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의 ‘여근곡(女根谷)’과 전북 정읍의 ‘남근석(男根石)’
‘닮은 것이 닮은 것을 낳는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이라는 게 있다. 민속 중에 특히 성기와 관련된 것이 많다. 전주 금암동에 가면 ‘공알바우’가 있다. 이 바위 언저리를 헤쳐 놓으면 뒷 검암리 여자가 바람난다 하여 앞 검암리에서는 헤쳐 놓고, 뒷 검암리에서는 묻어 놓기가 바빠 동네 편싸움이 심했다는 기록이 있다.(『한국지명총람』). 고창과 임실에도 마을 뒷산에 그런 바위구멍이 있고, 그곳을 막대기로 휘저으면 동네 처녀들이 바람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속칭 ‘넉매’라고도 부르는 정읍 진산마을 앞산에도 ‘할미바위’가 있어 풀과 흙으로 가려진 이 바위가 드러나면 여자들이 바람난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굿을 하고 잔디를 다시 입혔다. ‘할미바위’의 가운데 부분이 여자의 음부로 마을 청년들이 여기를 나뭇가지로 쑤신 뒤 마을 처녀들이 상사병을 앓게 되었다는 구전이 있다.
신라 선덕왕이 예언했다는 경주의 여근곡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음경이 너무 커서 배필을 구하지 못했다는 지증왕의 이야기가 나온다. 임금의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이 ‘지대로(智大路)’다. 도대체 얼마나 컸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며, 임금의 내밀하고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은 것인가. 키도 그렇지만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고민되는 것이 아마도 성기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형 성기를 가졌다고 알려진 사람들은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찰리 채플린(1889-1977)과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1850-1893), 세계적인 갑부 선박왕 오나시스(1906-1975)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사이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니 기록된 것만 가지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無理)가 따를 수밖에 없다. 1척 5촌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대략 45㎝ 정도의 그 크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보다 작았다고 하는 경덕왕의 남근 길이가 8촌으로 24㎝이었다 하나 이 역시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필시 남근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임금 모두 다른 임금의 절대 권력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쓴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신라 땅 경주 월지(일명 ‘안압지’, 국가사적)에서 모두 넉 점의 소나무로 만든 남근이 발견되었다. 길이가 17.3㎝이니 이것도 발기되었을 때의 한국인 남자성기의 평균 사이즈를 훨씬 넘는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 성기의 귀두부분에 콩알 같은 돌기를 새겼는데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이다. 신라인들의 성문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이에 반해 여근과 관련된 이야기가 역시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백제군사의 침입을 ‘여근곡’을 통해서 예언했다고 하는 선덕왕 덕만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야기에 앞서 선덕왕에 대한 오늘날의 인식 또한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어 흥미롭다. 선덕왕은 최초의 여성 국왕이다. 2003년 연말 한 언론사에서 10만 원 권 고액화폐에 들어갈 인물 초상화를 여성으로 할 경우,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 묻는 조사가 있었다. 신사임당이나 유관순일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달리 의외로 선덕여왕이 꼽혔다.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여자로서 국왕에 오른 점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한 겨울에 영묘사라는 절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개구리 떼가 사나흘 간 울어댔다. 이에 왕이 정예병사 2,000명을 급히 풀어 마침 여근곡에 숨어 있던 백제병사들을 습격하여 죽였다는 것이다. 임금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선덕왕이 답했다. “개구리는 성난 군사의 모습이다. 옥문은 여인의 음부로 여인은 음양으로 치면 음이 되며, 색깔로 치면 흰색이 된다. 흰색은 방위 상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바로 알았다”고 했다.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왕이 남들보다 뛰어난 지혜가 있었음을 칭송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쓴 김부식은 “여자가 왕이 되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혹평했지만 이 때가 신라문화의 전성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룡사구층목탑, 분황사탑, 첨성대 등이 모두 선덕왕 때 만들어졌고 이때 활동했던 스님이 바로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다. 여왕의 지혜가 담긴 이 이야기는 여왕이라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오래 전 이하석이 쓴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에 여근곡에 대한 설명을 아주 상세하게 해 놨다. 여기에 그 이야기를 줄여서 옮긴다.
