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보는 순서 ■
프롤로그 / 11
제1장 월곡 차경석, 그는 누구인가 |
1. 동학농민혁명과 망국(亡國)의 비애 / 19
2. 화형 당한 동학군 대장의 장남으로 출생 / 28
3. 청년시절, 동학운동에 참가 / 35
4. 사형선고, 그리고 기사회생 2차례 / 39
5. 부패한 세상, 꿈틀대는 변혁의 욕망 / 48
프롤로그
차천자-탁월한 ‘민중 심령 위안자’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월곡 차경석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일제치하 식민지 백성으로 질곡 속을 헤매던 우리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 꿈을 줬던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일제로부터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혹평 을 받았고 ‘미수천자(未遂 天子)’로 그쳤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었고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천자 놀음’을 시도했던 일세의 풍운아라는 점에서 그의 역사적 공과(功過)는 재론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철저히 그를 망각하고 무시해 왔다. 일제치하 한국 사회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차천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없이 냉정하기만 했다. 그것은 월곡이 역사 속에서 지닌 한계이자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보천교 창립 초기, 그는 민족의 독립문제 등 국가적 차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후 현세적 이익에 몰두해 있던 민중 층에지나치게 의존하고 이에 이끌려 감으로써 결국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종교적 가치를 정립하거나 제시하지 못했다.
또 조선총독부의 교묘한 술책에 휘말려 말년에 사교(邪敎)의 교주로 인식돼 언론과 지식인들로부터 혹독하게 비판 받으면서 철저하게 몰락했다.
그는 식민통치에 반발하는 뚜렷한 역사의식이나 자각이 결여되고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거나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도 부족했으며, 사회의 주동세력이기보다 주변세력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점도 비판 받을 대목이다.
하지만 월곡 차경석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한국 · 중국 · 일본을 아우르는 3국 통합의 천자가 되겠다는 장대한 꿈을 펼쳤던 인물이고, 한때 신도 수백만 명의 우상이었다는 점에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신도들이 폐하(陛下)라 부르며 자신의 거처인 전라도 정읍에서 일본 총독의 예방 받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인물이었다.
조선인으로 중국 황제나 일본 천황에 맞선 천자로 당당히 불리며 일세를 풍미한 당대의 풍운아였던 월곡을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 출두시켜 그의 공과(功過)를 가려 신원(伸寃)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다.
조선의 망국이라는 역사공간 속에서 그가 한때 일제에 병탄 당한 조선 왕조의 뒤를 이어 ‘전권획득(全權獲得)’을 위해 신(新)정부 수립을 목표로 활동했고, 기미년 독립운동 후 설립된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지원했으며 지도적인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월곡 차경석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1920년대 우리 한국사회의 주요한 인물이자 일세를 풍미한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하게 민중들에게 망각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월곡의 흔적은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서울 조계사 대웅전이 바로 정읍 보천교 본당이자 월곡의 거처였던 속칭 ‘차천자궁(車天子宮)’이던 십일전(十一殿)을 뜯어다 지은 것이고, 정읍 내장사의 대웅전도 바로 월곡의 집을 뜯어 옮겨 논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그가 만들었던 한반도에서 제일 큰 청동 대종(大鐘)은 동학사로 팔려갔다가 일제하에 총탄 제작용 전시 공물로 빼앗기는 비극을 겪었고, 월곡이 이끈 보천교의 조직과 행정시스템은 불교계의 한 종단에서 승계했다. 또 흥미롭게도 오늘의 우리 민족종교 대부분이 그와 직 · 간접으로 연계를 맺고 있다. 한 예로 강증산 후계의 정통 원류임을 주장하는 증산도측은 이렇게 주장한다.(<증산도 왜곡의 실상>, 대원출판사, 1991, 8쪽)
대순진리회는 상제님(증산: 펀집자 주)을 신앙한다고 자칭하는 교단 가운데 교리를 오용 · 악용하는 대표적인 난법 교단이며, 원불교는 불교에 증산 상제님의 도법을 오려다 붙여놓고 제 뿌리를 잡아먹으려는 불의를 행하는 집단이다. 또한 통일교는 증산 상제님의 진리에 기독교의 옷을 입혀 놓고, 최근에는 아예 증산도의 교리를 통째로 오려다가 해괴한 망언을 행하고 있는 집단으로 이들은 모두 증산도에 심각한 폐해를 입히고 있는 난법 교단이라는 데 그 공통점이 있다. |
월곡은 일제 치하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민족지로서 당당한 필진과 탄탄한 편집으로 어깨를 함께 겨뤘던 『시대일보』을 인수 · 경영하려 했다. 그래서 언론 · 문화사업 뿐만 아니라 당시 보천교 활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일본에 의해 끊긴 조선의 왕위(王位)를 보천교(普天敎)가 다시 복원하려 한다는소문이 일었기 때문이다.
보천교는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세울 나라 이름을 ‘시(時)’라 했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王) 또한 일본의 천황(天皇)이나 중국의 천자(天子)와 격(格)이 같은 ‘천자’라 했는데, 이를 근거로 민중들은 보천교가 조선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문을 믿게 됐던 것이다.1)
이런 소문은 당시 민중 사이로 급속히 번졌고,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보천교 운동의 슬로건은 당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과 무능한 조정에 실망, 상실감에 빠져있던 민중들의 기대를 하나로 모으는 데 엄청난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 결집된 힘을 민족의 독립 활동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은 월곡이 지닌 한계였다. 심지어 그는 말년에 일제와 타협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 민중의 실망을 사기도 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왜 월곡이 일제의 회유책에 대해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협상을 벌였느냐는 것이다. 그 배경으로는 그가 어릴 적부터 겪은 갑오농민전쟁을 비롯한 강경 투쟁 노선에 대한 극도의 회의와 강증산으로부터 영향받은 반전(反戰) 평화론이 주조를 이룬 것으로 추단(推斷)된다.
‘대시국(大時國)’을 선포했던 황석산의 천제'
당시 상황으로부터 유추해 볼 때 월곡이 노렸던 것은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대리 통치’를 위한 적임자로서 자신과 보천교를 인정해 달라는 정교일치(政敎一致)를 밑바닥에 깐 정치적 야심이 작용하지 않았나 추단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도는 이후 전개되는 월곡 주도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說)이라는 거국적인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2)
월곡이 경상도 함양 황석산에서 1921 년 고천제를 올리고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교병(敎名)을 보화(普化)라 한 것은 당시 파천황(破天荒)이나 다름없는 하나의 민중적 사건이요, 식민지 백성의 울분을 삭혀주는 청량제였음은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3)
월곡이 ‘대시국(大時國)’을 선포했던 황석산의 고천제 행사는 실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행사에 참여했던 이성영의 기록에 의하면 제단이 9층이었고 제수로 소 7 마리, 돼지 23마리가 쓰였다고 하니, 당시 상황으로 보아 대규모 의식임을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보천교주 월곡은 이 황석산 천제에서 교도 수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국호를 ‘대시국’이라 선포하며 아울러 관제를 교단조직과 병행하여 발표했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의미하는 선언이었다.
