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월곡의 생애와 사상 (4) 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 김화성,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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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접주 차치구와 그 후 3代,

 김화성 (‘전라도 천년’에서 발췌) / 전 동아일보 기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一〈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에서〉

 

 


 
신새벽, 고층아파트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일을 봅니다. 문득 내 머리 위에 누가 앉아있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지그시 짓눌려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바로 위층 누군가가 나처럼 일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가 앉아있는 자리는 현재 내가 앉아있는 변기와 정확히 일직선입니다. 그가 뻗고 있는 두 발바닥이 시멘트바닥을 사이에 두고, 내 머리통 위에 정확히 얹혀 있는 것입니다. 오호! 그는 지금 내 머리 위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내 위층의 일 보는 사람도, 그 위층의 일 보는 사람 발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그 위층의 사람 또한 그 아래층 사람의 머리에 발을 얹은 채 조간신문을 부스럭거리며 낑낑대고 있을 것입니다. 그 위층의 위층 그리고 그 위층의 위층의 위층도 그러할 것입니다.

 
고층아파트 화장실에
일렬종대로 앉아있는 사람들
퇴적물처럼 켜켜로 쌓여있는
사람 위에 사람
사람 밑에 사람
스톱모션 스위치를 누르면
딱딱하게 굳어버릴
현생대의 화석
一〈김혜수 ‘404호  3’에서〉

 


나는 과연 누구의 아들인가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5,000년 전 단군할아버지의 아들인가요? 그렇다면 내 머리 위에 아버지는 몇 명쯤이나 될까요? 한 세대가 30년이라면, 5천년 동안 아버지가 160여 분쯤 오셨다 가신 셈인가요? 퇴적물처럼 켜켜로 쌓여. 내 머리 위 일렬종대로 앉아있는 아버지, 아버지화석들. 그렇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성복 시인)’ 한 장일 뿐입니다. 나도 머지않아 내 자식의 ‘아버지화석’이 되어 딱 ‘한 켜’만큼 쌓일 것입니다.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누구보다도 피가 뜨거웠던 동학 접주였습니다. 삼국지의 장비와 비슷했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움은 없었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호박만큼 컸고, 기골이 칠 척 거구로 장대했습니다.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보다 네 살이나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봉준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894년 음력 1 월 녹두장군이 정읍 고부에서 처음 들고 일어났을 때, 농민군 1,200여 명을 이끌고 맨 앞장에 섰던 이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전봉준과 거사를 모의한 핵심 20인 멤버였고, 스스로 손여옥(1860~1899)과 함께 정읍두령을 맡았습니다. 동학군에서 정읍두령은 ‘녹두장군 직할부대’였습니다. 황토현전투나 전주성 입성 때 중군으로서 일등공신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 때 대패한 것도 그의 부대였습니다.
 
장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과격했습니다. 양반이고 선비고 단칼에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는 집강소 시절 정읍지방을 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방수령이나 양반 지주들이 순순히 농민군에게 관아를 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주, 남원, 운봉 같은 곳은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결국 남원성은 김개남(1853~ 1895) 에게 함락되고 부사 이용헌은 목이 베여 성문 밖에 걸렸습니다.
 
고창 흥덕 현감 윤석진도 완강하게 집강소 설치를 거부했습니다. 되레 집강소를 설치하려던 흥덕접주 고영숙(1871~1894)을 잡아 가둬버렸습니다. 이웃 정읍에서 이 소식을 들은 차치구는 펄펄 뛰었습니다. 그는 바람같이 농민군을 몰고 가서 윤석진을 생포하고 고영숙을 구해냈습니다. 평소 차치구라면 윤석진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영숙이 “굳이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며 말리자 마지못해 이에 따랐습니다.
 
1894년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태인전투 패배를 마지막으로 농민군 주력부대가 해산했습니다. 이제 녹두장군 주위에는 그의 핵심만 남았습니다. 차치구는 전봉준을 그의 집(입암면 대흥리)으로 모신 뒤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전봉준은 입암산성(12월 25일) → 백양사 청류암(12월 26일)을 거쳐 순창으로 향했습니다. 김개남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1894년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김개남이 잡혔고, 그 다음날인 12월 28일 전봉준도 붙잡혔습니다. 1월 25일엔 차치구가 그가 살려줬던 윤석진에게 잡혀 그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를 갈던 윤석진은 차치구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며 닦달했습니다. 차치구는 담담했습니다. “나는 죽을 뿐이다. 더 이상 심문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차경석(1880~1936)은 한밤중 사형장에 내팽겨진 아버지(차치구) 시신을 등에 업고 삼십 리 길을 달려 선산에 묻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열네 살. 그도 아버지처럼 체구가 건장했습니다. 너부데데한 얼굴도 호박만큼이나 넙적했습니 다. 큰아들이었던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크고 작은 동학농민군 전투에 소년 용사로 빠짐없이 참가했습니다. 전봉준의 마지막 호위도 아버지와 함께했습니다. 차경석의 피도 역시 아버지만큼이나 뜨거웠습니다. 18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그는 300여 명의 살아남은 비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고창 흥덕 관아를 습격했습니다. 예수교를 뜻하는 ‘영학계(英學契)’원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처럼 위장하고 호시탐탐 틈을 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경석은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1907년 음력 5월 16일. 차경석은 강증산(1871~1909)을 만나 그의 문도가 됐습니다. 증산은 차경석의 집에 한 달 동안이나 머물며 “(총칼이 아니라) 오직 도(道)를 통해서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차경석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차경석은 강증산이 죽자 그의 법통이 자신에게 있음을 내세워 보천교(普天敎)를 만들고 교주가 됐습니다. 그는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 중국,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는데 내가 그곳의 천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도들이 비온 뒤 죽순처럼 일어났습니다. 일본경찰의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차경석은 바람 같았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숨어 다니면서 포교와 함께 조선독립을 주장했습니다.
 
