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보천교 독립운동 구술사, 원군교를 감시한 어느 한국인 순사의 증언" 출판기념 집담회
장소: 종로구 인사동 태화빌딩 회의실 (지하1층)
35년간 한국 민족종교 운동사를 연구해 온 안후상 교수의 편저 “보천교 독립운동 구술사, 원군교를 감시한 어느 한국인 순사의 증언”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편저자 안 교수는 그간 유사종교, 사이비종교, 사교로 인식해 온 일제강점기 보천교(普天敎)를 민중의 민족운동 사례로 제시하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기도 한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신국가 건설운동”(민속원)은 일제 식민 통치자들이 남긴 방대한 기록들, 특히 판결문과 검경 자료, 그리고 당시 신문․잡지의 기사 등을 비판, 인용하였다.
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신국가 건설운동은 민중의 민족운동이라고 하였다. 당시 외교력, 정치력, 무력도 없는 민중은 “정감록”이나 강증산의 예언을 바탕으로 형성된 보천교를 중심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다가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탄압을 받으면서도 보천교는 1918년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대 전반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김좌진 계열에 10여만 원의 군자금을 댔다.
또한 보천교는 의열단, 정의부, 신민부, 그리고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등이 보천교와 깊게 관련돼 있다. 심지어, 박자혜, 조만식, 임규, 고용환, 주현 등 민족운동가들이 보천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아울러, 조선물산장려회에 보천교 간부 다수가 참여하였으며, 보천교는 ‘왜산 물산 안 쓰기’ 운동을 자체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는 보천교를 탄압하거나 회유하였고, 급기야 1936년 교주 차경석이 타계하자 일제는 보천교를 해체하였다.
조선총독부와 다른 국가나 정부 건설을 전개했던 보천교는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지냈으며, 고천제 당시 보천교는 국가 이름 ‘시국(時國)’을 선포하였다. 전라북도 정읍에 보천교 중앙본소를 건설했는데, 중앙본소의 상징성은 경복궁처럼 전통적인 왕조를 의미한다. 신국가를 상징하는 건축물 십일전(十一殿)은 1937년에 해체돼 오늘날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축, 존재한다.
보천교가 해체된 1940년 전후해서도 보천교계 민족종교들은 신국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중대사상사건경과표(朝鮮重大思想事件經過表)」(1943)에 나타난 일제의 사상 탄압 사건은 총 31건. 이 가운데 ‘보천교계 민족종교’와 관련된 사건이 6건일 정도로, 일제는 보천교계 신종교를 심각한 사상 사건으로 인식하고 탄압하였다.
당시 일제의 보천교 탄압은 세 갈래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물리적인 탄압이다. 당시 보안법과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관련자들을 구속, 기소했는데, 이 과정에서 타계한 교인이 무려 10여 명에 달한다. 참고로, 보천교와 관련한 독립 유공자 수는 2022년 현재 155명에 달한다. 이는 주변의 여타 종교 단체를 압도하는 숫자이다.
또 하나는 일제의 회유와 내분 조장이다. 일제는 끊임없이 내분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켰다. 보천교 역시 끝없는 내분으로 1930년경에는 지리멸렬하였다. 마지막으로, 일제는 보천교와 같은 민족종교를 사이비, 사교, 유사종교 등으로 비난하고, 또 탄압하였다. 일제는 식민 지배의 명분인 ‘문명론(文明論)’을 앞세워 보천교를 일반 사회와 분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민중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보천교의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을 민족을 구할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하였다. 당시 일부 지식인들의 보천교 비난은 극심하였다. 지식인들이 보천교를 비난하면서 내세운 것 역시 문명론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보천교를 악(惡)의 상징으로 묘사하면서, 보천교의 항일성은 묻혔다.