월곡은 이렇게 신왕조의 창업을 하늘에 고하는 상징적인 방법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무리에게 훨씬 적극적인 신앙을 요구할 수 있는 바탕을 다진 것이다.
월곡은 당시 민중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풍수사상과 비기 도참설 등을 자신의 천자등극을 예시한다는 상징조작에 적절하게 활용한 선전의 귀재였다. 고천제(告天茶)에서도 국호를 선포하고도 교묘한 위장과 수완으로 일제 당국에 잡히지 않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불패(不敗)신화를 창조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에는 보천교 교주인 월곡 차경석이 있었고, 차경석의 카리스마는 보천교도에게만 한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들에게 이적(異蹟)을 일으키는 새로운 신인(神人)으로 다가섰다.
이제 그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 초기 역사의 격랑 속에서 ‘한.중.일 천자’를 꿈꾸며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한 순간에 덧없이 사라져 버린 월곡 차경석의 생애와 사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1) 당시 보천교를 목격한 안영승의 증언.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 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1992, 30쪽 재인용)
*2)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31 쪽 참조
*3) 박문기 「본주」 (서울: 1995, 정신세계사),49~51 쪽
제1장 월곡 차경석, 그는 누구인가 |
1. 동혁농민혁명과 망국(亡國)의 비애
서세동점 ... 붕괴되는 조선왕조
19세기 후반의 한국 사회는 총체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5 백여 년 지속된 단일 왕조체제의 붕괴 조짐과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외세 압력은 조선 왕조를 뿌리째 흔들었다. 당시 위기의 성격은 정치 · 경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 문화적 차원의 세기말적 현상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봉건사회가 종언을 고하고 근대로 접어들던 시기에 어김없이 혼란이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19세기 후반의 조선도 예외 없이 누적된 봉건사회의 모순이 중첩되어 드러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삼정문란(三政紊亂)으로 지칭되는 조선조 말 봉건사회 해체기의 혼란과 맞물려 조선을 향한 제국주의의 침략은 점점 노골화되었다. 빈번한 농민 수탈, 아전들의 횡포가 극에 달한 가렴주구(苛斂誅求), 고리대금의 횡행 등 사회적 모순은 파국을 향해 치달았고,
문란한 왕실 외척의 세도정치는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기는커녕 정국를 더욱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폭정을 정화하기 위해 보낸 암행어사마저도 불법과 부정에 동조하는 폐단이 생겼을 정도였으니, 민중의 희생을 가중시키는 지배계급의 압박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더하여 가뭄과 홍수가 연이어 발생하였고,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였으며 물가의 폭등은 일반 민중들의 삶을 궁핍으로 몰아갔다. 그리하여 지방관리와 양반 토호들의 수탈에 민중들은 어린 자녀를 쌀과 바꾸는 처참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또한 폭압을 견디다 못한 민중들은 자식들의 손을 잡고 조상 대대로 살던 정든 고향을 떠나는 유민(流民) 대열에 합류하는 처참한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런 질곡의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분노와 저항은 폭발 일보 직전의 비등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세기 조선의 붕괴조짐은 국내적 요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편전쟁 이후 동양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시키던 서양 제국주의는 그 모습을 가시화하면서 호시 탐탐 한반도를 향해 압박해 오고 있었다.
중국을 강타했던 아편 전쟁을 통해 동양에 대한 힘의 우위를 과시한 서구 열강은 중국에 이어 한반도에도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골몰했다.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이어진 프랑스 함대의 출현과 1866년의 제네랄 셔먼호 사건은 서구 열강들의 힘을 드러낸 것이었으며, 이에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미 서양의 면직물을 비롯한 여러 공산품이 조선의 시장에 범람했고, 서울 인근에까지 진출했던 서양의 군대를 목도한 민중들은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조선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자본주의 혁명을 거쳐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의 침략도 염려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원료 공급과 시장 확대를 꾀하던 일본 정부 내에서는 군부를 중심으로 정한론(征韓論)이 서서히 대두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압박이 코 앞에 닥쳐오고 있었지만 조선 위정자들은 탄력적인 정책의 변화는 고사하고 권력 내부의 정권 쟁탈에만 사로잡혀 있어, 민중들은 점증되는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회적 모순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장 큰 피해자들인 민중의 분노는 축적되기 마련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개혁 의지는 점점 더 강렬해지는 법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 속에서 이른바 ‘시대의 혁명아'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역사에 등장하고, 그 인물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역시-를 주도해 나가기 마련이다. 세상사가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엮어내는 것이라면, 그 시대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경륜(經綸)과 역량(力量) 여하가 시대의 성격을 규정짓고 역사발전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인물이라도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하면 역사의 조소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운명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하에서 봉건지배체제의 모순이 그 도를 더해가고, 아전들을 비롯한 지방관리들의 수탈이 극에 달하자 민중들의 저항은 마침내 1894년 갑오농민혁명(甲午農民革命)으로 폭발하였다.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동학교도를 집결시키는 것으로 시작된 1893년의 교조 최제우 신원(伸寃)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포악한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쫓아내면서 일어난 갑오농민혁명은 순식간에 들불처럼 삼남(三南) 일대로 번졌다. 봉건 수탈체제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수많은 농민들이 팔을 걷어 붙이고 일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한 톨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는 형국’이었다.
월곡 차경석의 부친, 전봉준과 동학혁명지도자로 활약
당시 양반과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던 천주교는 연이은 박해로 인해 민중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천국(天國)에의 희망은 던져주었으나 민중들의 실생활에는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한 채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삶은 점점 황폐해 가고 있었다.
민중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비참한 현실을 타개해 줄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희망이 필요했다. 바로 이때 동학 농민군은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민중들을 구하기 위한 개혁을 외치며 새 사회 건설을 위해 혁명을 부르짖으며 떨쳐 일어선 것이다.
