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8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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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한 . 중 . 일' 천자(天子)를 꿈꾸다

 

1. 월곡의 야망과 ‘천자등극설’ / 151
2. ‘왕자(王者)의 예’로 치른 모친 장례식 / 164
3. ‘초호화 궁궐’ 대성전 신축 / 168
4. 보천교 추진사업 - 계몽·기업 ·문화·출판/ 176
 


 

3. '초호화 궁궐' 대성전 신축 

 

1925년 1월 16일, 월곡은 마침내 정읍에 궁궐 같은 대성전(大聖殿)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사의 첫 단계인 부지매립 공사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건물을 지을 부지를 고르게 하고 파인 곳을 매립할 목적으로 흙을 운반할 토차궤도(土卓軌道)를 부설하고자 교단에서는 도로사용 허가원을 정읍경찰서에 제출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 없이 계속 허가가 지연되었고, 이어 채석용(採石用) 화약 사용허가원과 토목공장 설치허가원 및 장대목(長大木) 운반을 위한 도로사용 허가원도 제출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 허가해 주지 않았다.


이러한 절차상의 허가 연기는 월곡과 보천교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일제의 방해공작이었으며, 월곡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 련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고 말았다. 더욱이 일제 당국의 공사 방해 로 수백명의 인부들이 일손을 놓게 되어 교금이 계속 낭비되었다. 또 총독부는 각 지방 관청에서 대흥리 본소에 납입하는 성금을 압수하여 교도들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했고, 재산가들을 협박하여 보 천교에 돈의 차용을 금지하도록 압박하였다. 16)


그러나 교단 본부에서는 관(官 )의 양해를 구하고 전국에 있는 교도들에게 현성(獻誠)을 독려하는 등 대성전 건축에 적극성을 띠었다. 월곡은 대성전 신축 전 상징적 조치로 같은 해 3월 15일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들이 수집한 놋그릇과 숟가락을 녹여 무게 1 만8천 근의 대종을 만들었다. 이 종은 직경이 8척(尺), 높이가 12 (尺)의 거대한 규모였기 때문에 큰 역사(役事)를 빌이는 교단의 입장에서는 공사 진행과 교단의 민심 수습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단에서는 이 대종(大鐘)을 동정각(動靜閣)에 걸어 놓고, 아침 · 점심 · 저녁 세 차례씩 각기 72번을 치게 하였다. 17)  일제의 갖은 박해와 공사 방해가 공사의 진척을 막는데다가 연이은 교단 간부의 배교(背敎) 분립(分立)은 대성전의 건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갑자년인 1924년 간주(艮主) 한효식(韓孝植)의 기록(포교 16년 간방 성적부-艮方 成績簿)에 따르면, 열성적인 교단 간부들은 전답과 가대(家垈)를 전부 팔아 성금으로 내놓아 그 돈이 대성전 건축금에 충당되었음이 확인되는 등 나름대로 공사는 착실히 진행되었다.


간방 성적부에는 주소 · 성명 · 교직 · 임교 연월일 · 포교인 수효 · 성금 액수가 차례대로 정리되어 있고, 전답과 가대를 모두 팔아 낸 교인을 ‘탄갈(彈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교인 1천37명 가운데 탄갈자로 기록된 교인은 무려 1백16명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교인들의 정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1월에 교령(敎令)으로 수호사(修好司)에 걸었던 남북선사무소(南北鮮事務所) 간판을 떼고 성전 신건축사무소 간판을 걸었다. 18)


한편, 같은 해 7월에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하수일리 박인원(朴仁達)이 연와대금(煉瓦代金)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공사 진행을 곤경에 빠트렸다. 대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박인원이 연와 청부를 맡았는데, 한 장 값올 1전(錢) 9리(厘) 로 정하고 70만개를 1925년 6월말일 안에 납품하기로 계약하였다고 한다. 보천교단은 기와 70만개를 구워 납품할만한 인부들 식비와 나무 값을 충분히 지불하였고, 6월 말일까지 25만개에 대한 값 1만여 원을 더 지불했다.


