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권력에서 본 민족운동사

 

 늘날, 일제 강점기 당시의 민족종교와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관련 학계와 일반 대중들에게 월곡 차경석보천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천교가 독립운동과 민족종교운동을 했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와 근대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보천교의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각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이는 <문화정치>를 표방한 조선총독부의 발행 허가를 받은 동아일보를 비롯,
월곡보천교를 인정하지 않는 반대 세력들이 차경석을 ‘사교(邪敎)의 교주’ 혹은 ‘희대(稀代)의 사기꾼’으로 매도하거나 보천교를 ‘유사종교’라고 규정한 후 국권침탈로 깊은 좌절과 충격에 빠져있던 당대 민중들의 허탈한 정서적 공백기를 교묘하게 악용, 철저하게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주도 면밀한 공작 활동의 결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실례로 일제는 1915년 7월에 「포교규칙」 을 제정 및 공포하여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구분하고 공인종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관리하고 그 외의 종교는 경무국에서 치안유지 및 보안 차원에서 감시 및 단속을 했습니다.

 여기서 소위 공인종교(公認宗敎)란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와 불교 및 기독교를 말하며 기타 종교는 유사종교(類似宗銀) 혹은 사이비종교(似而非宗頻)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보천교가 오늘날 까지 유사종교 및 사이비종교로 세간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그 뿌리가 바로 이러한 일제의 민족종교 말살책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권력은 유사종교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 보았을까요?

 

 

『조선의 유사종교』 를 정리한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과 그 외 자료들을 통해 확인해 보자.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의 유사종교는 (중략) 최수운이 所天得道하여 동학이라는 이름의 宗旨를 創唱하면서 비롯되었다. 그 후 75년간 많은 유사종교가 속속 출현하여 (중략) 오늘날에도 67종에 달하고 있다…고 하여 그 시초를 동학에 두었다.

(중략)

무라야마 지준은 유사종교의 ‘사상적인 영향’ 을 다루면서도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농후하게 하였다’ 는 교단을 88개 교단 중 51개 교단을 헤아린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 식민권력에 협조적인 교단은 전체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히 적은 수였다. 곧 유사종교는 혁명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가능성이 농후하여 19세기 말의 동학혁명, 그리고 일제강점기 발생했던 3.1운동과 같은 반일운동으로 확산되기 쉬운 비종교적인 단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2)

*(2)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김철수, 동학농민 혁명이후 근대 민중운동, 2016

  

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사종교란 바로 동학에 뿌리를 둔 민족의식의 상속체(相續體)이자 본거지로서 일제 식민권력의 입장에서는 통치에 큰 장애요소가 되는 위협요인이기에 반드시 와해시켜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따라서 조선총독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민족운동을 표방한 단체 혹은 민족관련 단체에 대한 불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모든 공작 활동, 이를테면 유사종교라 못 박은 단체의 내부모순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조직의 분열과 이간을 유도해서 자멸을 획책하는 술책이 전방위적으로 자행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월곡보천교에 대한 세간과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가, 긍정보다는 부정에 가까운 것은 당시의 파괴공작이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혹은 그 이상의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자료는 총독부가 당시 언론을 이용해서 월곡보천교를 대중과 분리시키기 위해 기술적으로 어떻게 진실을 호도하고 이간질 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 1921년에서 1938년 사이에 동아일보에 실린, 차경석보천교에 관한 기사입니다.

 제목만으로도 차경석 또는 보천교 = 유사종교() 혹은 사이비 종교()’ 라는, 철저히 친일적인 관점에서의 반자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등식이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기사모음 16(1921~1929)

