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미수 천자(未遂 天子)'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
메시아인가, 정치적 야심가인가
역사가 ‘강자와 약자의 투쟁 기록’이라면, 역사 기록에서 학자의 중립성과 객관적 과학성을 내세우는 것은 허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약자는 패배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어, 기록은 승자의 편의(便宜)에 따라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객관성과 과학성, 중립을 내세우는 ‘메마른 고증학’이란 때로는 강자 편에서 약자를 죽이는 공모(共謨)일 수 있다. 역사 기록의 진정한 공정성이나 객관성은, 관념의 유희같은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한 그야말로 억강부약(抑强扶弱)하고 동호직필(董孤直筆)하는 역사의식을 갖고 접근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럴 때 비로소 반역사적 반문화적 반도덕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구 한말과 일제 초기에 걸쳐 수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렸다는 증산 후계자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당시 통칭 ‘차천자(車天子)’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신도는 물론 일반 대중 상당수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던 조선의 전권(全權)을 획득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시대의 풍운아(風雲兌)로 질독에 빠져 있던 우리 역사에 등장했다.?
그러나 역사의 ‘강자’들인 조선총독부와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신문 등, 그의 반대파들은 월곡을 ‘사교(邪敎)의 교주’ 혹은 ‘희대(稀代)의 사기꾼’으로 매도해 민중들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같은 극단적인 인물평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라는 망국(亡國)상황에서 월곡이 겪어야 했던 무상한 역사의 소용돌이와 무관치 않다.
차천자의 역사적 재평가, 왜 필요한가
월곡 차경석과 민족종교 보천교. 한때 6백만명 신도의 엄청난 교세를 누렸던 보천교와 차경석에 대한 재조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보천교란 종교단체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보천교는 1920년대 대규모 교단을 유지했고, 일제 초기에 끈질기게 일제에 저항했던 막강한 종교집단으로 활동했었다.
동시에 월곡 차경석은 시대의 메시아로 당시 암울했던 우리 역사 한복판에 등장했던 실존인물이 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선지 월곡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실종되어 버린다. 하루 아침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보천교와 월독에 대한 활동상 분석은 당시 신흥 종교의 특징은 물론 종교와 독립운동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례일 텐데, 하는 의문과 아쉬움은 필자로 하여금 차경석이란 ‘잊혀진 인물’을 새삼 추적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차경석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일제 치하의 민족지도자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추적 과정을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서술했다.
첫째, 월곡이란 인물의 탄생 배경과 시대적 상황,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선친 차치구(車致九)의 삶과 강증산과의 만남, 일제가 조선을 병탄(倂呑)하고 식민지배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보천교의 태동배경을 살펴봤다.
둘째, 보천교의 조직과 활동상, 월곡의 사상과 생애를 통해 일제치하 보천교의 독립운동과 활동상황 등을 시대적 흐름에 비추어 조감했다.
셋째, 월곡이 교주로 있던 보천교의 창교 배경과 교단 형성, 특히 보천교 몰락과정에서 전환점이 됐던 『시대일보』 인수과정과 교단 내부의 분열,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고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과정을 추적했다.
의욕은 앞섰으나 관련자료의 불비(不備), 증언자의 고령화, 보천교 핵심 관련자들의 몰(沒) 등, 열악한 상황 등으로 저작의 완결성이 사뭇 부족하다는 점이 한가닥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갈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이번 작업은 ‘망국의 비사(悲史) 발굴’을 필생의 화두(話頭)로 정한 필자로서는 이제 겨우 ‘꽃 한 송이를 들었다’고 자위한다.
부족하나마 이 책 출판을 격려하고 관련 자료를 제공해 주신 차길진(車吉辰) 법사님, 입암산 나무꾼을 자처하며 차천자 관련 기록을 모아 온 농초(聾樵) 박문기(朴文基) 대형, 책이 나올 때까지 격려를 아끼지 않은 홍일식(洪一植) 전 고려대학교 총장님, 류근일(柳根一) 조선일보 논설주간님, 정읍까지 내려가 관련 사진을 찍어준 박종필(朴鍾弼) 아우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한다.
끝으로 필자가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은고(恩顧)를 베풀어주신 가천의과대학교 이길녀(李吉女) 재단이사장님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광복 57주년
■ 글 보는 순서 ■
프롤로그 / 11
제1장 월곡 차경석, 그는 누구인가 |
1. 동학농민혁명과 망국(亡國)의 비애 / 19
2. 화형 당한 동학군 대장의 장남으로 출생 / 28
3. 청년시절, 동학운동에 참가 / 35
4. 사형선고, 그리고 기사회생 2차례 / 39
5. 부패한 세상, 꿈틀대는 변혁의 욕망 / 48
제2장 ‘조선의 메시아' 강증산의 후계자 |
1. 강증산과의 운명적 만남 / 53
2. 강증산, 그는 누구인가 / 67
3. 강증산 이적(異跡)과 천지공사 (天地公事) / 76
4. 월곡의 증산승계 과정 / 90
5. 증산사상의 종교화 작업 - 보천교 창립 / 97
제3장 항일투쟁과 보천교 종교운동 |
1. 보천교단의 조직과 사상 / 109
2. 보천교의 성장 / 119
3.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의 수난 / 126
4. 보천교의 민족운동 · 독립운동 / 142
5. 종단,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 / 146
제4장 '한 . 중 . 일' 천자(天子)를 꿈꾸다 |
1. 월곡의 야망과 ‘천자등극설’ / 151
2. ‘왕자(王者)의 예’로 치른 모친 장례식 / 164
3. ‘초호화 궁궐’ 대성전 신축 / 168
4. 보천교 추진사업 - 계몽·기업 ·문화·출판/ 176
제5장 '『시대일보』사건'과 보천교의 분열 |
1. 「시대일보」 인수와 후유증 / 189
2. 보천교 혁신운동 / 204
3. 반민(反民) . 부일(附日)행위의 진상 / 216
4. 시국대동단 사건 시말(始末) / 218
5. 차천자(車天子)의 죽음 / 234
제6장 월곡 차경석의 사상과 생애 |
1. 보천교분열의 배경 / 249
2. 일제의 단계별 보천교 해체 전략 / 255
3. 월곡의 한계인가, 민족의식 부재인가? / 260
4. 보천교의 오늘 / 273
5. 차천자를 위한 변명 / 286
에필로그 / 289
보천교약사 / 291
참고문헌 / 299
* 2편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