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11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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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월곡 차경석의 사상과 생애

 

1. 보천교분열의 배경 / 249
2. 일제의 단계별 보천교 해체 전략 / 255
3. 월곡의 한계인가, 민족의식 부재인가? / 260

4. 보천교의 오늘 / 273
5. 차천자를 위한 변명 / 286

 

에필로그 / 289
보천교약사 / 291
참고문헌 / 299

 

 

1. 보천교 분열의 배경


월곡의 죽음은 보천교의 완전한 분열 · 해체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 분열의 싹은 그의 생존시에도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


월곡은 처음에는 증산을 옥황상제로 받들어 그의 권화(權化)를 절대시하였다. 월곡은 보천교를 창교한 이후 그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을 때에 이것은 오직 옥황상제인 증산의 신조라고 믿고 내심 은근히 옥황상제인 증산이 천지공사에 예정한 대로 자기의 교중에 도통문을 열어 많은 도통군자가 나와줄 것으로 확신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월곡은 조선을 독립시켜 교정일치(敎政一致)의 조화정부를 이룩할 수 있는 권화와 운수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미년 독립만세사건 이후 월곡이 경남 함양 황석산(黃石山)에서 일제의 삼엄한 경계 하에 천제(天祭)를 올리며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고 선포하고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살아가는 민초(民草)들에게는 하나의 민중적 사건이요,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달래주는 청량제였다.

그러나 1921년 60방주의 수련공부에서 한 사람의 도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복이라고 믿었던 간부들이 점차로 배교하여 자기에게 대항하고, 또한 국내를 풍미하던 천자등극설이 끝내 민중의 무수한 모욕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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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몰락을 대서특필한 언론. 멸망한 대시국의 궁궐이 경매처분되는 등 보천교의 문제를 파헤친 당시 동아일보 (1929.7. 17)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월곡은 증산의 권화를 의심하고 심지어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믿는 신앙대상의 기본문제까지도 회의를 품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처음 창교할 때 포교 선전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또한 모든 교인들의 태을주 수련공부도 증산이 사람을 기만한 사술로 단정했다. 이어 월곡은 1928년 1월 4일 많은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송주(誦呪) 수련을 금지하고 유교에 따르는 정좌수심법(靜坐修心法)을 행하라고 교시를 내렸다.

 

지난날 교인들이 신통묘술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믿었던 태을주 수련공부는 종의 산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를 시정하여 동양도덕의 정종(正宗)인 고성(古聖)의 도를 세계에 포양(裵揚)한다.

1929년 1월 3일 도통 전수기념 치성 때 월곡의 부인인  이씨가 개안(開眼)된 가운데 삼광영의 옥황상제의 위좌인 월광영에 있어야 할 증산이 철망에 씌워져 나병환자와 같은 험상으로 신단 아래 내쳐져 있고, 그 대신으로 대사부(월곡의 선고에 대한 존칭)가 옥황상제 신위에 앉아 있음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말을 들은 월곡은 사방주29)를 불러 이씨 부인의 개안 사실 알림과 동시에 옥황상제는 우주만물을 주재(主宰) 용사(用事)하는 절대적인 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요, 어떠한 인격신이 될 수 없다는 새로운 교리를 설명하였다.

 

월곡, 말년에 증산을 비판

 

월곡은 지난 날 교인들이 증산을 옥황상제로 믿어, 장차 보천교인들에게 주어진 신통사술과 경세의 운수가 모두 증산의 신적인 권화에 있다고 믿은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증산은 옥황상제에게 사액(賜額)을 당했고, 나는 증산의 사술에 속임을 당하였고, 너희들은 나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종전과 같이 증산을 옥황상제로 믿고 그의 권화에 의하여 신통묘술이 나온 것을 믿지 말 것이며, 오직 고성(古聖)이 전수한 인의(仁義)의 대도(大道)를 준수(達守)함이 가하다.


월곡이 새로이 믿으라는 고성은 유교의 조종인 공맹(孔孟)을 지칭하는 것이다.  월곡의 이같은 발언은 그 때까지 증산의 신권(神權)을 믿어오던 교인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되었다.


여방주(女方主) 신정심(愼正心)은 현장에서 반대의사를 표현하려다가 분에 못이겨 졸도하였고, 화방주(火方主) 김정일이 이 말을 선포하자 한로주(寒露主) 이중창(李仲昌)은 이에 반대하여 할복투쟁을 하였으며, 망종주(芒種主) 이용두 등 많은 교인들이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로부터 배교자들이 속출하여 혹은 월곡에게 대항하고 다른 종교에 귀의하였다.