“대구에서 경주 가는 고속도로를 달려 건천 못 미쳐 아화터널을 빠져 나오면 부산(富山) 골짜기에 여자의 성기를 쏙 빼 닮은 작은 산이 하나 보인다. 이곳이 여근곡으로 속칭 ‘음문골’, ‘보지골’로 불린다. 이 산의 샘을 작대기로 쑤시면 동네 처녀가 바람난다는 전설이 있어 그동안 동네 어른들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져 왔다. 조금만 감시가 소홀해도 이 동네 처녀들의 바람기를 부추기기 위해 타동네 총각들이 이 골짜기에 몰래 들어와 작대기로 휘젓기가 예사였다.”
헌데 오래 전에 이곳이 이 동네 상수도의 수원지가 되었다. 이 공사를 놓고 동네 노인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터. 아마도 이 샘이 상수도 수원지가 됨으로써 동네 전체가 여자의 그곳에서 나오는 음수를 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세가 마치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그것이 흉하게 보였을 것이다. 흉한 산세는 남자들의 양기를 위축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반대편에 남성을 상징하는 돌을 세워 음기를 누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과거보러 가는 선비가 이 길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어 반드시 떨어졌다니 아무리 오래 된 옛날이야기라 하더라도 요즘 여성들이 들으면 사열날 일이다.
책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표지 모델이 된 정읍 원백암 마을의 남근석
경주 여근곡과 반대로 남근석으로 유명한 마을이 정읍에 있다.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 마을 입구에 수령이 300~400년은 족히 되었을 큰 느티나무 옆에 높이 165cm, 둘레 88cm의 화강암으로 잘 다듬어진 ‘자지바우’가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ㅈ바우’ 또는 ‘개조ㅈ바우’로 부르기도 한다. 이때의 접두어 ‘개’는 개살구나 개복숭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종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상품으로 치기엔 볼품없는 것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단어다. ‘점잖은 사람’이 그대로 따라 부르기에는 좀 남사시러운 표현이다. 점잖은 사람은 젊지 않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일본에서 어른스럽다(大人しい=おとなしい)는 말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니 ‘남근석(男根石)’이라 부를 수밖에.
이렇게 마을 입구에 훔쳐보지 않아도 되는, 드러내 놓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남근석을 설치한 것은 아들 낳기를 바라는 기자신앙(祈子信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아낙네들이 남근석 주위를 돌면서 큰 절을 네 번하고, 이것을 안아주면 아이를 갖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믿음이 참 소박하다. 인구가 감소되면서 지방도시가 소멸하고 있다. 불임부부는 물론 이제 모두가 당산석과 당산나무에 가서라도 빌어야 할 참이다.
* 정읍 칠보 원백암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와 남근석. 완벽하게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백암리 남근석은 이 일대에 대추나무가 많아 원래 ‘숲정이’로 불렸던 곳이다. 나무가 많아 한때는 ‘애장터’라 하여 어린 애가 죽으면 망태기에 넣어 나무에 걸어두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당산나무나 남근석을 함부로 다루면 눈이 먼다는 속설도 함께 전해진다. 당산나무 옆에는 장승 모양의 당산석이 있고 남근석 바로 앞에는 여음석이 있었다 하나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대신 옆에 있는 느티나무가 여음을 대신하고 있다. 남근석과 여근목은 마치 음양을 상징하듯 당산나무 한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고, 봄이 되면 이곳에 어김없이 싹이 트고 있다. 전국에 남근과 여근을 숭배하는 지역이 많이 있지만 남근과 여근을 상징하는 것이 한 자리에 있는 곳은 아마도 이곳 백암리가 유일할 것이다.
문화란 굽고 구부러진 것을 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백암리 남근석을 보고 ‘빈약하다’고 말한다. 88cm의 두께를 보고도 빈약하다니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남근석보다 더 두툼한 좌대 같은 돌 위에 얹었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이다. 나는 88cm의 둘레에 ‘팔팔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거기에 걸맞게 민속학자 주강현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근석’이라고. ‘리얼리티의 극치’라고.