도탄(塗炭)에 빠진 민중을 지금 구하지 않으면 국태민안(國泰民安)은 이루어질 수 없다며 고부의 전봉준이 농민군을 이끌고, 탐오한 지방관리 개개인을 넘어 농민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관리를 양산한 봉건체제에 대한 저항에 총력전을 펼쳤다. 동학혁명은 종교투쟁이 아니라 농민이 주체가 되어 민권의식을 발양했던 농민혁명이었고,탐관오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며 민중들에 대한 연민을 가졌던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의 아들’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농민군 2 인자’로 활약한 차중필
월곡 차경석의 선친이었던 차중필(車中弼) 역시 농민지도자로 일어나 격변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다간 혁명가였다. 본관이 연안(延安)이고 자(字)가 치구(致九)인 월곡의 부친 차중필은 철종 2년, 1851년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범한 사람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차중필은 성년이 되어 밀양(密陽) 박씨 (朴氏)와 결혼했다. 빈농(貧農)이긴 했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를 맞은 역사는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그는 순종을 미덕으로 살아가는 일개 범부이기를 거부한 것이다.
<전봉준의 생가>
전봉준과 함께 동학군을 이끌고 봉기했던 월곡의 아버지 차중필은 관군에 체포돼 불에 태워죽이는 분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갑오농민전쟁에 뛰어든 차중필은 전봉준이 전개한 혁명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차중필의 손자이자 월곡 차경석의 둘째 아들인 차용남은 동학혁명 당시 조부 차중필과 전봉준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
*1) 2001년 4월 15일 인터뷰. 정암(井巖) 차용남은 한학 특히 주역(周易)에 일가견을 가진 한학자로 통신대 등에서 한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왔다.
동학란 당시 전봉준은 친구였던 할아버지(차중필)를 찾아와 거사하자고 설득했답니다. 아마 5 척 단구로 왜소한 체구였던 전봉준은 동네 유지로 6척 장신에 당당한 체모를 갖춘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봉기를 하자면 지도자가 그럴듯해 보여야 했겠지요.
‘고부에서 당신(전봉준) 부친이 조병갑이에게 당했다고 봉기하면 사감(私感)으로 들고 일어난 것으로 오해할 테니 뚜렷한 대의명분을 내세워야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 봉기가 성공할 것’이라고 조언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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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관아 습격를 시발로 일어난 농민군이 관군과 일본 · 청나라 군대에 의해 무참히 참살 당하고, 특히 일본군이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는 등 외세 침략이 노골화되자, 동학교주 최시형은 전(全) 동학교도에게 참전명령을 내렸다. 차중필 역시 이에 적극 가담했다.
차중필은 갑오농민전쟁 당시 백산(白山)에서의 ‘2차 거병’ 때인 1894년 3월 21 일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유한필, 손여옥등 혁명군 최고 책임자들과 함께 녹두장군 전봉준 바로 아래 서열인 장령격(將領格: 군단장 급)으로 참전했다.
이이화 동학농민혁명단체협의회 공동대표는 「고창은 동학농민혁명의 요람이었다-동학농민혁명과 고창지방의 위치」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흥덕의 접주였던 차중필은 열성으로 가혹한 고리대를 정리해주고 억울한 송사를 풀어주거나 강제로 빼앗은 장지(葬地)를 되돌려 주는 일을 하였다. 뒷날 그의 아들 월곡은 보천교를 창시하여 독립자금을 대주기도 하였다. |
평소 주민들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면서 신망을 얻고있던 차중필은 친구인 전봉준이 봉기하자 당시 정읍에서 농민들을 이끌고 참전해 동학군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차중필은 1차 봉기 때 전봉준 장군과 함께 고부 관아 습격을 사전 모의했던 20 인방(幇) 중의 한 명이었고, 2차 봉기 때는 함께 장령직을 맡아 출전했던 손여옥과 정읍군에서 농민군 5천명을 이끌고 두령으로 참전했다.
차중필에 대한 기록은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 보천교 교단측의 자료, 『동아일보』 등 신문자료나 기타 문건에서 확인된다.
1894년 연말 동학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밀려 공주(公州)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자 차중필은 동학군의 다른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은신처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은신처로 삼은 곳은 정읍군 소성면 광조동(광주골) 최제칠(崔濟七)의 집이었다. 그러나 차중필은 모해자(謨害者)의 밀고로 추격해온 관병(官兵)이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자 스스로 관군에게 붙잡혀 동네 앞산에서 분살형(焚殺刑)을 당한다.
15세 월곡, 분형 당한 아버지 시신 수습
동학혁명 당시 차중필은 정읍에서 기병(起兵)에 성공한 후 인근지역인 흥덕까지 진출하여 당시 흥덕 군수 윤석진과 ‘악연(惡緣) 아닌 악연’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불씨가 되어 분살형에 이르게 되었다”고 차중필의 셋째 손자 차봉남은 증언했다.
흥덕군수 윤석진은 아버님과 묘한 악연이 얽혀 있었습니다. 조부가 원래 정읍에서 기병해 단독으로 정읍 관아 입성에 성공했는데 옆 지역인 흥덕을 맡은 조부님의 친구인 고영숙은 실패, 오히려 관군에 생포돼 흥덕 관아에 수감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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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부친 차중필이 정읍 농민들을 모아 동학혁명 햇불을 든 곳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소 옆)
차중필이 분사했을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1894년 12월 29일이다. 당시 정황을 중필의 둘째 손자 차용남은 이렇게 증언했다.
조부님은 정읍에서 기병한 동학군을 이끌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다가 관군에게 패배하자 전봉준과 함께 정읍 대흥리로 돌아왔습니다. 두 분은 바로 동학혁명 거사를 모의했던 방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입암산 산성에 들어가 또 하룻밤을 지새고 다음날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현썽암리)에 살고 있던 동학군 부하인 김경천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전봉준은 그의 밀고로 체포돼 나주로 압송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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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형 당한 동학군 대장의 장남으로 출생
월곡은 1880년 7월 3 일, 고창군 흥덕면 연기리(당시는 고부군)에서 차중필의 4남 1 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홍(輪洪)이고, 자(字)는 경석(京石) 이며, 호는 월곡(月谷)으로 그의 스승인 증산 강일순(姜一淳) 2)이 지어 주었다.
2) 姜一淳(1871-1909) 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사옥(士玉)이며, 호는 증산(甑山)이다. 갑오농민전쟁 당시 무수한 희생을 보고 반전 (反戰)평화론을 주창했으며, 1901년 7월 5 일, 모악산(母岳山) 대원사(大元寺)에서 득도(得道)한 뒤 기행이적(奇行異跡)을 보였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한 때 놀라운 언행으로 당시 사람들의 기대를 한 폼에 받기도 했지만, 후에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 증산교의 창시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증산교에서는 증산이 상제로 불리며 운명(殞命)한 사실을 ‘화천(化天)’이라고 한다.
