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에서 발생된 ‘동학’과 정읍에서 터진
‘동학농민혁명’
19세기 농민 봉기는 대개 한 군현을 단위로 일어나 그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삼정의 폐단과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그쳤다. 만약 군현 단위를 넘을 경우, 이는 반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현의 수령들을 징치할 수는 있었어도 살던 지역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농민봉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대규모의 농민항쟁이었다. 19세기에 일어난 다른 농민봉기와 고부봉기가 같은 시대적 조건에서 일어났지만 규모와 내용, 성격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농민의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운과 증산의 사상을 이은 차월곡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뿌리가 동학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경주에서 발생된 동학이 어떻게 해서 고부에 와서 혁명으로 터지며, 증산교와 보천교로 이어지는지 궁리할 필요가 있다. 큰 틀에서 이야기하면 ‘훌륭한 이념이나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법’이지만 단순히 그렇게 설명하고 넘어가기엔 뭔가 부족하다. 인문학이란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 ‘본질’을 파악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수운의 개벽사상을 이은 증산
수운은 자신이 도를 깨우치기 이전까지를 ‘선천(先天)’으로, 그 이후 다가올 5만년 까지를 ‘후천(後天)’의 개념으로 잡았다. 수운이 주장하는 ‘개벽’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로 이루어진다. 이를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하였다. 수운은 봄을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며 때가 되면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올 것이다. 인간은 그에 대비하여 ‘수심정기(守心正氣)’하라는 것이었다.
증산은 수운과 달리 자기가 살았던 시기를 시점으로 그 이전을 ‘선천’, 그 이후를 ‘후천’으로 보고 선천의 특징은 ‘상극(相剋)’으로, 후천의 특징은 ‘조화(造化)’로 규정했다. 수운의 개벽사상은 증산의 ‘천지공사’ 또는 ‘개벽공사’로 이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증산은 수운이 주장한 것처럼 단순히 기다리기만 해서 개벽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후천의 새로운 질서인 ‘상생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새 세상을 여는 일에 앞장 설 것을 강조했다. 증산은 개벽되는 새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이미 완벽하게 구성한 만큼 이를 실제 역사로 드러내는 일은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꾼들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증산은 결혼 후 처남인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서당을 개설하고 한문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증산이 서당을 그만두고 인생의 항로를 과감하게 바꾸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에 있었다. 증산은 동학의 실패를 딛고 일어나 새로운 구원방법으로 새 종교운동과 사상운동을 펼칠 것을 마음먹은 것이다.
증산은 수운의 후천개벽뿐만 아니라 동학의 주문과 조직,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다. 증산의 24명의 제자 가운데 12명이 동학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수제자였던 김형렬(金亨烈)은 동학군을 쫓아 청주공방전에 참여했던 인물이며, 김경학(金慶學)은 시천주(侍天主) 수련을 하던 동학신자였다. 박공우(朴公又) 역시 열렬한 동학신자였으나 증산의 행적과 법언에 감화되어 증산의 가르침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5월 친구인 차월곡의 안내에 따라 증산을 따르게 되었다. 보천교를 창시한 차월곡의 부친 차치구(車致九)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읍접주로 고부봉기와 전주성 점령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김경학(金京學)도 시천주를 수련하던 동학신자였다.(이강오).
![]()
* 차치구의 위패, 황토현전적지 내 구민사 중앙 상단의 맨 끝에 있다. 왼쪽에 최경선과 김인배의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1907년 증산이 만든 대표적인 주문인 5주(五呪)에 동학의 강령 주문이 2개가 포함되어 있다. 세 번째 주문은 동학의 독특한 용어인 정성과 공경과 믿음의 성(誠)·경(敬)·신(信)이라는 용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수운은 하날님을 모시는 올바른 태도가 곧 성·경·신이라고 말했다.(김탁).
