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9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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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시대일보』사건'과  보천교의 분열

 

1.시대일보」 인수와 후유증 / 189
2. 보천교 혁신운동 / 204
3. 반민(反民) . 부일(附日)행위의 진상 / 216
4. 시국대동단 사건 시말(始末) / 218
5. 차천자(車天子)의 죽음 / 234

 

 

1.시대일보」 인수와 후유증 / 189

 

보천교에서 추진했던 사업 가운데 세상의 이목을 가장 많이 끌었고, 숱한 후유증을 낳았던 최대 사업은 당시 3대 민간지 중 하나인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여 경영을 시도한 것이다.


천도교의 교세를 위협하는, 아니 능가하는 보천교에 대해 천도교 기관지 <개벽(開闢)>지가 연달아 보천교 비난기사를 게재하자, 월곡은 그 대응방안의 하나로 <보광>지를 창간하였고, 사사건건 극한적인 비난기사를 보도한 『동아일보』에 맞서 역시 일간지 창간을 시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의 바탕에는 신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교단의 인사와 막강한 재정이 뒷받침됐지만, 일간지 창간은 총독부의 제동으로 불가능했다. 3 · 1운동 이후 문화정책을 표방한 일제는 신문지법 에 의해서 한국인들에게 발행을 허가해 주는 일간신문이 같은 시기에 통틀어 세 종류를 넘지 않도록 했고, 잡지도 허가를 극도로 억제 했기 때문이다.


『시대일보』가 1924년 3월 31일 창간될 당시부터 지분참여 등에 관여했던 보천교는 본격적인 인수작업을 시작했다.

3 · 1 운동 이전 유일한 우리말  일간지는 『매일신보(每日新報』 에 불과했지만, 1920년 대 이후에는 친일(親日) 경제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大正實業親睦會) 의 조병갑이 허가를 받은 『조선일보』,  인촌(仁村) 김성수(全性洙)가 발행한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파 민원식(閔元植)이 허가를 받은 『시사신문(時事新聞)』 등 세 신문이 발행되었다.

이어 1922 년 주간지 <동명(東明)>, 월간지 <신생활濁生活)>, <조신지광(朝鮮之光)>, <신천지(新天地)>, <개벽(開鬪)> 등이 허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사신문』은 1921년 발행인 민원식이 피살당하자 신문발행이 중단되었고, 한국인이 발행하는 일간지가 두 종류밖에 남지 않게 되자 일제는 최남선(崔南善)과 진학문(秦學文)이 발행하는 <동명>을 주간(週刊)으로 허가해 주었다.


그리고 1923 년 6월에 이르러 이 잡지는 통권 41호를 발간한 뒤 7월에 일간지 발행허가를 얻어 잡지 발행을 중단하고, 『시대일보 』를 창간하였다. 이 때가 1924년 3월 31일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민족지로서 당당한 필진과 탄탄한 편집으로 어깨 겨루고 신선한 감각을 불어넣었던 『시대일보』는 이런 우여곡질을 거쳐 탄생했다.

당시 『시대일보』는 최남신, 진학문의 주도하에 운영 및 편집이 이루어졌다. 일찍이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운동을 위한 방편으로 인쇄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19 세의 어린 나이에 신문관(新聞館)을 창설했던 최남선은 일간지 사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 오사카(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 서울지국 기자로 출발,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논설위원과 정경부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었던 진학문도 창간에 가세하면서 『시대일보』 는 당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일제하 3대 민간지로서의 위치를 굳혀 갔다. 창간 당시 『시대일보』의 사장은 최남선, 편집국장은 진학문이었다.  이 밖에 안재홍(安在鴻)이 논설반과 정치부장을 맡았고, 염상섭(廉尙燮)이 사회부장을 맡는 등 당대의 문장가들로 화려한 진용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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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면부터 거의 전 지면을 일본인 순사의 만행을 다룬 『시대일보 』. 총독부는 이 신문을 시사에 관해 황당무계한 풍설을 유포하여 인심을 혼란, 동요케 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시대일보 1924. 9.26> 


『시대일보』는 한국인에게 참정권이 없던 식민지 체제하에서 다른 신문과 차별화된 편집을 보여 주었다. 딱딱한 정치면이 1면을 장식 하는 기존 신문과 달리 대담하게 사회면으로 첫 표지를 장식했다. 연문체(軟文體)의 사회 기사를 다루어 편집의 융통성을 보여주었고, 미국 만화 '엉석바지’와 특약을 맺어 여섯 컷 짜리 대형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 한국언론은 명실공히 민간지 3대 신문 체제에 놓여 있었고, 『시대일보』는 지면과 경영에서 조선 · 동아와 경쟁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사(言論史)는 그 동안 『시대일보』에 관심을 등한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 시론적(試論的)인 연구가 한 두 편 있었을 뿐 지나칠 정도로 소홀히 취급되어졌다.1)


광복 이후 복간된 조선 · 동아와 달리 『시대일보』는 복간되지 못했고, 따라서 사사(社史)는 커넝 단편적인 자료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시대일보』와 같이 잊혀진 언론을 재조명하는 일은 우리 언론사를 복원하는 중요한 징검다리라 할 수 있다.

『시대일보』는 민족지라 자칭하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감당하지 못했던 역할을 당시 적지 않게 수행했다. 창간 당시 윤전기 2대를 갖추고 사회면을 1면으로 장식한 『시대일보』는 창간사 ‘처음 드리는 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낫자 - 북돋자 기르자 -  그리고 길게 깊게 뿌리를 박자 - 이것밖에 우리의 살길은 또다시 없음을 뼈에 새겨 기억하자 - 동포여 부모여! 형제여! 자매여! 울자! 울자! 싸우자! 싸우자!

