 말살한 겁니다.


보천교를 놔두고는 조선 통치가 어렵다고 본 거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보천교가 망한 뒤 1930 년대 후반 이후 국내에서 이렇다할 만한 항일운동집단이나 일제에 대한 뚜렷한 저항이 사라진 것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시  보천교측은  다음과  같이 자평하고 있다.

 

 시국대동단을 조직한 본래의 목적은 대동양(大東洋)을 한 가족과 같이 보고 같온 동양 인종간에 전쟁의 참화(慘禍)를 피하고 서세(西勢)의 침해 를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금전을 투입하고 정신상의 고로(若勞)를 인내하면서 먼저 조선과 일본사회에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 일본정부와 협력하여 장차 대대적인 사업을 경영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연사가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서 연사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고, 시국대동단의 본 취지가 그릇 전해져서 보천교는 관민(官民) 양 편의 이해와 동정을 모두 잃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일반민중의 어육(魚肉)이 되고 말았다. 21)

 

일제 치하에서 종교적 교리와 그것의 실천 과제로 사회 개혁과 민족 독립을 강조하던 교단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활발한 포교 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일제 당국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 교단의 포교 활동은 곧 독립운동과 하등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사회 개혁과 조국 독립을  주창했던 월곡은 포교  활동확대와 교단 정비를 위해 종교의 사회적 측면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죄어오는 일제의 압박을 어떻게든 막아내어야만 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월곡이 택한 것은 잠재적 인 타협이었다.


종교는 일반적인 사회운동과 구별되는 독특한 종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현재적 상황에 적용하여 일시적인 타협안을 제시하더라도 긴 안목 하에서 별다른 무리가 없 으리라고 본 것이다. 구원의 기능을 담당하는 종교로서 민족적 사회적 위기 상황 하에서 일시적인 타협은 결국 구원으로 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근원성을 훼손하는 첩경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늪 위에 놓인 보석을 잡기 위해 내디딘 첫 발은 보석을 손에 쥐기도 전에 온 몸을 집어삼 키고 만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또하나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보천교를 비롯한 당시 종교 교단은 포교 활동을 통해 역사 주체이자 민족 공동체 이념의 운반자로서 민중 자각을 일정 부분 이루어냈다는 사실이다.  전통 사회의 유산을 바탕으로 혁세(革世)정신을 고취한 초기 교단의 성과 중 민중 의식의 고양은 각 교단의 창립이 마무리되면서 각 교단 내는 물론 일반 민중 사회에도 안착되고 있었다.


물론 월곡이 교단의 노선을 수정할 무렵에도 보천교단 내의 교도 들은 상당 부분 민중 자각이 성취되었고, 이것은 결국‘시국대동단' 창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나는 교단의 방향 선회가 월곡의 표현대로 종교적 구원을 위한 일시적인 타협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히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고취된 의식을 가진 비교도(非敎徒)인 일반 민중들에게는 친일집단으로 비춰지는‘시국대동단’은 부정적인  집단 내지 친일 종교집단으로 밖에 비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월곡이 오판한 사회적 현실이었다.


여기에 더해 일제의 간교한 교단 말살책이 보태졌으니 월곡의 패착은 결국 종단의 급격한 쇠락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18) 『증산도』, 749쪽 참조
19)  위의  책, 750쪽 참조
20) 의금(義金)과 성금(誠金)을 통칭하는 말로써 교인이라면 의금은 의부적으로 납부하여야 하는 것으로 당시 교인은 봄 가을로 1원씩 납부하였으며, 성금은 임의대로 내었다. 이강오,『보천교』, 33쪽 참조
21)『보천교연혁사』 상, 102쪽 

 

 

5. 차천자(車天子)의 죽음


1926년 1 월, 당시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남도 순시 중 정읍 의 보천교 본소를 방문, 월곡을 만난 뒤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보 천교를 찾았다. 총독이 대흥리 본소를 찾은 데 이어 아사요시(淡利) 경무국장도 비밀리에 방문하여 30 분간 요담했다면서 회견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쳤다.