동학의 포교조직은 한 사람이 6명의 연비(聯臂, 내게서 도를 받은 사람)를 두는 피라미드 조직이다.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에 보이는 육임은 동학의 기본조직인 육임을 자신의 포교조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산은 스스로를 수운의 ‘사상적 후계자’요 후천개벽의 ‘실천적 계승자’라고 말했다. 그가 수제자인 김형렬(金亨烈)의 집에 머물면서 만국의 병든 중생을 다 치유하겠다는 것은 수운의 이른바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뜻으로, 그리고 만국약국이라는 뜻으로 ‘광제국(廣濟局)’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온 생명의 병든 상처를 치료하고자 하였다. 증산은 이러한 의법을 통해서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치질과 횃배, 안질, 설사, 소한두통, 장병(長病), 급증 등 무려 60여 가지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증산의 이러한 의통제세(醫統濟世)는 후천개벽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증산사상을 계승한 차월곡의 후천개벽사상
증산의 개벽사상은 보천교를 창시한 차월곡에 의해 계승되었다. 보천교에서 증산이 화천(化天)한 1909년을 포교원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증산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보천교연혁사』). 또 월곡이 수운의 개벽사상을 계승했음은 일찍이 월곡의 부친인 차치구(車致九, 1851-1894)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정읍지역의 접주로 활동을 했고, 전봉준과 혁명의 전과정을 같이 했을 뿐만 아니라 혁명의 주요 과정에서 아들인 경석을 반드시 데리고 다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차월곡은 동학과 부친인 차치구의 혁명사상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을 것이다.
이밖에도 차월곡이 수운과 증산의 사상을 계승했을 것이라는 근거는 많이 있다. 보천교에서는 일종의 노동조합인 ‘기산조합(己産組合)’을 만들어 정읍에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보천교에서 직물공장을 비롯, 농기구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을 세운 것은 보천교인들의 ‘종교공동체’이자 ‘경제공동체’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왜산 물건을 쓰지 않겠다는 민족적 사고의 산물이기도 했다. 이러한 발상은 있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서로 돕고 아껴야 한다는 수운의 이른바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신을 본 딴 것이다.(김재영).
〈자료 1〉 수운과 증산사상을 계승한 월곡 차경석, 어떤 인물인가
일제강점기 보천교를 창시했던 차월곡은 종교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병행하였다. 당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 진주 사람이 차월곡을 만나고 느낀 소회를 적은 글이 있다. 그는 「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라는 제하의 글에서 자신을 ‘비봉산인’이라고만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차씨를 보려고 정읍에 가기는 금년(1923) 4월 중순경이다. … 나는 본래 종교보다도 정치에 취미를 많이 두고 또한 차씨를 종교적 인물로 보지 아니하고, 정치적 인물로 본 고로 보천교에 대한 진리여하는 묻지 아니하고 먼저 시국문제를 말하였다. … 장래 조선이 독립되고 보면 무슨 정체(政體)를 쓰는 것이 좋으냐? 고 물었다. 차씨는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것은 그때 일반 인심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라.” 한다. … 세상 사람은 차씨를 일개 미신가요 또한 무식자로서 다만 우민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결여했다 하더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 외 엄격한 태도와 정중한 언론은 능히 사람을 감복케 할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요, 상당한 식견이 있다. … 그를 차천자라 하는 것은 결코 그가 자칭한 것이 아니요 몽매한 교인과 비소(鼻笑)하는 세인이 칭호한 것이지만 그의 여러 가지 용사(用事)하는 것을 보면 제왕될 야심이 만만한 것을 추측하겠다.