누가 인생은 웃음 그것 만이라 하고 안온 그것 만이라 하더냐!

낫자면 괴로워야 한다! 북돋고 기르려면 한층 더 괴로울 것임을 앞서 짐작하여야 한다.

하물며 길고 깊게 뿌리를 박으랴 함일 소냐

…‘시대일보’는 낫다. 우리의 소원대로 가진 괴로움 가진 구박 다 받고 시대일보는 나왔다. 

  그러나 이것올 어찌나 북돋우려는가. 어찌나 기르려는가 …

 

1) 시론적인 연구로는 정진석 교수의 ‘시대―중외―조선중앙일보', 『 한국언론사 연구』 (서울, 일조각, 1991, 중판)가 손꼽힐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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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 1926. 4. 29>
대상 절차 전부  중지  상태, 장례고문은 총사퇴 퇴궐, 무엄한 이왕직과 이항구 남작의 발호 등의 제목을 뽑아 6 · 10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전한 시대일보  창간호. 이  기사로  이 신문은 압수되고 말았다

 

창간 이틀 후인 192 4년 4월 2일, 친일파 박춘금(朴春琴) 등이 『동아일보』사장 송진우(宋鎭禹)와 취체역 김성수(金性洙)를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자, 지령 6호에 불과한 『시대일보』는 4월 5일자 1면에 이 사건올 대서 특필해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을 기화로 언론계와 사회 각급 단체들은 ‘언론집회탄핵압박회(言論集會彈劾壓迫會)’를 여는 등 일제와 친일파들에 대한 저항이 범 사회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2)


한편, 『시대일보』는 기존의 신문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직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장 아래 편집 · 영업 · 서무 등 3국(局)을 두었으며, 편집국(編輯局)에는 정치(政治). 경제(經濟). 사회(社會). 지방(地方). 학예(學藝). 조사(調査). 정리(整理). 공무(工務)의 7개 부(部)와  논설반(論說班)이 있었고, 영업국(營業局)은 광고(廣告) · 판매(販賣) 등 2개 부(部), 서무국(書務局)에는 경리(經理)와 서무(庶務) 2개 부(部)가 있었다.


『시대일보』창간은 한 마디로 민족지가 삼각제제(三脚體制)에 들어 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논조 또한 민족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지면과 경영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시대일보』에 대한 평가는 자못 높다. 일례로 <한국신문사>에서 최준(崔埈)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창간 1 호가 나오자 경향간 최남선 경영의 동보(同報) 인기는 자못 치열하여 발행 부수 약 2만을 내놓았으니, 당시 민간지로서는 가장 인기 높던 동아일보를 능가할 맹세(猛勢)였다.

 

… 이 때 시대일보는 일찍이 최남선이 ‘동명(東明)’에‘조선민시론(朝鮮民是論)' 등을 발표하여 신흥 사회의 진영의 강적(强敵)으로 등장하였던 그 기세로 역시 논설에 큰 중점을 두었다. 3) 

 

그러나 문제는 신문 경영에 소요되는 자본이었다. 신선한 감각과 편집 체제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민족지로서의 역량을 심분 발휘했지만 민족 자본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 당시 상황 에서 신문 발행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금을 모으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3) 최준,『한국신문사』,(서울 일조각, 1960), 229- 230쪽 참조.

 

경영진 진학문 · 최남선, 『시대일보』 경영능력 결여


『시대일보』는 신선한 감각을 가지고 독자들의 관심올 불러 일으켰으나, 최남선이나 진학문은 신문경영에 소요되는 막대한 자본을 끌어들일 만한 경영능력이 없었다.

창간 당시부터 주식회사로 발기인을 모집하고 1주에 20원 액면의 주식 20만주를 발행하여 자본금 400만원을 모집하기로 했지만 의도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고, 창간 이후부터 계속 운영자금에 압박을 받고 있었다. 결국 자금부족으로 운영에 타격이 가해지고, 그 해 7월 10일자로 정간(停刊)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최남선과 진학문은 일찍부터 신문 발행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고 편집권에 독립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줄이 닿은 곳이 바로 천도교와 천도교에 맞설 만한 교세를 자랑하던 신홍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였다.

정간되기 전부터 보천교 간부인 고용환, 이종익, 임경호 등과 친분을 맺어오던 『시대일보』 발기인이자 이사였던 서상호, 이득년은 자금 불입에 차질이 생기자, 보천교에 주식 5천주, 당시 싯가로 10만원의 출자 요청을 했다.


이들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보천교 경성(京城)진정원장이었던 이종익과 상의하고 최종적으로 보천교 고위간부였던 이상호에게 통지하였다. 이상호는 1924년 6월 월곡에게 "시대일보가 지금 자금이 부족하여 폐업할 지경에 빠졌으니 교중에서 금 2만원을 출자하여 이를 속간하면 피아(彼我) 간에 좋은 방침이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교단 안에서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시대일보』가 실패하게 된 것 을 애석하게 여기게 되었고, 차후 계속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우선 교단에서 원조 출자하여 현상 유지하리라 생각하여 의논한 끝에 2만원을 출자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을 통보받은 이상호는 서울로 다시 돌아와 매입추진올 주도하였다.


