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을 통한 ‘문제 해결력’과 ‘창의력’의 신장
‘인문학(人文學)’이란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아는 일이다.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네 자신이 인정하라’는 뜻이다. 위대한 지식은 자신을 아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한마디로 줄이면 인문학이란 ‘정체성(正體性)’을 파악하는 일’이다. 확대하면 ‘우리는 누구인가’를 아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와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이 화두(話頭)를 붙잡고 걸어가는 ‘자기성찰의 과정’이자 ‘비판적인 학습’이 바로 인문학이다.
글자구조로 본다면 인문학에서 ‘문(文)’은 원래 사람이 죽었을 때 악령을 쫒기 위해 사람의 심장 부근에 그린 무늬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것이 후대에 ‘글월 문’으로 정착된 것이다. 결국 인문학이란 사람이 그린 무늬(자취)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답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1+2+3+4도 10이고, 5+5도 10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歷史)가 아니’라고 한다. 기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후손들에게 우리 역사를 물려 주어야할 책무가 있음을 또한 깨우쳐주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역사란 무엇인가. 문자가 없거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역사일 수밖에 없었다. 또 역사는 역사가의 선택에 의해서 기록된 것에 불과하고, 기록된 역사도 전체의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관찬서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역사가 부정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99%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 가운데 구전과 야사로 전해진다는 말이 된다. 구전과 야사가 중요하게 다루어져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특히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암울했던 시기와 신분상 위험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록들은 모두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것이 특히 그렇다. 혁명이 실패한 뒤 전씨 일가들은 살던 마을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족보는 벽장이나 대들보 위에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촌로들의 전언을 역사연구에 인용하고 안하고는 오로지 연구자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일 뿐 구전과 야사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 역사가들은 말한다. ‘사소한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사소한 것’과 ‘일상적인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식(日食)과 월식(月食)을 조선시대에 기록했다면 역사가 되지만 오늘날 기록한다면 역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일식과 월식이 왜 일어나는지, 언제 일어나는지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소한 것과 사소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소한 것이 큰 사건을 만들고 사소한 것에 의해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따라서 일상적인 것도 기록해야 하며, 연구해야 한다는 학문의 대상이 바로 일상사다. 영어로 표기하면 ‘Everyday-life History’이다. 일상적인 것도 기록하지 않으면 일정한 세월이 흐르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난중일기>나 <안네의 일기>와 같은 ‘개인 일기’나 ‘가족사’는 역사가 될 수 없는가, 될 수 있다. 2013년 전남 강진에 사는 한 농부(김오동)가 무려 37년 동안 쓴 개인 일기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였다. 그는 생활고 때문에 초등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기를 통해 하루를 되새기고 한글공부도 겸했다 한다. 이 일기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고, 당시 물가나 벼 수매 가격, 경조사 때 낸 돈의 액수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와 함께 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강진일보」, 2013년 6월 4일자.). 개인이 쓴 이와 같은 일기류가 역사가 된다면 사소한 것과 사소하지 않은 것의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는 한 개인이 쓴 일기도 사료로써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출신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열 살부터 예순 세 살 때까지 무려 53년간 쓴 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도 사망 이틀 전까지 쓴 일기였다. 그는 기하학, 역사학, 지리학, 경제학, 음악, 자연과학, 천문학, 서양과학에까지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시대 개인이 남긴 기록으로는 가장 방대한 기록으로 백과사전처럼 망라되어 있다.(이재연구소장 전북대학교 한문종 교수). 황윤석은 장흥의 위백규(1727~1798), 순창의 신경준(1712~1781)과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꼽힌다.
□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부와 부안 등지에서 활동했던 기행현(奇幸鉉, 1843-?)이 1866년부터 1911년까지 45년간 기록한 『홍재일기(鴻齊日記)』는 동학농민혁명을 전후로 한 부안과 고부지역 사람들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관군과 민보군이 교류한 내용까지도 기록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사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소장자 : 정읍 솔티도예공방 도예가, 후손 기곤奇昆).
