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3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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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조선의 메시아' 강증산의 후계자

 

1. 강증산과의 운명적 만남 / 53
2. 강증산,  그는 누구인가 / 67
3. 강증산 이적(異跡)과 천지공사 (天地公事) / 76

4. 월곡의 증산 승계 과정 / 90
5. 증산사상의 종교화 작업 - 보천교 창립 / 97

 

1. 강증산과의 운명적 만남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무기력과 절망에 빠진 민중들은 새로운 국면 돌파를 위한 영험하고도 신비스런 힘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정감록鄭鑑錄』 이라는 비기(秘記)는 희망과 꿈을 담은 하나의 복음서였다. 

 

새로운 왕국건설의 비전을 내보인 『정감록』과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은 당시 난국 타개의 대안이었다. 정역은 흔히 영가무도교(歌舞蹈敎) 또는 남학(南學)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조 말 김항(金恒: 호는 一夫, 1826~1898)에 의해 이뤄진 주역(周易)의 새로운 해석에 기초한 후천운도(後天運度〕에 근거한 후천개벽의 논리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상을 제시하는 혁세이념을 통해, 조선조 말의 신흥종교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이념 중의 하나다.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들의 무의미한 희생을 극력 반대했던 반전(反戰) 평화주의자 강증산은 당시 이러한 비결(秘訣)과 역(易)에 달통(達通)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도(道)의 힘을 이용해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설파하고 다녔다.


철저한 반전 평화주의자였던 증산은 “일본 사람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며, 일본은 조선의 일꾼이니 돌아갈 때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 가리라”며 동학 농민군의 희생 이것을 염려하며 막연한 싸움을 말렸다. 또한 증산은 “때가 되면 조선은 상등국(上等國)이 될 것이니 그날은 수련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역설, 주변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에서 떠나라고 촉구했다.

 

증산의 예견대로 갑오농민혁명은 패배했으며 그 후유증은 참혹했다. 그리고 증산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농민군 일부가 전장을 떠나 따르기 시작했다. 바로 증산의 24제자 가운데 12제자가 동학군 출신이었다. 그의 예사롭지 않는 언행에 더하여 비참했던 상황을 벗어나려는 자들이 위안을 받으러 몰려든 것이다.


당시 도탄에 빠진 민중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구세주’로 알려졌던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으며, 월곡 역시 우연한 만남을 통해 증산의 범싱치 않음에 이끌려 그의 도문(道門)에 들어가게 된다.


“이 길은 길행(吉行)이니라"


월곡과 증산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진 때는 1907 년 5월17일. 장소는 전북(全北) 금구(金)의 거야(巨野) 서릿골 주막.


당시 증산은 한재(루핏)와 전쟁에 시달렸던 백성을 위무하고 구제하기 위한 순방에 나서, 전북의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 때 전주군 우림면 하운동 김형렬의 집을 떠나 순방에 나서면서 증산은 종도(宗徒)들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 말을 던진다.


이 길은 길행(吉行)이니라. 한 사람이 따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구의 한 주막에 이른 증산은 낯선 20대 후반의 한 손님과 조우하게 된다. 그 손님 역시 소탈한 차림이긴 하지만 남다른 기백이 우러나오고 있고, 말씨는 순박하지만 온후한 기품이 배어 나오는 증산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이유고 그 손님이 먼저 증산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자, 증산이 아무 말없이 닭국(鷄湯) 한 그릇을 그 손님에게 권하는데 느닷없이 벌 한 마리가 국에 빠졌다.


이를 본 증산은 "벌은 규모(規模)가 있는 벌레이니라."1)고 말을 건냈다. 이 손님 이 바로 훗날 증산의 도통을 이어 받아 보천교를 창시하는 월곡이다.


증산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챈 월곡은 정중히 되물었다.


“실례이오나, 무슨 업(業)을 하시나이까?"
“의원(醫員) 노릇을 하노라."
“어느 곳에 머무르시나이까?"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무가객(東亦客 西亦客 天地無家客)이로다. 동쪽으로 가도 길손이요 서쪽으로 가도 길손이니, 곧 천지를 집으로 삼아 병든 천지인 3 계나 고치고 사는 제생의세(齋生醫世)의 길손이로다." 

월곡이 다시 증산의 지식을 시험코자 “어떻게 하면 인권 (人權)을 많이 얻으리이까?"하고 묻자 증산의 답이 되돌아왔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욕속부달(欲速不達: 일을 너무 급하게 이루려 하떤 오히려 이루지 못함) 이니라."
“자세한 뜻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사람 기르기가 누에 기르기와 같아서 일찍 내이나 늦게 내이나 먹이만 도수(度數)에 맞게 주변 오를 때는 다같이 오르게 되느니라."

 

*1)벌은 여왕벌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갖추는데 일부 증산도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장차 상제님의 후천대업이 여성인 고수부(高首婦)님을 통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는 말로 후일 월곡 차경석은 고수부님을 배신하여 이종물의 살림을 차릴 때 고수부님이 확고부동한 종통(宗統) 연원의 두목임을 알지 못했으니 이 또한 월곡 차경석에게 내린 하나의 공안(公案)이었다.

 

당시 월곡은 세무관과 송사(訟事)가 있어 전주에 가던 길이었다.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인해 곤궁함을 면치 못하자 월곡의 아우 윤경의 아내 주판례가 시집올 때 그의 부친인 주종호가 논을 떼어 사위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시비의 발단이 되어 송사가 벌어졌던 것이다. 월곡은 증산에게 송사 관련 서류를 보이며 “삼인회석(三人會席: 남자 3 인이 모이면)에 관장(官長)의 공사를 처결한다 하오니 청컨대 이 일이 어떻게 될지 판단하여 주사이다”하고 물었다.
그 문권(文卷)을 읽어본 증산은 조용히 월곡을 타일렀다.


