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월곡의 생애와 사상 (1) 車月谷 出生에 관한 小考, 안후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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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생애와 사상 (1)

 

 

車月谷 出生에 관한 小考

 

 

安厚相 (전 보조사상연구원 간사, 현 고창북중 교사)

한국신종교학회 , 신종교연구 2, 2000

 

시작하는 말

 

 

인간 사회에 인위적인 어떤 돌출 현상이 있었다면, 그것이 인간 사회에 끼친 得失을 떠나, 이러한 현상을 주도했던 영웅들의 삶이나 出生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즐겨 하곤 한다. 적어도 前近代에는 이들 영웅들의 출생과 삶에 얽힌 逸話가 미화되기도 하고 과장되기도 하면서 說話化 또는 神話化 (1)하는 경향까지 보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한국 사회에서 적잖은 돌출 현상을 꼽으라면 단연 普天敎運動을 꼽을 것이다. 물론, 필자의 주된 관심 분야라서가 아니라, 당시 규모나 사회적 파문으로 볼 때 결코 여느 현상(2) 보다 그 정도가 컸으리라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따라서 보천교 운동을 주도했던 車月谷(3)出生出生說(4)을 검토하고, 이것이 갖는 비교종 교학적 의미를 窮究해보고자 한다. 또한, 월곡의 出生說을 통해 당시 동학운동과 보천교 발생의 사회적 배경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돼 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일반적으로 說話神話를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본다. 신화가 有神論的인 용어 이기 때문에 설화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적 입장에 서 신화를 심리적 사실로 이해하기 때문에 두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출생에 관한 것은 說話라는 용어를 택해 야 한다는 견해에는 동감한다.(참고로, 본고의설화나 신화에 관한 이해는 인 경(승려, 보조사상연구원 실장)의 강설과 논저를 인용 또는 참고로 하였다.)

2)일제 식민지 사회의 주요 논점(이슈)은 식민지 지배 체제의 유지 또는 진전, 그 리고 이를 저지하려는 반식민지 운동이었다고 본다. 전자는 일제와 일제의 통 치 체제를 수긍하고 강화하려는 현상이고. 후자는 앞의 현상을 저지하거나 벗

어나려는 움직임이다. 뒤의 움직임은 대체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3) 호가 月谷, 아명이 京石이다.

4)여기에서 은 풍설 또는 속설을 뜻하며, 을 뜻하기도 한다.

 

 

1. 出生出生地

 

車月谷甲午東學農民戰爭 당시 井邑 근방의 농민군을 이끌었던東學接主 車致九(1851- 1894)長男으로, 日帝 강점기에 新王朝開創運動을 이끌었던 당대 주목 받은 인물이다.

월곡의 출생에 관해서는 생존한 월곡의 次男 三男(5), 그리고 현존 보천교 관련 교단의 기록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익히 알려진 대로 월곡은 全北 高敗郡 富安面 龍山里 400번지 일명 煙起洞에서 출생 하였다.(6)

出生地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홍미로운 것은동아일보에 나타난 기록이다. 이 신문에 의하면 월곡이 高敵郡碧沙面 龍山里 안에서도 盤亭里 김광배라는 이의 집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7)

필자가 조사를 해 본 바, 연기동의 옛 이름이 반정리라는 것과 임감역의 집을 김공배가 사들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앞의 기사는 보천교단에서 발행한普天敎誌(8)기록 興德郡 扶安面 煙岩里보다 더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9)

 

이처럼의 동아일보 의 내용이 정확했던 것은 월곡의 출생지 연기동과 仁村 金性洙의 출생지 仁村과는 불과 십리도 채 안 된 곳에 서로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10)

 

다음은 월곡의 출생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행정 구역상 龍山里 이지만, 일명 煙起洞이라 불리는 출생지는 우리 나라 화엄종(남악)의 개산격인 煙起寺址가 있는 곳이다.11) 이곳 연기사지는 연기동 동남쪽 소요산 기슭의 비교적 넓은 협곡에 위치해 있어, 현재 진행되는 댐 공사가 마무리되면 수몰이 예상된다. 이곳의 안골, 큰냉골, 작은냉골, 부안골, 빈대절터, 절골 등은 아직도 절의 흔적들이 확연하며, 절골에

 

 

(5)次男의 이름은 龍南(井岩)三男의 이름은 鳳南(余孩)이다. 현재 정읍 대흥리에 살고 있다.