□ 전북 진안군 주천면에 살던 이상래는 사립 진안 화동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전주농업학교에 진학한 1916년 5월부터 8월까지 일기를 썼다. 주로 학교생활과 휴일이면 친구들과 전주 시내를 구경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로써 100년 전 스무 살 청년의 눈에 비친 당시 전주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시에서는 2019년 이 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 민중의 삶이 역사가 되고 있다. 2003년 영남대학교 민중생활사연구단에서는 노동자 농민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일상생활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민중생활사 구축작업에 기존 역사가 생각하지도 못한 역사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1996년 전남 장성군 환교리에 냉장고 문을 제작하는 중소기업이 들어와 2-3개 성씨만 살던 작은 마을이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돼지가 집단폐사하면서 공장을 보는 태도를 둘러싼 주민들 사이에 불화가 그치지 않고, 마을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동제각까지 공장 터에 포함되어 없어졌다. 덩달아 주민들 사이에 의사소통과 정체감도 상실된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자신들의 생활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방법은 없는지 묻는다.
□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바른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 ‘정사(正史)’라면 정사의 반대되는 말은 가짜역사를 의미하는 ‘위사(僞史)’일 것이다. 그렇다면 야사(野史)는 관찬서적에 기록되지 못한 역사일 뿐 위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만들어진 역사가 위사라면 오히려 기록되지 않은 민간구전과 개인이 사사로이 쓴 야사가 역사의 진실을 더 담고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최근 사이비종교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종교(宗敎)’란 과연 무엇이며, ‘사이비종교(似而非宗敎)’란 무엇을 말하는가. 사이비종교란 종교인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종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하면 진짜를 위장한 ‘가짜종교’다. 도올 선생이 말했다. “모든 종교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고. “종교를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위대성을 위해 종교가 인간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그 말의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서양에서 말하는 그런 종교를 종교라고 하지 않았다. 수운(水雲)은 자신이 만든 종교를 동학이라 하지 않고,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동학(東學)은 종교인가, 종교로 볼 수 없는가. 왜 수운을 따르는 교도들은 ‘동학을 믿는다.’ 하지 않고, ‘동학을 한다.’고 했는가. 동학은 종교가 아닌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극대도’다.
□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에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 1894년인가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맹자(孟子)가 말했다. “500년 주기로 왕조가 흥망한다.”고. 이는 역사의 주기성을 말한 것이다. 맹자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순환사관’을 주장하였다. 역사는 일정한 주기로 왕도(王道)에 의한 ‘치’와 패도(覇道)에 의한 ‘란’이 반복된다는 것이 순환사관이다. 어지러우면 다스려지고 난세가 극에 달하면 치세가 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동학에 대거 입도하는 시기가 1892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조선왕조 건국 50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수운은 하원갑(下元甲)이 지나면 상원갑(上元甲) 호시절(好時節)에 만고에도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이 세상에 날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동학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갑’자가 들어가는 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 전봉준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과 함께 1895년 3월 30일 새벽 2시에 처형되었다. 왜 하필 새벽 2시인가. 4월 1일부터 시행되는 근대 사법제도에서는 모든 민·형사 사건에 2심 재판과 소송을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군 지도자들도 이틀만 지나면 이 법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역사학자 이이화).
□ 역사학자 문일평은 ‘기축옥사(己丑獄死)’인 이른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국가와 민생을 위해 일어선 진정한 의미의 반역자일수록 그를 통해 사회의 병폐와 결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반역자들을 연구하면 그 시대와 사회를 잘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그대로 한국사 창조의 일대 동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요체(要諦)를 적시(摘示)한 것으로 나는 본다.
□ 제주도에 ‘빌레못 동굴’이 있다. 제주도의 못 이름 중에 아주 흔한 것이 ‘빌레못’이다. 한때 구석기 유적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곳이다. ‘빌레’는 ‘너럭바위’라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이다. ‘빌레못’은 ‘바위못’의 뜻이 된다.