 ⊙ 동아일보 1921. 04. 07. 3면 - 태을교도 대검거, 안동에서 삼백명 이상
 ⊙ 동아일보 1921. 04. 26. 3면 - 선도를 표방하는 비밀단체 대검거
 ⊙ 동아일보 1921. 04. 30. 3면 - 태을교 두목 검거
 ⊙ 동아일보 1921. 05. 29. 3면 - 기도만 하면 상제까지 顯影, 태을교도 두명 안악에서 잡혀
 ⊙ 동아일보 1921. 05. 13. 3면 - 국권회복을 목적하는 태을교도 대검거
 ⊙ 동아일보 1921. 08. 06. 3면 - 太乙敎人의 獨立運動
 ⊙ 동아일보 1921. 08. 25. 3면 - 태을교를 표방하고 독립운동을 맹세한 단체
 ⊙ 동아일보 1921. 10. 07. 3면 - 갑자년을 기약하고 독립운동, 태을교도공소
 ⊙ 동아일보 1921. 10. 29. 3면 - 십만원의 독립자금
 ⊙ 동아일보 1921. 12. 19. 3면 - 태을교도 검거, 여주서의 손에
 ⊙ 동아일보 1922. 02. 21. 3면 - 怪敎太乙 甲子年 4월을 기하여 鷄龍山에 車皇帝
 ⊙ 동아일보 1923. 04. 06. 3면 - 치성금(致誠金)으로 십만원
 ⊙ 동아일보 1924. 04. 01. 2면 - 보천교에 군자모집 협의
 ⊙ 동아일보 1925. 11. 25. 2면 - 전후 십명 체포
 ⊙ 동아일보 1926. 11. 14. 2면 - 민족운동자금으로 삼십여만원 변출계획
 ⊙ 동아일보 1929. 07. 12. 2면 - 복마전(伏魔殿)을 차저서(찾아서)1 정감록의
 ⊙ 동아일보 1929. 07. 13. 2면 - 복마전(伏魔殿)을 차저서(찾아서)2 보천교 정체, 차경석 걸어 내란죄 고발
 ⊙ 동아일보 1929. 07. 14. 2면 - 복마전을 차저서(찾아서)3 보천교정체, 태을운수의 신설
 ⊙ 동아일보 1929. 07. 15. 2면 - 내란죄로 취조에 착수
 ⊙ 동아일보 1929. 07. 15. 2면 - 보천교 동산(動産) 대부분 강제경매
 ⊙ 동아일보 1929. 07. 16. 2면 - 복마전을 차저서4 보천교정체,
 ⊙ 동아일보 1929. 07. 17. 2면 - 복마전을 차저서5 보천교정체
 ⊙ 동아일보 1929. 07. 17. 2면 - 强制執行 맛난(만난) 車京石 差押物品은 競賣에
 ⊙ 동아일보 1929. 07. 17. 2면 - 차경석에게 우부소환장
 ⊙ 동아일보 1929. 07. 23. 2면 - 차경석을 소환 취조 전주로 사건이송
 ⊙ 동아일보 1936. 07. 02. 2면 - 慈城普天敎徒 경찰이 강압령
 ⊙ 동아일보 1938. 12. 08. 2면 - 보천교의 後裔(후예), 증산교간부
?名 (20명) 검거

  

천교의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일부 시각의 논거는 근대화와 자주화가 요구되는 당시에 패망한 왕조의 잔재라 할 수 있는 봉건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근대화라는 시대적 사명과 흐름을 역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상기(上記)의 신문기사 및 일제의 유사종교 정책 방향의 입장에서는 비록 침소봉대(針小棒大)이기는 하지만 일부 타당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천교의 핵심 활동 가운데 독립을 염원하는 국권회복을 비롯, 민족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인 만큼 영구 통치를 획책한 일제 식민 권력의 입장에서는 월곡보천교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천교의 조직운동이 1918년 10윌에 있은 ‘제주법정사 항일항쟁’의 배경이 되었고 l920년대 초반에는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 참가하는 일부 사회주의운동가들에게 보천교의 차윌곡(車月谷 이름은 京石)이 여비를 지원하였으며 김좌진 (金左鎭)에게 자금지원 (1922년도)을 한 정황도 있으며, 일명 워싱턴 회의(1921년도)를 앞두고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대태평양회의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에 보천교 대표 2명이 포함되기도 하였습니다.

1923년에는 보천교 대표 2명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이들은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보천교는 실력양성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특히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 를 발간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독립운동가 주익, 고용환,임규, 배치문,조만식,박자혜 등의 행적이 보천교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습니다.
3)

*(3)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 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판결문’을 중심으로, 안후상, 동학농민 혁명이후 근대 민중운동, 2016

  

근에 ‘독립운동관련판결문’(국가기록원) 이 일반에 공개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 에서 총35건, 301명은 보천교의 민족종교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하다가 검거, 기소된 분들입니다. 참고로 일제가 이 분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한 기소내용은 ‘제령7호’ 위반입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같은 해 4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를 제정해 독립운동가 및 독립운동 자체를 억압했습니다.

 제령 7호의 제1조는 “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하여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코자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고, 제2조는 “이를 선동한 자의 죄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중에서 다음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1권 (국가기록원) 중 대정8년 제령7호 위반 사건
  ? 관리번호 CJA00021725 문서번호 79473, 성명 이정호 외 3인

(2)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국가기록원) 중 대정8년 제령7호 위반사건
 ? 관리번호 CJA0017817 MF 번호 95-226, 성명 차경석

(3)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국가기록원) 중 불경, 내란, 사기 사건
  ? 관리번호 CJA0016722 MF 번호 93-809 성명 차경석

  

 아울러 일제는 차경석을 1910년대 ‘갑종 요시찰인‘ 에 편입하여 한민족의 반일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전면 차단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제 식민권력입장에서
차경석보천교는 동학계열의 종교단체 혹은 민족운동 단체들과 함께 철저히 탄압하고 없애버려야 하는 세력이었기에 사이비 유사종교(似而非 類似宗銀) 단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