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 중앙 총정원 普天敎 中央 總正院 보천교 중앙 총정원 보천교 중앙 총정원은 강일순 증산 상제님을 교조(敎祖)로 하며 차경석 월곡 성사님을 교주(敎主)로 모시면서 교(敎)의 전통적인 종교 예식을 따르는 이른바 보천교 원형을 보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제세 9년(1901∼1909) 동안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하여 ‘옥황상제의 권능으로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시고 우주의 조화권능으로써 천지의 모든 일을 새롭게 계획’하셨습니다.
이는 혼란하기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원시반본과 해원.상생.보은 정신으로 뜯어 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 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신 ‘후천선경後天仙境’시대의 개창이자, 신 인류문명의 선포이셨습니다.
1909년 교조敎祖이신 강일순 증산상제님께서 화천 하신 후 월곡 성사聖師께서는 동년 7월 이른 바 ‘봉명개훈奉命開訓’의 새 운수를 여시었고 후천 5만년 대도를 세상에 펴시는 포교와 수련의 법방을 펼치셨습니다. (포교布敎 1년, 기유(己酉)년, 서력 1909년)
1920년 교단의 재정비로 60방주方主가 포함 되는 도체가 조직되었고 1921년에는 경상남도 황석산黃石山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올리며 국호國號를 '시국'時國, 교명敎名을 '보화교'普化敎로 고告 하였습니다.
1922년 발표된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仁義입니다. 인仁으로써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종시終始가 되는 것입니다. 사대강령四大綱領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이며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은 대동大同입니다.
당시 보천교의 교세는 매우 확대되어 간부급만도 50만 명을 넘었고 일반신도는 6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정화사, 보천교 중앙 총정원
보천교는 후천선경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18년 제주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주도가 보천교인이었으며, 대 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에 2명의 대표를 파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5만원을 지원하였습니다.
김좌진 부대에 2만엔을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으로 1만엔을 지원하였고, 의열단, 국민대표회의 등에도 참여하였으며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는가 하면,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산업계’를 발간하였습니다. 아울러 당시 굴지의 언론 매체였던 ‘시대일보’를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정읍 대흥리에 위치한 십일전을 위시로 한 보천교 중앙본소는 50여동의 큰 건물들로 구성되어 ‘신정부’의 수도로 인식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물산 안쓰기, 토산 장려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운동을 전개하였고 상가와 공장들이 들어섬으로써 현재까지도 방직공업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의 2022년 자료를 기준으로 약 404명의 보천교인이 독립운동가로 재판을 받았으며, 이분들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157명이 지정되셨습니다. 이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에 비해 훨씬 많은 독립유공자 수를 나타냅니다.
1936년 월곡 차경석 선생님께서 화천하시자 일제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구실로 보천교 본소에 형사대와 헌병대를 주둔시키고 일체의 종교모임과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보천교재산처리위원회’라는 유령 단체를 통해 보천교를 해체하였습니다.
이후 잔존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종교 단체의 이름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왔고 1945년 해방이 되자 해체된 십일전(十一殿) 터에 남아 있던 부속건물을 본부로 하여 포교를 계속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종파들로 구분되어졌으나 보천교 원형을 따르는 많은 분들이 지금도 월곡성사의 위패가 모셔진 정화사(井華祠)에서 보천교 전통에 따라 종교의례을 행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