□ 단군 건국 이야기에 ‘마늘’이 등장한다. 마늘의 어원은 무엇일까. 황필수(黃泌秀)의 『명물기략(名物紀略)』(1870년 경)에 맛이 몹시 매워(辣-랄) 세간에서 ‘맹랄(猛辣)’이라 했던 것이 마랄-마늘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언고략(東言考略)』에서는 ‘산(蒜)’을 마늘이라 함은 ‘마랄(馬辣)’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람 되려면 마늘을 많이 먹어야 한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고초(苦楚)가 따르기 때문이다.
□ 중국 의서에서는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공복을 채울 때는 ‘식(食)’이라 하고, 병을 다스릴 때는 ‘약(藥)’이라 하였다. 중국 당대(唐代)에 이미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마늘은 독초를 먹고 중독이 되었거나 고기나 벌레, 물고기의 독도 마늘로 푼다고 되어 있다. 마늘을 먹고 곰이 되었다는 것은 마늘이 식품인 동시에 약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육지에서 ‘곶’은 대개 물가로 육지가 불쑥 튀어나간 곳을 가리키지만 제주도에서 ‘곶(串)’은 대개 ‘숲이 있는 곳’을 뜻한다. ‘곶’은 대개 ‘콧’이나 ‘코지’로 옮겨 갔다. 북제주군 조천읍 심촌리의 ‘돌코지’, 남제주군 남원읍 태흥리의 ‘올랭이코지’ 등이 그것이다.(한글학자 배우리).
□ 공자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교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2008년 8월 8일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죽간을 든 3천 명의 인물이 등장하였다. 이는 공자의 제자가 3천이었다는 것을 표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백제의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가 3천이었다. 조선조 마지막 성리학자인 간재 전우(田愚)의 제자 또한 3천이었다. 3천이라는 숫자는 요즘의 대학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숫자이다. 이쯤 되면 왜 하필 ‘3천’이고, 과연 ‘천’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문제해결력’과 ‘창의력’이 생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따르는 제자가 3천이었고, 보천교를 창시한 차월곡(車月谷)에게 집지(執贄)의 예를 행한 사람도 3천이었다. 집지는 스승을 처음 뵐 때 예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한다. 환웅이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에 내려온 것도 그 무리 3천과 함께였다.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呂不韋, <여씨춘추> 저자)가 불러들인 식객의 수 또한 3천이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향리에 은거하면서 왜 하필 3천 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두문불출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고 했겠는가. 이는 모두 ‘3수 분화’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3천은 많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김재영).
□ 불국사 강당으로 이용하고 있는 건물을 왜 ‘무설전(無說殿)’이라 하는가. 석가는 열반하면서 “내 일찍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8만 4천의 법문을 남기고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교의 심오한 진리가 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 것이다. 석가의 십대제자 중 한사람인 마하가섭과 염화시중의 미소를 통한 불교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표현한 말이다. 이것이 역설(逆說)이다.
□ 덧붙여 왜 하필 8만 4천이고, 108번뇌인가. 이는 인도에서 ‘8진법’을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8의 배수는 많은 것을 뜻한다. 반면에 유태인들은 ‘7’이라는 숫자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한 주일의 일곱 번째 날이 안식일(安息日)이고, 일곱 번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고, 땅을 쉬게 하였다. 7년이 일곱 번 돌아오는 해인 마흔아홉 번째 해에는 밭을 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빌려 준 돈도 탕감해 준다고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다. 숫자에 이런 비밀이 있다.
□ 도선국사가 왕건의 아버지인 용건(龍建)에게 36칸의 집을 지으라 한 뒤에 왕건이 태어났다. 고려는 왕건이 세운 나라지만 궁예는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정하였다. 여기서 물 ‘수(水)’는 숫자로 ‘6’을 상징한다. 그래서 6-6에 36이다. 왜 ‘36계’ 줄행랑인가, 왜 하루에도 마음이 ‘12번’ 변하고, 호랑이가 12번 물어갈 놈이라고 하는가. 그 바탕에 숫자 ‘3’과 ‘6’이 있다.
