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13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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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월곡 차경석의 사상과 생애

 

1. 보천교분열의 배경 / 249
2. 일제의 단계별 보천교 해체 전략 / 255
3. 월곡의 한계인가, 민족의식 부재인가? / 260
4. 보천교의 오늘 / 273
5. 차천자를 위한 변명 / 286 

에필로그 / 289
보천교약사 / 291
참고문헌 / 299

 

에필로그 / 289

 

21 세기라는 세기적 전환기에 처해 있는 우리는 비록 망국의 시대는 아니지만 국가적 비전이나 국가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또 다시구한말의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으며 일류 국가 진입도 못한 채 2류 국가로 전락할 위기를 맞고 있다.


광복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분단 상황으로 인한 독립 주권국가로서 민족 통일도 이루지 못한 채, 어찌 보면 조선 반도를 강역으로 하던 구한말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파동 등에서 보듯이 아직도 일본의 신판 대동아공영론과 식민지 망령이 활개치는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이는 우리 한민족 모두의 시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차천자의 공과(功過)를 복원시켜 이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는 ‘실패한 역사’에서도 뭔가를 배워보자는 의도 때문이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말하자면 구원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회적 전제를 받아 들인다면 신흥종교들이 민족적 사회적 위기 상황 속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민족독립운동을 종교적 실천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고,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제하 조선의 전권획득을 목표로 월곡이 중심이 돼 벌인 보천교운동은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운동으로 정치적 성격이 강한 종교운동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식민지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약속하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강렬한 메시아주의는 차경석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뒷받침됐고, 일반인들에게는 차천자가 증산의 대를 잇는 보천교 교주로 위장해 새 황제로 등극할 것으로 인식됐던 것이다.


월곡은 비록 ‘미수 천자(未遂天子)’로 그쳤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었고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천자 놀음’을 시도했던 일세의 풍운아라는 점에서 그의 역사적 공과(功過)는 재론될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 한반도를 들끓게 했던 보천교 교세를 생각할 때 오늘의 보천교와 월곡에 대한 평가는 너무 쓸쓸하다.


그를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시켜 그의 어떤 사상과 행동이 세계 역사에 유례없이 그처럼 일거에 몇 백만 명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자장(磁場)을 가졌는지 탐구해 보는 것도 어려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특히 보천교와 월곡은 일제 통치과정 특히 종교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월곡은 동학혁명의 전말 그리고 일제시대 조선 식민지 지배의 실상과 일본의 치밀한 민족종교 말살과 탄압 등을 파악하는 데 키 퍼슨(關鍵人物)으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줄 것이다.

 

 

보천교약사 / 291

 

1871 년 음력 9월 19 일 증산(1871-1909)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현재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탄생

1880년 7월 3 일(고종 17년 음력 6월 1일) 월곡, 전라도 흥덕군(興德郡) 부안면 (扶安面) 호암리(?岩里)에서 출생, 1936년 윤 3월 10 일 사망

1894년 12월 29 일 부친 차치구(1851-1894), 동학군 군단장급으로 참여. 흥덕에서 관군에게 잡혀 그 앞산에서 분살헝(焚殺刑), 월곡은 15세 소년으로 부친 시신 업어다가 대흥리에 매장

1899년 월곡, 정읍 고창 등에서 봉기한 영학계 사건에 연루 체포됐다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

1901 년 증산,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무극대도 득도. 월곡은 부친 뜻 이어받아 동학운동 종사, 일진회 가입해 전북 순회관으로 활동.

1905년 12월 월곡, 일진회가 벌이는 동학운동 가담했다 일진회가 조선 침략 앞잡이로 친일을 하자 일진회 탈퇴, 손병희 추종

1908년 5월 17일 증산교 창시자 증산 만남

1908년 11월 28일 대흥리 월곡의 집에 포정소를 정하고(大巡典經 4장 115절), 상량공사를 할 때 월곡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 오게 한 뒤 공사를 마쳤으며 (大巡典經 4장 128절),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使)가 되리라 하였음

1909년 음력 6월 2일 증산 화천(化天)

1909년 7월 그믐께 월곡과 김광찬(金光贊)이 김형렬(金亨烈)을 방문하고 장래 일을 의논하던 중 월곡이 “대성께서 당신이 곧 미륵불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화천하실 때에 금산사로 들어가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미륵전에 참배하여 당신을 대하듯이 정성을 들여 취할 길을 생각하면 반드시 당신의 감화를 받아 깨달음이 있으리라” 말하니 모두 옳게 여겨 치성물을 준비하여 금산사에 들어갔다.
이 날 늙은 한 여승이 독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환영하며 “어제밤에 금산사 여러 부처님과 오백나한
(五百羅漢)과 호위신장(護衛神將)들이 일제히 밖에 나와서 어느 거룩한 행차를 맞아 들이는데 그 행차 뒤에 그대들이 따라 오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제 여기 나와서 기다리더니 그대들의 이름을 보게 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오” 말하다.

