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12편), 박종렬

문서관리자 0 7,702

 

제6장  월곡 차경석의 사상과 생애

 

1. 보천교분열의 배경 / 249
2. 일제의 단계별 보천교 해체 전략 / 255
3. 월곡의 한계인가, 민족의식 부재인가? / 260
4. 보천교의 오늘 / 273
5. 차천자를 위한 변명 / 286

 

에필로그 / 289
보천교약사 / 291
참고문헌 / 299

 

 

4. 보천교의 오늘 / 273

 

1935년에 간행된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보천교 간부조직만도 무려 55만7천7백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34년 8월말 현재, 전국 107개 포교소에 남자 교도가 1만3천76명 여자교도가 3천3백98명 로 총 1만6천4백74명이라고 집계하고 있다.


무라야마가 기록 보고한 같은 책 속의 1934년 당시 전 조선의 종단 수가 67개, 교도 수가 17 만3천8백58명이라고 한 사실에서 볼 때 보천교는 당시 주도적 신흥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만 명 이상의 교단은 천도교 9만3천4백6명이고 금강도 가 1만3천2백54명으로 보고되어, 서열 두 번째로 규모 있는 교단으 로 보고되었다. 또 증산교계 전체의 교도 수를 서술하면서 1925년 교도 수가 4만2천여 명으로 상승기의 극점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 600만  신도설’의 배경


그후 해마다 5천 내지 1만 명이 격감했다고 보고했다.
보천교의 교세가 한참 드세던 1919 년에서 1924년 사이에 자칭 6백만 신도라고 주장한 것은 당시 인구 총수가 대략 2천만 명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과장된 것이다. 교세가 한창 성장하던 19 20년 8월의 「보천교연혁사」 기록에는 "방주 1인 밑에 1만여 명이 수종하게 되었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당시 교단 외적으로는 언필칭 수백만 명이요, 교단내 주장은 60여만 명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보천교 간부조직이 형식상으로는 50만 명을 웃도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내용상 그만큼 하부조직이 확실하게 구축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물론 당시 비밀 포교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숫자상 과장은 인정해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 조직은 당시 인구 2천만 명 기준으로 볼 때 수십만 명의 신도를 확보한 사실로 미루어 단연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업청난 거대 조직이었음은 명확하다. 

1931년에는 교세 부진으로 자체 결정에 의해 총정원 문을 봉쇄 하기도 했고, 1932 년에는 방주들도 치성삼가를 정지시킬 정도였으며 잇단 핵심 간부들의 이탈과 배교, 금전문제로 인한 고소사건은 교단의 쇠락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1932년 11월부터 본격적인 교리의 유교적 해석이 강화된다. 이해 교장을 인의유신(仁義有炯이라 고치고, 육임이라는 교도에 대한 칭호도 인의사(仁義士)로 바꾸고 지방교단의 ‘육임총무소’ 간판도 ‘인의사 총무소’라 바꾸었다. 또 유생들과 사제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 하고 집지례 등 유교식 의례로 예식의 변혁을 꾀했다.

 

월곡이 사망하기 직전의 교세를 살펴 볼 유일한 자료는 「보천교 연혁사」 속편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1936년 1월에 집지례를 행한 자는 1백26명, 2월과 3월에 걸쳐 각도에서 집지 지원자의 청명서와 집폐물을 보낸 자가 평북 73명, 황해도 77명, 함남 24명, 전남 64명, 층남 4명, 경북 2백79명, 평남 1백14명, 강원도는 15명, 전북 66명, 층북 33명으 로 기록되어 도합 7백49명이었다고 한다.