월곡은 이제 우리 역사에서 망각된 존재가 되었지만, 20세기 초반 식민지 한국 사회의 전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던 지도자였고, 수백만 명에 달하는 교도를 확보한 비범한 종교지도자이자, 정교(政敎) 일치의 독립왕국을 세워보려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출생과 행적에 대해 끊이지 않는 소문과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 이어졌다.
신비에 싸인 출생 신화
월곡의 출생지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동아일보』 1924년 12월 18 일(음력)자에는 전북 고창군(高敞郡) 벽사면(碧沙面) 용산리(龍山里)라는 마을의 반정리에 있는 김광배의 집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고, 월곡의 차남(월곡이 당시 16세) 용남(龍南)은 부안면 연기동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그가 이끌었던 보천교에서 발간한 『보천교지』에는 그의 출생지를 전북 흥덕군(興德郡) 부안면(技安面) 호암리(壺巖里)로 전하고 있다.
『보천교지』에는 월곡의 출생을 둘러싼 다소 신비로운 현상이 기록돼 있다. 21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일이어서, 교단에서 그를 신격화하기 위해 만든 출생 설화로 해석됨직하다.
『보천교지』에 따르면 임감역(任藍投)이란 사람이 호암리에 새 집을 지어 이사갔는데 구렁이와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 무서워 살지 못하고 그 집을 버리다시피 하고 떠나자 월곡의 부친 차중필이 그 집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구렁이와 호랑이가 사라지게 되었고, 이 집에서 월곡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상 이름난 인물들이거나 민중의 흠모를 받았던 지도자들은 대개 그들의 어린 시절에 남다른 점들이 있다. 이 유별남은 성격이나 행동의 정의표움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고 뛰어난 슬기로움에서 오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지 어린 시절에 보여준 의기, 지혜, 사심 없는 행동은 그들 자신의 훌륭한 인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월곡도 어린 시절부터 가장(家長)으로 집안을 꾸리는 등 적지 않은 특이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한 ‘산천은 인간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면 월곡이 부친의 사망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이사하여 보천교 태동의 근거지로 삼은 정읍은 실로 기기묘묘하다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지세를 지닌 곳이다.
그 지세를 대강 살펴보면 우선 동쪽에 천하의 절경이라 일컫는 내장산이 있다. 이 내장산에는 전국에서 제일 크다는 연소혈(薰巢穴), 즉 ‘제비집 형상의 명당’이 숨겨져 있다고 예로부터 전해오고 있다.
내장산 남쪽에는 속칭 천관산(天冠山)이라 일걷는 입암산(笠巖山)이 있는데 바로 이 산에 신령한 기운이 다 뭉쳐 있다고 한다. 3)
*3) 박문기 [본주], (서울: 1995, 정신세계사), 43~49쪽.
전통적인 방식대로 한학을 공부한 박문기는 차천자의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 옆 마을 진등에서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농부로 『맥이(貊耳)』 『대동이(大東夷)』등 우리 민족의 원류를 발굴하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이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박문기는 외조부가 보천교 신자로 유년시절 대흥리에서 차천자의 귀여움을 받고 자란 어머니 최영단과 관련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천교와 차천자에 관한 얘기를 정리했다.
산의 동편 줄기 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이 곳 사람들은 흔히 삼성산(三聖山)이라 부른다. 즉 이 산의 정기를 받아 산과 같은 성인이 셋 나온다는 뜻이다. 여기에 이치를 맞추듯 산의 좌우에 문필봉(文筆峯)이 우뚝 솟아 있어 더욱 신비롭다.
풍수로 본 정읍의 지세
이 삼신산에서 서북으로 작은 들판을 건너면 제령봉(帝令峯)이 있는데 이는 곧 ‘임금이 명령을 내린다’는 형상을 말함이다. 제령봉은 흔히 계룡봉(鷄龍峯)이라 하는데 암닭이 화하여 용이 된 형상이라 한다. 그래서 수닭이 화한 충청도 계룡산에 비해 더욱 신비한 조화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연하게도 바로 이 제령봉 아래에는 조회리(朝會里 · 속칭 조올), 삼군리(三筆里) 등의 이름을 가진 동네가 있다. 곧 임금이 조회를 하고 삼군이 호위하는 형상을 지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산의 서편 줄기에 후중한 방장산(方丈山)이 있고 방장산에서 북으로 나아가면 왕심리(往尋里)라는 동네가 있다
왕심리 동북편에 바로 보천교가 일어난 대흥리가 있고, 대흥리 뒷산은 ‘날으는 용’이란 뜻의 비룡봉(飛龍峯), 비룡봉이 북으로 뻗은 곳에 ‘임금의 스승’ 국사봉(國師峯)이 있다. 특히 국사봉은 제령봉과 작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이름에 걸맞는다.
이렇듯 함축된 의미를 지닌 묘한 지형들을 품어 안고 있는 것이 바로 입암산이다.
입암(笠岩)이란 바로 ‘갓바위’를 지칭하는 말이다. 때문에 흑자는 그 갓을 하느님의 갓에, 혹은 천자의 관에 비기어 천관산(天冠山)이라 이르기도 한다. 산아래 오장군봉(五將筆峯 · 속칭 오봉)이 있고 군령지(軍令地)가 있는데 군령지란 바로 장군이 명령을 내리는 곳을 뜻한다. 여기에 모든 물이 다 북쪽을 향해 흐르고 있어 북진(比進)의 기상이 역력하다. 때문에 풍수에 웬만한 식견이 있는 자들은 다 입암산 아래 도읍을 정하면 가히 실지(失地) 회복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전라남도 장성의 황룡강물을 막아 대호(大湖)를 만들고 노령(蘆嶺)을 뚫어 그 물을 입암천으로 통하게 하면 장차 이 나라가 천하의 일등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하였다.
지세가 이러한즉 당시 사람들은 거의가 정읍의 계룡에 새로운 왕조가 창업되어 후천 5 만년 선경세계의 기틀을 다져 나갈 것이라 믿었다. 어린 시절부터 국가적 불행을 당했고, 이런 지세를 가진 곳에서 성장한 월곡의 정신세계에 어떤 생각이 깃들었는지는 바로 훗날 그의 행적이 증명한다.
아무튼 통학군의 선봉에 섰다가 분형으로 생을 마감한 부친의 영향을 받았던 월곡은 부친의 뜻을 이어 받아 일찍부터 동학에 입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동학에 대한 경도(傾度)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부친 차중필이 보여 주었던 기개와 분형을 목도하고 골수에 사무쳤을 원한 등을 미루어 보면, 그의 시국에 대한 고민과 의지는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5세 어린 나이에 부친의 죽음을 목도한 월곡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왜곡된 세상에 대한 반감과 일제에 대한 분노가 끓어 올랐을 것이다.