증산 화천(化天)한 2년 후인 1911년 9월부터 종도들이 유의경(柳宜卿)이 수련하던 방법으로 포교 방법을 정하여 각처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교세가 크게 일어났다.

1911년 증산이 죽은 2년 뒤 증산의 수부 부인인 월곡의 이종누이 고판례가 이적을 보이자 증산도문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 그 뒤 3년 동안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와 서남해 대부분의 섬 일대에는 거의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이어지게 되었음

1914년 경부터 세간에서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급속도로 세가 불어나자 이들을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부름, 특히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월곡이 주도권을 잡고 활동, 주목 받기 시작

1916년 동지 이후 월곡은 실질적으로 교주가 되었으면서도 교주로서의 정식 취임절차가 없었기 문에 교주로서의 존칭 없이 주인장(主人丈)으로 불렀음.

1916년 동지에 24방주(方主)를 임명함으로서 교체(敎體)를 조직.

1917년 10월 교세 확장에 따라 일제 탄압이 가중되자 모친 회갑연 기화로 주요 간부들을 모아 외유뜻을 전하고 정향없이 집을 떠난 뒤 강원도 경상도 유력(遊歷)하며 끊임없이 포교. 집을 떠나 은피생활(隱避生活)을 하면서도 포교활동

1917년 6월 전남 무안군 신도 김경범(金京範) 아들이 일본 헌병대에 ‘아비가 월곡을 신앙하여 많은 금전과 물품을 사기당했다’ 고소하니 천원(天原)?일본 헌병대 분견소(分遣所)에서 월곡을 체포하여 열흘 동안 구속 취조하다가 확실한 증거가 없어 석방

1919년 4월 송대선(宋大善) 편에 보낸 편지에서 월곡은 ‘부천지대운(夫天地大運)은 비기인(非其人)이면 불명(不命)이요, 인간지대업(人間之大業)은 비기명(非其命)이면 불성(不成)이라  인유기인(人有其人)하고 운유기운(運有其運)하며 기지소위(其之所爲) 역유기시(亦有其時)니…' 등 주장

1919년 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 서면에서 종전의 24방주제 확대 개편하여 60방주로 조직할 것을 지시, 같은 해 10월 경남 함양군 덕기리 대모산에서 60방주 선임하는 고천제 올림.

1921년 1월의 조직 재확대에 성공, 교단 간부 55만7천7백명에 이르는호대(浩大)한 교세를 자랑, 그가 뜻하는 바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어 보였음

1921년 1월부터 8월까지 조선총독부가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국 각지에서 교인 1천여 명 체포

1921년 2월 10일 집리(執理) 김홍규(金洪奎)가 평양역에서 일본 관현에 체포되자 북방주(北方主) 김영두(金英斗)는 김홍규가 ‘졸연히 출옥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홍규가 보관하던 교금(敎金) 11만3천7백30원을 도득(道得)한 후 방주 김성두(金晟斗) 한상숙(韓相畵) 김동식(金東植) 등과 내통, 자파( 派)세력을 길러 교권을 장악하려다가 들통나 경기도 경찰부에 교금 4만 천여원을 압수당함

1921년 9월 24일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각도의 겅리와 3백60군의 포장 그리고 60방주를 합하여 1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국호왈시 교명왈보화'라는 제문 통해 보천교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이라는 나라의 황제로 등극함을 하늘에 고함.
황석산(黃石山) 대천제(大天祭)의 성공적인 고천(告天)은 월곡의 증산에 대한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음.

이날 경기 경찰국 고등과장 藤本源市는 형사과장 김태석(金泰錫)과 박경환(朴慶煥) 정기홍(鄭基洪) 노병의(盧炳熙) 이기만(李基約 등을 파견, 감시

1921년 11월 7일 차교주의 노모(老母)가 별세하니 문정삼(文正三)이 이성영(李成英)을 임실군(任實郡) 상월리(上月里) 이기양(李起陽)의 집에 있는 월곡 게 보내어  부고를 전달할 때 장례비는 만원(萬圓)으로 예산하고 출금표를 요구함