(6) 월곡이 태어났던 임감역의 연기동 새 집을 구입한 김공배의 은 이수와 은수 (20002월 현재 , 교사)가 있다. 김은수를 만나 월곡의 출생 地 番 과 가옥 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2000. 1. 26, 김재영 · 안후상 기륵) 임감역이 490 번지에 지었다는 집은 대청마루가 있는 정면 4칸에다

전방과 좌우에 高設三門 과 사랑채, 디딜 방앗간 등이 있는 규모 있는 집이다. 1998년까지 존속되다가 헐었으며, 바로 옆에 양옥이 들어서 현재 김공배의 며느리가 살고 있었으며, 코미디언 김지선()은 이의 손녀이다.

(7)동아일보(, 1924. 12. 18)

(8)普天敎誌編纂委員會編 (普天敎中央總正院), 196-5, 387-389.

(9) 보천교지富安 漢 字 표기를 扶 安 으로, 또는 출생지인 연기동이나 반정리 를 호암리로 잘못 표기 또는 기술하고 있다- 岩 里 는 연기동의 남쪽 아산면으 로 들어가는 고개 우측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0)인촌이나 월곡은 다함께 소요산 자락에서 태어났다는 점이 매우 홍미롭다. 일 제 때 富安은 부자들이 많았고. 특히 동아일보와 관련 있는 이들이 지역 사 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1924년경,동아일보의보천교에 대한 맹 렬한 비판은 보천교가 무리하게 시대일보를 인수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의 월곡의 출생에 관한 내용은 보천교 비판 기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동아일보 의 출생 관련 관련 내용은 매우 정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1) 傅言에 의하면, ‘연기煙氣의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차용남은 신라말 도선국사 玉龍子가 이곳에 내려와 이곳에 연기가 나거든 내가 있는 줄 알라해서 煙起라 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앞의煙起표기는 정확하나, 보다 史實에 가까운 것은 高敵 興德人으로 백제 화엄종의 개창자인 煙起祖師가 이곳에 사찰을 창사했던 데서 煙起라는 이름이 발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병헌(서올대)煙起라는 지명과 아올러 인명이 時空을 떠나 자주 보이며, 따라서 同時代 같은 인물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이외, ‘연기사는 소요산 아래에서 20리 서쪽에 위치해 있다라는 기록이湖南邑誌(1872) 興德' 편에 보인다.

 

 

 

는 전라감사를 지냈다는 장성 임씨의 커다란 분봉이 있다. 승려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임씨의 분봉을 썼다는 傳言은 당시 지배계층인 儒人들의 권세를 실감케 한다. (12)

연기사지 서쪽인 선운사 초입으로 채 오리도 안 되는 곳에 연기동 이 있다. 연기동은 현재 30여 호가 평탄한 지형에 모여 마을을 형성 하고 있으며, 해발 mn 정도의 산세가 주변을 병풍처럼 휘두르고 있다. 한눈에 외부와 차단된 隱 通 地 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더군다나, 유일하게 트인 선운사 초입이 나오는 서쪽으로는 장수강이라고 불리우는 長淵江(13) 은 외부와의 굳건한 단절을 의미한다. 강폭은 대략 20m , 그리 넓지는 않지만 조수간만에 의한 수심 차가 크며, 따라서 외부와의 교통은 배를 통하거나 썰물 때를 기다려, 그것도 인위적인 구조물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14) 마을의 북쪽에는 마을과 맞닿아 있는 산이 있는데, 이름이 牛頭山이다. 일명 소머리산으로 블리우는 이 산은, 어느 풍수지리를 보는 이에 의하면, 소요산에서 뻗어 온 줄기가 장연을 만나 맥이 뭉치면서 소머리 형국을 이루었으며, 양택지로서는 출중하나 평범한 이가 들어가 살기에는 그 기운이 너무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월곡이 출생한 곳이 바로 소의 입에 해당되는 곳 이라는 것이다.(15) 재미있는 것은 마을의 이러한 풍수 관련 얘기들이 월곡의 출생을 의식해 발생된 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 사람들은 월곡이라는 존재에 대해 거의 잊고 있었으며, 기억하고 있다던 이들도 월곡을 부정적인 인물로 얘기하고 있었다.

이처럼 연기동의 월곡의 출생지는 隱通地形이며, 소머리 형국을 이루고있다.