5월 30일, 양측이 서올 영흥관(永興館)에 모여 5천주를 보천교측에서 사들이고 『시대일보』의 법적 발행권과 경영권을 넘긴다는 조건 으로 최남선이 <동명>을 발행할 때 진 빚을 보천교가 갚는 외에 최남선과 진학문에게 따로 1만원을 준다는 내용의 비밀계약을 맺었다. 이어 6월 2일에는 『시대일보』의 최남선, 이득년(李得年),서상호 3인과 보천교의 이상호, 이달호, 임경호 3인이 회동하여 정식계약을 맺었다.


이 때 체결한 계약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 

  김홍규, 서상호, 문정삼, 이득년, 이상호, 이달호, 이원영 7인을 갑이라 하고,

  최남선, 진학문 2인을 을이라 하여 위 계약을 체결함.

 

  - 을이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은 시대일보 편집 및 발행인권을 갑 등에게 양도하고

    갑 등은 이를 인수함.

  - 갑 등은 위의 권리를 인수하는 동시에 을이 전년도에 경영했던 시대일보의 전신인 동명사의 0 0 를

     0 0 하라고 돈 2만원을 을에게 지불함.

  - 편집 겸 발행권 명의 이전에 대하여 을은 본 계약 체결 동시에 명의 이전 서류를 작성하고,

    본O 가 0 을 병하여 갑 등에게 제공함.

  - 갑 등은 필요한 때는 명의 이전 서류를 당국에 제출할 수 있음.

  - 을은 사고없이 을의 현재 지위를 파기하며, 또는 임의로 퇴사함은 부득함.

  - 본 계약 체결일로부터 시대일보사 경영에 대한 일체 경비는 갑 등이 부담하고 을은 타 방면의

    재단이 입사하게 할 권리가 없음을 약속함.

  - 본 계약서 2통을 작성하여 갑 을이 각 1 통씩 보관함.
 

    1924년 6월 2일

 

    갑 : 김홍규, 서상호, 문정삼, 이득년, 이상호, 이달호, 이원영

    을 : 최남선, 진학문 

4)『개벽』, 50호, '문제의 시대일보 분규의 전말과 사회여론', 1924 년 8월 1일 33 ~ 34쪽 참조. 

 

이때 계약금으로 보천교 측이 2만원을 내놓았다. 이로써 발행권, 경영권, 편집권까지 모두 보천교 측으로 넘어 오게 된 것이다. 

이 계약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최남선은 시대일보사를 주식 회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월곡의 『시대일보』 인수, 여론의 비난 블러와


그러나 발행권 매도에 대해 사내의 반발은 점점 커졌고, 사회의 공기(公器)이자 2천만 조선 민중의 대변기관을 종교기관에 넘겼다고 해서 여론도 좋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동아일보』에서 나온 신석우와 이상협이 시대일보사에 입사해서 신석우는 사장이 되고, 이상협은 편집국장이 되리라’ 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았다. 얼마 뒤에 이 둘은 소문대로 입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천교의 교세 확장에 비판적이었던 천도교측은 여론올 주도하며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당시 천도교 발행지인 <개벽>은 아래와 같이 비판하고 나셨다.

 비록 삼척동자도 다 알만하게 아주 분명히 되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판결되었다. 시대일보는 여기서무터 시대일보사의 시대일보가 아니고 보천교의 시대일보였다. 발행권 경영권 할 것 없이 대가리부터 꼬리 끝까지 홈빡 집어삼켰다.


심지어 을(乙)이란 자들의 신권(身權)까지 삼켰다. 최남선 진학문으로 보면 팔려도 더럽게 구린내 나게 팔려먹었다. 돈이란 거기에 눈이 뒤집혀 자기 몸까지 팔아먹었다 해도 가(可)하다.


그러나 보천교는 떡 함지에 물러앉듯이 의외에 횡재를 한 셈이다. 사회의 공기(公器)로 처(處)하던 얻기 어려운 귀여운 언론기관을 몇 만원 돈으로써 어렵지 않게 얻은  것이다. 5) 

 5) 『개벽』, 1924 년 8월, 통권 50 호.

 

천도교측에서는 보천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보다는 최남선과 진학문에 대한 비난을 주조로 한 논조를 폈다. 물론 보천교에 대해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비판의 바탕에는 보천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는 극단적인 입장이 전제되어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남선과 진학문은 보천교와는 별도로 돈 5천원을 출자한다는 조건으로 백관수, 조계현 등에게서 돈을 받고, 신석우를 이사에 앉혔던 것이다.

이어 최남선과 진학문은, 보천교와 했던 대로 신석우 일파와도 발행권을 약속하는 이중계약을 해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사우회(社友會)에서도 들고 일어나 이 맺은 계약을 모두 무효화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사회 유지 40여명이 모여 6월 25일 진상조사위원  5명을 선정하는 등 사태는  점점 복잡해졌다.

이러한 사실이 보천교측에 전해지자, 이상호는 계약위반이라며 최남선으로부터 받은 명의변경서류를 총독부에 내고, 발행인 명의 변경을 신청하여 7월 9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보천교측의 이성영으로 변경해 버렸다.


월곡은 저간의 사정을 보고 받고 “그렇게 말썽이 많거든 내주어 버리라”고 의견을 내놓았으나, 당시 총령원장이었던 이상호, 임경호 등은 계속 신문사업에 집착을 보였다.