이와 같은 배교항쟁은 원래 월곡의 축천축지(縮天縮地)하는 능력과 혁명주가 될 운수가 오직 증산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증산교의 신도적 교리에서 당시 월곡을 추종했던 교인들이 이제 새삼스럽게 증산의 신비(神秘)를 부정하고 인의(仁義)만을 중시하는 유교에 가까운 신앙을 표의하는 월곡의 주장에 그대로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증산의 신도적(神道的) 교리를 의심하게 된 월곡은 ‘김(金)보따리’라는 역(易)학자를 데려다가 교인들에게 역리(易理)에 의한 교리를 설하는 한편, 유교에 조예가 있는 교인들을 전문사(典文司)에 두어 유교적인 면에서 자체 교리를 세우기에 힘썼다.

그는 전에 이상호가 관에 제시한 교리(敎理) 사강(四綱: 一心 · 相生 · 祛病解寃  · 後天仙境)은 이상호의 개인 의견이요 보천교 교리는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폐기한다고 설파하였다. 

월곡은 보천교의 새로운 교리(敎理) 교강(敎綱)을 창안하여 1934년 5월에 중앙문사(中央文司: 전문사 -  典文司)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혁신된 교리 교강을 발표하였다.

 

1. 교리(敎理): 인의(仁義)
2. 사대교강(四大敎綱):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윤(正倫), 애인(愛人)
3. 주의(主義): 상생(相生)
4. 목적(目的): 대동(大同)

 

월곡의 혁신교리 발표는 교체(敎體)상의 일대 개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혁신교리에 반대하는 자는 물론 물러가야 하겠지만, 기왕에 가산(家産)을 모두 교단에 바치고 가족을 이끌고 이사까지 하여 진퇴양난으로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는 교인들은 그대로 월곡이 주장하는 교리에 따라 가면서 증산의 신앙을 계속해야 할 형편이였다. 

보천교 교리는 월곡의 혁신사상에 전적으로 지지하는 찬동파와 이에 끌려 가야만 하는 추종파의 서로 다른 이념이 암암리에 두 개 의 신앙형태로 싹트고 있었다.


교리를 찬동하는 파의 견해로는 보천교의 제1교리로 하는 ‘인의(仁義)’는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며, 인류 도덕의 원리로서 고성(古聖: 孔孟)이 전교한 만고불역(萬古不易)의  대도(大道)라는 것이었다.

인의는 곧 천심이다. 그러므로 증산이 인의를 말한 것은 사람이 천심을 바로 가짐으로써 그 덕이 상제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는 것 으로 보는 것이다.


추종파의 견해로는 보천교의 제1원리가 되는 ‘인의’는 곧 옥황상제로서 강세한 증산이 1909년(기유년) 1월 3일, 고판례와 월곡에게 도통 전수를 하는 천지공사 내용으로 전교(傳敎)한 현무경(玄武經) 병세문(病勢文)에 나타난 대도(大道)이며, 유불선(儒佛仙) 삼도합일(三道合一)인 증산교리에 유교의 범질로서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즉, 찬동파는 증산을 한낱 인간으로 보는 것이요, 추종파는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봉하는 것이다.


찬동파에서 보는 증산의 천지공사는 증산이 능히 인의(仁義)의 천심(天心)을 자기 마음으로 하여 이 천심에 의한 천도(天道)를 이행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증산이 직접 옥황상제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사상이다.

이같이 월곡이 종래의 주술적인 증산교리의 해석을 지양하고 보다 더 합리적이며 인도적인 면에서 교리를 밝혔다고 하여 보천교의 창교주는 월곡이라고 봄으로써, 월곡을 교조로 숭배해야 한다는 신앙태도를 갖게 되었다.

추종파에서는 증산의 천지공사는 옥황상제의 권능인 신도(神道)로써 결정한 것이라고 보고, 월곡의 창도(創道) 및 교리 개혁이 천지공사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증산은 월곡의 상위 교조(敎祖)로써 숭배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신앙태도였다.


2.  일제의 단계별 보천교 해체 전략


일제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보천교와 월곡에 대해 감시의 눈을 일찍부터 가지고 경계하고 있었다. 새 정부를 조직하고 있다는 항간의 소문과 잇달은 고소로 일제는 월곡을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하였고, 강경책의 하나로 월곡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때가 1917년이었으니, 월곡은 보천교의 공식 창립 이전부터 도피 생활에 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월곡은 탁월한 조직력과 기만 전략으로 도피기간 중 고천제를 치루는 등 신출귀몰한 행동을 보여줘 종교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래서 교단은 날로 급성장했고 비밀스러운 거대한 종교조직을 이뤄 갔다.