좀처럼 일반인들에게 면회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차월곡을 직접 대면하고 쓴 이 글은 소문과는 다른 차월곡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월곡을 ‘종교 지도자’가 아닌 ‘정치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또 재가수행모임인 선도회(禪道會)의 초대 지도법사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1905-1990) 스님이 보천교를 창시한 정읍의 차천자를 직접 만나고 난 뒤의 소회를 적은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 것은 전라북도 정읍에 갔을 때 보천교 교주인 차천자를 만난 일이다. 본명은 차경석(車京石)인데 자칭 천자였다. 나는 이 사람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 때 본관(大法堂)이 준공되었으나 도 경찰국에서 허가해 주지 않으므로 개관은 못하고 폐문하고 있었으나 특정인에게는 보여주었다. 불교법당처럼 꾸몄는데 부처님을 모시지 않으니 그 자리는 차천자가 앉을 것인데, 과연 천자 자리 같았다. 규모가 웅장했다. 결국 개관도 못하고 차천자 사망 후 보천교가 해산되었다. 그 건물은 서울에 옮겨졌고 현재 조계사 대법당이 그것이다. 이튿날 아침 면회했다. 몸은 뚱뚱하고 큰 상투에 대갓을 쓰고 얼굴은 구릿빛으로 까만 수염이 보기 좋게 나 있었다. 그 풍채가 과연 만인의 장 같았다. 저렇게 생겨야 무슨 일이고 할 수가 있구나 싶었다. 우선 체격이 좋고 외모가 잘 생겨야 협잡도 크게 해 먹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첫 말에 불교는 포교가 자유롭지만 보천교는 경찰의 제재가 심해서 애로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일제 때 사이비종교의 탄압이 심했다. 독립운동을 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이런 풍문이 있었다. 차천자가 머지않아 등극하면 벼슬자리를 준다는 말을 믿고 전답을 팔아서 바치고 그 벼슬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신앙도 이 정도에 이르면 오히려 편할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런 사이비종교가 있었고 해방 후 경향 각지에 이런 종사가 발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 글에서 이희익은 보천교의 창시자인 차월곡의 당당한 풍채를 묘사하고 있다. 또 보천교는 종교를 가장한 독립운동 단체로서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이비종교가 아닌가 하는 상반된 두 가지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앞에서 인용한 두 자료를 종합해서 볼 때 차월곡은 정치적인 야심이 만만한 인물로 종교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신종교에서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는 점은 이들 종교의 발생 시점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신종교 가운데 ‘후천개벽적’인 요소가 들어있지 않은 종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사상은 바로 ‘미륵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대표적 신종교의 하나인 증산교의 경우, 증산의 법언 속에 미륵신앙의 요소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 같은 미륵신앙 현상은 이미 연구결과에 나와 있듯이 봉남계의 신종교, 불교계의 신종교, 단군계, 수운계 심지어 기독교 계열의 신종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종교 속에 미륵신앙이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것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민중의 염원과 바람에 부응하고자 종교가 창립되었다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차월곡이 갑자년에 천자로 등극한다는 이야기를 유포하고 이를 믿는 자에게 새 정부에서 관직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은 미륵신앙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보천교의 1924년의 ‘갑자등극설(甲子登極說)’에 대한 구상은 가깝게는 동학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을 변형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도들은 ‘갑’자가 들어가는 해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수운이 새로운 갑자년(1864)에 이 세상에 큰 변화가 올 것을 예언하면서 그 핵심은 무극대도가 출현하는 일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차월곡의 ‘갑자등극설’은 수운이 예언했던 1864년 갑자년에서 정확히 60년이 되는 해이다.