한편 총독부 고위 간부들의 연이은 방문으로 월곡에 대한 일제의 체포령과 교인 검거는 자연히 해결된 반면, 일반인으로부터 보천교 가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혀 전국적으로 보천교 박멸운동이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유화정책을 쓴 사이토의 보천교와 민중의 이간책(離間策)에 월곡이 속아넘어간 셈이다.

a3613d34c765d7f2e4eed603b4ac625f_1512033
<아사요시 경무국장 차천자  방문> 아사요시 경무국장이 차천자  대궐로  비밀리에 방문하여 30여분간 요담을  나눴다고  보도한 당시  기사.  (동아일보 1926. 10. 10) 


이후 보천교의 대외교섭 상대는 기껏 정읍경찰서나 전주경찰서 서장에 불과하였고, 총독은 월곡을 더 이상 만나주지 않았다.

1926년 1월에는 기존의 60방주제가 폐지되었다가 그 이듬해 1927년 6월에 다시 부활시키는 등 조직의 와해를 예고하는 조짐들이 나타났다.

1927년에는 월곡의 심복 신도들이었던 이달호 · 임경호 · 채규일 · 임치삼 등이 교단을 이탈하여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보천교 본소 습격했다. 22)  이것은 교단의 내분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찰은 각지에서 교인들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구타, 강제구금, 호출, 교기압수, 교(敎) 문패(門牌)파기, 교인간 왕래금지, 교무활동 금지 등 다시 혹독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수많은 배교자가 발생했고, 재산권에 대한 소송도 끊이지 않게 되었다. 23)

하지만 이렇다할 대책 한번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고 교단측은 오히려 교리해석을 둘러싼 교권다툼과 분쟁만 계속하다 점차 분열 체의 수순에 돌입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서도 경찰에 의해 중지됐던 성전 신축공사가 재개 었고, 그후 1929 년 드디어 완공을 보았다. 하지만 준공식과 더불어 삼광영(三光影) 봉안식을 성대히 거행, 새로운 활기를 찾아보려던 계획은 경찰의 불허로 중단되고 말았다.

경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대전역과 정읍역에 경찰을 배치해 회에 참가하려는 교인들올 무자비하게 체포, 구금시켜 버렸다.  동시에 각지의 보천교와 관련된 건물도 폐쇄되기 시작하였다. 시국대동단  활동과 관련, 지식인들의 보천교 성토는 격렬해졌고 일제 당국으로 하여금 탄압의 빌미를 만들어 주었으며, 따라서 조직의 와해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a3613d34c765d7f2e4eed603b4ac625f_1512033
 보천교에 입교했다가 굶어 죽게 되었다고 보도한 당시 신문. (동아일보 1926. 2.28)

 

전 재산을 성금으로 내고 대흥리에 모여든 교인들, 즉 탄갈자들은 곧바로 굶주림에 허덕였고, 심지어 벽곡(壁穀)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단식 후유증 등으로 굶어 죽은 자까지 속출했다.

1929년 성전 봉안식과 월곡의 천자 등극식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교단 간부들 가운데는, 교조인 강증산의 행적을 추적하고 언행록(言行錄)을 제작하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신앙 대상을 증산 만으로 국한시키려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미 교도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게 된 월곡은 1928년 1월 4일 교도 수백 명을 모아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걸어 놓고 음양진퇴소장(陰陽進退消長)의 이치와 천지인배합(天地人配合)의 도(道)를 3일간 설법하였다.

이 때 월곡은 이렇게 설파했다. 

 보천교는 포교 이래 혹자(或者)의 전도(傳道) 오류로 인하여 허령미신(虛靈迷信)의 설(說)에 기울어지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제무터는 동양도덕의 정종(正宗)이 되는 원리를 전세계에 포양(褒揚)해야 할 것이다.


월곡의 이 설법을 후일 보천교인들은 ‘무진설법(戊辰說法)’ 이라고 불렀다. 월곡은 무진설법을 통해 강증산을 옥황상제로 믿어 장차 보천교인들에게 주어질 신통묘술과 경세의 운수가 모두 증산의 신적(神的) 권화(權化)에 있다는 믿음을 부정하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월곡은 무진설법 이후 일본인 민속학자 무라야마지준(村山智順)과 나눈 문답에서는 24) 이러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24) 조선총독부 近澤印屈lJ音E에서 1933 년 발간한『조선의 점복과 예언』 참조 

 村山 : 여러 가지 이치를 수양력(修養力)으로 각득(愛得)하셨습니까?