일찍부터 세인의 주목 받아
월곡은 보통사람보다 체구가 장대하고 기걸찬 인물로 확연히 구별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춰 남달랐다. 참고로 보천교 신도였던 아버지를 따라 대흥리 본소에서 살았던 정읍의 최영단(75세) 할머니는 2001년 4월 필자와 만나 월곡이 설법할 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당시 보통사람들의 머리가 월곡의 옆구리 쯤에 있을 정도로 장대한 체구였다”고 그의 큰 체구를 증언한다.
월곡의 유별남은 그의 부친이 화형을 당한 후에 그의 행동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갑오농민 전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당시 상황은 사형 당한 농민군의 시선을 거둬 장사지내는 것은 커녕 사체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민심이 흉흉한 때였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이 지척에 있었다.
그러나 불과 15세 소년이었던 월곡은 부친이 화형을 당한 바로 그날 밤 형장을 찾아가 부친의 시신을 업어다가 고향 대흥리에 묻었다. 당시 즉결처분으로 수많은 농민군들이 죽어 가는 살벌함 속에서 시신들이 쌓여 있어 성인들조차 접근을 꺼리는 형장을 찾아 부친의 시신을 찾은 어린 월곡의 씩씩하고 꿋꿋한 모습에 당시 관군도 감복했다.
부친의 시선을 모셔와 무사히 장사를 지낸 월곡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가족과 사회 나아가 민족에게 불어닥친 불운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정읍시가 개설한 홈페이지의 전통문화편에 보면 차천자는 이미 신화화돼 아래와 같이 전설적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월곡이 7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는데 주변에서 신기한 일들이 많았다. 1918년 금강산 마하연 암자에 기거할 때의 일이었다. 산 깊고 물 좋은 그 곳에는 낮에도 바람 소리와 새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런데 스님들이 말하기를 요즈음 이상한 새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듣지 못한 곱고 아름다운 새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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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년시절, 동학운동에 참가
자신에게 불어닥친 운명을 비껴가기보다 정면에서 맞부딪혀 뚫고 나가고자 했던 월곡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당시 민중의 삶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가정 형편과 장남이자 가장(家長)으로서 보살펴야 할 적지 않은 식솔들이 있었다.
일찍부터 자신의 안위보다는 시대의 운명에 관심을 보였던 부친 중필의 슬하에는 첫째 월곡 차경석(초명은 輪洪)을 비롯해, 둘째 윤경(輪京), 셋째 윤칠(輪七), 넷째 윤덕(輸德) 등 4형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윤경은 배 다른 동생이고, 월곡 다음으로 막내 윤덕의 인물이 수려했다고 한다. 후에 월곡은 슬하에 희남(喜南), 용납(龍南), 봉남(鳳南), 복룡(福龍), 계룡(桂龍) 등 5남과 복리(福里), 복례(福禮), 삼이(三伊) 등 3녀를 두었다.
끼니 걱정할 정도의 궁핍한 형편
당시 월곡의 집안은 궁핍한 삶 그 자체였다. 5백여평 남짓 되는 땅을 가꾸고 있던 월곡 집안은 끼니조차 거를 정도였고, 그의 집안은 아우 윤경(輪京)의 아내 주씨(朱氏)가 ‘남의 집에서 일하고 밥을 얻어오는’ 밥품으로 겨우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정 형편 속에서도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꾸려야만 했던 월곡은 어려운 가정을 돌보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은 쉽사리 좋아지지 못했고, 20세때 아버지 고향인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선친의 뜻을 이어 받아 동학에 종사하고 있었다.
월곡은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살아 남은 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만든 세칭 영학계(英學契)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농민군 간부들로부터 흥덕군 관아 공격을 제의받고 가담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1898년 흥덕 봉기이다.
다음 해인 1899년 여름까지 정읍을 중심으로 전라도 중서부 일대는 영학당(또는 영학계)으로 불리는 농민군이 장악했다. 갑오농민혁명 이후 최대규모의 농민봉기였다.
전라도 중서부에서 세를 과시한 영학당 농민군은 곧바로 광주 진격을 위한 고창성 공략에 들어갔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그 뒤 영학당을 토벌하기 위한 전주 진아대(鎭衛隊)가 정읍에 내려왔고 혁명 주동인물과 불온한 잔당 토벌을 구실로 다수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대흥리에서 월곡도 잡혔다.
을해년의 정읍 농민봉기인 세칭 ‘영학당 사건’을 좀 더 자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
*4)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및 기타 자료 참조
이 사건은 갑오농민혁명이 농민군의 참패로 끝나고 미처 잡히지 않은 농민군들이 비밀리에 조직의 재건을 꾀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영학당은 전쟁 당시 처참하게 죽은 자들의 주변에 원한과 복수심으로 맺어지게 된 일종의 계(줬)라는 형식으로 당시에 거의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영학(英學)은 예수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전북 정읍의 마항리(지금의 정읍군 이평면)에서 영국인 목사가 주민들을 모아 선교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돼 계의 형태인 영학계(英學契)로 발전하였는데, 이후 전라도 중서부 7개 읍으로 그 세력이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영학계를 선교활동을 빙자한 시국집회로 규정했고, 관(官)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결국 영학계는 활동이 중지 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8년 11월 16일 새벽, 영학계로 분류되는 이화삼(李化三), 송민수(宋敏洙)가 관의 영학계 활동 중단압력에 불만을 품고 흥덕의 북면과 동면의 농민 3백여 명을 이끌고 흥덕 동헌(東軒)으로 쳐들어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군수였던 임용현(林鏞炫)은 처음에는 당황하여 후퇴하였으나 이틀만인 19일에 각 면 훈임(訓任)힘들과 이서(吏胥)들을 규합하여 반격을 가하게 되었고, 농민군은 퇴각하면서 해산해 버렸다.
영학당 사건에 참가 혁명 대열에 합류
이 사건을 두고 일각에서는 ‘흥덕민란’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체포된 이화삼이 스스로를 영학당 회장이라 해서 영학당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흥덕에서의 농민군 사건이 수습과정에 접어드는 가운데, 1899년 2월 고부 · 태인 등지의 농민 수십 명이 관아로 몰려가 이화삼의 석방을 요구하는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고부, 흥덕, 장성, 영광, 함평 등지로 확대되었고, 이 조직의 수장은 최익서(崔益瑞), 송문여 등이었다. 이 때 참가한 조직원만도 수천 여명이었다.