 

12)연기사가 언제 무엇 때문에 廢寺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절의 흔적이 대 여섯 군데 넓게 분포돼 있는 것으로 보아 重刺일 가능성이 크며, 폐사 시기는 임란 후인 165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또는 6.25동란 직후에도 승려가 주석했다는 주장도 있다. 필자가 연기동을 답사하면서 들은 바로는, 전 남 장성의 세력가 任監司 (전라감사를 지냈다고도 하고 약간 과장되었다고도 전한다)의 묘를 쓰기 위해 임감사 측과 승려들이 큰 싸움을 했는데, 표현이 싸움이지 임감사 측에서 승려들을 잡아다가 기름 가마에 처넣어 살해하는 광란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어릴 때 들은 바가 있다고 말하는 마을의 한 원로의 말은, 19세기경에 연기사가 완벽하게 폐사된 게 아닌가 한다. 참고로, 연기사의 사천왕상이 전남 영광 불갑사로 배를 통해 옮겨졌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3)최완수,명찰순례(2), 대원사, 426쪽 이 책에 長淵이라는 강이름이 나온다.

14)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의 연기동 장연은 항포구로, 배의 소통이 왕성했다. 연기 동 산내에서 나온 목탄이 인근 군산이나 부안 등지로 실려 나가는 주요 포구로, 한때 기생집까지 있었다고 한다. 임감역의 집을 샀던 김공배는 당시 유일 하게 배를 소유했던 船主 였다. 현재 연기동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수단은 작은 인도교이다. 그러나 지금도 차량은 썰물 때를 기다려 인공 구조물 위를 지나야 한다.

15) 마을 사람들의 얘기다.

 

 

2. 出生 背景

 

月谷父 車致九甲午東學農民戰爭 당시 井邑 지역의 接主였다.

2차 봉기 당시에는 정읍의 농민군 5천명을 이끌던 首領이었다 (16) 延安, 이름은 重弼, 致九. 철종 2년인 1851년 지금의 井邑市 笠岩面 일명 大興里에서 출생하였다.(17) 치구는 가난했지만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양반들의 횡포에 맞서 완력을 사용하기도 한 당대 민초들의 영웅이었다.

 

 

16)오지영,동학사, 대광문화사, 1989, 123. 앞의 자료에는 대장 전봉준과 장령 손화중 외 15명 가운데 치구가 포함돼 있다. 이외, 한우근,동학농민봉기 , 세종 대왕기념사업회, 1985, 225쪽 참고.

17)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엮음, 《 -동학농민군 후 손 증언륵-다시 피는 녹두꽃 , 역사비평사, 102-108. 치구는 나중에 이름을 행중으로 고쳤으며. 신분은 평민이었다. 서당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장가도 늦게 들어 29세에 가서야 월곡을 낳았다고 한다. 월곡은 延安 車 氏 문절공파 16대손, 始祖로부터 36대손으로, 그의 조부 때부터 정읍 입암 磨石(가는돌) 어귀에 정착하였다. 원래는 전남 순천에서 충북 영동 옥천으로 다시 정읍으로 이주해왔으며, 더블어 6대부터 증조대까지의 선영 묘를 정읍 마석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입암면 접지리 일명 대홍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치구 때부터였다. 3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치구는 7척 거구에다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차용남 구술 (2000. 2. 5)).

 

 

18799월 경의 일이다. 입암면 접지리 인근 芝仙洞 (18)이라는 마을에 천석지기 任監役(19)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천석지기에게 문제가 생겼다. 양반들이 감역의 땅을 부쳐먹고는 소작료는 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이에 치구를 찾아가 양반들에게 소작료를 받아 마음대로 쓰라고 하니, 치구는 소작 양반들을 불러 놓고 힘께나 쓰는 두어 사람을 그 자리에서 꺾어버렸다. "양반인 주제에 도조를 안내는 도둑놈 짓을 하느냐며 혼쭙을 내니, 그 즉시 소작료를 가져왔다. 받은 소작료의 일부는 되돌려 주고, 나머지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20) 물론 치구가 양반들을 징치할 만한 위치에 있다거나, 징치해도 될만한 그런 시대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용기 있고 정의로운 당대 영웅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21) 이어, 전봉준으로부터 거사를 권유받고 농민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22)

 

이처럼 양반을 혼내주는 당대 영웅으로서 우뚝 설 수 있었지만, 한편 신변에 대한 위협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때가 1880년 안팎이다. 당시 사회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명문 儒家 출신이라 하더라도 농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원도의 경우, 유생들 전부가 농경에 종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양반 또는 유생들의 처지가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었다.