1921년 9월 24일, 차경석은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신도 수천 명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창교(
創敎)와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종교 이름은 ‘보화교(普化敎)’, 나라 이름은 ‘시국(時國)’. 스스로 천자임을 선포하고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유유히 빠져 나갔습니다.

 
조선 민중들은 열광했습니다. 온갖 얘기들이 부풀려져 신비로움이 더해졌고 교세는 마른 풀에 불붙은 둣 활활 타올랐습니다. 1920년대 당시 ‘남북 2,000여만 명 중 700만 명이 보천교 신도’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조선총독부 집계로도 170만 명이었으니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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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교 교주 '차천자' 차경석


차경석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선이 닿는 곳이면 모든 단체에 독립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보천교는 1920년부터 1940년까지(1936년 교주 사후에도 계속) 147번이나 독립자금을 지원해 전체 지원 건수의 54%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민족진영 김좌진 장군(1889~1930)에게도 군자금 일부를 댔고, 공산진영 김철수(1893~1986)에게도 독립자금을 주었습니다.
 
1925년 평양의 조만식 선생(1883~1950)은 정읍에서 차경석으로부터 군자금 일부를 받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됐습니다. 1922년 차경석은 출판사 보광사를 만들고, 그 이듬해부터는 기관지 ‘普光(보광)’을 펴냈습니다. 최남선이 운영하던 ‘시대일보’도 인수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교주 차경석은 여전히 수배령이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소재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000명에 달하면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비밀음모 단체로서 주모지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되 특히 산간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이 매우 성대했다.”
-〈동아일보 1921 년 4월 26일자 기사에서〉
 
차일혁(1920~1958)은 차경석의 아들입니다. 그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를 졸업하고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을 펼쳤습니다(1938~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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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각황전 소각명령을 거부한
 차천자의 아들 차일혁 총경 


중국조선족 외다리소설가로 유명했던 소설 ‘격정시대’의 김학철(1916~2001)과 김승곤(1915~ ) 전 광복회 회장이 바로 그의 전우들입니다. 역시 차일혁도 ‘열혈아’였습니다. 해방 후 서울에 온 그는 두 눈을 의심했습니다. 악명 높았던 일본경찰 간부가 그때 까지도 ‘미군정을 도와준다’는 이름 아래 귀국하지 않고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1945년 11월 2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일제경찰간부 사이가(齊賀七)를 원남동 네거리 골목에서 권총으로 사살해버렸습니다.
 
그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해. 6.25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맹활약했습니다. 70여 명의 병력으로 2,000여 명의 적을 격퇴한 정읍칠보발전소 전투나 1953년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사령관 이현상(1906~1953)을 사살하는 등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공적은 구례 화엄사 소각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1951 년 5월 화엄사 소각명령이 떨어지자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현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1000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며 대웅전 문짝만 떼어내 불태웠습니다. 그는 기꺼이 명령 불이행으로 감봉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이현상을 사살한 뒤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하동 섬진강에 뿌려주기도 했습니다. “비록 적이지만 죽은 뒤에 빨갱이가 어디 있고 좌익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현상을 사살한 그의 부하들은 태극무공훈장을 3명이나 받았지만 정작 지휘관인 그는 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의 사후인 1998년 화엄사 경내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졌고,2008년 정부로부터 ‘6개의 고찰을 전화(戰火)에서 구한 공로’ 로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됐습니다.
 
차길진(1947~ )은 차일혁의 아들입니다. 그는 동학 차치구 접주의 4대손이요,차천자(차경석)의 3대손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차법사라고 부릅니다. 대중들에게 그는 ‘영능력자’ ‘예언가’로도 통합니다. 그는 스스로 ‘귀신들이 눈에 보인다’고 말합니다. 저승의 귀신들을 불러와 이승의 사람들과 만나게 해주는 ‘구명시식’이란 것도 합니다. 가령 자식이 부모 살아계실 때 불효를 했을 경우, 저승의 부모 영가를 불러온 뒤, 그 앞에서 잘못을 빌게 히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줘 해원을 함으로써 저승의 귀신과 이승의 인간이 상생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난 모르겠습니다. 이승의 것을 보고 헤아리기에도 바쁩니다. 어쨌든 그의 주위에는 이름만 들어도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일수록 가슴에 맺힌 것들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현재 일간스포츠에 ‘갓 모닝 (God morning)'이란 칼럼을 몇 년째 연재하고 있습니다. 칼럼 내용은 아무래도 이승과 저승의 교감에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성경의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는 결국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그 많은 아버지들 가운데는 꼭 훌륭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르호보암 같은 폭군도 더러 보입니다. 어머니 중에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불륜 여인 심지어 화류계 출신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예수도 ‘아버지가 떨어뜨린 한 장의 가랑잎’이었던 것입니다.
 
동학의 기본정신은 인본정신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너도나도 모두 잘 사는 ‘상생정신’입니다. 시인 조지훈은 “최제우 동학의 원형은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흥익인간의)단군신화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차씨 집안에서는 그 정신이 알게 모르게 면면히 이어져 내렸습니다. 그건 순전히 아버지의 힘입니다. 아버지는 ‘한 장의 가랑잎’인지 모르지만, 그 가랑잎에 ‘정신의 줄기세포’를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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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가 누고 간 한줄기 똥 덩어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난 그 거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또 하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본 글은 저작권자(김화성)의 사전 허락에 따라 발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원문은  <오매! 징허고 오지게 살았네 전라도 천년 (글 김화성, 사진 안봉주)>, 전북문화재단총서003, 맥스미디어, 2018년 2월9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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