새 발행인이 된 이성영은 『동아일보』에  ”『시대일보』 편집 겹 발행권은 금반(今般) 진학문씨로부터 본인에게로 명의서환(名義書換)의 인가가 된 바 종래보다 더욱 지면을 쇄신코자 하며 주식회사 성립 수속상 당분간 휴간하오니 만천하 애독자 제씨는 양존(諒存)하옵소서”라는 광고를 낸 후, 속간을 준비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론을 주도하던 『동아일보』 등은 연일 ”『시대일보』가 보천교에 넘어간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같은 해 8월 26일에는 보천교 성토위원회 명의로 ‘보천교 성토문’이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광고란에 게재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결의문 6)


1. 우리는 사회의 공기(公器)인 신문이 종문(宗門)이나 개인의 전유(專有)기관(機關)이 되는 것이 사회에 해독을 견(遣)함이 다대함을 인(忍)하고 금번 시대일보가 보천교의 수중에 귀(歸)함을 절대로 반대함.

2. 만일 보천교가 시대일보 경영을 고집할 시(時)는 대중과 차(此) 를 분리 키 위하야 전(全) 조선 각 방면과 연락하야 보천교의 행동과 시대일보 분규책임자를 성토하야 사회적으로 매장함.

3. 우(右) 성토는 보천교도가 시대일보 편집발행권을 분규의 책임자를 제(除)한 동사(同社) 사우회와 급(及) 동사(同社) 전(前) 발기인회에 무조건으로 인도하는 여부를 보아서 그 실행방침을 결정함.

 

성토회 위원 : 이헌(李憲). 신백우(申伯雨). 김종범(金鍾範). 박일병(朴一秉). 신일용(辛日鎔) 

6) 『동아일보』, 『조선일보』, 1924년 7월 16 일 

 

이럴 즈음 『시대일보』가 다시 『대동민보』로 넘어가게 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총독부가 속간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이상호로부터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월곡은 크게 노했다. 월곡은 이상호의 독단적 결정에 심한 질타를 가했으며, 보천교 간부들 사이에서도 이상호를 업중 문책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런 와중 에서 이상호와 임경호가 또 분란을 일으켰다. 당시 『시대일보』가 주인 없이 표류할 때 사우회(社友會)가 조직되었고 사우회는 경영진인 이상호에게 지분을 인정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상호는 사우회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사우회와 일정한 타협을 하자고 임경호에게 제의한 반면, 임경호는 이상호의 그런 발상을 비판했다. 경영권 등이 이미 보천교로 넘어왔는데 당연히 단독으로 경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등하는 사회적 비난 속에서 우여곡절을 거쳐 9월 1일 보천교측이 10만원, 사우회측이 15 만원을 출자하기로 타협이 이뤄져 9월 3일자로 속간됐지만 이 결정은 보천교단의 반대를 묵살한 것이었다.

‘사우 10만원, 보천교 10 만원씩 균등하게 출자하고 사원 조직 양측이 타협한다’는 원래의 계약조문은 이상호에 의해 독단적으 사우 15만원, 보천교 10만원으로 한다’고 수정되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보천교 간부회의에서 이상호는 파면되었다.7)


7) 『 개벽 』, 50호, ‘문제의 시대일보 분규의 전말과 사회여론’ 참조 

 

『 시대일보 』 인수로 보천교  내분 심각


그런 와중에 속간비 몇 만원이 더 준비됐고, 신문사 경영의 일체 권리를 이상호와 임경호가 맡게 됐다. 최남선을 비롯한 사우회 방두환(方斗煥) 등이 사무를 맡아보기로 했으나, 속간하는 데는 여전히 자금이 모자랐다. 때문에 평양의 김모, 여동진, 박일근과 자 출연의 계약을 맺고 이들올 경영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번 흔들린 경영권은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했다. 10월에 접어들어 이사 7명과 이성영 명의로 된 편집 겸 발행인을 사원 이중건(李重乾)에게로 넘기고 모든 권리도 원래의 경영자에 무조건 넘긴다는 사고(社告)가 실렸다.

이듬해 1월 2일자에는 1924년 12월 18일자로 시대일보사 이사회가 해체되고 일체의 경영권이 사원 일동으로 조직된 사원회가 임시로 맡아 운영한다고 밝혔다.


『시대일보』는 1925년 4월, 『시대일보』 주필이었던 홍명희(洪命熹)를 사장으로 영입하고, 편집국장에 한기악(韓基岳)을 앉히는 등 진용을 가다듬어 1925년 6월 30일자로 혁신호를 발행했지만, 경영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1926년 8월까지 발간한 후 발행이 중단됐다. 이어 『시대일보』를 전신으로 이상협(李相協)이 『중외일보(中外日報)』로 제호를 변경하여 그 해 9월 18일자로 총독부에 허가를 받게  돼, 『시대일보』는 회사가 해산되고 발행허가도 소실된다.


이후 『시대일보』는 『중외일보』로 바뀌고, 『중외일보』는 다시 여운형(呂運亨)이 사장으로 경영을 주도한 『조선중앙일보(朝辨中央日報) 로 그 맥이 이어진다.