混沿가 심하였다. 당시 반상이나 양천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있을 때다. 大早災가 전라도에서 유독 심하여, 麻發이나 火賊이 횡행하였다. 심지어 백주에 上納錢木을 탈취하거나 擧義伐倭 격문을 뿌리기도 하는 義賊 양상이 전라도에 빈번하였다.

민란과는 달리 縣監을 위협 축출하거나 官穀을 탈취하여 민간에게 분배하는 등 지방에 거주하며 徒黨을 규합, 연결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리고 1888 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민란이 번졌는데, 이를 성격상 郡縣民이라 부르기도 한다쁘 따라서 지역에 편력하며 당시 부당함을 혁파하고자 했던 의로운 이들이 민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들에 의해 徒黨이 만들어지고 도당끼리의 연합을 통한 민란은 흔히 있는 일이 었다.

바로, 전봉준과 차치구의 협력은 도당끼리의 연합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사회 통념을 깨트리고, 양반 사회의 퇴폐에 대한 윤리적 항변의 한 방법으로 향촌에서 완력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반이나 유생들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당시 민란 진압에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을 나무라는 유생들의 상소나 격문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감역의 부탁으로 양반들을 징치한 치구의 신변에 위협이 따랐을 것은 자명하였다.

 

(18) 芝仙洞 의 행정 구역은 정읍시 입암면이지만, 전에는 興德郡 소속이었다. 지금도 지선동엔 임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몇 십 년 전만 하여도 임감역이 살았다 고 하는 돌층계만 백여 개가 넘는 대궐 같은 기와집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 다.(정용채 구술 (2000. 2. 5, 안후상 기록))

(19) 監役 은 조선시대 종9 품의 관리로, 주로 건축에 관한 사무를 담당했다.

(20)월곡의 후손들의 구술.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 회 엮음, 앞의 책, 102-108. 전언에 의하면 치구의 명성에 吏背들까지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21)19세기 말엽은 지방 행정 체계나 班常 의식이 급속히 붕괴되어 가는 시점이다. 그렇다고 내놓고 양반이나 향리들을 징치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22)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엮음, 위의 책, 102-108쪽 앞의 책에도 나오지만, 후손들에 따르면 치구는 체격도 크고 기운도 장사였으며, 눈매가 무서워 미친개도 치구의 勢目으로 보면 그 자리에서 뒹굴었다고 한다. 전봉준이 직접 대흥리로 찾아와 함께 거사하기를 권유받자 치구는 우리 고을의 수령을 내쫓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다른 곳에 가서 거사하면 역적이 된다며 거절했다 한다. 나라를 위해 거사하자며 끈질기게 권유하는 전봉 준의 노력 끝에 고부 봉기는 물론 전주 입성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東學에는 入道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때는 생포 당한 이웃 고을 홍덕 접주 고영 숙이를 구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일로 그는 홍덕 군수 윤석진과의 악연으 로, 결국 윤석진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고부 봉기에서부터 전주 입성 까지, 그리고 폐퇴하여 아들 월곡과 함께 전봉준을 데리고 입암산성을 거쳐 순 창으로 들어갔다가, 있기가 불가하다고 하여 아들 월곡과 함께 다시 나와 국사 봉 토굴에 숨어 지내다가 붙잡혀 홍덕에서 분살형을 당했다.

23) 한우근, 앞의 글, 75-84쪽 참고.

 

 

이러한 신변 위협에서 벗어나 외부와 차단된 은둔지 연기동 감역의 새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24) 이때가 18799월경. 이때 이미 부인의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25) 28,9세가 되던 때에 부인의 첫 受胎는 영웅 치구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제쳐두고서라도, 부인의 신변을 걱정 안 했을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외부와 차단된 연기동 생활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연기동의 은둔 생활에서 한때 수백만 민중을 조직했던 보천교 차월곡이 출생하였던 것이다.