1945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그 동안 종교활동이 정지되었던 보천교는 새로이 종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18일 동지절에는 각지의 교인들이 정읍 대흥리에 모여 교단의 재정리를 논의하여 현재의 본부교당에 새로이 본부를 설치하고, 예전의 교체 조직에 의하여 다시 교체를 정리하였다.
그들은 중앙기관으로 삼원(三院) 육사(六司)의 임원을 선정하였고 각 도의 정리(正理) 및 특파원을 선정하며 교인을 수습하고 의성금(義誠金)을 거두어 교단 재건에 주력한 결과 당시의 교도가 2- 3만명에 달하게 되었다. 44)

cb516e11ab4d5ac3295d4a167fdf34a7_1512291 

월곡의 비참한말로를 보도한 당시의 동아일보 (동아일보. 1929. 3. 9)


1947넌 월곡의 아우 차경덕이 ‘‘보천교의 교리는 자신의 형 월곡이 창도한 것이니, 월곡을 교조로 신봉해야 된다는 뜻을 말하면서 증산은 광인(狂人)이며, 혹세무민(惑世雄民)한 자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발하는 일부 교인들은 “우리들 보천교인은 월곡에게서 사기는 당했을지언정 한가지의 종교적 교도라도 받은 일이 없다”고 응수, 양자가 모두 불공죄로 출교(黜敎) 당하였다. 45)

이같이 대립된 이견의 분쟁은 곧 지난날 월곡의 교리개혁으로부터 야기된 찬동파와 추종파의 상대적인 신앙태도가 노출된 것이었 다. 이로부터 월곡을 교조로 하는 신파와 증산을 교조로 하고 월곡을 교주로 하는 구파로 분열 · 대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 · 구파가 항쟁하게 되는 데에는 또다른 요인이 개재되어 있었다.

 

44)  『보천교』, 36쪽

45)  같은 책, 37쪽  

 

월곡 · 증산,  교주놓고  신 · 구파 대립

첫째 요인은 월곡의 영위(靈位) 봉안(奉安)의 건이었다.
1953년 동지기에 김세훈(全世勳: 후에 신파의 協正院長이 됨)이 성전(聖殿: 昊天金厥 별실에 봉안됐던 월곡의 신위(神位)를 삼광영 신단에 연향(連享)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찬성한 자는‘신파(新派)’라 불리위 월곡의 차남인 차용남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고, 반대한 자는 한규숙(韓奎淑)을 중심으로 ‘구파(舊派)’를 형성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구파의 세력이 강하여 총정원 사무실은 구파에서 점령하고 있었다. 

둘째 요인은 성서(聖書) 간행의 건이었다.
1954년 신파에서는 월곡의 언행을 수록한 성서의 간행부를 조직 하고 차용남을 총관(總管)으로 하여, 총정원 앞 별관인 수호사실(修好司室)을 간행소로 정하여 신파 단독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구파에 서는 성서간행은 총정원 전문사(典文司)의 소관이니 간행부를 없애고 그 일을 총정원으로 넘기라고 하였다.

이에 신파에서는 성서간행은 차용남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상호간에 시비와 비난만 오갔을 뿐 단합할 수 없었다. 이 때 세간에서는 신파를 가리켜 월곡파 또는 간행부파라 하고, 구파를 증산파  또는 총정원파라고 불렀다. 46)

 

셋째 요인은 이씨 부인 장례비 건이었다
1955년에 월곡의 처 이씨가 사망하였을 때 차용남이 구파 측이 장례비를 부담하고, 또 교장(敎葬)으로 해주기를 요청했으나, 구파에 서는 이를 거절하였다. 신파에서는 구파에서 ‘사모님의 교장을 반대 한다’고 비난하게 되었다.


넷째 요인은 회관 소유권에 관한 투쟁이다.
1958년에는 신 · 구파 간에 회관소유권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신파 측에서는 구파 측에 대하여 총정원 회관을 인도하라고 구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신파 측에서 40여명이 작당하여 구파의 노(老)간부들을 폭행 · 축출하여 입원과 고소를 하는 등의 소란을 일으켰다.