그런데 박인원은 연와를 굽다가 2번 실패한 것까지 합하여 1백2만개 대금 중 잔액 8천4백여 원을 더 지불하라는 청구소송을 경성(京成) 지방법원에 낸 것이다. 이 재판은 그후 8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보천교측이 패소하고 말았다.19)


1928년 무진년 윤 2월 1일부터 대성전 건축공사를 속행할 때 사 정방 사무소를 새로 설치하고 각부를 두어 공사를 분담하게 하였 다. 이 때 수부(水部)는 토차(土車) · 기와만들기 · 기와올리기 · 토역(土役)· 담쌓기를 맡고, 화부(火部)는 목재 · 목역 일체를 맡고, 금부(金部) 는 제지(製紙) · 철물(鐵物) · 단청(丹靑)을 맡고, 목부(木部)는 석역(石役) ? 수도공사를 각각 분담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사를 진척시켜 1929년 기사년 3월 15 일 5년만에 마침내 건물을 준공하였다. 20)

교전인 십일전(十一殿)은 1 925년 기공하여 4년만에 완공했는데 부지 10,000여평, 건평 350평, 높이 99척이나 되는 웅장한 건물로 경내에는 제탑(祭塔) 3개가 있고 4대 문루가 있었다.

대성전의 이름을 심일전(十一殿)이라 하였는데 십일전과 그 부속건물은 당시로서는 큰 규모였다. 주요 건물의 크기는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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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천교 연혁사』, 61쪽
17)  같은  책, 61
18)  앞의  책, 71
19)  같은 책, 72쪽
20) 같은 책, 1- 3쪽 참조 

십일전의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 지방의 재목으로 완성되었고, 보의 길이가 무려 48척(약 15m)으로 그 보 끝의 직경이 2척5촌 (약 70cm)으로 준공된 십일진은 경복궁 근정진보다 크고 호화스러웠다.


십일전은 포가 15 포, 높이가 20척, 자치미가 20척이었다. 근정전이 7보(褓) 5간(間)인데 비하여 십일전은  9보 7간의 2층이었고, 간구(間口)가  7보에 퇴가  5간으로 건평이 350 여평, 높이가 90척으로 26.6m(근정전 보다 6.6m 높음), 총 공사비가 50만원이 넘었다.

한간이 보통 8척을 기준으로 집을 짓는데 십일진에서 쓴 한 간은 16척이니 사실상 건물의 크기는 근정전 두 배이고, 2층까지 합치면 간수(間數)는 1백 86간이나 되었다. 목조 건물로서는 그 웅장함이나 정교함, 그리고 오색 단청의 화려함이 한반도에 민간의 사저( 私邸)로 이런 건물이 없었고 신라 이후 근세에는 사찰에도 없었다.


박문기씨가 구전돼 온 십일전 내부 모습을 채록한 다음 내용을 보면 실로 한반도의 명물이었다는 느낌이다. 21)

십일전 내부에는 이른바 제탑(祭塔)이 있고, 그 주변에는 용두용신 (龍頭龍身)이 조각되어 있다. 또 그 위에 금으로 도금까지 하여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었다. 제탑은 높이가 30척(9.1m), 둘레가 80척 (24.2m)으로 실내에 있는 탑으로는 세상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제탑으로 오르는 계단이 스물여덟 계단이고 상륜부 뒤편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새겨지고 아래에는 땅올 상징하는 방장산 입암산 내장산이 조각되어 있으니 곧 천지(天地)가 모두 조각되어 있는 셈이다.

이를 이름하여 ‘일월성신 삼광영화 일폭(日月星辰 三光影畵 一幅)’이라 했는데 그 조각의 아름다움과 정교함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전국에서 이를 구경하고자 모여든 사람들로 날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제탑을 장차 천자가 앉을 용상(龍床)이라 일컬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반만년 역사의 어느 왕조에서도 건축양식 상 한 번도 쓴 일이 없는 황금색 기와를 올려 중국의 천자궁(天子宮)을 그대로 본뜬 존대의식(尊大意識)에서 출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경찰의 간섭으로 다시 보통기와를 올렸다.