때마침 3 · 1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한민족의 독립 의식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기 강경책으로 일관했던 일제는 비밀스러운 종교 대집단을 함부로 다룰 수 없게 되었고, 이를 붕괴시키기 위해 강온, 즉 탄압과 회유라는 이중 정책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1921년부터 보천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려 전국적으로 수천명에 이르는 교인을 체포하는 한편, 특별조치법까지 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탄압이 오히려 비밀단체화하여 지하운동만 더욱 강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하에 월곡을 회유하여 자신들의 수중에 넣으려는 회유책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회유책으로 일제는 월곡의 은신처를 탐문하여 밀사를 보내기도 하였고, 소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체포하지 않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곡은 그러한 일제의 의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월곡에 대한 회유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지 않자 일제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교단의 간부들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넘어간 교단의 일부 간부들은 월곡을 설득하여 서울에 보천교 간판을 걸었으나, 이것은 보천교에 대한 형식적인 활동만을 인정하는 것이었을 뿐, 보천교의 종교활동에 대한 자유로운 보장은 아니었다.

 

보천교가 서울에 간판을 걸고 수 개월이 지났음에도 월곡에 대한 체포령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일제는 유인책을 통해 월곡을 식민정책에 이용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월곡은 일제의 전략을 알면서도 거대해진 보천교단을 숨어서 운영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유화책을 받아들이면서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월곡은 보천교 단을 공개하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 월곡의 판단은 보천교에서 추진하는 여러 사업, 특히 언론과 출판 사업을 통해 보다 긍정적으로 민중들로부터 평가받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일제도 탄압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판단 하에 월곡의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고도의 회유전략을 구사하였다. 보천교를 사교로만 규정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철저한 자멸의 길을 유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논리는 보천교를 ‘사교(邪敎)집단’으 로 보는 국내의 일반 인식과는 달리 한국 종교운동사 내지는 민중 운동사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 자료에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보천교 관련 자료로는 무라야마의 <조선의 유사종교>와 <조선의 점복과 예언>, 그리고 총독부 경무국에서 발간한 <최근 조선치안상황>과 <선인(鮮人)의 소요관(騷擾觀)> 등이 있으며, 이들 자료들은 보천교와 월곡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월곡은 1915 년 6월, 조선을 독립시켜 자신(월곡)이 황제가 되겠다며, 우민(愚民)을 유인하고 금전을 사기한 혐의로 정읍 천원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30년 6월, 역시 정읍검사국에서 월곡올 소환해 20여일 간에 걷쳐 심문, 취조했다. 이유는 황제로 등극한 후, 관작을 준다는 조건으로 금품을 내게 한 혐의이나, 증거 불충분으로 판명났다.


1932년 1월, 월곡을 정읍경찰서로 소환해 심문했다. 그 이유는 정읍 진산리에 사는 강재우라는 자가 1922년 여름, 방주 조제승의 소개로 3천원을 교주에게 건네 주고 관작을 받기로 했다는 등의 고소에 따라 방주를 잡아 심문했는데, 이것 역시 증거 불충분으로 블기소 처분됐다.


1934년 5월에 월곡은 또 한 번 경찰에 소환됐다. 이유는 주연초비가 동맹사건과  관련, 심문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30)


이 기록들은 한결같이 월곡은 조선을 독립시켜 스스로 왕이 될 것이고, 이것을 이용해 미리 매관매직올 한다는 고발사건이 빈발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1933년 1월, 보천교인 김모는 정읍에서 ‘만주사변은 점점 악화돼, 장래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이다. 그때 조선은 반드시 독립하고 보천교도가 정권을 잡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스스로 독립할 것이다. … ’  라는 등의 예언을 선전했다. 그러나 그들은‘정감록’의 자구를 견강부회해 ... 예언도 하고…. 31)


보천교인의 예언에 대해 터무니없는 낭설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시국관련설은 적중한 것이어서, 자구(字句)를 이용한 견강부회(牽强附會)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일제 당국의 보천교에 대한 정세 분석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미신이라는 일제의 판단은 미봉책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 한일병합 이후에는 조선독립을 말하는 등, ‘본교를 신봉하는 것은 곧 조선독립을 마친 뒤 영직을 받는 거와 같다.' 는 등의 말로 농락하니,
… 제2세 교주 월곡은 1922년 보천교라 이름하고 공공연하게 포교를 하며, 당시 소요사건(만세 사건) 이후 천도교의 힘이 소진된 틈을 타 그 교세가 천도교를 능가하게 되니 …32 )


이 기록 역시 부정적인 시각이 전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선총독 부가 유사종교단체로 분류시켜 놓은 보천교를 요시찰 대상으로 보 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라야마는 보천교와 같은 유사종교의 사회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평가하고 있다.

 

 동학의 난 다음으로 이어지는 종교운동이 일진회 활동이고, 이들 운동의 성격은 신 왕조 출현이라는 기대에 이어 성도(聖都: 왕도)운동 즉, 지상천국(地上天國) 건설운동이다.


