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째 대웅전
안후상, 역사학자
내장사 대웅전은 내장사의 상징적 건축물이자 지역사회의 큰 자부심이다. 그런 대웅전이 지난 3월 5일에 큰불에 휩싸였다. 불길에 휩싸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대웅전이 메인뉴스로 등장하였다. 2012년 화마에 휩싸인 대웅전이 다시금 등장하기도 하였다.
2012년 화재를 두고서 실화다 또는 의도성 있는 방화다 등의 설이 난무하였다. 의도성 있는 방화라는 설 뒤에는 일부 승려들이 신종교 보천교 보화문을 옮겨다 지은 것을 큰 흠으로 여겼을 거라는 추측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2012년 화재 이후의 불교계는 나랏돈의 지원으로 대웅전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그러나 보화문의 석주(돌기둥)양식이 아닌, 목주 양식의 대웅전이었다.
내장사의 화재 사건은 금래의 일만이 아니다. 조선중기의 ‘내장산 승도탁란사건’(1539)은 내장산의 모든 사찰이 전소돼 버린 사건이다. 왕조권력이 내장산의 영은사와 내장사를 도적승의 소굴이라며, 3~4백 명의 승려가 거주하는 거찰을 전소시켜버렸다. 억불(抑佛)의 분위기가 확산하던 당시 왕조권력은 대규모 토목공사에 승려들을 동원하기 위해 도첩제(度牒制)를 부활하였다. 토목공사에 동원된 이들에게 승인호패(僧人號牌), 즉 승려증을 난발하면서 자질없는 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었고, 더블어 사찰 경제는 열악해졌다. 이러한 사정은 승려들의 일탈을 부추겼고, 왕조권력은 이러한 일탈을 빌미삼아 내장산의 사찰을 전소시켜버린 것이다.
조선후기 판소리 이론가 신재효(申在孝)의 ‘내장사 대웅전 상량문’(1872)에는 “내장산 영은사가 네 번 불에 타고 다섯 번 중건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신재효가 쓴 상량문의 대웅전이 5번째라는 것이다. 5번째는 문살이 화려한 3칸 다포계 맛배지붕의 웅장한 대웅전이다. 그런 대웅전이 1937년에 불에 타버렸다. 그때도 주지 임면 문제로 갈등이 고조돼 있었다.
당시에도 내장사는 전국의 탐승단들로 성황이었다. 그런데 핵심인 대웅전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이다. 그때 주지 매곡(梅谷)이 대웅전을 신속하게 건립하니, 6번째 대웅전이다. 6번째 대웅전마저 한국저쟁 때에 불에 타버렸다.
1957년에 내장사 주지 야은(野隱)은 보천교의 정문 보화문(普化門)을 가져다 대웅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1958년 주지 다천(다천)당시 완공을 본 7번째 대웅전은 하얀색 석주가 독특하였다. 그런 7번째 대웅전마저 2012년에 불에 타버렸다. 그 뒤에 나랏돈의 지원을 받아 건립한 나무기둥이 8번째이다.
앞으로 건립될 9번째 대웅전은 나랏돈의 지원 없이 건립해야 한다. 한국불교계, 특히 사찰을 지키는 승려들이 무능하고도 부도덕하다는 인식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9번째 대웅전은 불교계의 손으로 직접 건립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사회 일반에서 한국 불교계를, 그리고 승려들을 다시금 신뢰하게 될 것이다. 800여 년 전 보조국사 지눌이 한 말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서남저널」 노령산책, 광장, 2021년 5월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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