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천교는 1909년 월곡(月各)
차경석(車京石)이 창시한 구한말의
신종교라 할 수 있다. 강일순(姜一淳), 일명 강증산을 근원으로 형성된 증산교계의
여타 종단 가운데서도 규모와 교세가 제일 컸으며, 일제강점기에서도 사회 각계각층의
모든 분야에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종교로서
근대 우리나라의 신종교를 연구하는데 있어 결코 간과할 보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사이비 종교로 치부되어 극도의 탄압을 받았는데 그 원인으로는 교리에 나타난 민족주의적 사상과 자주독립을 표방하는 항일운동 관련 행동 때문이었다. 식민지 백성의 마음 둘 곳 없는 설움을 위로하는 한편,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면서 대중을 껴안은 보천교는 그 순수성으로 조직과 세력이 급격하게 불어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대규모의 종교 집단을 식민 통치에 유리하도록 적극 활용하고자 끊임없이 교주 차경석을 탄압 및 회유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시국대동단(時國大同團)의 조직 권고와 박해, 영위 봉안식의 거부, 계유년(1933) 박해 등과 같은 사례가 있다.
보천교가 내포한 구도와 교리, 정신은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보천교는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서도 민족해방 운동가들과의 협력을 은밀하게 수행하는 동시에 언론·출판사업, 자급자족운동, 대중문화운동, 교육사업, 기산조합(己盧組合) 활동 등, 직·간접적인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보천교 운동의 최종 목표는 새로운 세상 만들기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야만 했다.
보천교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자금 지원에 대한 내용은 다행스럽게도 국가기록원을 비롯한 각종 기관에서 제시하는 수많은 근거자료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보천교가 사이비종교라는 일반의 인식과 달리, 1925년 ‘시국대동단’이 결성되기 이전까지는 사실상 임시정부의 독립 관련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당시 총독부와 결탁한 언론과 일부 친일 사회지도층에 의해 왜곡 및 거짓 정보에 농락당한 나머지 보천교에 대한 세간과 대중의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대상으로 남아있다.
거기에는 전술한 것처럼 총독부와 결탁한 언론과 일부 친일 사회지도층이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측면을 간과하고 도외시한 영향이 크다. 이와 같은 인식은 바로 일제가 의도한 것이었다. 차월곡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종교의 형태를 이용하여 비밀리에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지원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보천교가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 〈표 1〉과 같다. <표1> 보천교의 민족운동과 관련된 사건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살펴볼 때 보천교는 적어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민족운동 진영에 주류세력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며 실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천교의 민족운동 중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임규가 보천교로부터 5만원을 얻어내 나용균에게 전달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천교의 민족운동에 대한 관심은 1921년 전주에서 발견된 11만원의 군자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전주에서 발견된 돈을 보천교에서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군자금으로 파악했다.
이것이 만일 임시정부에 제대로 전달이 되었다면, 임시정부의 어려운 재정 형편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또한 보천교에서는 1922년 고려공산당에서 세계약소민족 회의에 참가하고자 김규식과 여운형, 나용균, 장덕진 등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는데 이때 보천교에서는 필요한 경비 및 기타 자금 1만원을 최팔용과 장덕수에게 지원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보천교에서 김좌진에게 2만원의 군자금을 제공하여 무장대(武裝隊)의 편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었던 김좌진은 1924년 자금 부족으로 부하들을 해산하여 활동 불능 상태에 있었으나 보천교의 교주인 차월곡으로부터 2만원의 군자금을 지원 받아 다시 무장투쟁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 같은 사실을 탐지하고 기밀문서로써 이를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바,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를 군자금 출처의 배경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깊은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1924년 3월 26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온 사람이 보천교에 군자금을 모집하러 왔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에 대한 차월곡의 의지는 보천교 수호사장(외교업무 담당)을 지내다 상해로 망명했던 조만식이 1925년 요인 암살과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보천교 본소에 잠입했던 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하 송진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장을 지냈던 민세 안재홍, 그리고 몽양 여운형도 모두 보천교에서 비밀리에 군자금을 지원받은 것으로 그 후손들은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군자금 지원은 그 성격상 차윌곡의 승인 없이는 절대로 결정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중구제와 주권 회복을 위한 독립의 열망과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천교의 민족운동사적인 측면을 정리하면, 보천교는 혹세무민하는 유사종교 내지는 사이비 종교 집단이 아닌 국권회복운동 전개와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민중과 독립을 위한 다양한 방면에서의 여러 활동만큼이나 일제 강점 하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의 움직임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변명의 여지를 주자면 그물망 같은 일제의 감시 속에서 눈치보기식의 수동적이고 표피적인 친일은 교단의 존속을 위한 최소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파헤쳐 보면 단기간에 조선민중의 약 3분의 일을 신도로 거느리며 성장한 보천교의 막강한 교세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 정부가 탄압과 회유라는 이중정책을 적극 활용, 대중이 부정적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도록 언론을 선동하여 보천교를 사이비 종교로 매도하는 치밀한 공작을 전개했음을 간파할 수가 있다.
다양한 옵션을 행사하는 전방위적인 압박에 의해 한계상황에 내몰린 보천교는 마침내 독립운동을 더 이상 지원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차월곡이 56세의 나이로 1936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조선총독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보천교의 해산을 명령하고 재산을 압류, 약탈하는 폭거를 자행한다. 그것은 보천교의 중흥과 부활을 사전에 막기 위한 예정된 조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제2의 차월곡, 제 3의 차월곡과 같은 존재의 출현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유사종교로 매도당한 보천교에 대해서 올바른 평가와 함께 보천교의 각종 사회 활동에 관한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보천교를 단순 사이비 종교로 매도하는 것은 1925년 친일단체인 ‘시국대동단’ 결성 이전의 보천교 활동을 배제한 채 일제가 주입한 왜곡과 편견을 답습하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제의 치밀한 탄압과 함께 시작된 시국대동단 결성 이전의 보천교의 독자적인 민족운동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 편향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이고 면밀하게 검토할 때 비로소 실체에 다가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국대동단 구성 이후에도 여러 자료를 통해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한 사실들이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증빙되는 현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지금의 우리에게는 일제 강점기의 독자적인 자생종교 가운데 보천교와 같이 이미 교세가 기울었거나 유사종교로 왜곡되어 낙인찍힌 제 종교들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는 편견 없는 자세가 필요하다. 보천교의 민족 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독립운동자금 지원은 이미 규명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재평가를 받아 마땅한데도 이에 대한 주류 언론과 학계의 관심은 여전히 무관심 내지는 소원한 편이다. ‘진실’에 대한 이와 같은 외면은 결국 현재진행형으로 파국을 향해 치닫는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고자 오늘도 동분서주 하는 우리들의 정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인 동시에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1922년 이후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임시정부에게 자금을 지원한 점, 청산리 전투의 영웅인 김좌진에게 군자금을 조달한 점, 고려공산당에서 세계약소민족회의에 참가하고자 김규식과 여운형, 나용균, 장덕진 등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을 때 거액의 관련 경비를 지원한 점 그리고 정의부에 20만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자 했다는 점 등은 폭압의 시대에서 감히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독립운동의 커다란 족적이었기에 오늘날 역사는 그 ‘진실’을 높이 평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