보천교가 ‘『시대일보』 인수’라는 파란을 겪는 동안 내 · 외적으로 갈등 요인을 안고 있던 보천교 운동은 분열의 극에 이르렀다. 보천교 교단 안에서는 야심가 이상호에 의해 주도된 『시대일보』 인수사건에 대해 일찍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이상호는 교단을 위한 공공심(公共心) 없이 1921년 8월 일제 당국에 붙잡혀 취조받을 당시 단체 공개협상 시에는 교주 체포령과 각 방주(方主)들의 체포장을 취소하도록 주선하지 않는 등 자신의 활동영역만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또 이상호는 김홍규의 체포 구금 사건 때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 았음은 물론, 단체 자금 4만원 압수사건 때도 수수방관해 종내에는 국고로 귀속되게 했던 것을 교단에서 감지하게 된 것이다. 이어 이 상호는 경성 가회동과 창신동‘진정원’ 가옥 및 대지를 자신의 단독 명의로 이전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월곡 이후의 종통(宗統)을 꿈꾸어 오던 이상호는 월곡으로부터 방 주인을 회수 당하고 중벌에 처해지자 이를 기회로 공개적인 배교자로 돌변, 스스로를 ‘보천교 혁신인’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월곡 성토문과 보천교 혁신선언서(革新宣言書)를 인쇄하여 전국 보천교 신도들에게 발송, 교도들의 난동을 유도했다.


이에 대해 이성영은 ‘‘교직에서 파면된 뒤에 이종익, 고용환, 주익 등이 와서 자신들이 이상호 형제의 연비로 입교하여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이씨 형제들이 파면되어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으므로 혁신운동을 도모할 것을 요구하여 받아들인 것”이라는 입장을 설명하였다. 8)

이에 월곡은 ‘이상호 토죄문’을 전국 교도에게 발송하고 간부들 상경하여 이상호를 정중히 질책했다. 그러나 이상호가 유도의 고수들과 역사(力士)들을 매수해 놓은 것을 눈치 챈  간부들이 인근 파출소에 급히 고발하니 경관이 웃으며 "종교 세계에서 투쟁함은 고래(古來)로부터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며 사건을 냉각시켰다.

이후 진정원 건물대지는 이상호의 혁신파가 소유하여 점거하였으므로 보천교에서는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 형사 고소를 제기했는데 검사국에서는 조사도 하지 않고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이 이상호는 횡령한 보천교 교금을 모두 탕진하고, 일본 당국의 지인(知人)의 주선으로 동생 이성영이 ‘보광사’ 인쇄기 및 활자 등올 매각한 돈으로 이성영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한편 경성 진정원장인 이종익이 이상호와 공모한 죄로 출교 처분되자 뒤에 배교한 이달호가 이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교단의 분열상이 진행되던 중에 월곡과 결별, 증산의 적통을 이어받은 새 종파를 만들려는 야심에 가득찬 이상호 형제 들러리 역할만 하던 고판례는 1933년 11 월 6일 오성산  수양소로 은퇴하여 1935년 10월 5일 사망하였다.

 

8) 『증산교사』, 111 

 

2. 보천교 혁신운동


달도  차면 기울고…


새로운 왕국 건설의 기대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전국이 한 때 태을주 외는 소리로 가득하더니, 보천교도 내 · 외적 갈등으로 서서히 조락(馮落)의 길로 들어섰다.


첫 조짐은 내부 갈등으로 표출됐다.
보천교가 교단 내외의 분열상을 보이기 시작한 시점은 1920년대 초반이다. 1920년 이른바 ‘청송(靑松) 사건’으로 인한 교인들의 대량 검거와 1921년 1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실시된 검거 선풍은 실로 교단 내부의 입장에서 보면 큰 참상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김영두와 같은 고위간부들이 교금을 도용하고 동지를 규합해 교단 을 별립(別立)하면서 월곡의 비리를 폭로하며 대항하였다.


한 번 터진 봇물처럼 이로부터 내홍이 끊임없이 일어나 월곡과 보천교단을 배반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서 일제의 탄압과 회유는 계속 자행되어 보천교 조직은 끊임없이 분열 · 이탈해 나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천교는 더 이상 암울했던 시대를 사는 민중들에게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식민지 상황 역시 변화되었고, 따라서 운동 초기의 구시대적 발상으로는 민중의 힘을 결집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침체된 상황 속에서 난국을 타개하려는 몇 가지 사업이 시도됐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업이 전술한 것과 같이 월간지의  창간과‘『시대일보』 인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의 고위 간부들 간에 오히려 불신이 증폭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교내 신진 지식인들을 주축으로한 좌파적 성향의 간부와 구습을 버리지 못한 우파적 성향의 간부들과의 주도권 다툼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교단, 수차례 혁신운동으로  내부소모전


교단 내의 배교를 놓고 일어난 갈등은 최고간부 이상호의 ‘보천 교 혁신운동’을 정점으로 최고조에 달했으며, 이후 월곡의 심복들에 의해 수 차례에 걸쳐 혁신운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대동단조직을 통해 월곡이 친일(親日)세력으로 변질된 모습을 본 교인들은 노골적으로 교주를 배신하였고, 이전에 월곡의 수족이 되었던 중요간부들도 대부분 배교(背敎)하기 시작했다. 또 각자 나름대로 파당(派黨)올 이루어 월곡에 대항하였으므로 교세는 점차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보천교 내부의 갈등은 서서히 증폭되다가 마침내 이상호에  의해 폭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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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혁신회>
보천교 혁신회 활동과 신구 양파의 내홍이 심각함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

 
‘『시대일보』 사건’을 계기로 교단 간부직에서 해임당한 이상호 형제는 그의 동지 이종승(양주), 이종익(경성 진정원장), 주익(부장),이명섭 (진정원 사서장), 박영호(보광사 편집주임) 등과 공모하고 사회단체와 제 휴하여 보천교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혁신운동이 질정에 달한 것은 이상호가 그의 아우 이성영과 함께 1924년 8월 18일 경성 계동의 보천교 진정원에서 개최한 보천교 혁신회 발기인 대회로, 상당한 폭발력을 가진 것이었다. 이상호는 보천교 혁신회 발기인 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교조 강증산이 교를 창설한 이래로 여러 가지 파란을 겪고, 그후 차경석이 뒤를 이어 비밀리에 교를 전파하려다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다.