□ 왜 환한 대낮에 결혼식을 하는데도 화촉(華燭)을 밝히는가. 이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婿屋制]의 유풍으로 고대사회에서 밤에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혼식은 왜 밤에 했는가. 농경사회에서 낮에 농사짓고 밤에 결혼식을 했기 때문이다. 결혼의 ‘혼(婚)’자도 계집 녀(女)와 저물 혼(昏)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더 풀어쓰면 여자(女)가 씨(氏)를 받는 날(日)이다.
□ 왜 결혼식에 신랑은 벼슬이 없으면서도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하고, 신부는 혼례복에 왕비임을 나타내는 봉황(鳳凰) 무늬를 그려 넣을 수 있었을까. 벼슬하지 못한 일반인에게도 이날만은 관복과 봉황무늬 사용을 조정에서 허용했기 때문이다.
□ 김포(金浦)와 김해(金海)는 ‘쇠 금(金)’자를 쓰고 ‘김’으로 읽는다. 왜 ‘금’으로 읽지 않고 ‘김’으로 읽어야 하는가. 통상 강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김’으로 읽고, 강의 북쪽에 해당하는 지역은 ‘금’으로 읽기 때문이다. 김포는 한강의 남쪽이고, 김해는 낙동강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 윷[柶]놀이를 한자로 ‘척사(擲柶)’라고 한다. ‘척(擲)’은 던지는 것을, ‘사(柶)’는 윷을 뜻한다.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윷놀이에서 왜 ‘모’가 가장 강력한가. 고대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게 ‘말’이었다. 윷놀이에서 ‘모’는 ‘말’이 변한 것이다. 말은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치는 공물이기도 했고, 귀한 물건을 살 때 치르는 대가(代價)로도 쓰였다. 중국인들은 ‘비단’과 ‘말’을 바꾸기도 했다. 때문에 말을 세는 단위(匹)가 비단을 세는 단위(疋)와 같은 ‘필’이 된 것이다. 윷을 뜻하는 한자 ‘사(柶)’는 말 그대로 네 개를 뜻한다.
□ 윷놀이의 도-개-걸-윷-모에서 도는 돼지를 뜻하는 말 ‘돝’에서 ‘ㅌ’이 탈락한 것이다. 마산 앞바다의 섬이 돼지섬인 ‘돝섬’이다. 종돈을 ‘씨돝’이라 하고, 일부지역에서는 돼지고기를 ‘돝고기’로 부르기도 한다. ‘걸’은 양을 뜻하기도 하지만 크다는 뜻이 있다. 윷놀이는 왕을 중심으로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의 정치조직을 가지고 있었던 부여의 사출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유목민족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양이 없는 것이 의문이다. 사출도를 통해서 당시 사회가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 목축을 겸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띠 가운데 유독 원숭이띠만 ‘잔나비띠’라고 한다. 왜 그럴까. ‘잔나비’는 과연 무슨 뜻일까. 우리나라에서 ‘원숭이’라는 단어는 18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납’으로 쓰여 있다. ‘납’이 ‘나비’로 연음이 되고, 여기에 동작이 날쌔고 빠르다는 뜻의 ‘재다’가 붙어 ‘잔나비’로 바뀐 것이다(이찬욱). 빠른 걸음을 ‘잰 걸음’, 빠른 동작을 ‘재빠르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동물이다. 원숭이는 일반적으로 어린이 3~4세 수준의 지능을 가졌으며 6~7개의 단어를 외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재주가 많고 영리해서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부부간의 정이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사람 못지않은 동물이다. 이와 같이 원숭이는 꾀가 많고 재주가 있으며, 흉내 잘 내는 장난꾸러기나 모성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오죽하면 새끼 한 마리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백리쯤 떠난 배를 쫒아가 배에 올랐으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졌다는 ‘단장(斷腸)의 고사’가 원숭이로부터 비롯되었겠는가.