이와 같은 유사종교의 사회운동은 일반적으로 정신적 해방운동임과 동 시에 물질적 해방운동 즉 현실생활올 보다 낫게 개척활동올 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33)


30) 村山智順『조선의 유사종교』, 312- 313
31) 村山智順,『조선의 짐복과 예언』, 조선총독부 중추원, 1935. 591- 656
32) 조선총독부 경무국, 『최근 조선의 치안상황』, 115쪽
33) 村 山 智 順 앞의 책, 934,  943, 950쪽

일제의 전략은 사회운동으로 치닫는 보천교의 사업을 적절히 이 용해 보천교를 수면 위로 올려놓고, 필요할 경우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철저히 자신들의 수중에 가두어 놓으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전략에 말려든 보천교는 정책의 혼선을 빚게 되고 마침내 시국대동단이라는 어용단체를 만드는 데에 이르고 만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제의 일관되고도 치밀한 식민지 전략에 보천교는 철저히 농락당한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 카리스마를 보인다 해도 현실 상에서 완전히 드러난 인간은 현실적인 인간에 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제는 교묘하고도 단계적인 전략에서 보천교를 앞질렀으며, 철저한 여론 조작을 통해 광범위 종교 조직을 한 순간에 와해시켜버린 것이다.

조신 통치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일제의 일관 정책에 월곡은 말려들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현실적으로 공권력 가진 권력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할 뿐 이었던 것이다.


시국대동단이라는 어용단체는 ‘대동’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하에 일본제국주의가 동양침략 명분으로 내건 대동아공영권에 매몰되어 철저히 부쉬졌고, 이렇게 이반된 민심은 보천교를 벼랑 위에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고도의 식민화 정책은 이렇게 거대 종교 조직을 한순간 몰락시킨 셈이다.

여기에 한 몫 한 것은 바로 조선 민중 내부의 분열과 여론 조작, 그리고 교단 내부의 갈등이었다. 특히 교단의 창립은 월곡의 종교적 카리스마가 근원이지만 그 뿌리에는 증산이 있었고, 증산이라는 뿌리는 월곡이라는 가지만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뻗은 가지는 고판례, 김형렬 등 적지 않은 종교지도자가 있었던 것이다.

 

3. 월곡의 한계인가, 민족의식 무재인가?


월곡과 보천교의 몰락은 한국종교사에서 하나의 중대한 획을 긋는다. 일제강점기 막강한 교세로 민족의 앞날에 종교적 희망을 불어넣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민족적 종교운동은 지도자였던 월곡이 사망함으로써 일단락 됐다.


일제는 월곡이 숨을 거두자 지체없이 민족세력 결집의 토대였던 민족적 민중종교운동을 유사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 매도하고 나셨다. 각종 집회나 교리전달 자체를 엄중히 금지, 종교를 통한 민족 운동의 불씨를 미리 잠재워 버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종교사에서 1936 년부터 1945 년까지는 종교를 통한, 주목할 만한 민족운동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껏 소규모거나 개인적 차원에서 독립투사들을 보호해 주고, 문맹퇴치에 힘쓰는 정도에 불과했다. 오히려 당시 종교 지도자 가운데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적극 찬동하고 학도병 지원을 설득하는 강연에 나선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보천교로서는 일제 당국의 단계별 종교 파괴전략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상황에 따라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임기웅변식으로 대응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소극적 대응은 결국 부일행위로 전락했고, 민중은 한때 구세주로 여겼던 보천교의 변절에 낙심, 보천교단에 등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또 하나, 보천교단은 식민지배 하에서 타종교 내지 민족진영과의 연합전선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일찍 민족주의자와의 연결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할 만큼 미약했고, 전략으로서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의 파괴 전략은 민족 진영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고, 급기야 적전(敵勸 분열로까지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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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차림의 月谷 車京石>
신출귀몰하는 신비적인 종교지도자  로 민중에게 각인된  차경석은  좀처 럼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사를 받으러 정읍 검찰국에 들어 가던 중 사진기자 렌즈에 찍혀 언론 에 최초로 공개된 모습.

당시 기사는 차경석의 얼굴을 보려고 쇄도한 인파로  정읍 검사국이  대  혼잡을 빚었고 사진기자는 보천교 교도들에게 포위되는 소동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유가적인 풍모가 이채롭지만 그의 종교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는  범인(凡人)이 근접하기 힘든 강력한 마력이 있었다고 당시 그를 본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특히 월곡이 차천자로 불린 것은 이날 법정에서 그를 고발한  배교자 채규일이 ‘월곡이 천자 놀음’을 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천황폐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라고 인사한 뒤부터였다고 그의 아들은 증언했다.  (사진은 동아일보 1927.7.24) 


월곡의 정치적 몰락은 정치적 상징 조작에 대한 일제의 정책과 일제하 우리 지식인의 대 종교관에서도 그 요인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언론은 신흥종교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비판을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6월 3일자를 통해 1919년의 만세시위 때부터 농민을 선동하고 있다고 처음으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 는 1923년경까지 보천교를 줄곧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일본을 배척하는 음모단체로, 장래 기회를 보아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 비밀단체로 파악하는 등 우호적인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후 교주인 월곡이 조선의 황제로 옹립된다는 세간에 떠도는 천자 등극설을 비꼬는 냉소적인 시각도 보였다. 