그러나 근일에는 교조(敎祖: 강증산)가 창설한 교리를 위반, 미신(迷信)과 사설(邪說)로 인민을 속이고 금전을 사취하여 부당히 쓰고, 시대와 배치 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어 혁신회를 조직하였다.

 

『시대일보』 인수 당시 참여했던 이종익과 같은 인물들도 혁신회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는데, 이들은 위와 같은 취지문을 월곡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이 때 정읍 보천교 본소에서는 임경호, 문정삼 등이 참여하는 고위 간부회의가 열려 대책을 숙의했다.

토의 결과는 우선 『시대일보』 편집 겹 발행권을 이성영이 다른 사람에게 명의 변경하는 것에 대한 우려였고, 그 다음은 혁신회가 사용하고 있는 가회동 170 번지 집과 창신동 693번지의 집을 이상호가 다른 사람에게 매매 또는 저당 잡힐 우려를 상정하여, 이에 대응하는 문제였다.


과거에도 교 간부가 교금을 유용하고 교단 소유의 부동산을 개인적으로 처분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해 소송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때 간부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사람을 파견해 이들에 대한 설득과 회유를 동시에 하고, 그래도 안되면 소송도 불사한다는 것 이었다.

 
핵심 부하들  사분오열,  월곡 암살 기도


보천교 본부에서는 수명의 간부들이 방사(方士) 서상근(徐相根 보천 교 기산조합장)을 데리고 상경하였는데, 혁신파측에서는 유도(柔道)에 능한 사람을 사서 이들에 대항하였다.


실제로 임경호 등이 경성 가회동의 혁신회 사무소에 찾아가 소유권을 놓고 이상호와 심한 다툼을 벌이는 등, 내분은 보천교 운동이 시작된 이래 최악의 사태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혁신운동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이상호 형제는 상당액의 교금과 보광사의 인쇄기 매각 대금을 가지고 만주로 도주하였다.

다음해인 1925년에 귀국한 이상호는 김형렬의 미륵불교(彌勒佛敎)에 종사하다가 1928년에는 보천교 간부를 지내다 탈교한 임경호와 손을 잡고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용화동에 동화교(東華敎)를 창립하였다.


이상호에 의해 주도된 혁신운동은 교단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불만을 증폭시켜 연이은 혁신운동으로 노골화되는 도화선 구실을 하였다. 1925년 9월 경성 진정원장 이달호(李達濠)가 월곡의 장남 희남을 유혹하여 주색에 탐닉한다는 논죄를 받게 되자, 이에 반감을 품은 이달호가 간부 박래필(朴來弼) · 함익록(咸益錄) 등과 암암리에 혁신운동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이달호는 이때 교주 명의로 된 금 2만4천5백원의 위조보관증서와 월곡의 진영(眞影)을 촬영하여,9 )  교인들에게 배부하여 이득을 얻으려는 계획으로 경남 거창인 김병우(金秉佑)로부터 약속금 2천원을 받은 사실까지 발각되자 경성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1926년 10 월에 임경호 · 문정삼 · 임치삼 · 이달호 · 채규일 등과 연락하여 경성 진정원에 증산교 간판을 걸고 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보천교 혁신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보천교 박멸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월곡 암살을 계획하고 1927년 1월 10일에 임경 호 · 채기두 · 임치삼 · 문정삼 · 이달호 등이 수명의 깡패를 매수한 뒤 전주 경찰부와 정읍 경찰서에 먼저 통지하고, 십여 명이 자동차 두 대에 분승, 비밀리에 보천교 본부를 급습하였다.

그러나 본부에서는 이달호의 누이 이달영의 내통으로 수백 명의 장정들이 기다렸다가 반격을 가하였기 때문에 혁신파 측에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리어 많은 해를 입은 채 돌아갔다.


1930년에는 문정삼이 한로주 이중창과 수호사(修好司) 사원(司員) 이중수(李重洙) 등의 내응(內息)을 받아 경찰을 동원하여 혁신운동올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6월 1일 문정삼은 또다시 혁신운동을 일으켜, 장정 50여명을 동원하여 본부를 습격했으나 목적올 이루지  못하자 대흥리  앞산 제검봉에서  애곡제10) 를 지낸 뒤 통곡하며 돌아갔다.

이러한 혁신운동은 보천교단의 위축을 가져왔음은 물론이고, 배교 독립으로 이어졌다.


1921년 북방주이며 경남 정리로 있던 김영두(金英斗)는 당시의 집리(執吏: 재무) 김홍규가 평양 역에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을 때, 교금 11만3천5백원을 훔쳐 방주 김성두 · 한상숙 · 김동식 등과 내통하고 자파의 세력을 기르다가, 이 사실이 들통나 교금 4만여 원을 경기도 경찰부에 압수 당했다.


김영두는 그 뒤 오히려 교주 및 60방주를 무고하여 관에 고발하고 목방주로 있던 신현철과 경성인 장궁만과 공모하여, 경성에 태을교라는 간판을 걸고 보천교인을 유인하여 월곡에게 대항하였다.

또 1923년 11월에 소한주(小寒主) 채경대(蔡京大: 채규일의 아우)가 배교하여, 증산의 본가인 고부군 객망리에 증산 사당을 건립하여 ‘삼성교(三聖敎)’라는 교단을 따로 세웠다.