월곡 : 교조(敎祖)께서 친화(天化)하신 후로 천지가 붕퇴한 것 같아 망지소조(罔知所措)하고 막지소향(莫知所向)이라 의론할 곳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었습니다. 교조께서 항상 이 세상에 계실 줄 알았는데 떠 나신 이치가 무엇인가 생각하느라고 밤이면 유단하에서 밤새는 것 을 몰랐고 낮이면 비룡산(飛龍山)에 올라가 고지통곡하다가 문득 교조께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아니한 이치(理致)를 각득(覺得)하고 그 후로는 의심을 파(罷)하였습니다.


村山 : 어느 해 교조를 만났고 어느 해 교조가 천화하였습니까?


월곡 : 정미(丁未.19 07)년에 교조를 처음뵙고 기유(乙西 1909)년 정월 초 2 일 야반(夜半)에 이곳을 떠나신 후로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 김형렬(金亨烈)의 집에 머무르시다가 6 월 24 일 천화하시기 전에 오라는 통기(通奇)가 있었습니다.

 

일모시(日暮時)에 당도하였을 때 좌중(座中)에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초면부지(初面不知)의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때는 성하시(盛夏時)여서 교조께서는 심피를 깔고 마당에 누우셨다가 나를 곁에 눕게 하셨는데 사흘 되는 날 천화하셨습니다. 모였던 제자들이 모두 흩어져 돌아갈 때 혹 허망하다고 욕도 하고 혹 생존시 관망과 요 및 수신지구를 팔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義理)와 정곡(情曲)을 생각하고 박공우(朴公又) 한 사람만 하여 남았습니다. 졸지에 뜻밖의 변을 당함에 치상비(治喪費)도 준비가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주인 김형렬이 말하기를 교조께서 생존시에  돈 40원(圓)을 용처가 있다 하시면서 궤에 넣고 자물쇠로 잠그고 열쇠를 몸에 지니신 일이 있다 하므로
이는 치상비로 두신 것으로 알고 궤를 열어보니 돈 40원이 있었습니다.

 

증산생시(曾瓦山生時)에 친숙했던 사람과 병 고친 사람들이 자청(自請)해서 상여를 쓰게 되었습니다. 상여
뒤에 따르는 자식도 없으니 그 정곡(情曲)이 절박(切迫)하고 가긍(可矜)하되 다른 수행자(隨行者)가 없고 주인은 허망하다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니 부득불(不得不) 홀로 상여를 배행(輩行) 할 때 비가 오는지라 곁에 있는 사람이 우산을 주어도 펴지 아니하고 냇물을 밟고 가니 밭 매는 여자들이 보고 저 사람은 무슨 지성이냐고 비방하였습니다.

 

동리 뒷산 기슭에 매장(埋葬)하고 차마 오지 못하여 혼자 무덤을 안고 방성대곡(放聲大哭)하니 산을 내려가던 사람들이 다시 와서 만류하여 내려왔습니다.

 

그후에 교조의 부친을 위로하여 본댁에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처자와 형제에게는 천화하셨다는 말도 못하고 교조를 뵙고 싶을 때는 교조께서 남기신 약장(藥匠) 앞에 홀로 배례(拜禮)를 드리지만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7월 그믐에 동곡 김형렬에게 금산사 구경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갈 때 생각엔 금산사를 보고 조용한 방이 있으면 공부를 해보리라 하였는데 마침 조용한 방이 있어서 김형렬에게 상의하니 형렬이 말하기를 불가(不可)하다는 것이 었습니다.

나는 수중에 금전이 없으므로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서 양도(糧道)를 변통하여 8월 1일 형렬을 데리고 다시 금산사에 들어 갔다가 14 일 귀가하여 주야로 생각하다가 9월에 파혹하였읍니다.


처음에는 교조의 사(死)하심을 사(死)치 아니한 것으로 의심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교조 사(敎祖 死)함이 무의(無疑)하니 내두사(來頭事)를 어떻게 조처(措處)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이어 월곡은 보천교단의 교의에 대해 무라야마와의 문답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村山 : 증전에 교리를 일심(一心) 상생(相生) 거병(扶病) 해원(解寬) 후천선경(後天仙境)이라고 한 말이

          있었는데 정당한 교리가 아닙니까?

