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천년사”의 ‘보천교’
안후상, (사)노령역사문화연구원 이사장, 문학박사
천 년 전인 고려 현종 대에 ‘전라도(全羅道)’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의미의 정도(定都) 1,000년! 정도 1,000년을 맞아 호남권 3개 지자체가 5년 동안 24억 원과 자료조사연구원 포함 집필진 600명을 투입해서 편찬한 “전라도천년사”! 스스로가 총 34권 13,559쪽에 달하는 전례 없는 역사서가 “전라도천년사”라고 평가하였다. 전례 없는 역사서가 왜 이렇게 말썽이 돼버렸을까?
오늘날 인문학자들은 주로 글로써 자신의 연구나 생각을 표출한다. 그런데 그 글은 돈이 안 된다. 수십 년 전만 하여도 비소설 부문에서도 100만 베스트셀러가 나왔지만, 오늘날에는 소설 1만권 팔리기가 쉽지 않다. 조선 시대라면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이라도 진출할 수 있겠지만, 시대가 변했다. 문과생은 인기가 없고 사학과나 철학과는 대학에서 사라지고 있다. 문과가 인기 있을 때도 인문학자들은 늘 고달팠다. 논문 1편을 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머리는 거미줄처럼 복잡해지고 오래 앉았으려니 옆구리가 터지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이처럼 힘들게 글을 쓴들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 발표비 또는 원고료는 기껏해야 기백만원, 많아야 2, 3백만원이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에 24억이 들어갔다고 하니 뭘 모르는 분들의 입이 떡 벌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원고료는 15억원 정도로 추정되며, 집필진이 600명이니 1인당 원고료는 300만 원이 채 안 된다. 그 돈으로 전라도의 정사(正史)를 책임지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이공계 학자들과는 달리 인문학자들은 무척이나 고달프고 가난하다.
그래서 대필이 유난히 많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교수가 석·박사과정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대필을 시킨다. 그러다 보니 글은 부실해지고, 인문학도 함께 부실의 늪에 빠진다. 이번 “전라도천년사”에서 대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대필이 없었는데도 “전라도천년사”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은 지금도 솟구치고 있다. 이를 집필한 인문학자들은 당연히 욕을 먹는다. 비판론자들은 고대사 부문은 물론, 전(全) 시대사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그 황당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검증이 생략됐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대주의적 관점이나 친일 잔재 등이 전 시대사에 걸쳐서 나타나고 그 내용 또한 왜곡됐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을 비판하는 혼란도 이어지고 있다.
정읍(井邑)에서도 동학농민전쟁의 역사가 왜곡됐다며 이의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즉 1894년 고부농민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전사(前史)’라거나 농민군을 ‘민군(民軍)’으로 표현한 것은 분명 왜곡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전라도천년사”는 발간도 되기 전에 진흙탕으로 뭉개졌다. 글을 쓰고 교열·교정까지 감당해야하는 인문학자들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고달픈 인문학자들에게 정사(正史)를 편찬케 하고 그 책임까지 지라는 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러함에도 다음 몇 가지는 사실 확인을 꼭 해주셔야겠다. 얼마 전 인천의 모(某) 대학교수의 권유로 “전라도천년사(25권, 근대5)”의 「3. 보천교의 활동과 분파」(6쪽)를 읽다가 가진 의문이다.
①보천교 차경석의 출생지를 “고창군 흥덕구 부안면 호암리(현재 흥덕면 연기리)”(366쪽)라고 했는데, ‘흥덕구’는 충북 청주의 지명이며 ‘호암리’가 아닌 ‘연기리’가 맞다.
②“차경석은 1907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강일순이 들렀을 때 그를 만난 뒤 추종하게 되었는데”(366쪽) 역시 사실과 다르다. 차경석이 김제 금구 거야주점에서 강증산을 처음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는 게 정설이다.
③“1916년에는 25방주를 세우고”(366쪽)에서 25방주가 아닌 24방주라야 맞다.
④“차경석은 보천교의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각에 친일 사절을 파견하고, 시국대동단을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366-367쪽) 역시 오류에 가깝다. 주어 격인 ‘차경석’이 시국대동단을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한 적은 없다.
⑤“이에 따라 무진년과 기사연간, 즉 1928년과 1929년 사이에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천자등극설이 유포되면서”(367쪽)에서 무진년(1928)이 아닌 ‘기사년(1929) 등극설’이라야 맞다. 그 이전에 ‘갑자년(1924) 등극설’이 있었다.
⑥“보천교는 1924년과 1925년 두 차례의 혁신운동이 전개되었으나”(368쪽), “혁신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친일화 되면서 다시 전통적인 유교로 회귀하였던 것이다”(368쪽) 등도 오류다. 혁신운동은 두 차례 이상 있었으며, 비록 ‘친일화’라는 용어의 남발은 집필자의 자유일진대, 백번 양보하여 ‘친일화’ 이후의 보천교는? 그러함에도 강증산 신앙은 건재하였다.
⑦여처자(여원월)가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 이거한 적이 있었다”(370쪽) 역시 사실과 다르다. 보천교 본소 주변 마을에 여처자가 거주한 것은 맞다.
이외 자질구레한 것들이 꽤 있지만 일단 위의 몇 가지만이라도 사실 확인을 해주셔야겠다. 안 그래도 이번 일로 억울해하는 인문학자들이 두고두고 욕먹을 수는 없잖는가. 그리고 논란 극심한 역사서를 편찬해놓고 누구든지 읽어보고 문제 있으면 얘기해, 라는 식의 해결책은 무책임해 보인다.
∙ 「서남저널」 <노령산책>, 2023년 7월 12일자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