황색은 바로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십일전은 남쪽에 솟아있는 입암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워진 오좌자향(午座子向)이었다. 이러한 좌향(座向)은 현세가 선천(先天)과 달리 운수(運數)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대성전 조감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십일전은 1만여평의 대지 위에 정화당(井華堂) · 총령윈(總領院) · 총정원(總正院) · 태화현(泰和軒) · 연진원 (硏眞院) 등 45동(棟)의 크고 작은 부속건물로 구성돼 흡사 대궐을 연상케 했다.

보천교 본소 안의 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규모의 십일전의 명칭은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극을 적 용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한다.


또 교주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일컫는데 경찰의 의심을 피해 십일진이라고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즉 十(십)자와 一(일)자를 합치면 토(土)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나가는 집이라는 뜻이다.  22) 


21) 박문기,『본주』, 116 쪽
22)  박문기, 앞의 책, 115쪽

이것을 역학적 의의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敦)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종(始終)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심일 은 음양이 순환하여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조화의 본체로서 태극을 뜻하고, 이렇게 보면 십일전이라는 이름은 태극전(太極殿)과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월곡은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1929년에 십일전 신축공사가 끝나자 이해 3월 15일을 택하여 준공식과 아울러 십일전에 보천교의 신앙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봉안식을 거행한다고 전국 각지의 교도들에게 통지하였다. 태극전이라는 의미에서 십일전에 봉안되는 삼광영은 태극의 본체(本體)를 뜻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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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광영을 모시는 십일전의 정문을 삼광문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삼광영과 같이 천지(天地), 일(日), 월(月), 성신(星辰)을 뜻하는 것이다. 삼광문은 중앙에 ‘무극문(無極門)’이 있고, 좌우에 사상문(四象門)이 붙 어 있는데, 정문의 입구는 중앙과 좌우로 둘씩 있어 도합 다섯 군데의 각문은 어느 것이나 좌우로 열 수 있게 하였고, 음양(陰陽) 태극도(太極圖)가 질은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역학상으로 구조를 배치하여 신앙대상인 삼광영을 음양이 작용하여 만물을 생성 발육하는 도의 본체로 보는 보천교의 심일전은 그야말로 도(道)의 현현(顯現)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신축된 십일전의 영위봉안식의 거행은 전술한 바와 같이 ‘차월곡이 기사년(乙巳年) 기사월(乙巳月) 기사일(乙巳日)에 신축궁전에서 등극식을 거행한다’는 설로 유포되어 기사등극설이 되었다. 월곡은 자신이 도중천자(道中天子)라고 생각하고 이 생각을 교도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말은 그의 심중에 혁세제민(革世濟民)하는 새 왕조를 건립하지는 못해도 도중천자로서 교주 즉위식을 궁전같은 십일전에서 갖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실제로 월곡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는 ‘불온설로 민심을 자극하여 소동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봉안식의 연기 조치를 명령하였으며 그 뒤로도 계속 이유를 붙여 십일전의 영위봉 안식은 끝까지 금지하고 말았다.


1936년 병자년 윤 3월 10일, 월곡이 그의 나이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백만의 보천교도들은 그를 왕으로 받들어 나라를 회복하겠다는 뜻이 일시에 무너져 모두 땅을 치고 통곡하며 오열하였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박문기의 모친 최영단에 따르면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조문객으로 정읍 일대의 교통이 모두 마비되었고, 천지를 암울케 하는 교인들의 호곡(號哭)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월곡이 죽자 경찰은 즉각 대흥리 보천교 본소를 접수하고, 전국각지의 교당 간판을 떼어 버렸다. 이어 교인 및 교단 전체에 대한 압수, 수색, 구금 및 체포, 고문 등이 시작되었다.