월곡 : 정당한 교리가 아니라 이상호(李祥昊)의 말입니다. 교조께서는 선경 이라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증년(曾年)에 내가 은둔(急通)하여 있을 때 양해를 얻을 때 자의로 교리라고 명목한 것입니다.

村山 : 지금 보천교의 정당한 교리는 무엇입니까?

월곡 : 교리는 인의요, 교강은 경천 명덕 정륜 애인입니다.

村山 : 교리를 인의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월곡 : 교조의 유훈(遺訓)에 대인대의(大仁大義) 무병(無病)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람이 사는 것은

          인(仁)이요 죽는 것은 의(義)니 곧 일신 (一身)에 관계되는 생성(生成)의 이치입니다.

          만물(萬物)도 봄에 생(生)하 여 가을에 성(成)하니 종자(種子)가 곧 인(仁)이요 인은 중심입니다.

          사람이 생(生)함은 곧 인(仁)이요 성(成)함은 곧 의(義)라 합니다.

村山 : 경천(敬天)이라 함은 상제(上帝)를 말합니까?

월곡 :  천(天)이라 함은 신(神)도 아니요 사람도 아닌 물(物)이라 천(天)이 있고 상제(上帝)가 있읍니다.

          우리 교(敎)에 삼단(三段)이 있으니 제1단은 천(天)이요 제2단은 상제(上帝)이니 주체(主體)가 되고

          그 위에 천이 있습니댜 상제(上帝)만 말하면 그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村山 : 그러면 결국 천(天)이 원체(原體)요 상제(上帝)는 모든 일에 관여하여 활동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입니까?

월곡 : 천(天)은 본래 허무한 것이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주체(主體)이니 총재(總宰)하는 권리가

          있습니다. 신(神)은 명목이 있으니 일월(日月)이 곧 상제(上帝)입니다.

          상제(上帝)도 천(天)의 범위 내에 있읍니다.

          12계명(誡命)중에는 특히 상제(上帝)를 존(첼)한다 하였습니다.

村山 : 옥황상제와 증산과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월곡 : 그 자리가 곧 상제(上帝)입니다. 

村山 : 증산선생이 인간에 생(生)하심이 곧 옥황상제가 화현(化現)하신 것입니까?

월곡 : 그렇습니다. 교조께서 생존시에 ‘내가 옥황상제’라는 말씀도 계셨습니다

村山 : 교도가 독실하게 교를 믿으면 상제(上帝)와 동양(同樣)으로 됩니끼, 안됩니까? 

월곡 : 태을주를 송독(誦讀)하여 개안(開眼)이 되면 옥황상제(玉皇上帝)를 승안(承顔)하여

         육체는 이 세상에 있어도 신(神)은 옥경(玉京)에 가서 문답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무진설법이 있은 후 연중 칠대치성(七大致誠)이 1월 1 일, 1월 3일, 춘분, 하지, 8월 15 일, 추분, 동지로 정해지게  되었다. 25)  무진설법은 보천교의 신로(神路)변경이 교서(敎書)에 처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2년에는‘ 인의유신(仁義有信)’이라고 새긴 교주의 직인을 사용하고,  육임(六任)에  대한  칭호도‘ 인의사(仁義士)’로 바꾸는  등  증산과의 차별화 시도가 절정에 달하였다. 물론 이에 따라 교단 간부와 교인들에게 유교식(儒敎式)으로 집지례(執贄禮)가 행해졌고, 교리는 인의(仁義), 교강(敎綱)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으로 선포됐고,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교(敎)의 목적은 대동(大同)으로 정해졌다, 26 ) 이러한 신앙형태의 변경에 대해 월곡은 교조 증산의 유훈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정읍시 홈페이지에는 월곡이 일상 평생계잠(平生戒歲)으로 들려주던 좋은 글귀를 기록하고 있다.
德戀耳鳴 過愍鼻息(덕은 귀 우는 곳에 힘쓰고, 허물은 코 숨쉬는 소리에도 징개(愍改)하라),' 즉 덕은 음덕으로 베풀고 허물은 하찮은 것도 고치라는 말이다.