축출된 구파는 본부를 한때 총정원회관 앞 간행소 건물로 옮기고, 차천수(車千壽) 명의로 있는 교회건물이 실제로는 교단의 공유건물이니 교단 명의로 이전하라고 요구하였다. 뒤에 축출된 구파는 경찰의 조정에 의하여 종전처럼 총정원 회관을 사무실로 이용하게 되었다. 47)


1961년 12월에 구파 측은 문교부의 국산종교(國産宗敎) 통합계획에 의하여 동도교(東道敎)에 편입되었으나, 뒤에 신구파간의 분쟁사실 을 알게 된 문교부는 동도교 편입을 각하(却下)시켰다. 이 등록취소에 양자가 모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2년 3월 22 일 춘분기에 양파가 통합결의를 하고 다시 문교부 에 종교단체 등록을 신청하였다. 이 때 양파의 통합결의를 보면 거의 모든 시비를 피차가 일소에 부칠 것과 신앙대상을 통일할 것 등의 15강(綱)  조항을 이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구파에 속한 이용우(李龍雨)를 통합 대표로 하고 대표 대리는 신파의 최병대(崔秉盛)로 선임하여 동년 6월 18일자 ‘보천교’ 명의로 문교부에 재등록했다. 그러나 양파의 통합을 선언한지 6 개월, 문교부에 등록한지 2개월만에 보천교는 또 다시 분열을 재연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62년 7월경 문교부에서 편찬하는 대한연감에 기재할 보천교의 연혁과 교리를 보고할 때 차용남이 대표 이용우의 위임을 받아 보고하게 되었다.

차용남은 창교연혁에서 교조 증산의 약사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월곡을 창교주로 하였고, 또한 구파 간부들의 사실무근한 비행을 열거하여 기록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신 · 구파 분열  대립 계속


같은 해 11월 27일 동지기의 회의석상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구파 측에서는 격분하여 회의 중 퇴장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구파는 또다시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구파 측에서는 종전에 사용하던 총정원 사무실에서 물러나와 대흥리 서쪽 산밑에 위치한 정화사(井華祠)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 르고 있다. 이때부터 옛 총정원 사무실은 신파의 집회소가 되었고, 정화사는 구파의 집회소가 된 것이다. 과거 성전은 원래 월곡의 장 손 차천수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1936 년 총독부로부터 보천교 재산을 압수처분할 때 문제가 제기되었다.


차천수 측에서 이를 매각하여 개인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해방 후 처음 집회도 이곳에서 갖지 못하고 대흥리의 교인 김자경(全子庚)의 집에서 가졌다. 

동도교 증산교회 대표 이정립(李正立)이 해방 직후 ‘대법사(大法社) 라는 명칭으로 종단을 조직하고, 이 성전을 매수하여 대법사의 사무실로 정하였다. 이 때 보천교는 대법사를 상대로 하여 교당(敎堂) 명도소송을 제기한 결과, 대법사 측에서 보천교의 공유로 명도한다는 조건으로 화해, 비로소 다시 보천교의 교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보천교는 1961년 5 · 16혁명 직후에 당국에서 증산계(甑山系)와 동학계(東學系)의 교단을 한데 묶어 동도교(東道敎)라는 연합체로 등록하기를 권할 때 여기에 편입하면서 초교파 운동에 찹여한다.

동도교는 그해 12 월 11일 문교부에 183호로 등록하였다. 그 신구파간의 분쟁사실을 알게 된 문교부가 보천교의 동도교 편입 각하시키자 이 등록취소에 양파가 모두 당황하여 그 다음해 1962년 3월 22일 춘분기(春分期)에 양파가 통합을 결의하고 다시 문교부 종교단체 등록을 신청하였다.

민정(民政)이양이 된 뒤 종교단체 등록이 필요 없게 되자 보천는 동도교 행사에 불참하여 이 운동에서 벗어났다.


1970년 11월 29일 보천교의 구동서(具洞書) 이순만(李順萬) 김진화(金鍾華) 김관선(金視善) 김병삼(金炳三) 등은 증산교의 배동찬(襄紀菜) 박기백(朴者伯) 정혜천(鄭息天) 한인회(韓寅熙)와 법종교(法宗敎)의 이봉기(李奉基) 김노택(金魯澤) 김형길(金炯吉) 등과 함께 증산천사 진리연구준비위원회를  만들려고 했다.