월곡의 죽음 후 강행된 일제의 보천교 탄압은 열을 더하여 5월 20일에는 정읍경찰서에서 협정원장(協正院長) 김홍식(金鴻植)을 불러 ”이제 보천교는 신축건물을 유지할 능력이 없으니 당국에 위임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가 23일에는 신 건축물을 당국에 제공하라고 위협하며 협박하였다. 서구세력을 배척하고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던 월곡을 총독부는 친일파로 몰아 일반민중과 이간책을 편 끝에 보천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에 치해진 것이다.

 

4. 보천교 추진사업 - 계몽·기업·문화·출판


보천교의 창립 자체는 확실히 민족적 좌절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민중에게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한 종교의 창교를 넘어선 민족 독립과 새 왕조의 건설을 바라는 희 망으로 비춰진 보천교 활동은 민족주의적 성향과 강렬한 메시아주 의를 바탕 삼아 월곡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제공하였다.


또 교인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로 하여금 식민지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활동영역을 확대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천교는 단순히 종교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여러 사업을 추진했고, 그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함양 고천제를 통해 시국을 선포한 월곡의 심증에는 새로운 왕국 의 건립에 필요한 일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 었을 것이고, 이것이 보천교 추진 사업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월곡 은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제의 식민 지배체제라는 현실적 조건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에게 메시아적 존재로서 자신을 각인 시키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의 탈출구가 보천교 내에 있고, 다음 세상의 대안은 보천교임을 과시하기 위해 왜산품 배격운동과  자급자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우선, 보천교단은 직물(織物)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하여 옷감의 자급자족화를 꾀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침탈 가운데 하나였던 ‘광목수입’을 감안하여 의생활과 직결된 절실한 문제부터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급자족운동의 취지에 대해 월곡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 사람이 보천교인(普天敎人)이 하는 것은 흉보면서, 교인의 무정신(無精神)하게 삭발하는 것은 흉보지 않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23 )며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물산(物産) 배척과 자급자족 운동으로 나타난 보천교의 모습 은 전통을 고수하고 가장 민족적인 것을 고집하는 보천교 운동으로 서는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보천교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있는 대흥리에는 지금도 직물공장, 염색공장 등 30여 개 공장이 모여 공단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일제 치하에서 보천교가 벌인 자급자족운동의 산물이다. 보천교가 창성할 때는 갓공장, 농기계 공장까지 있었고, 서양의 염색기술 도입 등 근대적 염색공장이 권장되기도 하였다. 24)


또한 중공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월곡은 유리공장, 제철 · 제련소 건설을 시도했으니, 공업이 발달해야 백성들이 기근에서 벗 어날 수 있다는 평소 월곡의 발언은 산업 건설 현실화를 염두에 두 고 있었던 셈이다. 공업이 발달해야 일본의 지배에서 하루 속히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한 월곡은 공장에 원료 및 원자재를 공급하기 위한 기간산업의 하나로서 철도 건설을 추진했고, 실제로 당시 지식인과 민족운동가들의 자문올 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23) 『개벽』, 1 923년 8월 1일, 40쪽
24) 원래 보천교인들은 흰 옷을 입고 다녔. 교인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 관헌들은 흰옷에 푸른 물감을 뿌려 교인검거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흰옷을 푸르게 염색을 해 입고 다녔는데, 이 때문에 염색공업이 대흥리에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안후상, 「보천교운동연구」, 50 쪽 재인용.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조만식이고, 이것을 추진할 때가 1922년이라는 것이다. 1923년에 일어난 외화배척(外貨排斥) · 왜품 배격 · 자급자족의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물산장려운동(창립총회는 1923년)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25)

이밖에 증산이 의원으로서 동곡약방에서 활동한 것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월곡은 약업(藥業 :제약)회사를 세우기 위해 토지조성을 하고 총독부의 허가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의 불허로 지금의 ‘유한양행’에 회사설립권올 넘겨줬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공공연한 비화로 아직까지도 전해진다. 26)

 