1922년 6월 사설묘지 설정 허가가 나서 7월 20일 정읍군 정읍면 고직동(庫直洞) 왕모래등(王母來嶝)에 장례를 거행할 때 장례에 참석한 신도가 10 여 만명에 달하고 장례는 왕자(王者)의 예로 행하였으므로 그 동안 저축하였던 교금(敎金)을 탕진하였음

1922년 1월 반용리(盤龍里) 김영길(金永吉)의 집에 채경대(蔡慶大) 김형식(金亨植) 이규선(李圭宣) 등 열네사람이 보천교를 떠나 새 교단 세움

1922년 1월 월곡이 임실군(任實郡) 고덕리(高德里)에 은거(隱居)하면서 방주 몇 사람에게 명하여 제사(製寫)하여 교인에게 12계명 반포, 여기에서 존상재(尊上帝)는 교조 증산대성(派山大聖)을 숭봉하는 것이라 밝힘

1922년 2월 보천교 간부 이상호는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 수십 간 집 을 사서 교단 사무소로 정하고 교단 이름은 보천교, 사무소를 진정원(眞正院)이라 일컫고, 교단 종지(宗旨)를 성명(聲明), 10여년 간의 비밀운동을 공개운동으로 전환, 이로써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敎名)이 비로소 세상에 나옴

동아일보 1922년 2월 23일자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거병(祛病) 해원(解寃)의 신조(信條), 신축(辛丑) 년에 도통(道通)한 증산(姜一淳) 자칭 옥황상제(玉皇上帝)’ 제하(題下)의 글 화제

1922년 5월 15일에 낙성한 심일전(十一殿)의 호천금궐(吳天金?)에 일월성(日月星)을 상징한 신단(神壇)을 봉안(奉安), 이를 삼광영 신단이라 일컬음

1923년 10월 20일에 보천교의 최초 활자 정기 간행물 보광(普光) 창간호 발행

  1923년 4월 조제승이 출교(黜敎)당하자 강동회(姜東會) 배익현(襄翊玄) 등과 노태현(盧台鉉) 서청죽 (徐靑竹) 이무열(李武烈) 등과 연락, 구례군(求禮郡) 간문면(良文面) 대덕산(大德山)에 금산사포교당지소(金山寺布敎堂支所) 간판을 걸고 포교를 하였음

1923년부터 월곡이 1923년과 1934년 사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 갑자(1924년의 간지가 갑자년) 등극설’  ‘천자등극설’이 신도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유포됨

1924년 정월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부사장 이득년(李得年)이 경성 진정원장이종익(李鍾益)을 방문, 시대일보가 경영난에 빠졌으니 보천교에서 출자하여 경영케하라고 권하였음.  이종익은 총령원장 이상호에게 이 일을 의논하니 이상호는 월곡에게 보고하여 승낙을 얻었음

1924년 6월 이상호(李祥濠) 등이 혁신운동을 일으켜 교주 월곡의 비행(非行)을 성토濁討)함에 따라 교단내의 반목(反目)이 심한 데다가 관(官)에서는 사찰(査察)과 위압(咸壓)이 심해질 뿐 교주 체포령은 취소될 가망이 없어 위기에 처함

1924년 12월경에 부산 국제관(國際館)에서 시국대동단의 강연이 있을 때 청년 수백명이 이를 듣다가 격분하여 연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보천교의교기(敎旗)까지 찢었고 을축(乙丑 1925)년 1월에는 부산 청년들이 경남 각 군의 청년단들을 연합하여 보천교 부산정교부를 파괴하려 하므로 정교부 에서 부산경찰서장을 만나 청년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렸는데도 2월 초 에 각 지방 청년들이 모여 시민대회를 열고 보천교 부산정교부 성토(聲討)를 결의하자 보천교에서는 정교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수백명의 교인이 농수(籠守), 경찰서에서는 안심하고 해산하라 하여 흩어져 돌아갔는데 2월 7일 오후 2시경에 청년과 시민 수만명이 몰려들어 정교부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정교부의 건물과 집기가 파괴되고 교도 40여명이 중상을 입었음

1924년부터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에 성전(聖殿) 호천금귈(吳天金?)이 세워지고 방주공실(方主公室) 50여 동(棟)건립됨

1925년에는 1만 8천근의 대종(大鐘)이 주조되고 여기에 중앙 교당으로서 십일전(十一殿) 신축을 착공하였는데 그 장업한 규모는 대궁전을 연상하게 되어 세간에서는 이 신축공사를 차천자(車天子)의 대궐 신축공사라고 했음

1925년 1월 16일 대성전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부지매립부터 난관에 부딪힘

