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진주의 ‘형평운동’과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혁명’
형평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뤄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수능시험은 물론이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인 귀화시험의 단골소재이다. 필자는 형평운동을 주제로 학위를 받았지만 정작 형평운동을 수능에 처음으로 출제한 이는 경남역사교사모임 회장이자 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신진균 박사이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최초 출제자는 전 전국역사교사모임 부회장이자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의 저자 김남철 선생이다. 두 분 모두 형평운동을 널리 알린 공로자들이다.(『형평운동 100년의 기억과 실천』, ).
1894년 1월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있던 구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반상의 차별을 중심으로 한 신분제도를 폐지하여 인간평등의 세상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를 통해 현실화시켰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한 사회 신분제의 폐지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외쳤던 주장을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에서 법령으로 확정 지은 것이었다.(조광환).
하지만 법적으로는 철폐되었지만 사회관행적인 차별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이에 1923년 4월 경남 진주의 백정 출신들이 차별철폐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전개한 것이다. ‘저울처럼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그들이 내건 슬로건이었다. 이 두 운동은 인권운동이자 반봉건적인 사회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김재영).
* 진주형평운동기념탑(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형평운동에서 내건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에 형평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100주년을 기념하고, 형평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다시 형평’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하는 일에 따라 달리 불렀던 백정(白丁)들의 이름
백정은 하는 일에 따라 여러 계층이 있었다. 가장 많은 ‘재설꾼’은 짐승을 잡고 고기를 다루는 일을 하였다. 때로 '도한(屠漢)'이나 '칼잽이'라고도 하였다. 수공업으로 가죽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백정들은 따로 '갖바치(皮匠)'라 불렀다. ‘갖’은 가죽이라는 뜻이고, ‘바치’는 장인이라는 뜻이다. 가죽신(갖신)을 만드는 이는 ‘가죽 혜’자를 써 따로 '혜장(鞋匠)'으로 불렀다. 페라가모나 구찌 같은 세계적인 가방이나 신발을 만드는 장인들을 우리는 ‘쟁이’라 천시하고 ‘갖바치(가파치)’라 부른 셈이다.
생활이 어려운 대다수의 백정들은 들판에 있는 고리버들로 키나 바구니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들을 '유기장'이나 '고리백정'이라고 불렀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백정들이 하는 일도 많았다. 일반 부업에 해당하는 우골(牛骨)이나 우지채취(牛脂採取)·수육행상(獸肉行商)·견육즙(犬肉汁)·폐우마 처치(斃牛馬 處置)·야견박살(野犬撲殺)·골세공(骨細工)·납촉제조(蠟燭製造) 등에도 종사하였다. 이밖에 체와 베틀에 사용하는 바디 등 기기 부속품 제조를 주요 직업으로 하는 자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생활을 하는 이도 있었다.
* 수육은 원래 짐승의 고기[獸肉]가 아닌 익힌 고기라는 뜻의 ‘숙육(熟肉)’이 변한 말이다.
* 견육즙은 약재를 넣고 개의 진액(엑기스는 일본말)을 우려내는 것으로 지금의 ‘개소주’를 말한다. 소주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증류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지금은 해서는 안 되는 불법행위이다.
* 야견박살은 광견병(狂犬病)에 걸린 개를 때려잡는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백정의 수, 과연 40만인가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차별 대우를 받는 백정들이 1923년 말 당시 40만을 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실제 40만이 넘었는지는 의문이다. 자료마다 제 각기 그 숫자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89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2,106명으로, 백정 해방운동에 앞장섰던 선교사 무어는 3만 명으로 보았다. 운동 주최 측의 자료인 형평사 주지(主旨)에서는 40여 만 명으로 보았다. 『개벽』에서는 17만이라 하였으나, 『조선의 군중(朝鮮の群衆)』에서는 33,712명으로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조선일보」는 33,700여 명으로 보도했다. 일인학자 암기계생(岩崎繼生)은 조선에 분포하는 실제 백정의 수가 십 수만에 달한다고 해도 대차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시대일보」는 1926년 형평사는 전국 단체 수 194개에 회원이 28만 명에 달한다 했고, 『조선의 치안상황(朝鮮の治安狀況)』에서는 1926년 33,779명의 백정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했다. 「동아일보」는 1929년 가맹단체가 287개에 사원 총 수는 32만 명이라 했다.