25) 안후상, 위의 논문, 51쪽
26)  안후상, 위의 논문, 51쪽

보천교의 대중문화 운동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증거도 아직까지 남아있다.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보천교 농악(農樂)’이 그것이다. 식민통치를 위한 고등술책인 문화정책을 추진한 일제에 맞서 전통 문화를 보존하려는 의도에서 추진된 보천교 농악의 전승 보존은 보천교의 의식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기층 민중들의 애환을 드러내는 문화의 보존, 특히 지배계급이 아니라 평범한 민중들의 놀이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 했던 보 천교의 이 운동은 전통문화를 부정했던 일제의 문화정책에 대항하는 자주민족으로서 문화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종교단체와 지식인들의 전통문화 부정 의식이 드러난 것과 대조적인 이 보천교의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전통을 일단 부정하고 보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풍조 속에서 소위 신진 지식인 또는 외래종교의 교인들은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고, 전통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면서 미신 또는 구시대적 작태로 비하되었다. 이 때 월곡은 흰옷과 상투를 고집하며 고전을 연구했고, 전통음악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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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군지』는 정읍 풍물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읍의 풍물(농악)이 발달한 시기를 찾아보면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 에 깊이 관여했던 증산교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음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고, 1920년대 차경석이 풍물(농악)을 보천교 종교음악으로 지정 우대하 풍물(농악)기능인들을 초청해 대대적인 공연을 함으로써 풍물(농악)을 육성 발전시켰다


이즈음부터 호남 우도 풍물의 판이 갖춰지게 되었고 그때의 명 들이 정읍을 중심으로 호남 서해안 평야지대(정읍, 고창, 부안, 김제, 산, 군산, 영광, 함평, 나주, 목포, 광주)에서 정읍 우도풍물(농악)을 이끌었다.

교육은 보천교운동에 있어 그 어떤 부분보다도 중요시 됐다. 제가 조선인 주도하에 실시되는 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 며 민간대학을 허용치 않았고, 교육을 통해 황국사관을 주입시키려는 상황에서 보천교는 교인 자녀들의 취학을 거부할 정도로 민족교육을 중시했다.

보천교의 교육은 고전교육에 한정되어 신지식인들의 참여가 차단된 상태였다. 신지식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성영은 <보광>지의 탑객란’에서 보천교의 교육관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객 : 귀교(貴敎)에서 현대교육을 부인하고 자제의 취학도 금한다니, 참말인 가요?


 답 : 그렇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도덕을 먼저하고 지식을 뒤로 함은 종교가의 진면목이 아닌가요.

    그리고 종교가, 즉 교육가가 아니오. 양 자간에 업정한 분과적(分科的) 의미도 있으려니와 영적

    건설(靈的 建設)의 초단에 있어서 본무(本務)에 분망한 우리 교에서는, 교육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사업을 장려할 여가도 없게 됨은 유감이지만은 부득이 사노의다.

    이리하여, 자연히 세간의 오해를 받는 것이겠지. 어디, 교의상(敎義上)으로야 교육을 반대할 리가

    있나요. 만일, 여력만 있다면 그런일에 용력(用力)할 것은 물론이지요. 그런데 개인으로는 현대교

    육을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요.

 

인재를 끌어 모으고 배출해야만 민족주체가 바로 선다는 취지 하 에 보천교에서는 교육 투자를 많이 하였으며, 교인의 자제 가운데는 신식교육을 받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이정립, 이순탁 등이고, 이들은 일본 유학을 마친 후 종단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순탁의 형인 이상호나 이정립 일가에서는 지금도 보천교의 교금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이상호 일가가 보천교에 몸담았던 때 유학했다는 사실은 보천교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호, 이정립 일가는 전 재산을 몽땅 바친 이른바 탄갈자였기 때문이다.


월곡의 아들 용남은 서울 노량진에 10 만평을 확보, 최초의 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했지만 총독부 방해로 무산됐다고 증언했다.