1925년 7월 해주(亥主) 임경호가 교단을 이탈하고 8월에는 화주시(化主) 채규일(蔡奎全)이 이탈하였음

  1926년 1월에 교령(敎令)으로 수호사(修好司)에 걸었던 「남북선사무소」(南北鮮事務所) 간판을 떼고 「성전신건축사무소」 간판을 걸었음

1926년 10월 이달호는 임경호(林敬鎬) 문정삼(文正三) 채규일 등과 연락하여 경성 진정원에 증산교 간판을 걸고 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보천교 혁신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보천교 박멸을 계획함

1927년 1 월 10 일 이들은 대흥리 본소에서 곤봉과 죽창으로 만나는 교도를 난타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달호의 누이 이달영(李達榮)의 통기로 이 사실을 알고 대비하였던 수백명의 교도들이 반격을 가해 일대 혼전이 벌어졌으나 혁신파측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리어 많은 피해를 입은 채 돌아감

1928년 윤 2월 1일부터 대성전 건축공사를 속행(續行)할 때 사정방사무소(四正方事務所)를 새로 설치하고 각부(各部)를 두어 공사를 분담케 하니 수부(水部)는 토차(土卓), 기와만들기, 기와올리기, 토역(土役) 담쌓기를 맡고 화부(火部)는 목재(木材) 목역(木役) 일체를 맡고, 금부(金部)는 제지 철물 단청을 맡고 목부(木部)는 석역(石役) 수도공사를 각각 분담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사, 1929년 3월 15일 준공

1928년 정월 4일 월곡이 교도 수백명이 모인 앞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걸어놓고 음양 진퇴소장 (陰陽 進退消長)의 이치와 천지인 배합(天地人 配合)의 도(道)를 3일간 설법(說法)

1928년 정월 초 3일 치성후 월곡은 사정방주(四正方主 金木水火의 男女 方主) 말하기를 ‘수십년 동안 노력해 온 일이 허사(虛事)로 돌아갔으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하였음

1929년에 심일전(十一殿) 신축공사가 끝나자 이해 3월 15일을 택하여 준공 식과 아울러 십일전에 보천교의 신앙 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봉안식을 거행한다고 전국 각지의 교도들에게 통지하였음. 신축된 십일전 영위봉안식 거행은 차교주가 기사년인 1929년 기사월(己巳月: 4월) 기사일(己巳日: 16일)에 신축 궁전에서 등극식(登極式)을 거행한다는 ‘기사등극설’로 유포됨

1930년 1월 23일 차교주가 교단 간부들을 모아 치성때 홍배 기복(興拜起伏)을 법도있게 하기 위하여 신축한 성전의 연진원(硏眞院) 앞 광장에서 예식(禮式)을 연습시키려 할 때 정읍경찰서 고등계 순사부장 마에다 도라요시(前田寅吉)가 와서 서장의 명령으로 새로 건축한 성전의 사용은 허가가 없으니 잠시라도 사용할 수 없다고 금지하여 본소 정침전(正寢殿) 앞뜰에 서 배례식(拜禮式)을 연습함

1930 년 5월 23일 정읍경찰서 경관 22명이 정읍 대흥리 본소를 방문, 성전내외와 차교주 가묘(家廟)의 신주독(神主?) 까지 열어보고, 심지어 차교주 및 교주 형제친척의 거실에 들어가서 천장과 벽장의 벽지까지 찢어보며 교주가 교도들에게 벼슬을 준다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수색하다 그대로 돌아감

1930년 6월 12일 문정삼(文正三)은 한로주(寒露主) 이중창(李仲昌) 등의 내응을 받아 보천교 혁신단이란 이름아래 교주 토죄문(敎主 討罪文)을 인쇄하여 뿌리고 배교자(背敎者)와 부랑자 등 50 여명을 모아 자동차에 분승(分乘) 혹은 도보로 대흥리(大興里) 비룡교(飛籠橋)까지 다가오니 수호사장(修好司長) 원약제(袁若濟) 등 교도들이 폭력을 사용않고 교유지(敎有地) 통과를 극력 저지하니 출동한 일본 경찰이 오후 5 시경에 해산령(解散令)을 내려 흩어져 돌아감

1932년에 월곡은 교주의 직인을 인의유신(仁義有信) 넉자로 새기고 육임의 인의사(仁義士)로 고치고 육임 총무소를 인의사 총무소로 고치며 경북 성주(星州)의 유생(儒生) 송호눌을 비롯하여 간부들과 일반 교도들로 하여금 집지례(執贊禮)를 행하게 하였음

1933년에 부안사람 박인택(朴仁澤)이 홍순옥(洪淳玉) 등과 탈교하여 같이하는 교인들을 모아 부안군 산내면(山內面) 지서리(知西里)에 원군교(元君敎)를 세움