위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교인과 이와는 달리 동지(冬至) 다음날 음력 11월 23일 동도교(東道敎) 연례 총회에 참석한 홍범초가 증산도친목 발기문을 돌림에 여기에 찬동한 교인들이 원평에 있는 보화교에서의 동도교 총회 끝에 법종교에 모여 증산신도 친목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다음달인 1971년 1월 11일 대흥리에 있는 보천교 구파 회의실서 각 교단 교인 90여명이 모여 증산신도 친목회를 결성하고 그 임원을 선출하였다. 회장에 박기백(朴耆伯: 甑山敎人), 부회장에 이종호(李鍾浩: 甑山敎人 배동찬(裵東燦:  甑山敎人 ) 이시발(李時擦: 三德敎人 ) 정두영(鄭斗永) 이옥수(李玉壽), 교리연구위원장에 구동서(具洞書), 그 부위원장에 배용덕(裵容德), 황수찬(黃壽餐), 감찰위원장에 박종설(朴鐘卨), 그 부위원장에 강봉규(姜鳳圭), 총무부장에 홍범초, 그 차장에 한인희(韓寅熙), 섭 외부장에 한병수(韓炳洙), 부녀부장에 정혜천(鄭息天), 청년부장에 이봉기(李鳳基),  고문에  김근하(金槿T)  송육오(宋六五)  송상진(宋相鎭)  성주철(成周哲) 서양술(徐良術) 김갑진(金甲晉) 이순만(李順萬) 등이었다.

 

증산신도친목회는 증산대성(曾瓦山大聖)을 신봉하는 신도들이 스스로 교파를 초월하여 친목하고 시운(時運)에 적합한 종교운동을 전개하려 한 것인데 이 친목회를 결성한 곳이 1921년 이후에 많은 교인들이 분립해 나간 모체라 할 수 있는 보천교 회의실이었다는데 더욱 큰 뜻이 있다.

 

증산신도  친목회로  명맥 유지


증산신도친목회는 1971년 음력 3월 1일 전주 동서학동에 있는 관성묘에서 제1 차 법문분과(法文分科)위원회를 열어 심주택(沈珠澤) 김갑진(金甲津) 이창환(李昌煥)서양술(徐良述) 송육오(宋六五) 등 5명이 다 년간 연구해온 법문(法文) 곧 현무경(玄武經)의 진리를 발표케 하고 토의하였으며 제2차 법문분과위원회를 정읍 초산동에 있는 용화사에서 열었다.


증산신도 친목회는 1971년 증산교단협회로 개칭하고 규약과 기구 를 개정하여 재발족할 때 회장에 이시발, 부회장의 한 사람으로 정 기현을 추대하였다. 증산종단협회가 1973년 음력 3월 27일 더욱 규모가 큰 증산교단통일회를 법종교에서 창립하여 회장에 이환우를 추대할 때 보천교도 여기에 참가하여 강덕중이 부회장이 되었다.


1974년에는 증산교단통일회를 해체하고, 1975 년 법종교에서 증 종단연합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서병구를 추대할 때 보천교에서 여기에 참가하여 부회장에 강덕중, 의전부장에 윤기선이 선임되었다.

1975년 5월 25일 법종교에서 보국안민결의대회를 열 때 보천교도 여기에 참석하였고 1980년 법종교에서 증산종단연합회 정화대회를 열어 법도(法度)있는 교단의 건설, 국민정신을 바로잡을 새 윤리의 확립, 주체사상의 확립 등 종교차원의 정화를 추진할 때도 보천교도 여기에 참여했다.

1978년 문화재 보호협회 김제군 지부에서 간행한 <김제군사> 의하면 보천교 구파가 총신도수 8백여 명, 보천교 신파가 3백여 이며 각기 교당수는 1개뿐이고 교직자 수도 각 3명씩에 불과한 으로 나와 있다.


일반 신도들의 교리에 대한 지식도라는 조사항목에서 교도들은 40~80세의 고령층 농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막연한 신앙 에 근거하고 있는 정도라고 보고하고 있다. 학력은 국졸, 한학이 대부분으로 조사됐다.  교단 대표는 임기제로 4년마다 바꾸고 있다고 한다.