1924년경부터 보천교에 대해 비난과 성토 일색으로 논조를 바꾼다. 이러한 변화는  『동아일보』  1924년 12월 18일부터 6회에  걸쳐 연재됐던 '보천교와 시국대동단' 관련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민협회와 손목을 마주잡고 조선과...일본을 융화시킨다는 조건으로 관민일치, 노자협조, 사상선도, 대동단결이라는 조목 아래 시국대동단이 조직되었다. ... 월곡은 원래 총에서 불이 나온다고 떠들고 돌아다니며 갖은 행패를 다하다가 흥덕 현감 윤석진의 손에 무참히 죽은 차치구의 아들 ... 누구의 전하는 소문에 의하면 ... (월곡은) 매일 노름에 눈이 뒤집혀 ... 아무쪼록 돈을 많이 따도록 집안에 상을 차려놓고 치성까지 들였다고 한다. …

 

그는 강삿갓(증산)의 제자로, 증산이 죽으며... 월곡이 증산을 옥황상제라 하여 오늘날 보천교의 첫 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34)

 

... (월곡은) 어떤 확고한 종교정신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 민족을 위하여 어떻게 해 보겠다는 정치적 관념도 없이 다만 태을주만 외우니, 이것만 외우면 둔갑장신을 한다는 등 별별 … 갑자년 동짓날에 월곡이 등극해 천자가 된다고 하는 소문을 퍼트려 … 환상적 낙원을 꿈꾸고… 어수룩한 백성들을 속이어 너는 정승감이다, 너는 판서감이다 라는 등 ... 그래서 요리조리 금품올 떼먹고 … 백성들은 결국 벌거벗은 알몸덩이가 되어 의지할 데 없이 빌어먹을 짓을 하니…35)

 

"월곡이 어느 간부에 대해 말하기를‘지금 형편으로 보아 조선이 독립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즉, 차라리 일본 정부의 양해를 얻어 가지고 우리 의 편의를 취하는 것이 옳다.'고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36)

 

일반 사회 안에 독립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있는 것과 같이 보천교 에서도 (일본과) 융화주의자, 비융화주의자가 있어, 일상 반목과 질시를 오딘 터댜 비융화주의자인 이상호, 이성영(정입) 등은 당국에 교를 인정 하라 했고, 이들에 의해 총정원을 두어 포교하게 된 것도 다  그들의 힘이라 한다. 37)


… 시국대동단을 조직하게 된 원인을 듣건대, 친일, 배일 두 파가 일상 서로 노려 오던 중에 배일파인 이상호 일파가 시대일보 인수 사건과 관련하여 축출 당하게 되자 … 이상호 일파는 여러 간부 중에서도 가장
신지식이  풍부하고 현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38 )

 

34) 동아일보 1924년 12 월 18 일
35) 동아일보 1924년 12월 19 일
36) 동아일보 1924년 12 월 21일

37) 같은 신문, 1924년 12 월 21일

38) 같은 신문, 1924년 12월 22일

 

이처럼 1924년을 기점으로 보천교를 보는 『동아일보』의 시각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지나칠 정도로 악평이 연속되는데, 이것은 국권회복 차원의 보천교 운동이 노선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와 같은 시각에 서 있었다. 1924년 8월 28일 게재된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신백우의 ‘보천교 성토문(聲討文)’ 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 또 혹자들온 이렇게 말한다. 보천교도 다 같은 조선 사람인 이상에 는 그 다수인의 단결을 한 때에 이용할 수 있지 아니하냐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릴 한다. 과연, 그 혹자들은 월곡과 거리가 가까운 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한 시기에 주정꾼이 아무리 다수인들 그 무슨 일을 할 수 있 올까? 폐병원에 정신병자, 아편중독자가 아무리 다수인들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까? … 원래 단결이라 함은 명백한 의지와 강고한 주의와 철저한 주장 밑에서 동일 평등한 생활조건이 약속되지 아니한 단체는 그것을 단 결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

 

동아, 조선 두 신문의 시각이 초록동색(草綠同色)으로 한결같은데, 이에 더하여 총독부 기관지라 할 수 있는 『매일신보』도 여기에 동참하여 비난기사를 게재하였다. '보천교의 수도(修道) 개안(開眼)이 살인(殺人)인가’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사기(詐欺>'' '황당무계한 망설’ 등 의 기사는  그 제목만으로도  비판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24 년 말부터 보천교가 시국대동단을 창설하면서부터 친일지 『매일신보』는 동아, 조선과는 달리 상세하면서도 매우 우호적으로 보도한다. 이것은 물론 총독부의 지시라 추측할 수 있다. 39)

한편, 보천교의 상대가 되었던 종교인 천도교 역시 기관지 <개(開鬪)>을 통해 보천교와 그 운동을 비판했다. 