갑오농민혁명 당시 관군으로부터 체포 대상이었던 정읍 출신의 최익서(1858~1918)는 1899년(己亥) 음력 4월 18일, 정읍군 입암면 왕수리에서 농민군 4백여 명을 이끌고 벌왜벌양(伐倭伐洋), 보국안민(輪國安民)의 명분을 내세우며 고부군 관아를 습격했다. 이어 파죽지세로 이튿날 밤에는 흥덕, 그 다음날에는 무장군 관아에 쳐들어 갔고, 관아의 군인들은 농민군이 몰려 온다는 소식에 미리 도망갈 정도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고창으로 향하던 이들은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그들의 주무기인 화승총을 쓸 수 없어 결국 공략에 실패하고 퇴각하였다. 퇴각하면서 산발적인 전투를 지속하여 그 싸움은 이듬해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일본 외무대신은 주동자 색출을 위해 일본인 경찰 14명을 봉기지역으로 파견해 수백 명을 체포할 정도였으니, 이 사건은 갑오농민혁명 이후 최대의 농민봉기로 기록되며, 갑오농민혁명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거사로 평가된다.
이때 주동인물 대다수가 죽거나 체포되었는데 월곡 역시 이 봉기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부친인 차중필의 이름을 앞세운 농민군과 합세하여 봉기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혐의로 사형이라는극형을 선고받았다. 마침내 월곡은 장성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처참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4. 사형선고, 그리고 기사회생 2차례
대(代)를 이은 수난
사람의 운명이 하늘을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인간의 운명을 만드는 것인가?
월곡은 생애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특히 젊은 시절 드라마틱하게 두 차례나 생환(生違)한 적이 있다. 5)
*5) 2001년 3월 27 일, 월곡의 3남인 봉남(鳳南 75세)이 월곡이 죽기 직전 거처한 옆방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필자에게 전한 월곡이 생사의 문을 넘나든 얘기는 당시의 정황을 고려해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그 첫째가 월곡이 자신의 부친을 불태워 죽인 윤석진의 마수를 벗어나 생명을 건진 이야기다. 월곡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 할 윤석진이 또 아버지에 이어 자신을 사형시키기 직전, 이름도 모르는 한 장교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이다.
흥덕 군수 윤석진은 아전들이 “차중필의 아들이 기골이 장대하고 기걸 찬 인물이어서 살려두면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 들텐데, 후환이 두려우니 아예 죽여버리자”며, 참초제근(析후除族 풀을 죽이려면 아예 뿌리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뜻)해야 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월곡을 잡아들였다.
월곡이 정읍 동학 접주로 기골이 장대했던 아버지 차중필의 대를 잇는 ‘인물’이란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차에 월곡을 붙잡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친과 함께 동학에 참여했던 동학잔당들이 많이 사는 흥덕현의 민심이 뒤숭숭했다.
포승줄에 묶인 월곡의 담력을 시험하기 위해 윤석진은 당시 서울에서 파견돼 온 군인 3백여 명이 착검하고 있는 사이로 월곡을 들어오게 했다. 살벌한 분위기인데도 이미 죽을 각오를 한 월곡은 장대한 체모에 어울리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걸어 오는데 담대한 기상이 좌중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처럼 비범한 인물됨을 본 윤석진이 오히려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니 애비가 역적질하다 죽었으니 니 마음은 어떤고”하자 월곡이 “나로서는 할 말이 없소”라며 “죽이려면 빨리 죽여 달라”고 오히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다시 윤석진이 “애비가 죽었는데 할 말이 없다면 말이 되느냐”고 욱박지르자, 월곡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표표한 자세로 “나로서는 할 말이 없소. 다만 (아버지가) 국법을 어겨 돌아가셨으니 분하다면 나라에 반심(叛心)이 있다는 뜻일 테고, 잘한 일이라면 부모 은혜를 모르는 사람일 테니 말이요”라고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윤석진은 부하 장령들에게 “북을 세 번 치면 총을 쏘라”고 총살 형을 명했다.
잠시 뒤 북 소리가 마른하늘을 울리며 허공에 메아리쳤다.
둥!
둥!
두 번째 북소리가 끝나기 직전 사형장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사형을 중단하라는 고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인명 (人命)은 재천(在天)이라던가?
흥덕 영학교 민란 진압 차 서울에서 내려온 장교 한 사람이 총살 집행을 중단하라고 고함지른 것이다.
그 장교는 사형을 중지시킨 뒤 윤석진에게 “아비의 잘못은 밝혀져 이미 죽였는데 그 자식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이느냐”며,
“사감(私感)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고 항의했다.
서슬퍼런 이 장교의 명분 있는 힐난(詰難)에 윤석진은 월곡의 석방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월곡을 따라와 흥덕현 관아 밖에서 초조하게 아들을 기다리던 모친은 월곡이 갑자기 사형이 중단돼 포승줄을 풀고 밖으로 나왔는데도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윤석진과 친했던 흥덕 동림(東林)에 사는 흥덕읍내 향교 재무로 있던 백청사(白靑史)로부터 관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얘기를 전해 들은 월곡의 한 친지가 월곡 3남인 봉남에게 전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선을 넘은 것은, 앞서 설명했듯 영학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건이다. 그동안 월곡이 어떤 경위로 풀려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했지만, 그의 아들 봉남의 증언으로 사실관계가 분명해졌다. 봉남은 월곡이이후 장성 관청에 붙잡혀 또 한차례 죽기 직전 살아 난 얘기를 이렇게 전한다.
월곡의 부친인 차중필을 사형시키는데 관여한 김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월곡이 입 암산성 안의 별장사(別將舍)에 불을 질러 태워 없냈다’고 장성관아에 밀고, 사형을 언도받게 했다.
실제는 김씨 자신이 불을 지르고, “월곡이 흥덕 관아에서 풀려나 입암산 별장에 들어가 사서삼경(四書三經), 특히 주역(周易) 등에 심취하여 독서하며 수양하고 있다가 ‘아비 죽인 원수’를 갚으려고 정부에 대한 반심(叛心)으로 불을 질렀다”고 모함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전라도 정읍현감을 지낸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시찰한 적이 있는 이 별장은 전주감영의 관리하에 있던 군사적 거점의 요새로 산꼭대기에 있어 평소에는 비어 있었다. 월곡은 시국이 뒤숭숭해지자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독서로 소일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 오래 머물자 인근에 자연스럽게 알려져 화근이 된 것이다.