빛바랜 보천교의 오늘


1983년 금산면 금산초등학교 교정에서 조국평화 통일기원 대치성을 올릴 때에 보천교도 참여하여 총령원장 강덕중이 연합회장으로서 봉도위원이 되었고 윤기선이 기원문을 봉축하였다.

1985년 양력 11월 16일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있는 서울관광호텔에서 민족종교 상호간의 권익과 발전을 도모하며 나라의 융성과 세계평화 건설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할 때, 보천교도 여기에 참여하여 강덕중 총령원장이 자문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발간된 한국종교학회의 ‘한국 신종교 실태 조사 보고서’ 의 조사에 의하면 보천교 교세는 약 5천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으 며 신도들은 연령이 40~70세의 노년층으로 농민이 중심이다.


또 대흥리 일대 마을에 사는 신도들이 가내공업으로 방직공장을 세워 공동운영하고 있어 ‘신앙촌의 공업화’를 이루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특히 월곡 당시에는 증산을 천제로 받드는 증산교의 분파 였으나 현재에는 증산과 상관없는 월곡이 설립한 종단이라고 보고 있다.


2001년 현재 보천교는 그 이름조차 사람들의 기억에 희미한 존재로 퇴락했다. 정읍시청 종교담당자  서인석씨에 따르면 “정읍에만 2천여 명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증산계  종파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 『한국 종교실태 조사보고서』 참조 

 

1. 선도교
2. 보화교 · 보천교 (차경석)
    (1)  동화교 (이상호)
            · 대법사 - 증산대도회 - 동도교중산교회 (이정립) 증산교본부
            · 난화세존 미륵증산대도회 (서원호) - 관음선원
            · 용화미륵 불교연구회 (서승영)
            · 증산대도 갱생연구회 (박상래)
            · 증산도장
    (2)  삼성교 (채경대)
            · 천인교 - 증산교객망리파 (신원목) - 증산교객망리파, 증산 객망리 강석환파 (강석환)
            · 인도교 (김종수) - 인도교
    (3) 수산교 (강용강)
            · 용강교회 - 단군성주교
            · 공노교회 (김승례) - 동도법종금강도
    (4) 보천교 구파 (구동서) - 보천교 구파
    (5) 보천교 신파 (차용남) - 보천교 신파
    (6) 선도교 (여처자)
            · 이영우파 - 모악교회
            · 무교 (김계주) - 무을교
                                    - 무을교 이동옥파 - 무을교
                                    - 미륵종 (김홍현)  - 대한불교 미륵종

    (7) 인천교 (정용은)

    (8) 미륵불교 포교소(17재승 서백일)
            · 용화교 어백일) - 대한불교 용화종
    (9)  증산교 서상근파 (서상근)
            · 최봉근파 - 증산대도일화종
    (10) 무극대도 (김환옥)
            · 보화교 - 동도교육화교회 (김재헌 · 김명환) - 보화교
                         - 진동학대도문  (김동규)  - 진동학제화교  - 제화동대도 


3. 미륵불교 (정인표)
    (1) 미륵불교 (김홍수)

    (2) 미륵불영원회 (정공일) - 미륵불교
4. 부극도 (조철제)
    (1) 무극대도교
         · 태극도 - 태극도
                      - 대순진리회(박한경)  - 대순진리회
5.  증산선생형원 (상순임)
    (1) (선불교)
         · 대한증산불교교회 - 동도교, 법종교회, 청도대형원 (김삼일)
6. 태을교 (안내성)
    (1) 증산대도교
        · 증산교안내성파 - 안문환파 - 증산교안내성파 (소장파)
                                   - 유영계파 - 증산교안내성파 (노장파)