모든 기사를 열거할 수 없지만, <개벽>지의 보천교에 관한 기사로는 보천교가 정감룩을 교지로 창교된 모양이라며, 미신에도 고등미신과 하등미신이 있는데 보천교가 바로 이 고등미신에 해당한다고 비판하는 논조의 ‘미신의 감투를 벗으라'(<개벽>제 7호, 1921년 1 월 1 일), 미신 가운데 정치적 미신이 있는데 바로 보천교가 그런 미신이 라는 ‘암영 중에 묻혀있는 보천교의 진상'(<개벽>제 38호, 1923년 8월 1 일) 등이 대표적인 기사다.

월곡에 대해서도 정면 경고를 서슴지 않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보천교에서는 기관지 <보광(普光)>지의 편집 및 발행 인이자 방주인 이성영이 창간호‘답객난(答客勸’에서 천도교와 손병희의 행적을 조목조목 따지며 맞대응했다.

 

 계룡산 갑자(甲子) 등극설은 누가 떠든 소리며, 궁궁을을(弓弓乙乙) 어느 교의 기장(旗章)이며,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을 울부짖으면 강령(降靈)한다고 떨기는 어느 교인인가?
공중으로 날아가다가 육사(陸死)하기는 어느 교도이며, 무슨 회(會)를 만들어 창광자자(猖狂自恣) 하기는 느 도당이야.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 기첩(妓妾)을 안고 놀기는 어느 두목이야. 모든 미신과 온갖 죄악은 자신들이 다하고서는 남을 조소함이야로 언어도단이요...


보천교나 천도교는 다같이 민족을 대표하는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비난기사를 주고 받은 것은 당시 종교를 조직화한 민족운동 영의 주도권 다툼으로 볼 수도 있지만,‘유사종교’로 분류하여 세인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도록 유도한 조선총독부의 은밀한 공작으로 파악할 수도 있도 있다.  

민족의 암울한 장래에 불안을 느끼고 고난을 당해야만 했던 민중들에게는 더 없는 메시아적 존재로 비쳐졌던 두 종교가 조직을 둘러 싸고 벌이는 운동은 다분히 정치적이었고, 저항적이었으며 따라서 경쟁적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보천교와 이에 대항적인 자세를 보인 천도교는 운동의 대중화,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그 과정 에서 경쟁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차천자로 제왕될 야심 만만했던  월곡


한편, <개벽(開闢)>지의 ‘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라는 제하의 글은 보천교에 관한 냉소적인 분위기가 드러나지만, 월곡 개인에 관해서만은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있다. 월곡을 직접 만나 나눈 몇마디 대화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피력해 놓은 글이어서 월곡의 진 면목과 성향을 파악하는데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귀중한 자료다.
주요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깎은 머리에 가짜 상투를 망건과 갓을 빌려쓰고 K 씨를 따라 갔다. (그렇지 않으면 면회를 허락하지 아니하니) 밤은 침침하고 고요한데, 한참가니까 청량한 10여 간의 초가집이 있고, 그 초가집은 차씨의 수도실이요, 그 옆 기와집은 성전이라 한다. K씨는 나를 성전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십분이나 되어서야 어떤 남자 한 분이 정당으로 나오는데, 신장이 약 6척 가량이나 되고, 체격이 부대하며 얼굴은 타원형으로 약간의 흙색이 있고도 광명청수(光明淸秀)하며, 비두는 광후하고 (보천교인이 이를 龍鼻라 한다) 발(髮)은 단발하야 표발(約髮)과 같으며 (보천교인은 이를 龍髮이라 한다) 나이는 약 40 여세 가량이나 돼 보인다. (현재 44세)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의복은 조선산으로만 입었다. 그는 물론, 내가 보고자 하는 주인공 차씨다. 듣던 바와 같이 남을 속일지라도 과연 인격이 있어 보인다.


… 차씨가 정당으로 오자 여러 사람은 모두 굴복사례(屈服謝禮)한다.  ㄷ나도 역시 따라 배례를 했다. 차씨는 아무 말 안하고 있다가 침묵(沈默) 어조로 나의 여기에 온 이유를 묻는다.


나는 본래 종교보다는 정치에 취미를 많이 둬, 또한 차씨를 종교적 인물로 보지 아니하고 정치적 인물로 본 까닭에 보천교에 대한 진리가 어떠한지 묻지 아니하고, 먼저 시국문제를 물었다. 4)

 

이 글의 필자는 정치적 인물인 것으로 평가되며, 따라서 월곡도 종교보다는 정치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이유는 1922년 이 글 이 쓰여질 당시는 보천교 운동이 국권회복(國權回復)운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때였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개벽>지의 필자가 월곡과 나눈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자 : 현하 조선은 인심이 분란(紛亂)한 즉, 어떻게 하면 통일하겠는가?
월곡 : 세운(世運)이 다 그러하니까 별로 걱정할 것이 없고 인심을 통일하려면 종교가 아니면 안될 것이나, 종교 가운데도 기독교와 같이 국가의 이용물이 되면 안된다.
필자 : 조선의 문제는 언제 해결되는가 ?
월곡 : 조선 문제는 해결 될 것이오. 또 시기가 멀지 않다.