* 위(여자나무), 아래(남자나무), 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목포 유달산에 가면 ‘여근목(女根木)’에 해당하는 여자나무가 있다. 수종이 팽나무속 ‘폭나무’라는 것도 생소하지만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여자의 거시기와 닮았다. 이것이 화제가 되다 보니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남자나무로 보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졌다. 유달산에 가서 이것을 못보고 온다면 답사에 의미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에 성박물관이 있다. 관람료가 상당히 비싼 편이다. 세워질 당시에는 다들 민망하다고 하더니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이란 게 원초적인 것에 대한 관심만큼 더 큰 것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먹는 것과 성(性)스러운 것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잘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다. 제주도에서 어떤 소재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했는지 잘 모르나 우리는 이렇게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도 활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 제주성박물관 입구(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더욱 아쉬운 것은 문화재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원래 논 가운데 있던 할아버지 당산이 아무런 고증 없이 남근석 옆에 있는 할머니 당산 맞은편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할머니 당산이 있는 곳이 원래는 고추밭이었고, 할아버지 당산이 있는 곳은 물이 있는 논 속이었다. 고추밭과 논 속의 물, 참으로 절묘하다. 완벽하게 음양의 조화를 갖췄다. 그러던 것이 방문객들이 자주 찾다보니 이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는지 어느 날 갑자기 논 속에 있던 할아버지 당산이 튀어나와 할머니 당산 맞은편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누군가 그랬다. “문화란 굽고 구부러진 것을 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있다.”고.
정읍 칠보 원백암 마을의 ‘농바우’
원백암 마을 동쪽 진등재에 여자 음부를 쏙 빼 닮은 ‘농바우’가 있다. 바위 틈새에 항상 물이 흐르기 때문에 ‘농바우’라 한다. ‘민들바위’ 또는 ‘보지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부르기 민망하지만 오래 전에는 분명히 그렇게 불렀다. 바위가 있는 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습한 곳이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농바우’ 맞은 편이 당산제로 유명한 북면 오류리 마을로 이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류리 사람들은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농바위에 열심히 흙을 덮고 잔디를 씌우지만 비가 오면 허사되기 일쑤였다.
〈자료 1〉 충북 청원의 대중음식점 입구에 있었던 남근 모양의 장승
장승연구가들은 장승의 방울 같이 튀어나온 눈, 주먹만 한 코, 귀 밑까지 찢어진 입 등 하나 같이 못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어딘지 모르게 살붙이 같은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본다.(김두하). 바로 정읍 칠보면 원백암 마을에 있는 장승도 그렇다.
장승은 설립 년대, 위치, 형태, 새겨진 글씨 등에 따라 마을과 성문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수호하거나 사찰의 불법 지킴이, 경계표와 이정표, 아들 낳기를 기원하는 기자(祈子) 신앙 등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엔 시국장승이 유행하였다. 전남대학교 정문 근처에 언론해방대장군, 통일대장군, 개벽대장군이 있었다. 사범대학 건물 앞에는 참교육대장군, 사범대수호대장군 등 시류와 관련된 장승이 여러 기 있었다.
청주에 가면 이와 다른 형태의 현대적인 해석이 가미된 장승이 있어 여기에 소개하려 한다. 나는 석사과정을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했다.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은 만큼 학위를 잘 주지 않는 대학으로 아주 유명하다. 나도 석사학위를 포도-시 땄다. 교원대학교에 다니던 2000년에 대학원생(원우회장 김순길)들과 같이 인근 지역 사적지 답사를 나섰을 때의 일이다. 아마도 상당산성 입구였을 것이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 현암리에 있는 산들바람이라는 대중음식점으로 기억된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다가 입구에 남근으로 된 장승을 발견했다. 장승이 성기숭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주장이라도 하듯 귀두가 벗겨진 남성성기의 윗부분을 관처럼 씌우고 아래쪽에 얼굴을 새겨 ‘천하난봉꾼’이라 이름 지었다.
* 충북 청원의 산들바람이라는 대중음식점 앞에 있었던 장승이다. 양기가 넘쳐 대지를 뚫고 나왔다.