7.  제화교  (이치복)
    (1) (태을교)
        · 삼덕교(허욱)  - (동도교 삼덕교회)  ― 삼덕교
8. 미륵교 (유동윤) - 미륵교
9. 미륵불교 (김형열) - 불교진흥회 一 미륵불교 - 대한불교 법상종
10. 순천도
    (1) 순천도 박일문파
       · 순천도 박일문파
       · 순천도 송월학파
       · 순천도 정동옥파
       · 순천도 박봉완파
       · 순천도 주대영파
       · 순천도 왕순철파
    (2) 순천도 김갑진파
    (3) 순천도 안양원파
    (4) 순천도 채계봉파
    (5) 순천도 나승열파
    (6) 순천도 정장오파
    (7) 순천도 (주종윤) - 증산진법회 - 순천도 주종윤파
    (8) 순천도 이교현파
11.  증산대도원 (유동열) - 증산대도연수원 - 증산대도원
12. 증산진법회 (배용덕) -증산사상연구원
13. 증산교인 통합운동 신생 친목회 (정혜천) - 금산사미륵불숭봉회 

 

5. 처천자를 위한 변명

 

위인(偉人)은 시대의 화근(禍根)’이라는 중국 속담처럼 통칭 차천자로 불리면서 일제하 한반도를 들끓게 했던 그는 이제 역사 속에서 잊혀진 존재가 됐지만,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로 여겨졌던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이 혁명가로 분형(梵刑)을 당하는 비극을 겪은 월곡 차경석은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격랑을 헤치며 살아온 시대의 풍운아였다. 월곡은 전봉준(全琫準)의 동지로 형장(刑場)에서 이슬로 사라진 갑오농민혁명 지도자 차치구( 車致九)의 아들로, 20대 초반 동 학사건 이후 최대 민란인 영학당(英學黨)사건에 가담한 협의로 체포 돼 총살형을 당하기 직전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생사의 고비길을 술하게 넘긴 월곡은 20대에 아버지가 관계했던 일진희(一進會)의 동학운동에 깊숙이 관여한다. 그러던 중 동학운동에 비판적이던 반전평화주의자(反戰平和主義者) 강증산(姜誤山)과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보천교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종교로 위장해 조직적으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조선의 전권을 거머쥐기 위한 전 단계로서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해 내고자 했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신정부운동(新政府運動)’으로 나타났고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인 설산 장덕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전라북도 정읍을 무대로 한 그의 포교활동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됐고, 그가 기획했던 십일전 등 보천교 본부건물의 축조계획은 무려 600여 칸이나 돼, 거대한 궁궐을 연상시키는 스케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갖은 압박과 희유책 등으로 1924년 악화된 교단의 상황을 벗어나려고 조직한 시국대동단의 활동을 잠시 방치 했다가 민중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일제로부터의 탄압이라는 고립무 원의 상태에 빠져 끝내 몰락하고 만다.

일제는 폭압적인 식민통치의 큰 걸림돌이고 위협적 존재였던 차천자를 철저하게 식민지배체제 확립에 이용하기 위해 당시 언론과 정보기관을 활용해 사교 교주라는악인으로 역사에서 매장시켰다.

 

일제강점기 통칭 차천자로 한국.중국.일본 3국을 아우르는 시국을 선포하고 수백만 명의 신도를 자랑하던 보천교는 이제 역사 속에서조차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존재가치가 미미 해졌다.

물론 일제의 회유로 시국대동단을 조직해 대동론을 내세워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에 가담한 차천자의 역사적 과오때문이겠지만, 당시 조선총독부의 지능적인 차천자 몰락시도와 더불어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인물들과 일부 반대자들에 의해 차천자와 보천교 집단은 철저하게 사교집단으로 매도당했다.

 

월곡은 독특한 점 조직 방식으로 교단을 조직, 단기간에 수백만 명의 신도를 확보, 보천교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화해 민족 정체감을 고취시켰으며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종교운동적 측면에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에서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월곡은 망국의 비통 속에 탄식하던 민중들의 독립 욕구를 수렴하여 집단적으로 표출시켰다는 점에서도 희대의 사기꾼으로만 매도하는 것은 일제(日帝)의 시각이자, 너무 일방적이라는 소희이다.

 

보천교가 당대에 몰락했고 또 후손들의 소극적인 노력으로 역사의 전면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는 비극을 겪었지만, 당시 그의 비중으로 보아 그는 역사적으로 재조명 받을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13편에서 계속 됩니다.



 
 

Comments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