□ 하지만 설화에서는 원숭이의 재주나 잔꾀의 과신(過信)을 경계하는 내용이 많고 너무 사람을 닮은 모습, 간사스러운 흉내 때문에 ‘재수 없는 동물’로 기피하기도 한다. 띠를 말할 때 원숭이띠라 하지 않고 ‘잔나비띠’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속설 때문이다.
□ 관상에서는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 천재가 많다. 도올 김용옥이 그렇고 명리학자(命理學者) 박재현이 그렇다. 일본에는 원숭이형 천재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있다.(동양학자 조용헌). 안동의 선비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본 뒤 꼭 ‘원숭이 같다’고 평하였다. 히데요시는 평지돌출한 인물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말을 끌던 미천한 마부 출신에서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은 물론 중국까지 삼켜버리려고 했던 걸물이다.
□ 그렇다고 관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주(四柱)가 좋다 해도 관상(觀相)이 좋은 것만 못하고, 관상이 좋다 해도 신상(身相)이 좋은 것만 못하다. 신상이 좋다 해도 심상(心相)이 좋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얼굴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 한자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는 다중(여러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 ‘동녘 동(東)’은 말 그대로 나무(木)에 해(日)가 걸려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동’은 동쪽을 뜻하는 ‘동녘 동’이라는 뜻밖에 없는 것인가. ‘동(東)’은 족속과 무리라는 뜻도 있다. ‘동이족(東夷族)’이란 같은 족속들과 다른 무리들이 합쳐진 종족이라는 뜻이다.
□ 유명한 재야사학자 농초(聾樵) 박문기(朴文基) 선생의 ‘백학농원’이 왜 정읍 ‘삼성산(三聖山)’ 아래에 있는가. 정읍은 풍수상 배가 떠다니는 ‘행주형(行舟形)’이고, 그 뱃머리가 삼성산이기 때문이다. 신과 같은 성인이 셋이 나온다는 삼성산은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영역이다. 여기에 국책 연구단지가 조성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김재영).
□ 백인은 왜 장례복장이 검은색이고, 흑인은 흰색인가. 고대사회에서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죽은 백인이 어쩌다 다시 살아나 보니 온통 사람들이 검은 복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가 살던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무덤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에서였다. 흑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초상집에 갈 때 모두 흰옷을 입었다. 검정은 죽음을 상징하지만, 흰색은 시작과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장소에 가서 시작과 탄생을 기원한 것이다.
□ 일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조선에서 무려 2만여 명의 귀와 코를 베어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전쟁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베어 온 코를 모아 ‘코무덤’을 만들었다. 이것이 ‘비총(鼻塚)’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전라도에서는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과 ‘애비’라는 말이 생겨났다. 애비는 원래 귀와 코를 의미하는 ‘이비(耳鼻)’가 전음된 말이다. 이 말이 지금도 아이들이 위험한 물건을 만지면 겁을 주기 위해 쓰이고 있다.(고윤정).
□ 이와 같은 말이 유행하게 된 배경은 1597년 8월 21일에서 10월 9일 사이에 왜군들에 의해 자행된 전라도의 ‘코베기’ 만행에 있다. 이 기간 동안 총 24,394명의 코가 잘렸다. 당시 종군 의료인으로 왔던 경염(慶念)이 남긴 『조선 일일기』의 길천가문서에 전라도내 영광, 남원지방에서 9월 1일부터 10월 9일 사이에 19,350명의 코를 잘라갔으며, 같은 자료의 과도가문서에는 금구, 김제, 부안 등지에서 8월 21일부터 10월 1일 사이에 5,044명의 코를 잘라갔다고 되어 있다.(전주문화원장 나종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