필자 :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는가 ?
월곡:……
필자 : 장래, 조선이 독립되고 보면 무슨 정체(政體)를 쓰는 것이 좋으냐 ?
월곡 :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것은 그때 일반인심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 : 미안한 마음으로) 보천교인이 가정집물(家庭什物)까지 방매(放賣)하고 가산은 탕패(蕩敗)하니, 이것이 선생의 명령이냐 ?
월곡 : 하늘이 준 재산은 하늘일에 쓰면 관계가 없다. … 세상 사람이 보천교인의 장발하는 것은 흉을 보면서 기독교인의 무정신(無精神)하게 삭발하는 것은 흉보지 않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한참 있다가 다시 입올 열었다.) 필요한 말은 일시에 다 할 수 없으니, 후일에 다시 기회를 얻자고 말하고는  나의 멀리 온 것올 사(謝)했다. 41) 


40) 飛鳳山人,‘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 『개벽』38호, 1922년 8월 1일. 87쪽.  

飛鳳山人은 가명인 듯 하다. 자신의 신분노출을 원하지 않는 정치적 성향의 지식인 또는 사회운동가로 추정된다. 이름 앞에 경남 진주라고만 표기되어 있어 사는 곳이 진주라는 것만 알 수 있다.
41) 위의 책, 38-  40쪽

 

필자는 이어 월곡과의 면담 결과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상은 내가 차씨를 방문한 결과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는 나는 다시 차씨를 방문한 소감을 말하고, 또 차씨에 대하여 한 말을 부탁하고자 한다. 세상 사람은 차씨를 하나의 미신가(迷信家)요, 또한 무
식자(無識者)로서 다만 우민(愚民)을 유혹하여 금전 사취하는 자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 시대의 지성은 부족하다 할지라도 구시대(舊時代)의 지식은 상당한 식견이 있다.
인지소절(人之所節)은 덕지소재(德之所在)라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치(愚癡)하다 할지라도 수많은 군중을 좌우하는 것을 보면 그리 심상히 볼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다만, 그는 시대의 지식이 없음으로 구식 영웅의 수단과 방법을 많이 쓰고 또한 구식 영웅의 야욕이 만만하여 자기가 제왕 되기를 항상 꿈꾸는 듯하다.


그를 차천자(車天子)라 하는 것은 결코 그가 자칭한 것이 아니오. 몽매 한 교인과 비소한 세인이 칭호한 것이지만 그의 여러 가지 용사하는 것을 보면 제왕될 야심이 만만한 것을 추측하겠다.

우민을 유혹하여 금전올 사취하는 것은 차씨의 죄가 아니라, 차씨 부하에 있는 까닭에 토방주(土方主)니 무엇이니 하는 여러 기괴한 임명(任名)을 띤 인물들이다.

 

그들은 차씨의 말올 능히 전달하여 교인올 선량하게 인도치 못하고 무지몰각한 미신망설(迷信妄說)로 교인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한다. 그래서 별로 교회를 위해서 쓰지 못하고, 다만 목전에 자기의 구타(苟妥)를 취하는 듯 싶다.

최근에는 동교 간부로 있는 모가 대금올 휴대하고 도주하였다는 설이 있으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즉 그러한 부류의 소위일 것이다. 나는 차씨 가 구식의 탈을 속히 벗고, 아주 철저히 시대화하기를 바란다.


고대의 제왕이나 영웅이 되기를 꿈꾸지 말고 일반이 요구하는 시대적 인물이 되기를 바라며, 또 눈앞에 다수의 도제가 있고 다수의 금전이 축된 거기에 구타하지 말고 그 도제, 그 세력을 일조(一朝)에 백실(百失)하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아불관언(我不關焉)과 철저한 결행으로써 자기의 소신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현하, 일반사회에서는 차씨를 많이 공격,  비난한다.

그러나 비난과 공격온 실상 정면의 것이 없고, 다만 그 측면뿐이다. 나는 차씨에게 대하여 문화사업이나 교육시설 같은 것을 왜 않느냐고 말하고 싶지 않고, 다만 철두철미하게 신(新)시대 신(新)주의에 화(化)하여 개척적 사업을 하라고 하고 싶다.


인사(人事)는 개관(蓋棺) 한 뒤에야 판단한다 하지만은 차씨의 인물여하는 개관을 대(待 기다리지)치 아니하고 있다. 금후 활동 여하만 보고도 판단할 수 있다.