위의 자료를 기준으로 본다면 1910년 이후의 백정 수는 적게는 33,700명에서 많게는 40만까지로 정리된다. 일제 관변 측 자료를 신뢰한다면 33,700명을 근사치로 볼 수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는 숫자로 보인다. 이렇게 백정들의 숫자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제는 1916년 경무총감부 훈령으로 「호구조사 규정」을 제정했다. 이 규정에 따르면 각지 경찰서장의 감독 아래 주재소나 파출소의 인근 외근 순사들이 6개월마다 1회 이상 담당구역 호구조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은 1922년 조선총독부 훈령으로 격상 개정되었다. 개정된 규정에는 파출소나 주재소의 호구조사 담당순사는 3월, 6월, 9월 그리고 12월 말에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경찰서장과 도지사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찰력을 강화하고 인원과 자금을 지원했다 하더라도 전국을 조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경찰에 의한 호구조사는 처음부터 자의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고, 조사 대상 가운데 상당 부분이 누락될 가능성이 많았다. 또 현지조사를 경찰이 실시하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심리적인 저항도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22년 「조선호적령」이 발표되었으나, 절차를 몰라 그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누락될 가능성은 더 커진다고 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5년 11월 18일까지 608명이 평양에서 실기하고 있음을 기사로 싣고 있다. 즉 민적에 빠진 자로 재판소에서 취적 허가만 얻고 부청에는 제출하지 않은 자, 1909년 4월 1일 이전에 출생한 사람으로 부모가 생존한 경우에도 재판소의 취적 허가를 얻지 않은 사람, 또는 1909년 4월 1일 이후에 출생했으나 출생계를 제출하지 않은 사람 등이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당시 정확한 백정의 수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백정에 대한 정책
일제는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뒤 백정들을 민적(호적)란에 ‘도한’으로 기입하고 법률적으로 그들을 차별하였다. 백정들은 공민권을 향유하지 못하고 납세의무도 불문에 붙였다. 또 도한이라고 기입된 그들의 자제는 공립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사립학교에 들어갔다 해도 학급을 달리 편성하거나, 백정 자식임이 밝혀지면 퇴학을 당하기 일쑤였다. 백정 자녀들은 학교를 나와도 공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일반회사에 취직도 어려웠다.
백정들의 특별 채용(?)
조정에서는 백정들의 탁월한 기동성과 기마술 그리고 궁술을 활용하기 위해 조선의 군사력으로 충당하기도 했고, 군사적 자질을 인정받은 백정들은 정규군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또 직업군대인 ‘갑사(甲士)’에 등용하기도 했다. 사형을 집행할 때는 ‘회자수(劊子手)’로 채용하기도 했다. 속칭 ‘망나니(亡亂)’ 혹은 ‘희광(犧狂)’으로 본래는 무인을 채용했으나, 조선 중기 이래로 백정을 선발하여 그 일을 하도록 했다. 이는 백정에게 옥졸 자격으로서 법의 집행권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가장 천대를 받던 백정으로 하여금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사형을 집행하게 한 것이다. 백정들은 국장 시 ‘여사꾼(轝士軍)’이라 하여 가마를 이끌고 행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장례가 끝난 뒤에는 그 공로로 상당한 은급의 혜택을 입었다. 이는 백정으로서는 최대의 영광이었다.
백정 동록개와 원평의 집강소(執綱所)
김제 원평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사용되었던 집강소 건물이 남아 있다. 이 건물은 백정 출신으로 원평에서 돈을 번 '동록개(洞鹿介)‘라는 백정이 사람대접 받고 사는 사회를 위하여 써달라고 전봉준 장군에게 바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원주인인 백정 동록개를 이곳에서는 ‘하촌아(下村兒)’라는 미칭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고 최순식 모악향토문화연구소장의 도움말. 2003년 11월 16일). 동록개는 ‘동네 개’라는 뜻이다.
*원평 집강소(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주변에 유명한 국밥집이 성업 중이다.
동록개가 어떻게 해서 큰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당시 백정들의 도축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 도축만으로는 큰 자산을 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품삯 대신 소나 돼지의 부산물인 머리나 내장, 족(발) 등을 받아 음식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집강소 건물은 일제강점기 금산면사무소로 이용되었고, 원평 천도교당으로도 이용되었다. 원평 형평분사(衡平分社) 창립 당시에는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2000년대에는 원평택시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2017년 7월 7일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집강소 바로 앞에 상호가 비슷한 국밥집 두 곳이 성업 중에 있다. 비슷한 상호만큼이나 맛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집이다.
형평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무엇인가. 민중사관의 입장에서는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과 압박과 고통을 받는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본다. 민중은 지배자나 영웅들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역사에서 수동적인 입장이었으나, 특정 시기에는 역사발전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형평운동은 백정 출신들이 주도하여 봉건적인 유제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개혁 운동이자 ‘인권운동’이었다. 또한 형평사에서 벌인 신분차별 철폐운동이 갖는 반봉건성에 유의한다면, 형평운동의 ‘근대지향적인 요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편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바탕을 둔 평등이념과 ‘후천개벽’ 사상에 바탕에 두고 일어 난 동학농민혁명은 3·1독립만세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29 민주화선언, 최근의 촛불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형평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우리사회가 근대로 진입하는 사회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현대사의 서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3대 농민전쟁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한 연유로 관련 기록물 185종이 지난 2023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 개막 전시에 앞서 캘리그라피 유명 작가 이화선(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교수의 퍼포먼스가 있었다.(사진 :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로써 정읍은 2019년 9월 무성서원의 세계유산 지정에 이어 두 번째의 경사를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1년 9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직지심경』의 저자가 고부 출신의 백운화상이라는 점과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에 남은 『조선왕조실록』 유일본을 태인(지금 칠보) 출신의 두 유생이 내장산 용굴암으로 이안하여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읍 시민들의 문화적인 자긍심이 그 어느 때 보다도 고양되고 있다. 2024년 11월 5일부터 2025년 4월 13일까지 동학농민혁명기록물 특별전시가 있었다.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있었던 전시물 구성은 제1부 변화와 개혁의 기록(평등한 세상을 꿈꾸다), 제2부 협치와 상생의 기록(집강소를 세우다), 제3부 자주와 항전의 기록(외세의 침략에 맞서다), 제4부 정의와 인권의 기록(민주주의의 뿌리가 되다) 순서로 되어있다.