25)『보천교 연혁사』 하, 1 쪽 참조
26) 현재의 보천교 한쪽(구파라고도 함)에서는 이는 증산의 유훈이며, 기존의 신 앙형태를 유교식으로 변경했을 뿐 증산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제 가혹한  탄압으로  교단 와해


한편 1933 년에는 또다시 각지의 포교사들에게 이유없이 구타, 행, 고문, 구금 등의 탄압이 이루어졌댜 교기와 교첩이 찢기고, 당이 훼손 당했다. 결국 일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교단의 핵심간부들도 하나 둘씩 교단을 떠나갔다.


대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는 교인들의 성금에 전적으 로 의존했다. 당시 교단기록을 보면 가산을 팔아 남김없이 헌금한 탄갈자(彈埼者)들이 무려 교인 가운데 1 할 가까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처럼 교인들의 헌금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교인들이 교단 떠나자마자 조직의 와해를 가져왔고 보천교의 조직체계는 스스로 쇠락의 운명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36 년 정월에 월곡의 종질 차순기가 칼을 들고 월곡의 거실에 들어가 죽이겠다고 날뛰어 월곡은 이를 피했으나, 이후 신색(神色)이 나빠지고 뒷발에 종기가 나 큰 고통을 겪었다. 지병이 더욱 악화된 월곡은 양의사와 한의사를 번갈아 불러들여 치료를 하였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3월 초순에 이르러 병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병탑(病榻)을 정침(正寢)으로 옮긴 뒤 얼마 안 돼 월곡은 눈을 감았다. 

1936년 3월 10일이었다. 월곡은 7남매(7남 2녀)를 두고 세상을 하직하니 당시 57세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치고는 고단하고 쓸쓸한 죽음이었다.


3월 11 일에 이르러 부고를 각 도의 정리소(正理所) 교약소(敎約所)에 띄우고 13 일 오후 소렴(小殮)을 하고 14 일 대렵(大殮)을 하여 입관을 마쳤다. 이 때 호상은 김홍식(金鴻植), 상례에 김기용(金基鏞),대축(大祝)에 임용순(任鎔淳), 진설(陳設)에 최남진(崔南鎭), 사명정(寫銘族)에 이영호(李英浩), 사서(司書)에 홍택근(洪澤根) 최종한(崔鍾翰), 사화(司貨)에 원약제(袁若濟) 등이 맡아 장례를 준비하였다.


그의  명정에는 ‘보천대화대교주(普天大化大敎主)  중앙예문(中央叡文) 월곡선생(月谷先生) 연안(延安) 차공지구(車公之柩)'라 쓰여졌다. 18일 오전 8시 교도 1백여 명이 상여를 메고 광소에 이르렀고  건대환질 (巾帶環?)로 곡하며 따르는 자가 2백여 명에 이르렀고, 일반 남녀교인과 문상자가 수천 명이었다.


월곡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정읍경찰서에서는 3월 10일부터 경관 4명을 보내어 수호사(修好司)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감시하였고, 18 일 발인이 있은 날에는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고오지마(神島)경부와 전주경찰부 고등과 안도료세이준(安藤梁星淳)과 정읍경찰서 고등계 후투나미(福澤) 주임 이하 경관 50 여명이 출동하여 경계를 펄쳤다.


월곡의 장례일에는 경찰의 경계와 수색이 더욱 심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즉각 대흥리의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전국 각지의 교 간판이 떼어졌으며 교무 집행은 금지 당했다. 또한 본소에 대한 수색과 교무자료 조사, 간부의 구속과 고문이 시작되고 집회와 성금 접수도 금지하였다.


5월에는 교회 건물관리를 당국에 위임하라고 경찰측이 교단의 간부들을 협박했다.


6월에는 정읍 경찰서장이 찾아와 보천교 해산, 십일전 건물 포기 교인의 삭발 등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자는 엄중 처벌할 것이라고 통고하였다. 이어 2만여평의 본소, 중앙에 건평 136평, 높이 87척에 이르는 최대 건물 십일전은 강제 경매에 처해져 곧바로 해체되었다.