목숨 건진 시(詩) 한 수
김씨의 모함에 꼼짝없이 걸려든 월곡은 포승줄에 꽁꽁 묶여 죽창으로 무수히 찔리는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수감됐다. 목을 가운데 두고 나무 판자 두 개를 대못으로 박아 움직일 수 없도록 해 놓고 발에 족쇄를 채워 꼼짝 못하게 해 용변도 앉아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었다.
관식도 주지 않아 매일 한끼를 월곡 둘째 동생인 윤칠이 정읍 대흥리에서 장성관아 감영으로 배달해야 했다. 형제는 도시락밥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리며 먹었다.
특히 고개를 움직일 수 없어 동생 윤칠은 뒷돈을 준 간수들의 협조를 얻어 목에 걸린 나무판자 밑을 들어올려야 월곡은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가혹한 감옥생활이었다.
모친은 간수들에게 줄 뒷돈 마련을 위해 매일 엽전 몇 푼이라도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꾸어야 했고 대나무 도시락에 밥을 싸야 하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죽을 날을 기다리던 월곡으로서는 살아 있는 게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사형 집행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집행 하루 전 날이었다.
세금을 떼먹은 혐의로 월곡이 수감된 옥사 옆 별채에 연금돼 있던 아전을 위로하기 위해 동료들이 베푸는 잔치가 벌어졌다. 이들은 감방 안까지 기생을 불러다 놓고 술판을 벌였다. 조선조 말 지방 관료인 아전들의 부패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기생들의 노래 가락까지 곁들인 썩어 빠진 탐관오리들의 타락상을 보면서 ‘이제 내일이면 이 세상을 하직한다’고 생각하니 월곡은 화형 당한 부친의 한(恨)도 풀지 못하고 죽게 된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고 만감이 교차했다.
이때 교교히 비치는 감영 밖의 무심한 달을 쳐다보다 시 한 수를 읇었다.
복력수지등로기 (伏?誰知登路驥)
함로미작견기홍 (啣蘆未作見機鴻)
(마굿간에 엎드린 말, 뉘라서 천리마인줄 알랴. 갈대 머금은 고니, 올가미 못 본 신세로세.) 6)
우연히 근처를 지나치던 아전 한사람이 월곡의 우렁찬 목소리와 시 내용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다가왔다.
“방금 읇은 시가 누구의 시냐?"
“내 신세가 하도 처량해서 한번 옮어 본 거요
“정말 네가 지은 시란 말인가
“그렇소
“그럼 내가 운자를 벨 테니 또 옳어 보겠는가?"
“운을 떼 보시오 ”
“묏산(山). "
“초심하사욕서산 (初I心何事欲棲山). "
“사이 간(問). "
“우연득죄수보간 (偶然得罪數步問). "
*6) 고니나 기러기 같은 미물도 올가미를 쳐놓은 것을 알고 잡히지 않기 위해 갈대를 입에 물었다가 미리 떨어 뜨려 올가미를 피해 먹이를 찾는다는 사실을 빗대 자신의 지혜 없음을 한탄함.
월곡은 조조(曹操)의 큰아들 조비(曹丕)가 아우 조식(曹植)이 반역 음모의 혐의를 받았을 때 그를 차마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용서할 수도 없어 자기가 운자를 낸 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대귀(對句)를 지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던, 이른바 ‘칠보시(七步詩) 7) 문답처럼 아전이 내놓은 운자에 막힘 없이 응구첩대(應口輒對)로 시를 읇었다.
달 밝은 밤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아전과의 시 문답이 계속되었다.8)
초심하사욕서산 (初I心何事欲棲山)
우연득죄수보간 (偶j然得罪數步問)
유군막소아신곤 (唯君莫笑我身固)
남아처세항불한 (男兒處世恒不閑)
체신암간창외출 (滯身暗看窓外出)
흥의잠출한불한 (與意暫出恨不閑)
한등반야홀연와 (寒燈半夜忽然臥)
심빈왕래일령간 (心頻往來一嶺間)
처음에 무슨 일로 산 속에 살고자 했던가
우연히 몇 걸음 사이에 죄를 얻었네
그대는 내 신세 곤함을 비웃지 말라
남아 세상살이 언제나 한가하지 않다네
갇힌 몸 가만히 창밖에 내침을 보니
흥겨움도 잠시 나지만 한가롭지 못함이 한이네
한 밤중 차가운 등불에 홀연히 누워
마음만 자주 한 고개 사이를 오가네?
* 7) 자두연두기(煮豆燃?箕) 두재부중읍(豆在釜中泣) 본시동근생(本是同根生)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콩을 묶는데 콩짝지로 불을 때니 / 콩은 솥 안에서 뜨거워 운다 / 콩이나 콩각지는 본래 한 뿌리이건만 / 콩짝지로 콩을 묶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급한가. 당대의 문장이었던 조식이 형제간의 불화를 콩과 콩짝지에 빗대어 풍자한 내용.
* 8) 한시는 봉남과의 인터뷰에 동석했던 박문기가 번역.
자신이 입암산 장수대 별장사에서 지내다 무고로 죄를 얻어 갇힌 신세가 됐음을 한탄하면서, 정읍에서 장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노령고개를 생각하며 지은 시였다.
월곡의 범상치 않은 시재(詩才)와 녹록치 않은 기상을 본 아전은 다음날 아침 바로 장성군수에게 어셋밤에 일어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해 석방을 건의했다.
동생의 기지로 구사일생(九死-生)
이때 마침 열세 살이던 월곡의 아우 윤칠은 점심을 가지고 정읍에서 장성 관아에 왔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장성군수 면회름 요청한 뒤, 형의 목숨을 구해 달라며 매달렸다.
당시 동학농민전쟁 패잔병들이 도처에서 출몰해 감시-가 순시하며 중죄인들은 즉결처분하거나 현장에서 별다른 재판도 없이 마구잡이로 살상하던 때라 동학 접주로 분형 당한 차중필의 아들인 월곡의 목숨은 경각(頃刻)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장성 군수는 눈물로 자신의 형을 살려달라며 지성스럽게 애원하는 윤칠의 정성에 감복되어 “참으로 사정이 딱하게 되었다. 어제 감사가 최종 결정을 한 사항이니 말이다. 감사가 이미 광주목에 이르렀을 터인데 이미 때가 늦었다”면서 오히려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윤칠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형이 억울하다는 서찰을 써주면 감사에게 자신이 직접 달려가 전달하겠노라고 통사정을 했다.