하여간 차씨는 괴(怪)인물이다. 방(方)이 적적(寂寂)한 반도(半島)에 그가 있는 것도 또한 주목할  일이다. 42)


이렇듯 월곡에 관한 평은 정치적 야망을 품은 인물로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 사업을 이끌어 내려는 야심가로 요약되고 있다. 그리고  보천교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미신에 가깝다는 듯한 조소 섞인 판단이 개재되어 있지만 정치성향의 종교이자 사회운동의 실체로 긍정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꽤 차천자라고 했는가”라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왜놈들의 법에는 6법 위에 황실을 모독하는 죄를 제일 크게 친다. 아버님이 명치천황 사진 걸어놓고 가죽 포대에 소의 피를 담아 화살을 쏜다고 일본에 매수된 문정삼, 채규일, 임경호, 이상호, 이성영 등 배교자들 이 대역죄(大逆罪)라며 고발했다.


총독부는 보천교를 협박한다고 민간 법정이 아닌 일제 용산 군사령부에 넘겼으나 ‘민사관계니까 고등법원에서 처리하라’고 해 정읍 지법에서 마침 당시 총독의 독직(瀆職)사건 수사 차 조선에 와 있던 천황의 친임관 이라는 검정 3명이 법정에 나와 취조했다.


아버님이 검찰에 출두했는데 법정에서 채규일이가 ‘‘천황폐하를 여기서 뵙게 돼 죄송합니다."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이에 아버님께서‘‘니가 확실히 변심했구나”하면서 침묵을 지키셨다. 이날 아버님은 이들이 곤룡포와 면류관을 쓰고 천자행세를 했다는 증거물로 제시한 것을 가지고 나갔는데 치성드릴 때 쓰는 옷가지와 물건 들이어서 협의가 모두 풀렸다.


또 메이지(明治: 1868- 1912)왕의 사진을 걸어놓고 화살을 쏘았다는 대목도 아버님이 화살을 쏜 시점은 이미 명치천황이 죽고 그 아들 쇼와(昭和1 926- 1989)가 등극한 뒤여서 시차(時差)가 맞지 않아 고발이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당시 재판은 1926년 열림)


이에 일본 검정들이 화를 벌킥 내면서 무고한 이들 배교자들을 나무라고 월곡에게 “우리 나라 법은 아무리 무고한 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으니 고발하라 법정을 시끄럽게 했으니 용서할 수 없 댜”고 채근하자 “그 사람들이 내 제자인데 철없는 사람들을 고발할 수 없소. 다만 그들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을 바랄 뿐이요"하자 검정들이 ”과히 교주 선생은 다르십니댜“하고 경의를 표했다고 전했다.


이때부터 차천자 소리가 나오고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들었다. 

 

원불교측의 기록에도 정읍 법정의 재판과 관련, 차천자의 인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43)

 

 차경석의 인물됨이 얼마나 기걸찼든지 아무리 대담한 사람도 그 앞에 서면 고개 숙여 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선 총독 사이토가 보천교 본소를 방문하였다고 하며 아사요시 경무국장도 비밀리에 그를 방문하여 더욱 소문이 났다.


조선총독 야마나시의 비리를 심문하고자 천황의 특명을 받고 나온 대가 높은 검정(檢正)들도 정읍법원에서 보천교주 차경석을 보고는 그 공손히 질을 하고 극진히 대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일제가 간교한 술책 으로 부화뇌동하는 세상 인심을 이용하여 차천자를 사이비종교 교주로 매도한 경향이 없지 않지만, 당시 유림들 사이에 그가 유학과 선도에 도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김제 만경면 대동리 출신 유학자로 호남학파의 거두인 김홍규(탄허스님 의 부친)가 보천교 60방주 가운데 최고급에 속하는 목주도인(木主道人)으로 역할하였음을 고려할 때 경상도 유생 송홍눌이이와의 교류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평가된 월곡이지만 보천교는 거대한 조직을 가진 종교체였다. 그리고 종교는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교주에 대한 추종보다는 조직체계에 의한 운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천교는 일정 수준에 도달한 후 월곡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고, 그 카리스마가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을 때 분열의 싹이 내부로부터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리에 대한 해석도 증산에 대한 월곡의 회의로부터 출발해 새로운 이념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유교적인 교리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염원했던 교도들과 민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삼광영으로 대표되는 교단의 상징은 유학적 견지에서 해석됐고, 이념은 흡인력을 가지지 못하고 말았다.


아울러 조직은 장래를 대비하는 체계로 진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월곡은 그 시기를 놓쳐 버렸다. 배교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미 봉책으로 일관한 그의 조직 운영에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그를 이 을만한 후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후계 구도를 둘러싼 교단 내부의 이전투구가 이어질 수 밖에 없었고, 무리한 사업 추진으로 인한 교금의 소진과 분파의 형성은 월곡의 사후를 대비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12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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