맹자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의 ‘순환사관’을 주장하였다. 역사는 일정한 주기로 왕도(王道)에 의한 ‘치’와 패도(覇道)에 의한 ‘란’이 반복된다는 순환사관이다. 그 주기를 500년으로 잡고 있다. 1894년은 조선왕조 500년이 지난 ‘갑’자가 들어가는 첫 해이다. 보천교인들은 1918년 무렵부터 1924년 갑자년이 되면 차월곡이 조선의 새 황제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1921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에 ‘갑자년을 기약하고 독립운동, 태을교도(太乙敎徒) 공소’라는 제목의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여기서 태을교는 보천교를 지칭한다.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 191번지 이주범 외 네 명은 모두 태을교에 들어서 허무황당한 말을 믿고 조선독립운동을 하다가 … 이주범은 오년 전에 태극교에 가입하여 신앙하던 중에 삼년 전에 … 그 교의 간부인 백남구와 만났을 때에 그의 말이 태을교로 조선독립을 도모하면 오는 갑자년 봄에는 태을교주 차경재(필자 주 차경석)가 조선황제가 되고, 교도는 각각 상당한 벼슬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 신자 총계가 5만 7천 7백 인이 되면 일제히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하고, 운동비로 수 백 원을 모은 것이 발각되어 체포된 것이라더라.
태을교인들의 신앙의 목표가 바로 ‘조선의 독립’이었다는 말이다. 태을교를 믿는 것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고 믿은 것이다.(김탁). 태을교는 보천교가 교명을 세상에 공표하기 이전에 지칭되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24년 차월곡은 갑자등극설에 이러한 맹자의 순환사관을 구체화시켜보고자 한 것이다. 차월곡은 증산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정치적으로 확대 해석하였다. 그가 등극한다는 ‘갑자년 갑자월 갑자시’는 동양 역법의 시초가 된다는 상징성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을 일제는 1920년 4~5월로 보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있었다.
차월곡은 이러한 일반의 민중 심리를 이용하여 1924년 ‘갑자등극설’을 유포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갑자년은 60갑자의 첫 시작을 알리는 해로써 다른 해보다 더 의미가 부여되었을 것이다.
보천교의 이러한 예언은 후천개벽운동이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믿어졌다. 보천교가 일제강점기 특히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의 시기에 급격하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일제의 강점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와 투쟁으로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곧 새 왕조가 보천교의 교주 차월곡을 중심으로 세워져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는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은 일종의 ‘정신적 차원의 독립운동’이었던 셈이다.(김탁).
차월곡은 2024년 11월 정읍시의 ‘이달의 역사인물’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동경대전(東經大全)』 「환도유심급(歡道儒心急)」.
비봉산인, 「정읍의 차천자를 방문하고」 『개벽』제10집 38호, 1923.
오지영의 『동학사』, 박문사, 1940.
이상호, 『대순전경(大巡典經)』, 원광사, 1948.
보천교 중앙총정원, 『보천교연혁사』(상·하·속편), 1948, 1958.
유병덕, 『한국민중종교사상론』, 시인사, 1985.
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평민사, 1985.
윤이흠, 『한국종교연구』제2권, 집문당, 1988.
김탁, 『증산교학』, 미래향문화, 1992.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 1992.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감』, 대흥기획(서울), 1992.
김지하, 『동학이야기』, 솔, 1994.
김탁, 「증산 강일순의 공사사상」,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논문,1995.
한국종교연구회, 『한국종교문화사 강의』, 청년사, 1998.
유병덕, 『근·현대 한국종교사상 연구』, 마당기획, 2000.
김탁, 『동학과 증산교의 만남』, 한누리미디어, 2000.
황선명, 「잃어버린 코뮨」, 『신종교연구』제2집, 한국신종교학회, 2000.
박영재, 『이른 아침 잠깐 앉은 힘으로 온 하루를 보내네』, 운주사, 2001.
이찬구, 「동학주문의 성격과 한국신종교에서의 수용」, 『한국종교사연구』제10집, 2002.
나권수, 「대순진리회의 정신개벽론 연구」, 『신종교연구』제25집, 2011.
전라북도·정읍시,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자료집』1, 기역, 2017.
김탁, 「보천교의 예언사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학술대회, 2017.
김재영,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2018.
김탁, 『증산천사공사기 연구』, 민속원, 2022.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연구」, 전남대학교박사논문, 2022.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후천개벽운동과 ‘정읍’」, 노령역사문화연구원 제2차 학술대회, 2023.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산책』, 선인(서울),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