 

치구가 연기동으로 가게 된 배경을 다르게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천석지기 임감역은 風 水 地 理 를 보는 이를 데리고 다니며 가문을 더욱 융성하게 해 줄 후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끝에 지금의 부안면 용산리 400번지 일명 연기동 牛頭山올 주목하였고, 이곳에다 집을 짓 고 살기 위해 근방의 전답까지 사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연기동으로 이사한 임감역에게 문제가 생겼다. 밤마다 호랑이가, 낮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도저히 살수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임감역은 또 다시 치구를 찾아가 연기동 새집에서 살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능히 호랑이까지도 이겨내는 당대 영웅이었기도 하지만, 연기동에 사놓은 전답의 先 資 받을 일이 막막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26)

 

24) 마을 원로들의 그사람들이(치구)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온 게 아니라 잠시 다녀간 것 뿐이다. 원래 한 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고 한 전언을 참고하였다.

25)차용남 구술(2000. Z. 5, 안후상 기륵)후손들은 조모님의 태기는 입암면 대홍 리에 계실 때 있었다고 한다.

26) 차봉남의 구술 가운데 임감역의 先資 문제가 군데 군데 나타난다.

 

 

3. 出生說象徵的 含意

 

후손들에 의하면, 월곡은 나면서부터 특이했다. 성장이 빨라 돌떡을 이웃에게 직접 돌렸다고도 한다. 당시 민가가 몇 채 들어서 있는 연 기사지까지 걸어서 자신의 돌떡을 날랐다고 한다. (27) 흥미로운 것은 월곡의 출생에 관한 속설이다. 먼저, 치구가 연기동 임감역의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발생되는 속설이다.

 

임감역이란 자가 新基家屋成造하여 新家移居則 꾸리가 함이 不知基數山君每日 侵入故로 임감역은 不得已 基家擔棄하고 移去하였는데 大師父께서 基家하여 移去則 꾸리와山君不侵故基家에서 월곡 선생님이 誕降하시다. (28)

 

... 연기동으로 이사를 하니, 밤마다 호랑이가 떼를 지어 내려와 대문이며 부뚜막이며 뒤란이며 할 것 없이 온통 집 주위를 둘러 싸 는지라, 두 분은 무서운 게 아니라 오히려 든든하게 생각하였다. (29)

 

당시 임감역이 가문의 눈부신 번창을 위해 잡은 터가 현 용산리 490번지. 이 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물을 만나 기운이 뭉쳐진 곳으 로, 아무리 천석지기 임감역이라지만 凡人에 불과했던 그에게 적합한 땅이 아니며, 오히려 기운이 왕성하고 비범했던 치구에게 적합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곳에서 출생한 월곡 역시 비범하고 특별했음을 말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호랑이와 구렁이는 왕성한 地氣를 뜻하며, 호랑이를 만나 든든했다는 것은 이들 부부의 기운과 地氣가 서로 맞아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진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임감역이 공들여 지은 새집을 치구에게 잠시 내 준 것은 당시 치구에게 수모를 당했던 양반들의 보복에 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연기동으로 들어간 치구의 부인은 뒤란 평편한 바위 위에 청수를 떠놓고 극진한 치성을 드리니, 10개월 후에 월곡을 낳았다. 월곡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전언이다.

 

돌이 되어 아버님께서는 직접 이웃집에 떡을 돌리셨다. 윔박질을 하기도 하며 떡을 돌리시니, 텃바람으로 저런 아들을 낳았다는 소 문이 돌았다. 이에, 임감역이 욕심을 내 다시 연기동 새집으로 들어 오니, 또 다시 호랑이와 구렁이가 나타나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들 하나 낳고 싶은 욕심에서 꾹 참고 잉태를 하여 출산을 했 는데, 딸이었다. 임감역이 우리 아버님을 위해 좋은 터를 잡은 격이다. (31)

 

월곡의 출생설은 후손들의 말이 정확하다. 이제 겨우 120년 전의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위의 내용 가운데는 과장과 미화된 부 분이 없지 않으니, 필자는 이를 종교적 인물에 대한 미화 차원을 넘는 설화적 또는 신화적 요소가 이미 가미되고 윤색되어지는 과정이 라고 보고 있다.(32)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含意는 아래와 같다.

 

먼저, 1936년 월곡이 타계하자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 뒷산 국

사봉과 앞의 방장산과 입암산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올음소리가 들 렸다고 한다. ) 이처럼 近代에도 합리나 과학과는 동떨어진 어떤 신 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들로만 구성되어진 이 제조되고 있는 것이 다. 이유는, 一回性에 근거를 둔 史實보다는 종교적 祭儀를 통해서 실존적 정황으로 끊임없이 再現되기를 希願하는 후손이나 따르는 교인 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出生說 이나 他界說의 중심적 인물의 탄생과 이에 얽힌 사건의 발생에 주목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를 두고 인간의 수범을, 종교적 모델을 만인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때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또는 그 거룩함을 공유하고픈 심리에서 발생되었으리라고 본다.

