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갤러리





양반문화의 상징 경상도의 ‘누정문화’와 서민문화의 상징 호남의 ‘모정문화’ (연재7편), 김재영

관리자 0 570


양반문화의 상징 경상도의 ‘누정문화’와 서민문화의 상징 호남의 ‘모정문화’

 

 

누정이 양반들의 유유자적한 ‘관음문화(觀吟文化)’라면 모정은 ‘노동문화’라 할 수 있다. 모정은 시정, 유산각, 농청, 동각, 양청(凉廳)과 같은 명칭으로 두루 쓰였지만 역시 주류를 이루는 것은 ‘모정(茅亭)’이다. 헌데 누정이나 모정의 ‘정’자가 ‘솟을 정’, ‘우뚝 솟을 정’으로 쓰이기도 해서 ‘정정(亭亭)’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말이 건축 용어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f698ebe213efd9417b5f7662ae4dd809_1760605

* 정읍시 칠보면 동편마을에 있는 모정과 노거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원 느티나무의 빨간색 단풍과 새끼 느티나무의 초록색, 익어가는 노란 벼의 색깔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빨간색과 초록색을 섞으면 노란색이 나오는데 그 사이에 노란 가림막으로 둘러쳐진 모정이 보인다. 필자의 고향마을이다.(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모정 주변은 그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보통 느티나무 아니면 팽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주종이 느티나무다. 모정은 어렸을 적 ‘모종’이라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정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정이 아닌 모종으로 구분해서 불렀을 것이다. 모정은 글자 그대로 ‘띠’로 엮는 초가지붕이다. “띠‘로 집을 지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면 모옥(茅屋)이라 해야 맞다. 「상춘곡」에 나오는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 앞에 두고“의 그 모옥이다. 모정은 새마을운동 이후에 슬레이트나 양철지붕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요즈음엔 하나같이 모두 기와를 올리고 있다. 이를테면 모정이 ‘와정(瓦亭)’이 돼 버린 셈이다.

 

 

누정과 모정의 분포

 

모정은 전라남도 지방에 분포도가 높다. 전라북도에도 많이 있지만 금강을 건너 충청도 부여로 접어들면 모정이 보이지 않는다. 또 섬진강을 경계로 전라남도 곡성에서 경상남도 하동으로 접어들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호남지방에만 모정이 발달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농사짓는 평야지대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호남은 모정과 누정이 함께 공존하는 지역이다.

 

모정과 구별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모정에 준하는 공동체 장소는 있었다. 모정의 다른 이름인 동청, 농청, 농정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집회소는 농사의 대소사를 토론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겨울철에는 젊은 두레꾼들이 모여서 악기를 배우거나 멍석 짜기 등으로 소일하던 공간이었다.

같은 농사지대라도 경상도에서는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평상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같은 호남 지역이라도 섬이나 산간 지방에는 모정이 드물다. 평야지대가 ‘모정문화’의 중심 권역이다. 경상도는 전라도에 비해 누정이 압도적으로 많다. ‘좌안동 우함양’으로 부를 정도로 두 지역은 영남 사림의 본거지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두 지역에만 현재 100여 개가 넘는 정자와 누각이 남아 있다. 함양의 유명한 정자인 농월정(弄月亭)이 화재로 없어졌지만 현재 동호정(東湖亭)과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등이 여전히 건재하다. 군자정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양반문화가 발달했던 함양에서는 오늘날 민가에서도 그 영향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분명 농촌주택인데도 대문이 ‘솟을대문’을 본 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솟을대문은 말할 것도 없이 권위의 상징이다. 프리미엄 아파트의 정문이 바로 이 솟을대문을 본 딴 것이다.

 

 

f698ebe213efd9417b5f7662ae4dd809_1760605

* 경남 함양 운곡리에 있는 어느 민가의 솟을대문. 콘크리트 벽체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봐서 1980년대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정의 역할과 기능

 

모정은 쉼터이자 집회장소다. 어렸을 적 기억이다. 한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목침을 손에 들고 몰려드는 마을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모정은 또 남성들만의 공간으로 여성들이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마을이 생기면서 모정 주변에 심었던 느티나무는 어느 덧 마을의 역사가 되고, 그늘이 되고 당산나무가 되어 당산굿을 치르는 종교 중심 터가 되기도 했다. 또 그네를 타는 동네 사람들의 공동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모정의 구조가 어른과 젊은이를 구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조적으로 높낮이가 큰 차이를 보이진 않지만 마룻바닥의 높낮이를 달리 해서 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높은 곳에서, 그보다 젊은 사람들은 아래쪽에 있도록 공간을 구분해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다. 어른과 젊은이들이 섞이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모정은 마을에 들어오는 외부인들을 감시하고 경계하는 초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잘 모르는 타관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오게 된 목적을 꼬치꼬치 묻고 그 의심이 풀려야 만이 따뜻한 환대가 이뤄졌다. 한편으로는 부정한 기운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상여가 마을 입구를 지나지 못하게 하는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힘자랑을 할 수 있도록 모정 주변에는 무거운 ‘들독’이 있었다. 

 

 

모정과 시정, 어떻게 다를까

 

정읍시 이평면 서산리 서산마을에 가면 ‘시정(詩亭)’이라는 게 있다. 통상 모정이라고 부르지만 모정과는 사뭇 격이 다르다. 지붕에 기와가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자라 하지 않는다. 정자보다는 그 규모가 작고 편액도 없기 때문이다. 

 

 

f698ebe213efd9417b5f7662ae4dd809_1760605*누정형 모정이다. 기와지붕을 하고 있으나 정자보다 규모가 작은 모정형태의 집이다. 논 가운데 있다. 이것이 바로 정자로 볼 수 없는 이유다.(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 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으로 조선 중기 도학자인 권극중(權克仲, 1585-1659) 선생의 탄생지이자 증산교조인 강일순(姜一淳)의 외가마을로 알려져 있다. 증산의 어머니 권씨가 권극중의 9대손이 되는 것을 보면 증산의 사상 형성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법하다. 

 

마을 논 한 가운데에는 안동 권씨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은 시정이라 불리는 모정이 자리하고 있다. 논 가운데 있으니 논에 물을 대고 벼가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에서 오는 피곤함을 풀기 위해 지은 것이 분명하다. 이곳 시정은 모정과 정자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시정은 안동 권씨들이 지은 것인 만큼 그 후손들만 출입한다니 요즘 세상에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마을 입구에 타성바지들이 별도로 지은 모정이 따로 있다.

 

 

 

《참고문헌》

 

박언곤, 『한국의 정자』, 대원사(서울), 1989.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송화섭, 『전라문화 바로보기』, 신아출판사(전주), 2003.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인문학 99강』, 대성인쇄기획(정읍), 2018.

김재영, 『정읍을 이야기하다 정읍을 노래하다』, 도서출판 기역(파주), 2021.

최영록, ‘나의 영원한 독서당, 임실 찬샘마을 원천정’, 『어머니』, 낮은문화사(서울), 2024.

 

 

Comments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