그 바람에 주변 항아리가 모두 깨져 버렸다.(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찍어 놓고 보니 지금 봐도 ‘사진 참 잘 박(拍)았다(照片拍得不错, Zhàopiàn pāi dé bùcuò)’는 생각이 든다. 잘 찍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사진을 찍었다 하지 않고 항상 사진을 박았다고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이상한 말로 들릴듯하여 이 말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뜻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한자로 ‘칠 박(拍)’으로 쓰이는 이 글자는 손으로 셔터를 누르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주체적으로 사진을 찍는 행위를 나타내기 말이었으니 앞으로는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통상 장승은 몸통에 역할을 나타내는 글자를 쓰고, 대부분 지킴이 역할을 하기 때문에 표정이 험상궂은 게 특징이다. 한마디로 생긴 것이 우악스럽다. 헌데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남성 성기 모양의 ‘천하난봉꾼’의 모습이 우리 일행들의 눈길을 끌었다. 재보진 않았지만 사이즈나 모양새, 좌우 양쪽의 까무잡잡한 모습과 생생하게 표현된 귀두의 모습까지 정말 적나라했다.
전북 순창 추령의 장승촌(촌장 윤흥관)에도 남성 성기를 소재로 한 장승이 있었지만 이 장승은 표현방식이 아주 기발하였다. 주인장을 찾았으나 외출 중이었다. 결국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다. 다시 봐도 작가의 번득이는 기지가 엿보인다.
장승은 원래 나무의 뿌리부분이 위로 가게 세운다. 한옥장인 자칭 ‘목수’라 아호를 붙인 신영훈 선생은 이를 가리켜 ‘하늘의 남근이 대지를 향해 삽입한 형태’라 풀이했다. 반면에 ‘천하난봉꾼’이라 쓴 산들바람의 장승은 땅 속에서 솟았다. 그 뚫고 나오는 힘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주변에 있던 항아리가 모두 깨지는 불상사가 생겼다. 이 기발한 장승의 모습이 어찌된 일인지 인터넷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25년이 지난 지금, 장승을 새긴 그 작가는 어디에 있는지,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 2000 학번 선생님들은 잘 계시는지, 음식점은 그대로 있는지 모두가 궁금해진다.

* 경기도 파주에 있는 콩요리 전문 음식점 ‘콩사랑’ 출입문 손잡이(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실내 인테리어에 남근을 소재로 한 음식점이 정읍에도 있으나 파주 것이 훨씬 기발하다. 음경이 휘었다.
〈자료 2〉 이보다 더 당당할 수 없다. ‘국내에서 가장 터프가이한 전북 임실의 남근석’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에 가면 자경마을 입구에 오돌토돌하게 생긴 남근석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동강난 남근석 허리부분을 시멘트로 접합한 흔적이 보인다. 경지정리 과정에서 잘렸다고 하지만 필시 미신이니 뭐니 하는 당시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오히려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서 이제는 훼손되지 않도록 잘 가꾸어놓았다. 들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아예 철제보호망까지 만들어 놨다. 원래 마을지형이 여근을 닮아 음기를 누르기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는 구전이 있다. 형태는 성기를 닮은 자연석으로 보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누군가가 이 작업을 했을 것이다. 오돌토돌한 모습이 정으로 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읍에 있는 백암리 남근석과 비교해봤다. 백암리 남근석이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면, 임실 사곡리 남근석은 ‘국내에서 가장 터프 가이(tough guy)한 남근석’으로 보인다. 만든 사람의 뛰어난 눈썰미 하나로 돌기둥 윗부분에 턱을 두어 남성 성기의 귀두를 간결하게 표현했다.
한편 순창 산동리와 창동리에 있는 남근석은 이보다 더 정력적이다. 마치 발기된 남자 성기의 혈관이 곧 튀어 나올듯한 묵직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헌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랫부분에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을 남근석이 아닌 ‘연봉석’으로 보기도 한다.(송화섭). 틀린 말이 아니지만 연봉석이든 선돌이든 대상을 남근으로 보고 아들 낳기를 기원했다면 이는 남근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일종의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순창의 남근석이 크기에서 웬만한 남근석을 압도하지만, 임실 덕치의 남근석은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석물(성물)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 임실 덕치의 남근석을 가리켜 ‘우리나라 현존하는 남근석 가운데 가장 터프 가이 한 것’이라 평한 것이다.
* 임실군 덕치면 사곡리에 있는 남근석. 전북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출처: 엽토51 개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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