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대구의 국채보상운동과 전라북도 정읍의 국채보상운동
*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우리나라 민중운동 또는 민족세력이 본격적으로 대두한 시기는 19세기 말엽,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국채보상운동으로 꽃피었다. 국채보상이란 구한말 일본에서 빌려 쓴 차관을 갚자는 것이고, 이것을 갚아야 일본의 예속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이 돈을 갚았어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이 나라의 예속을 막는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의 배경과 전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한국을 근대화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일본으로부터 끌어다 쓴 1,300만원의 빚을 갚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다. 1,300만원은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과 맞먹는 큰돈이었다. 당시 쌀 한말의 가격은 1원 80전 정도, 1,300만원을 현재 물가로 치면 약 3,000억 원에 달하는 돈이었다. 운동은 1907년 1월 31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회장 서상돈(徐相敦) 등 10여 명이 공동 명의로 발의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담배를 끊자는 ‘단연회(斷煙會)’를 만들어 국채보상금을 모집했다. 한 사람 한 달 담배 값을 20전으로 치면 국채액이 된다는 계산 아래 단연회를 만든 것이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 언론계가 먼저 호응을 보였고, 전국에서 각 단체와 학생, 상인, 노동자 할 것 없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이와 같이 거대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신문이 운동의 취지를 널리 전파하고, 신문사가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거두는 등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 운동으로 고종이 담배를 끊었고 궁내에도 담배를 금했으며, 서민, 학생은 물론 진주의 기생, 걸인, 백정 그리고 땔나무꾼까지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운동에도 한계는 있었다. 서민들이 적극 참가한 반면, 정부의 고관대작이나 부유층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전개되었던 제2의 국채보상운동과 판박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사하고 있는 사람이 더 한다는 말이 하나도 틀림없었다. 대한제국 정부 역시 수수방관함으로써 이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학계에서는 언론기관이 대동단결하지 못한 것도 실패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 중앙에서 결성된 국채보상기성회가 의연금 모금을 자임하고 나섰으나 「대한매일신보」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탄압을 예상하고 국채보상기성회로서는 이러한 국면에 부딪혔을 때 이를 능히 물리치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 모금된 의연금은 반드시 사회적으로 신임이 두텁고 식견이 높은 인사로 구성된 조직체가 이를 보관해야 된다고 보았으며 이 의연금을 어떻게 유효적절하게 사용할 것이냐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매일신보」는 전국을 대표하는 중앙기구로서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동사 내에 마련함으로써 국채보상기성회를 하나의 지역적인 기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특히 일제는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裵說)이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의연금을 횡령하고 있다는 암시를 주었고, 국채보상기성회 측에서는 의연금 보관에 의심할만한 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열의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일진회의 앞잡이인 송병준(宋秉畯)과 이용구(李容九)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반대하고 나섰다. 한국에 무슨 재정이 있어 거액의 차관 금액을 모을 수 있느냐. 일찌감치 자진 해산하여야 할 것이라고 애국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렇게 반년 만에 모금된 의연금은 19만여 원에 불과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세계기록유산이 되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모금액이 적힌 장부와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운동 관련 기사 등 운동의 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 2,472건이 201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정읍지역 국채보상회의 활동
전라북도에서는 전주 1,500여명, 익산 1,100여명이 의연금 모금에 참여했으나, 정읍은 가장 많은 2,000여명이 참여할 만큼 주민들의 호응이 높았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5일자 잡보(雜報)에 의하면,
“보상회의 활동에 따라 의연 실적이 현저한 경우의 예를 들어보면, 정읍국채보상임원 전의관(前議官) 박중현(朴仲炫)과 전문안(前文案) 박기철(朴箕哲) 양씨가 종중(宗中)의 자원금 이백육십여원을 기위(己爲) 수집하였고, 동지 사인(士人) 김낙형(金洛馨)과 임추재(任秋宰) 제씨(諸氏)로 경내(境內) 인민을 힘을 다하여 권고 수합하여 우선(爲先) 칠백여원을 경회소(京會所)로 송교(送交)하고 그여(其與)는 수취상송(收聚上送)한다더라”
라고 보도함으로써 정읍에서 보상회(단연동맹회) 임원의 노력에 의해 막대한 의연금이 수합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지역에 따라 의연자 수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보상회 활동에 의한 것이지 지역민의 의식 차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김기주). 물론 임원들의 활동에 의한 실적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엄혹한 시기였다는 점과 생활에 쪼들려 가난을 면치 못했던 시기에 이러한 막대한 의연금이 모금된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주민의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표〉 정읍 지역의 국채보상회 설치 상황
정읍국채보상회 발기인 가운데 한사람인 박기철(1865-1933)의 아들이 취산(翠山) 박석규(朴碩奎, 1893-1950)이다. 박석규는 1905년 정읍노휴제(창립 부위원장)를 세우는데 주된 역할을 했고, 1908년에는 사립 초남학교(楚南學校)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서예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을 사사하여 글을 잘 쓰고 사군자에도 능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석규는 1923년 정읍의원(지금 종삼의원 자리) 원장 차경삼과 함께 정읍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조선노동공제회 정읍지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정읍면장을 지냈다.
이밖에 박희현(朴希炫)외 14인이 위친계(爲親契)를 만들었는데 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서로 의논하여 ‘위국이 곧 위친’이라고 하여 모아놓은 곗돈 5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당시 정읍 지역에 설치된 보상회는 위 〈표〉와 같다.
《참고문헌》
김기주, 「전북지방의 국채보상운동」, 『전북사학』 제19·20집, 1997.
신규수, 『한국의 유림연구』, 원광대학교출판국, 2007.
최현식, 『신편 정읍 인물지』, 신아출판사(전주), 2007.
김재영, 『한국민족운동사와 정읍』, 대성인쇄기획(정읍), 2019.
최영록, ‘국채보상운동’, 『어머니』, 낮은 문화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