 

왜놈들은 조선인들이 개명 독립을 못하도록 교육은 물론 상업, 공업 등 민족 독립의 기반이 될 사업은 무조건 방해하고 일체 못하도록 막았다. 우리 나라에는 전문학교만 허가했지 대학은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 하나만 허가했을 뿐이다. 인촌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지 못하고 인수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인데 『동아일보』가 창간 된 직후, 보천교가 기미년 3 · 1운동 이전에 세 차례나 독립운동을 거사하려다 여의치 못해 중지했다고 보도했다.  

보천교가 신도 자녀들을 일본제국주의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일제 식민교육을 받으면 어린 청소년들의 의식에 일본 정신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등록금 안 받고 하는 재야학교 설립을 추진했고, 서울 노량진에 10만평을 사서 우리 나름의 순수한 민족학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뒤늦게 이를 안 총독부가 배상도 하지 않고 무조건 탈취해 가는 바람에 학교 건립이 무산됐다. 수원에도 30만평을 매입해 약업 공장을 세우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총독부가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왜놈들은 교육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광복 직후 농업국가인데도 삽 과 낫 하나 제대로 못 만들고 성냥도 생산하지 못한 한심한 수준에 머물도록 탄압했고 이에 저항한 보천교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보천교의 교육사업에는 신식교육을 받은 이성영(정립)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한다. 한편, 고전을 읽고 해독하는 학습소로 보천교 본 소가 사용되었고, 고전 해독과 편찬, 저술활동의 전통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내려왔으며, 고전을 연구하려는 젊은이들이 여전히 보천교를 방문하고 있다는 차용남의 전언이다. 이것을 보면 보천교는 종교운동차원을 넘어 민족 정신을 일깨워주는 민족교육을 행하고자 하였고, 이것은 비결올 연구하고 그 비결에 따른 민족주체의식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비결 연구에 대한 것은 보천교의 비결은 남이 알지 못하도록 은어(隱語)로 쓰여졌기 때문이고, 이것은 이성영이 ‘주공공구유언왈왕분겸공하사시(周公恐慣流言曰王弄謙恭下H寺士)’라는 말을 자주 인용한데서 확인된다.27)

보천교는 교육사업을 통해 비결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것을 다분히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28)   보천교운동의  궁극적인  목적 이 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을 비결로써 계획해 놓았고, 이 비결을 통한 교육을 민족교육화시킨 것이다.


보천교가 추진한 운동과 사업들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장래를 염 두에 둔 것들이어서 이 사업들의 바탕에는 조선 민중들의 조직적 연대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금 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했다.

보천교의 자금원에 대해 이성영은 "···우리 교에는 계율이 없습니 다....(중략)… 있다면 ‘너는 네 것을  두지  말아라’는 것 뿐이요" 29  )라 고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보천교의 무소유(無所有)의 생활철학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자금 출원에 대한 월곡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문 : 보천교인이 가정집물까지 모두 방매(放賣)하고 가산을 탕패(蕩敗) 하니

      이것이 선생의 명령이냐?
답 : 한울(하늘)이 준 재산은 한울 일에 쓰면 관계없다_30) 

 

27) 『보광』, 1 923년, 41쪽
28)  같은  책, 같은 곳
29)  같은 책, 36 쪽 

 

이 같은 교의 논리는 적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금을 강요했고, 많은 교인이 자신들의 전재산을 헌납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는 이른바 ‘ 탄갈(彈揚)’이라 불리는 기부행위에 대한 세간의 여론은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언론의 비난기사도 끊이질 않 았다. 그러나 재산이나 성금을 바치는 탄갈자들이 속속 대흥리로 모여들었다. 31) 

탄갈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보천교 본소가 있던 대흥리에 는 건물 수백 채가 지어졌고, 교기를 본따 ‘정(井)'자 모양의 도로를 뚫고 도로가에 공장과 상가를 지어 무상으로 분양했다고 한다. 지금 대흥리에 가면 이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교인들을 중심으로 집단 생산체제에 들어가기 위해 상가와 공장 이 분양됐고, 여기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는 교단에서 직접 관리하였 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노동의 강도에 따른 이른바 ‘집단생산 · 차별분배제’라는 획기적인 제도가 시험된 사실이다. 32)

원시 공산주의 체제나 사회주의적 요소로 비춰지는 이 공동체 제 도를 지켜보는 세인들의 시각은 더욱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차용남의 증언이다.