안 교수는 그간의 연구 과정에서 한계를 느꼈다고 하였다. 기록이 없는 보천교, 그리고 편향된 일제의 기록들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안 교수는 구술사에 관심을 가졌다. 안 교수는 1990년경부터 조금씩, 조심스럽게 몇 분 안 되는 보천교 교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들었다. 교주인 차경석의 아들들을 만났고, 당시 간부를 지낸 교인도 만났다. 좁게는 전라북도 정읍을 위시해 완주와 전주, 그리고 넓게는 서울과 경기도, 경상북도 청송과 경상남도 함양까지 찾아갔다. 관련 기억을 메모했고, 때로는 녹취하였다. 그렇게 생성된 기억의 일부는 교차 검토한 끝에 논문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관련 구술들은 사장되었다.
안 교수는 구술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구술은 사람의 주관적 기억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관련 당사자라 할지라도 그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한계다. 그리고 구술이란 역사적 사료와의 교차 검토를 통해서만이 조심스럽게 활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기록 속의 적지 않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컨대, 차경석 아들들의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한 자금이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보천교 교직을 맡았다는 구술이 최근 발굴된 각종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보천교의 거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라용균(羅容均)을 통해서 지원했다는 임규(林奎)의 구술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이던 라용균이 영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상하이를 찾아가 국민대표회의 경비로 2만 원을 기부했다는 기사(‘羅容均氏留學. 영국으로 향하였는데 무사히 도착하였다고’《조선일보》1923.5.23)와 교차 검토할 수 있었다.
1920년대 중반의 독립운동 단체 신민부(新民府)를 성립시킨 김혁(金赫)이 한때 보천교 교인이었으며, 그를 통해 보천교의 자금이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흘러 들어갔을 개연성을 차용남과 최종섭이 구술하였는데, 1930년대 《매일신보》나 조선총독부의 관련 기록과 교차 검토한 끝에 이들의 구술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하였다.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車致九)와 관련한 구술도 있었다. 차치구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정읍의 두령이었다.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광조골에 피신해 있던 차치구를 끝내 붙잡은 흥덕현감 윤석진의 악행에 대한 구술이기도 하였다. 차경석의 아우 차윤덕에 관한 구술도 있었다. 당시 중앙본소 정문인 보화문(普和門) 사진을 책 표지에 게재할 수 있었던 것도 차윤덕의 후손 덕분이었다. 그리고 전봉준과 차치구가 자주 만난, 건축물(보천교 본소)에 관한 구술을 들을 수 있었다.
보천교 수위 간부 김홍규(金弘圭)가 아들 탄허(呑虛)에게, 탄허가 속가 사위인 서상기에게 남긴 “김구가 정읍에 와서 정읍에 큰 빚을 졌다고 말하였다”라는 구술에는 보천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5만 원을 지원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김구(金九)가 정읍에 온 정황을 찾을 수 없었는데, 최근에 정읍 태인의 독립운동가 김부곤(金富坤) 댁에서 김구가 여러 날을 묵었다는 구술이 나왔다.
경북 청송의 중평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5명의 독립 유공자가 나왔다. 모두 보천교의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후예는 정작 보천교의 독립운동에 둔감하였다. 구술 과정에서 애써 보천교를 언급하지 않았거나, 또는 이를 회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최근에는 달랐다. 보천교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이들 가운데 150여 명이 독립 유공자로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이들의 보천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그동안 애써 언급하지 않던 이들이 선대의 보천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물론, 기초적 구술사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구술은 본래 주관적이며, 또한 파편적인 기억들은 해당 역사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안 교수가 시작한 구술사 작업 역시 일관된 질문에 대한 일관된 답변이 아닌, 중구난방 같은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술 채록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구술자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수단을 채록자는 한껏 발휘해야 한다고 안 교수는 강조하였다.
구술 채록자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이를 꿸 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관련 연구자가 직접 채록자가 되어야 함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구술, 즉 기억의 파편으로써 ‘역사’라는 목걸이를 만드는 일은 반드시 채록자가 아니어도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구술은 문헌의 역사를 보완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보완을 넘어서 그 기억들이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안 교수는 최근에 조심스럽게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