특별전시의 구성을 소개하는 이유는 인권운동이자 백정들의 차별철폐운동인 형평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서 주창했던 자유와 인권, 정의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와 민주주의, 반봉건 등은 근대 이후 인류가 추구해 온 가치나 지향을 대변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형평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그 본질이 서로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9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대헌장)가, 2011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세계인권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형평운동은 인권운동으로서 인류발전을 위한 보편적 가치가 충분한데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움직임이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형평운동 사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련 사적지를 단계적으로 정비하여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자료 1〉 천민들 사이에서조차 무시당했던 ’조선시대 백정들의 사회적 지위
(복식) 백정들은 명주옷을 입거나 가죽신을 착용할 수 없었다. 두루마기도 입을 수 없었다. 저고리에 동정을 시칠 수 없었고, 고름 대신에 실단추를 달아야만 했다. 신발도 검정 버선에 짚신만 신어야 했다. 머리는 삭발을 했고 수염도 기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털모자를 쓸 수 없었고,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平凉子]’를 써서 백정신분임을 드러내야 만 했다. 갓 끈도 대나 구슬 그리고 베 조각으로 만든 것은 맬 수 없었고, 종이나 새끼를 꼬아 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망건은 쓸 수 있었으나 탕건(宕巾)은 금지되었고, 부녀자들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비녀를 꽂으면 안 되었다.
(교제) 어른은 물론 어린 아이들에게도 항상 복종하고 자신을 ‘소인’으로 낮추고 공경의 예를 행해야 했다. 늙은이에게는 생원님, 젊은이에게는 서방님, 어린이에게는 도령님이라고 높여서 불러야만 했다. 공공장소에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었고, 개인적인 용무로 남의 집을 방문할 때에는 문 앞에서 예를 행해야 했으며, 길가에서도 일반인과 나란히 걸어 갈 수 없었다. 특히 성씨와 이름의 사용에 차별이 심하여 성도 분명한 자가 별로 없었고 이름도 일반인과 구별되었다.
(호적) 원래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성이 부여되었다. 또 백정은 출신지와 계통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향이 없었다. 혹 성이 있더라도 본관을 거의 알지 못했고, 이름에는 충·효·인·의 등의 유교적인 글자를 사용하지 못했다. 대개 금석(今乬)과 만석(萬石), 억석(億石), 무검(武劍), 소개(小介) 등과 같은 종류의 이름을 써야했다. 이러한 경우를 벗어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참월(僣越)’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사적으로 형을 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매질을 할 때에도 보통 사람들은 나무판 위에서 했지만 백정들은 직접 땅바닥에 엎드려놓고 하였다.
(결혼식) 말이나 가마를 타지 못하기 때문에 신랑은 말 대신 소를 타고, 신부는 가마 대신 널빤지에 앉아 장가가고 시집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사람들은 ‘소등 장가’ ‘널빤지 시집’이라고 했다.
(장례) 머리에 삼베로 만든 두건만 쓸 수 있었고,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묘지도 백정 산소라 하여 풍수를 보지 못하게 했고, 공동묘지를 사용토록 하여 일반인들과 따로 자리를 잡았으며 가묘도 만들 수 없었다.
(일상생활) 일반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다니는 음식점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가더라도 토방에 앉아 밥이나 술을 사 먹어야 했다. 심지어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할 수도 없었다. 이런 관례를 따르지 않으면 농청에서 매를 맞아야 했고, 만약 대들기라고 하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하여 이른바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림을 받았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갑오개혁 이후 백정들은 조상들의 제사상에 두루마기나 탕건과 갓끈, 가죽신 등을 얹어 놓기도 했다.
(상호부조 조합) 지금의 파고다 공원 동쪽에 ‘승동도가(承洞都家)’가 있었다. 지방에 지부가 설치되어 평양에는 ‘어가청(於可聽)’이 있었고, 각 마을에는 ‘도중(都中)’이 있었으나 이들 백정의 상호부조 조합도 갑오개혁의 사민평등 조서 발표와 아울러 그 존재 의의를 잃게 되자 후일 형평사가 그 기능을 대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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