 1933년 3월 7일 이후 각 도에 정리(正理) 포정(布正) 선정사(宣正士)가 지방 순회하며 교인들의 신앙을지도하였는데 지방관청에서는 일종의 유사단체(類似同體)로 취급하여 순회사를 위협, 구타하고 혹은 고문, 포교를 방해하고 교기―교첩 등을 찢음

1933년 5월 21일 경북 부정리(副正里) 이달상(李達相)과 포정(布正) 김승렬(金承烈) 2인이 영덕군(盈德郡) 달산면(達山面) 대지동(大枝洞) 이기대 방(方)에서 돈신록을 검열하고 그 달 23일 돌아오는 길에 인사차로 그 군의 경찰서를 방문한 즉 불문곡직하고 단발을 안했으니 국적(國賊)이라 하고 순사 10 여인이 달려들어 삭발한 후 1 주일간 구류에 처했음

1934년 5월에 전문사(典文司)를 통하여 혁신된 교의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새 교의 강령의 뜻을 설명한 대도지남(大道指南)의 내용 공개

1947년에 월곡의 아우 차경덕(車敬德)이 보천교의 교리는 자기의 형 차월곡이 창도한 것이니 월곡을 보천교의 교조로 신봉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증산은 광인(狂人)이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언

1961년 12월에 구파측은 문교부의 한국 고유종교의 통합계획에 의거하여 동도교(東道敎)에 편입 되었으나 뒤에 신구파간의 분쟁사실을 안 문교부는 동도교 편입을 각하(却下)

1970년 음력 11월 1일(양력 11월 29일) 보천교 구동서(具洞書) 이순만(李順萬) 김진화(金鎭華) 김관선(金觀善) 김병삼(金炳三) 등은 증산교의 배동찬(裵東燦) 박기백(朴者伯) 정혜천(鄭惠天) 한인희(韓寅熙)와  법종교(法宗敎)의 이봉기(李奉基) 김노택(金魯擇) 김형길(金炯吉) 등과 함께 증산천사 진리연구준비위원회 결성 시도, 이들과 달리 다음날 음력 11 월 23일 동도교(東道敎) 연례 총회 에 참석한 홍범초가 증산신도친목회(曾瓦山信徒親睦會)로 참여하자 여기에 찬동한 교인들이 원평(院坪)에 있는 보화교(普化敎)에서의 동도교 총회 끝에 법종교에 모여 증산신도 친목회를 결성하기로 합의

증산종단 협회가 1973년 음력 3월 27일 규모가 큰 증산교단 통일회를 법종교(法宗敎)에서 창립하여 회장에 이환우를 추대할 때 보천교도 강덕중(姜德中)이 부회장에 피신

1974년 음력 3월 27일 증산교단 통일회를 해체, 1975년 음력 1월 8일 법종교에서 증산종단연합회 창립, 회장에 서병구(徐丙攻) 추대할 때 보천교 참가하여 부회장에 강덕중, 의전부장에 윤기선(尹沂善) 선임

1975년 양력 5월 25일 법종교에서 보국안민 결의대회에 보천교 참석, 1980년 음력 9월 19일 법종교에서 증산종단연합회정화대회(甑山宗團聯合會淨化大會)를 열어 법도(法度)있는 교단 건설, 국민정신을 바로 잡을 새 윤리의 확립, 주체사상의 확립 등 종교차원의 정화(淨化)를 추진할 때 보천교 참여, 1983년 음력 6월 24일 금산면(金山面) 금산국민학교 교정에서 평화통일기원식에 보천교 총령원장 강덕중(姜德中)이 연합회 부회장으로 봉도위원, 윤기선은 기원문 봉축

1985 년 11월 16일 서울 종로구 청진동 서울관광호텔에서 민족종교 상호 간의 권익과 발전을 도모하며 나라의 융성과 세계평화 건설 목적으로 하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할 때 보천교 참여, 강덕중 총령원장이자 문위원, 1986년 12월 2일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민족종교지도대회를 개최할 때 보천교에서도 강덕중, 김관선(金觀善) 참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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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친필 회고록」, 역사비평 여름호, 1989.
김  탁, 「증산교의 신관」, 한국철학종교사상사,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1990.
김  탁, 「종교적 예언은 실현될 것인가 - 증산교를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논문집,

           제3집, 1988.
김홍철, 「일제하 증산교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증산사상연구』, 제14집,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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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천자의 꿈, (부제: ‘시대일보사건과 증산교 포교전략’, 저자: 박종렬)은 저자의 동의하에 본 홈페이지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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