 

 

(27) 차용납 구술(2000. 2. 5, 안후상 기록)

(28) 普天敎誌編纂委員會編,普天敎誌(普天敎中央總正院), 1965, 387-38 .

(29) 차용남 구술(2000. 2. 5, 안후상 기록)

(30) 차봉남 구술(2000. 1. 31, 김재영 기록)

(31) 차봉남 구술(2000. 1. 31, 김재영 기록). 연기동에서 출생한 임감역의 여식은 고창군 성내면 칠성골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32) 신화나 설화는 설명되고 검증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의식의 상징적 표출로. 이해의 대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신화나 설화는 인간의 내적 인 심리적 사실로, 외계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과학 언어가 아니다. 또 형이상학적 실체를 주장하는 철학적 사유도 아니며, 단지 원시적인 미분화 된 무의식적 사고의 한 형태로, 집단적 차원에서 만들어지고 보존되어온 사실 이기 때문에 신화나 설화는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여러 논저를 참고하여 정리함)

33) 월곡의 후손과 몇몇 교인들이 말하고 있다.

 

 

 

맺는말

 

 

神話說話는 매우 중요하고 뜻깊은 심리적 사실을 표현하는 거 짓말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아데(Eliade)는 신화야말로 참된 역사(true history)라고 단언한다.(34) 역사적 사건은 一回性에 근거를 둔다. 하지만, 이것이 일단 신화화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제의를 통해 실존적 정황으로 끊임없이 再現된다. 따라서 신화는 중심 인물의 탄생과 사건의 발생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하는 종교적 모델을 제공한다.

 

따라서 역사를 참으로 의미 있고 신성한 사건으로 만듦으로써 그때의 거룩함을 유지하려 한다. (35)

앞의 정리된 내용은 신화나 설화의 일반적 정의이며, 필자 또한 공감하는 부분이다.

 

월곡의 출생설에서 보듯, 신화적 윤색은 결코 역사적 사실을 주장 하는 것이 아닌 종교적 스승에 대한 戀慕 와 종교적 敬虎 에서 비롯된 합리적인 태도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이 내포한 종교적 함의를 이 해하려는 태도는 또 하나의 합리적 태도라고 본다. (36)

 

그렇다고 史實을 전혀 배제한 신화나 설화는 설득력을 얻는데 실패할 것이다. 近者 일수륵 史實 해석을 위한 설화의 상징적 함의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51) 물론,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진실을 밝히는 태도는 별도의 영역이다. 따라서, 월곡의 출생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이미 觀點의 문제이다. , 역사적인 사실을 중시할 것인가, 아니 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진실을 더 가치 있게 여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1880년 전후, 지역에 편력하며 정치적 · 사회적 부당함을 혁 파하고자 했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월곡의 부친 차치구는 전봉준 과 연합함으로 거대한 갑오동학농민전쟁을 발발시켰던 것이다.

 

처음에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도당끼리의 연합을 통한 민란이 발생되기도 하였다. 바로, 전봉준과 차치구의 협력은 도당끼리 의 연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교적이고 봉건적인 양반 사회의 퇴폐적인 모습에 대한 항변으로 완력을 사용하였다. 하 지만, 양반이나 유생들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이때 신변에 이상이 있 음을 안 치구는 외부와 차단된 연기동 새 집으로 들어갔다.

 

이때가 18799월경이다. 당시 치구의 부인은 암울했던 시대에 수 백만 민중의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 또다른 영웅 월곡을 잉태하고 있었다.

 

(34) M.Eliade, The Quest (Chicaco University Pre$, 1969), 76

(35) M.Eliade, "Religions Structure and Archetype", Phenomenlogy of Religion, J.P.Betlis, ed. (New York, 1969), 199-21 .

(36) 신화적 윤색은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이다. 곧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단지 자기 표현의 의미 체계이기에 형이상학적 주장이 나 우상 숭배와도 같은 태도는 하나의 종교적 상징 체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 댜

(37) 시간이 흐를수륵 史實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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