그는 월곡에 불만을 품은 보천교인을 규합하였고, 앙선화사(昴宣化師)인 김언수(金彦洙) 등 다수의 교인을 이끌고 삼성교에 가담했다. 1930년에는 수호사 사원 이중성(李重盛) 부부가 모두 신통하였다고 해서 입암리 비룡촌(飛籠村) 한 귀퉁이에 신단을 설치하고, 자칭 교주라 하니 중흥선화사(中興宣化師) 최석천(崔鈴天)은 이에 미혹하여 보천교를 탈퇴하고 그를 따랐다.


이밖에 정선화사(靜宣化師) 강상백(姜祥伯)은 1 930년 11월 삼필현(三弼峴) 수련으로 도통하였다고 신설(神說)을 하다가 배교하고 고향인 제주도에 귀향하여‘ 수산교(水山敎)' 를 별립하고 교주가 되기도 하였다.

 

시국대동단  창설은  월곡의 결정적 패착


보천교 혁신운동 등 내부갈등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월곡이 난국 타개책으로 시도한 ‘시국대동단’ 창설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민심의 이반을 가져온 월곡의 결정적인 악수(惡手)가 되었다.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의부의 비판적인 시각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1925년 초부터는 언론도 보천교의 시국대동단 활동을 비판하는 기사로 공격에 가세하였다.

친일의 협의를 두고 있었던 『동아일보』는 연일 시국대동단의 활동을 비판적 기사로 장식한데 반해, 『매일신보』는 지금껏 견지해 왔던 비판적 논조와는 달리 시국대동단의 활동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매일신보』는 ‘내선융화 시국대동단(內祥融和 時局大同園)’ 이라는 제하에 그 활동을 소상히 소개하고, 극찬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시국대동단이 주최하는 강연회는 썰렁하였으며, 참석한 대다수의 조선 민중들조차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월곡의 전력까지 들춰 냈다. '도박꾼 차월곡, 아비는 동학당’ 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차라리 욕설에 가까웠다. 이 외에도 교조 강증산을‘강삿갓’이라며 원색적인 비방이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했다.

이러한 당시 언론의 보천교 비판에 대해 차경석의 아들 용남은 일제의 치밀한 언론 통제와 이간책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 언론들은 치음에는 우호적으로 보도하다가 비판적으로 됐는데 이는 일본의 교묘한 언론통제와

  이간책으로 그리 된 것이요. 당시 언론은 동학군도 비적(匪賊)이라고 했듯 일제치하니까
  살아남기 위한 보신책으로 불가피했던 측면을 인정해야겠지요. 

  박종만이라는 전북지역의 기자가 광복 된 뒤에야 ‘보천교를 왜곡, 곡필 (曲筆)했는데 왜놈 탄압으로

  그리됐다며 반성문을 쓰겠다'더니 갑자기 죽는 바람에 유야무야 됐지요.


  지방 신문이 그랬으니 서울의 동아, 조선은 총독부의 압력을 얼마나 받았는지 상상이 가요.

  그래서 당시 언론이 사교(邪敎), 미신(迷信), 일제에 대한 불령(不退)집단으로 철저하게 매도했다고

  생각해요.


  보천교를 나중에 무라야마(村山)라는 자가 유사종교로 묶어 말살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당시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언론인들도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했겠지만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요.

 

증산교 종령을 지낸 홍범초는 시국대동단의 본래 설립  목적는 “대동양(大東洋)을 한 가족과 같이 보고 같은 동양 인종간에 전쟁 참화를 피하고 서양세력의 침해를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는 있었다”고 증언했다.11)

 

동양인의 평화시대 건설,  월곡의 ‘대동건설론’ 

 

그는 또 보천교에서 많은 금전을 투입하고 정신상의 노고를 인내하면서까지 조선과 일본 사회에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 일본 정부와 협력해 장차 대대적인 사업올 경영하려 한 것은 바로 증산의 핵심사상인 대동(大同)건설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보았다.

월곡은 당시 자신의 시국관을 ‘대동건설론’으로 요약하며 다음 같이 설명했다.

 

   현금 대세가 대동이 아니면 평화할 수 없다.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올 침입하는 이때를 당하여

   동양 황인종은 상호간 대동단결로써 세력을 공고히 하지 않으면 백인종에 의해 화를 면키 어렵다.


   나는 이전무터 이러한 대세를 예측하였으므로, 임술년(1922)  1월에  교시한 12계명 중에는

   대동양 동민족(大東洋 同民族)의 단결을 가리키는 것이다. 12)

 

대동건설론은 전쟁의 참혹상에서 반전평화 논리를 펴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는 ‘해원상생’을 핵심 사상으로 제시한 스승 증산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것이자 당시 월곡이 품었던 시국 논리의 핵심이다.

따라서 ‘종족 구별 없이 상생의 대도가 행해지며, 세계는 한 집안이 되고, 인류는 동포가 될 것’이라는 월곡의 설명은 증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3)

그러나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월곡의 시국관은 시대상과 맞물려 약점을 가지고 표출되었다. 그것이  바로‘시국대동단’이다.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유사하고, 유교의 대동사상이나 불교의 세계주의보다도 오히려 우리민족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시국대동단의 취지는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식민지 정책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14)


당시 상황은 보천교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진영 대에서 독립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많은 갈등이 있었다. 보천교 내에서는 특히 ‘교(敎)’와 ‘국(國)’을 위해서 방편(方使)상 친일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고, 또 일본의 보호를 통한 교세의 보존, 그리고 국가의 존립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로 부상하였다.