그리고 1924 년경에는 지금의 노동조합체에 비견되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 형성되었고, 이것을 중심으로 산업활동이 활성화되어 나갔다. 33) 이러한 활동은 노자(勞資)의 개념을 일찌감치 파악하는데 기여했다. 생산적인 노자협조를 운동의 주요 명분으로 내건 것으로 보아 사회주의 요소가 절충적으로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30) 『개벽』, 38호, 40쪽
31)  안후상, 위의 논문, 55쪽
32) 이것은 사회주의자들과의 접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는 매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닌 일종의 계약과 조건에  따른 임대의  성격을  띠었다. 이들에 의해  기산조합이  조직됐으며,  이것은  지금의  노조나  다름없는 생산자들의  권리 확보를  위한 조직이었다. 


1920년대 당시 보천교는 신홍 종교로서 여러 사업을 추진하면서 기성 종교의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특히 동학올 그 뿌리로 하는 천도교의 비판에 맞서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고 온 보천교 방주 이성영(李成英)은 1923년 10월 25일 월간 <보광(普光)>올 창간하게 된다. 그 동안 보 천교를 미신이나 사술 정도로 여겼던 지식인들에게 보천교의 실상 을 제대로 알리고 보천교 운동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로 이루어진 잡지 창간은, 다른 한편 천도교 측에서 발행하는 <개벽(開關)>지의 보천교에 대한 비난올 의식한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창간호에 실린 ‘종교와 미신’과 편집인 이성영이 직접  쓴 ‘답객난(答客?)’을 보면 지식인의 대(對)천도교에 대한 의식이 크게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성영의 문답식 글인 객(客)과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객 : 근일簿日) 모(茶) 잡지에 ‘흑막(黑幕)에 쌓인 보천교 진상’이라고 특필 대서(大害)한 제하에 여러가지 악평을 늘어 놓고, 이어 ‘정읍 차천자 방문기’란 제하에 역시 조소적 문구를 많이 채웠으니,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신지요?


답 : 나는 비록 문외한(門外漢)이지마는 의분(義懷)이 나요. 그 잡지가 모(茶)교(敎) 기관지인 까닭으로, 더구나 그 조소 재료가 도로 그네들의 경력담임올 생각할 때 ... 가령, 보천교에 그 기사와 같은 사실이 있다 치더라도 그네들의 교가 이교(異敎)를 흉볼 만큼 깨끗하다 치더라도 종교끼리 그런 모욕적 문자(文字)를 망기(妄記)할 수 없거늘 하물며 …

머슴노릇하든 놈이 돈푼이나 모이면 더구나 머슴을 학사(虐使)한다니, 머슴을 면한지 겨우 5년이 되어 가지고 무슨 교오(驕傲)가 그리 많어 ... 34) 

 

33) 김홍철의‘일제하 증산교의 민족운동에 관한 연구’ 참조

분명 천도교를 의식한 글임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잡지 <보광>을 발행한 보광사35)라는 출판사를 설립한 이후 보 교는 그 영역을 확대해 당시 3대 민간지 중 하나인 『시대일보』를 인수하려고 하였다. 당시 언론의 보천교 비판기사, 특히 『동아일보 의 비난기사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보천교단에서, 이에 대 소극적 방법이 아닌 적극적인 방향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 고, 그것이 『동아일보』에 비견되는 일간지를 소유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34) 『보광』, 1923 년, 44- 46쪽
35) 편집 · 발행소가 ‘보광사’이며, 인쇄소는 ‘보광사인쇄부’라고 명기되어 있다. 주소는 경성부 가회동 170번지이다. 이 잡지는 주로 종교 · 예술 ·문예부문을 다루었으며, 편집 및 발행인은 이성영이었다. 

 

 
 9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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