총 공사비용 50만원이라는 어머어마한 규모와 5년간에 걸친 대공사의 결과물이자 당시 목조건물로서는 그 웅장함과 정교함이 한반도에서 최대였던 건물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삼광영과 일월상 금붙이들은 경찰에 의해 뜯겨졌고, 부속건물, 종각, 교종이 강매 했고 심지어 담장까지도 뜯어갔다. 그런데도 교단 간부들은 속수무책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27)

 

27) 장봉선,『정읍읍지』, 1927년 11월 발행, 9- 20쪽 참조


한편 간부들이나 교주의 후손들은 경매가격조차도 모른 채 고스란히 건물 등을 빼앗겼고, 해체된 건축물 부속들은 서울의 조계사와 내장사로 운반되어 대웅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차경석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9ccb3e2532a70bca53c915f85a817ccb_1512105<서울 종로 조계사 대웅전>

 단층다포식 팔작지붕으로 된 조계사 대웅전은 보천교의 본당 건물인 십일전을 1937년 뜯어다 옮겨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웅장함을 보아 보천교의 당시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어차피 잘못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고쳐지겠는가. 십일전만 해도 기사년 (1929년) 3월에 사이토 총독이 당시 돈으로 500원만 주면 보천교 본소에 완공된 십일전을 사용하게 해 주겠다고 했으나 아버님께서 거절하는 바람에 한번도 사용을 못하고 아버님 돌아가신 뒤 일제에 의해 강제 경매 돼 불교도들에게 500원이라는 헐값에 팔렸습니다.

결국 십일전은 한번도 써 보지도 못하고 다시 헐려 오늘의 서울 종로 조계사 대웅전 짓는데 쓰인 거요.

사이토는 총독을 두 차례나 했는데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종교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여 보천교를 망가뜨린  원흉이지요.

 

월곡이 죽은 직후에 총독부에서는 유사종교(類似宗敎) 활동을 금지하는 영(令)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향후, 종교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 운동은 보천교 운동을 끝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보천교운동 측면에서 본다면 시국대동단의 조직 이후부터 월곡이 죽은 1936년까지를 타협적인 자치운동기(自治運動期)라고 할 수 있다. 국권(國權)을 회복시키고 조선의 전권(全權)을 차지하겠다는 월곡의 야망이 꺾인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노선 변경이 곧 보천교 운동의 소멸로 치닫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바로 이전 시기를 조직을 이용한 반일운동기(反日運動期)였다면, 이 시기는 조직을 이용해 일제와 타협하려 한 시기로 귀착된다. 결과적으로 일제와 타협하려는 순간, 보천교는 동시에 몰락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천교운동이 3 · 1 운동 후 엄혹한 식민지체제인 일제에 저항해 국내에서 최대 규모로 조직된 단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반일이든 타협이든 간에 거대한 조직을 담보로 했다는 점에서, 월곡은 종교지도자라기보다는 탁월한 조직운동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28) 

 

28)  안후상, 앞의 논문 참조

 

9ccb3e2532a70bca53c915f85a817ccb_1512106
'차황제의  비밀' 등을   파헤친   심층보도.

2년 뒤 월곡의 갑자등극설이 허구로 드러나면서 내부분열이 가속화됐고, 보천교 박멸이 사회 문제화됐다.  1924년 9월부터는 보천교 혁신회, 대동시국단 사건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1922. 2. 21)

 

월곡의 타계 후 교전은 앞서 지적한대로 일제의 강제 철거로 섭 일진은 서울로 이진되어 조계사(曹溪寺) 건물이 되었으며 보화문(普化門)은 부안(扶安) 김상기씨의 집이 되었다가 내장사(內藏寺) 대웅진이 되었다.

지금, 보천교 자리에는 둘째 및 세째 아들과 딸 한 분이 살고 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본소(本所)에서 매년 다섯 차례씩 (음력 正月 初三日, 春分, 夏至, 秋分, 冬至日) 교인들에 의해 치성식(致誠試)이 올려 지고 있는데 영정(影幀)은 모시지 않고 방안에 탑(12층의 나무탑)을 놓고 식을 올리고 있다.


종교의 보편적 기본 요소가 이상(理想), 즉 계시(啓示), 신앙(信仰), 의례(儀禮)라 한다면 종교의 신생(新生)에는 반드시 계시자(啓示者)인 천재적 인격의 출현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의 어떤 계단을 쌓아 올리던 월곡(月谷) 차경석, 이제 다 영생의 길에 들었으니 인(人) 무상, 세월 무상이란 말인가?

 

 

 

 11편에서  계속 됩니다.   

 

 

 

 

Comments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