형제 우애에 감동한 장성군수가 서찰을 써 주자 윤칠은 형을 살리기 위해 그 길로 죽기살기로 광주목으로 뛰어갔다. 광주목에 도착했으나 사나운 개와 사령들이 막아서며 어린 윤칠의 접근을 막았다. 우여곡절 끝에 윤칠은 결국 감사에게 하소연, 월곡의 사형을 중지토록 하는 전갈을 갖고 장성 관아로 되돌아왔다.
어린 소년 윤칠이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채 형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숨을 헐떡이며 장성에 도착해 보니 이미 사형 집행시간은 두어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러나 천만다행, 심부름 간 윤칠의 소식을 기다리던 군수가 형 집행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사의 서찰을 받아본 군수의 사형 집행 중단으로, 월곡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월곡의 동생이 군수의 서찰을 전달했다는 봉남의 증언은 구전돼 온 집안의 얘기로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그토록 형제 우애가 돈독했음을 전해주는 대목이다. 아무튼 월곡은 구사일생(九死-生)으로 호구(虎口)를 벗어났지만 감옥에서 목을 채운 판자에 얼마나 심하게 못질을 했던지 못을 뺄 수 없어, 톱으로 판자를 썰어 내야 했다.
월곡이 기사회생한 것은 당시 동학교인이나 농민군에 가담했던 자들의 색출, 체포, 처형이라는 분위기가 다소 진정돼 있었고, 일진회가 공개적으로 동학운동을 하고 있던 때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월곡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진아대(鎭衛隊)안의 대원들도 민족적 자각의식이 어느 정도 싹트기 시작했던 때라 사형 직전에 월곡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정읍시의 홈페이지에는 월곡이 장성에서 살아난 이야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월곡은 한 때 남의 모함을 받고 장성(長城)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중, 사형수로서 伏誰知登路驥含蘆未作見鴻 (갈대를 머금고 기틀을 본 기러기를 짓지 못하였도다) 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장성 옥중에서 옥살이 중 사형을 받았다. 사형(死刑) 집행 3 일전에 위의 즉흥 시(詩)를 읇으니 장성부사(長城府使)가 그의 시 솜씨에 놀라 극찬하고 다른 운자(韻字)를 내어 시작(詩作)을 겨누며 좋아했다. 월곡의 뛰어난 인품을 잘 알게 된 장성부시는 날이 밝은 즉시 광주(光州) 목사(牧使)를 찾아가 월곡의 면죄(免罪)를 간청했다. 그 후 즉각 월곡은 옥중에서 풀러나는 몸이 되었다. |
5. 부패한 세상, 꿈틀때는 변혁의 욕망
사선을 넘어선 월곡은 평범한 삶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독서와 사색을 통해 품었던 사회 변혁에 대한 상념이 그의 머리에 맴돌았고, 그래서 월곡은 당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동학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동학은 해외의 문명세계를 시찰한 손병희에 의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1861 년 4월 8 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난 천도교의 3 대 교주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는 서얼 출신이었지만, 동학의 중진이었던 숙부와 형의 영향을 받아 21세 때인 1882년 동학에 입문했다. 동학의 이념이 개인의 이익을 비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다분히 사회구원적 성격이 있음을 안 그는, 매일 3만 차례 주문을 외우고 짚신을 두 컬레씩 삼으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동학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관심을 끌어 일찍부터 종교적 수련을 쌓은 손병희는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지자 중군통령(中軍統領)의 직책을 맡아 수만 명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그는 북접군의 지휘를 맡아 27차례 전투와 최고 6만 명의 통학군을 지휘했으며, 남접군의 영수 전봉준과 손을 잡게 되고, 이 때 전봉준은 손병회를 가리켜 ‘도(道)에 있어서만 접장이 아니라 전투에 있어서도 나보다 우수하다’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변절한 일진회 탈퇴 … 새로운 대안 모색
그러나 전술한 대로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 청나라군의 연합 전선에 패배하고 최시형을 비롯한 농민군은 지하에 잠복하게 된다. 그러던 중 손병희는 종횡무진(縱橫無盡)의 출중한 지략과 용기를 바탕으로 극비리에 최시형의 사문(私門)을 부활시키고, 마침내 1897년 12월 24일 동학 제 3대 교주로 도통을 이어 받게 된다.
하지만 동학에 대한 당국의 박해가 지속되고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이 죽어 가자, 손병희는 1901년 3월 도제들과 의논 후 망명을 겸한 외유의 길을 떠났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정치활동을 벌였으며, 상해(上海)에서 손문(孫文)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정치적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 손병희는 동학대단(東學大團)을 이끌고 조국 근대화의 대열에 앞장서게 되었고, 동학농민혁명의 피해를 입지 않은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인다. 손병희는1904년, 5천자에 달하는 ‘비정(秕政)개혁안’을 당국에 건의하는 등 온건한 정치개혁론을 표방했다.
이어 노일전쟁(露日戰爭)이 발발하자 그는 동학 두령 40여명을 모아 보국안민의 계책을 주고, 서울에 대동회를 조직한다. 대동회 이후 중립회, 진보회로 명칭이 변경되고, 이용구가 실무를 맡게 되었다.
손병희의 의도는 장차 벌어질 거사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이용구는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보회를 운영하였다. 이용구는 각 군에 지부를 설치하여 민원해결을 벌이는 등 민권신장과 개화운동을 벌인 것이다. 바로 진보회가 한창 조직을 확대해 나갈때, 죽음 일보 직전에서 목숨을 건진 월곡은 이 대동회가 벌이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대동회는 일본에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고, 철도 부설 일본업자를 도와주는 등 부일(附日) 행위도 함께 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당초의 목적과는 다른 엉뚱한 결말이 빚어지고 ‘일진회’로 이름이 바뀐 진보회의 부일 협력을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100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할 정도로 세력이 커져 버린 이용구 일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월곡은 당시 일진회 전남북도 순회관(巡廻官)으로 활약했으며, 일진회 주요 간부들의 독단과 왜곡된 노선에 이의(異義)를 제기했다. 민중들은 점차 일진회의 매국적 활동에 식상해 있었고, 마침내 손병희도 일진회와 결별하고 동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 종교인 천도교(天道敎)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1905년 12월의 일이다.
손병희는 이용구 일파의 일진회 세력을 동학에서 축출하려는 정풍 운동에 착수, 일진회 지방 지회를 폐쇄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일진회 조직의 친일(親日)활동은 계속되었고, 이들에 대한 대다수 민중들의 규탄은 더욱 심해졌다. 이 무렵 일진회를 탈퇴한 월곡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중 증산교의 창교자인 증산(甑山) 강일순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이때가 1908년, 그의 나이 28세 때였다.
* 3편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