보천교운동은 일정기간 일본의 보호를 거친 뒤 자연스럽게 민족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일단 친일하고, 친일을 언제 그만  둘 것이냐’가  결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15)


보천교 교세가 막강할 때는 총독부까지도 유화책을 쓰며 타협하려는 듯 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보천교운동은 국권회복을 공공연히 주장했댜 그러다가 점차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는 1923년 이후 에는 총독부 경무국의 교단 조직 파괴 공작이 부쩍 늘었다.  교단 내부에 팽배한 위기의식은 다른 때와는 달랐다.

11) 홍범초,『범증산교사』, 범증산연구원, 1988. 109
12)  위의 책, 106
13) 이정립, 『증산사상의 이해』, 인동, 1986. 38- 40쪽
14) 홍범초,『증산교 개설』, 창문각, 1982. 98쪽
15) 안후상, 위의 논문, 63쪽 보천교운동은  이처럼 친일과  항일이라는  양면이 있으며, 그 내면에는  개인적인 이익을 염두에 둔 친일과는 그 성격이 다른 교리 해석상의 문제가 강하게 내포된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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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나면  보천교도만 구조>
보천교에서 유언비어를 유포 하고 있다고 보도한 당신 신문기사.
(동아일보 1934. 5. 23)

따라서‘막연한 회생(티生)’을 진제로 하는 운동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이의가 자주 제기되기도 하였다.
자치주의나 타협주의는 이러한 때에 논의되었으며, 시국대동단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출현하였다.16)

 

사이토 총독의 보천교 방문


그러나 월곡의 과거 전력을 감안한다면  자치주의나 타협주의는 하나의 전술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시국대동단 결성과 19 26년 3월에 있었던 사이토 총독의 보천교 본소방문 및 월곡 면담은 월곡에 대한 체포령을 자연히 해제하는 효과를 가 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보천교가 친일세력이라는 인식을 세간에 부각시킴으 로써 보천교는 더 이상의 상징적인 민족 · 민중운동 세력으로서의 그 위치를 상실해 버리는 후유증을 낳았다. 비록 시국대동단의 활동은 교단 내분을 진정시키고, 조선내 일정 한 역할 또는 위상을 일제로부터 확보해 내려는 전술적 측면이 강 했지만, 민중들의 보천교에 대한 반감은 오히려 고조되었다. 강고했던 교단조직은 이때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보천교의 주장이 된‘서양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동양 황인종 상 호간 대동단결’을 외친 시국대동단의 강연은 일본의 대동아공영 논리를 찬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곧 보천교로부터 민심의 이반 을 가속화시켰다.

이때부터 보천교 운동은 민족 · 민중 운동세력으로서 그 상징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고, 월곡의 카리스마적인 권위도 급전직하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월곡에게 수년간 따라 다녔던 체포령이 해제된 반면, ‘보천교 박멸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기대됐던 보천교의 조선내 일정한 역할분담론은 사라졌고,‘유사 종교’라는 매도 속에 탄압은 가중되었다. 시국대동단과 관련, 차경석의 아들 용남은 이렇게 증언한다.

사이토가 총독으로 와서 채규일 · 채경대 · 이달호 문정삼 · 임경호 등 간부들을 모두 매수하거나 협박해서 친일파로 만든 뒤, 배후에서 교묘한 이간책(離間策)과 술수를 부려, 보천교를 분열시켰다. 친일단체 외에는 설립을 막고 우리 국민들을 괴롭혀 만주로 이민 보내려는 정책도 폈다. 

 

왜놈들은 사관학교서도 중국지도만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등 중국을 병탄하려는 야심으로 우리 국민을 중국 만주로 내쫓은 것이다. 일본은 지진도 나고 살기가 마땅치 않으니 일본 수도를 서울로 옮겨
자기들이 한반도에서 살고 조선인을 이주시켜 중국을 다 차지하려는 과대망상 부린 것이다.


그래서 보천교에서는 시국대동단이라는 간판을 걸고 한국 유지 30명 보천교 간부 3명을 일본 중의원에 보내 ‘일본이 앞으로 반드시 중국을 침략할 모양인데 그러면 동양 3국이 다 망해 죽게 된다. 차라리 일본국과 한국이 단결해 공동으로 서양 세력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취지는 다 없어지고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인 ‘대동아 공영권’ 논리에 보천교가 협조하는 친일세력인 것처럼 총독부의 사주(使嗾)와  압력을 받던  언론이  부화뇌동(附和雷同) 해 보도하는  바람에 결국 망했다.


아버님의 생각은 보천교가 중심이 돼 아시아 3국 모두 서구세력을 막아야 살수 있다는 원대한 세계전략에 따른 구국(救國)의 계획이었다.
서구가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은 그 어른의 생각이 결국 맞았다고 생각한다. 

 
보천교는 1922 년 이후 교단을 공개했고, 그 이후 공개적인 활동이 속속 일제에 탐지되고, 회유책을 펄 기회를 제공해 보천교의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돌이 보면 보천교의 지하운동을 경계, 일제가 시도한 교단 공개를 통 회유책이 성공한 셈이다.

특히 일제는 한반도는 자신들이 점령해 거주하기 위해 조선 전 각지에 일본인이 이주해 살도록 주선했으며, 조선인들은 만주로 이주해 살도록 하는 계략을 꾸몄음이 드러나고 있다. 

 

 

 10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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