일의 곡직(曲直)은 어찌하든지 원래 대인(大人)의 일이 아니라. 이 송사는 그대에게 유리하리라. 그러나 이 송사로 인하여 피고의 열 한 식구는 살길을 잃으리니 대인으로서는 차마 할 일이 아니니라. 남아가 반드시 활인지기(活人之氣)를 가질지언정 어찌 살인지기(殺人之氣)를 띄리요.


월곡이 증산의 이 말에 경복(敬服)하여 "선생의 말씀이 지당하오니 이 길을 작파(作罷: 그만둠)하나이다"하고 즉시 그 문권을 불살라 버렸다. 월곡은 증산에게 문도(門徒)가 되고 싶다고 청했다. 월곡이 증산의 문도가 되기를 희망한 것은 증산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그 자리에서 월곡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월곡은 포기하지 않고 주막집 인근 용암리(龍岩里) 김사유(金士裕)의 물레방앗간에서 기거하던 증산을 찾아가 수종(隨從)하면서 제자 되기를 재차 간청하였다.


마침내 증산은 월곡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 때 증산의 종도 김광찬은 월곡의 전력, 특히 일진회에 참가한 일을 들어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용(龍)이 물을 구할 때에 비록 가시덤불이 막을지라도 회피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하고 월곡을 제자로 받아들였다.2)


이로써 월곡의 인생은 새로운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증산의 충고로 송사를 포기한 월곡은 같은 해 7월3 일 정읍 대흥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동생들을 모아 놓고 “사람의 생명이 크냐, 돈이 크냐”라고 묻고,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 그냥 돌아왔다"며 송사를 완전히 포기했음을 알리며 설득했다. 물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때 월곡은 증산을 모시고 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제(師弟)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평소 대삿갓에 푸단님(풀대님의 호남 사투리: 바지나 고의 여미는 대님을 차지 않고 그대로 풀어놓음)차림으로 다니던 증산도 이때부터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였다고 한다. 증산은 이후 약 한 달 가량 월곡의 집에 머물면서 그에게 자신이 지닌 독특한 수련법을 가르쳐주고 수도(修道)하도록 하였다. 

 

이때 증산은 “나는 삼계(三界)를 주재하는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인세(人世)에 내려와 절박한 선천말기(先天未期: 말세)의 겁액(劫厄)을 제거하고 ‘후천선계 조화정부(後天仙界 造化政府)’를 조직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한다”고 설파, 증산 자신의 일동일정(一動一靜)은 모두가 천지공사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매일같이 양지(洋紙)에 뜻 모를 부서(符書)를 쓴 뒤 불태웠는데, 이것은 새로 이룩될 정부의 관료를 조직하여 천지신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소문났다. 그리고 사람들을 모아 태을주(太乙呪) 시천주(待天呪) 등 여러가지 주문을 외우는 것을 가르쳤는 이는 도통(道通)하게 하는 수련공부였다.3)

 

*3)『대순경전』 3장 27절 참조

 

가뜩이나 어려운 월곡의 살림살이에 증산은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당연히 가족의 반대도 심했다. 

특히 성격이 괄괄하고 힘이 장사인 월곡의 아우 윤칠은 “동학한다고 집안을 망쳤는데 또 이상한 사람(증산)을 끌어들여 집안을 망치려 한다”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친인척 간에도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증산도에 입문, 그리고 수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곡은 꿋꿋하게 수련에만 정진하였다.4) 증산은 자신의 ‘세상 바로 잡는 비결’을 한마디로 ‘도(道)’라고 정의하고,도를 통해서만이 그 비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며,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증산은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만이 가진 독특한 수도법을 행하게 하였다.


이 때 그의 문하에 든 사람을 세상 사람들은 증산의 제자라고 불렀고, 증산의 호를 따라 ‘증산도문에 들었다’고 했다. 월곡 역시 증산도문에 들어간 셈이다.


월곡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이 증산의 비결을 전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였던지 그는 나름대로 증산 최고의 제자 혹은 후계자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의 이런 생각과 행동의 이면에는 증산의 힘을 빌어 민중들을 조직화해 그가 품었던 야망을 펼쳐보려는 야심이 있었다. 월곡은 자신이 후계자임을 증거하는 근거로 증산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인용했다.

 

*3) 이강오, 「보천교」 (『전북대학교 논문집』 제8집, 1966년) 14쪽 참조
*4) 홍범초, 『범증산 교사』, 63쪽 참조

 

“이제 천하대세를 회문산 오선위기형(回文山 五仙圍碁形)의 형세에 붙여 돌리노니, 네게 한 기운을 붙이노라 "5)

 

증산은 또 1907년 가을 순창 농바우(農岩)에서 “회문산에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 있으니 이제 바둑의 원조 단주(丹朱)의 해원도수(解寃度數)6)를 이 곳에 붙여서 조선의 국운을 돌리려 하노라"7)고 말했다.

 

증산은 “천하대세는 오선위기혈의 영기(靈氣)로서 돌리노니, 두 신선은 판을 대하고 두 신선은 각기 훈수하고, 한 신선은 주인이라.
어느 한편을 훈수할 수가 없어 수수방관하고 손님대접만 하였나니, 연사에 큰 흠이 없는 공궤지절로서 4명의 신선 중 어느 한 곳에 현혹되어 그곳에 빠지지 않으면..., 주인의 책임은 다 한지라, 만일 바둑을 마치고 판이 끝나면 바둑판과 바둑돌은 주인에게 돌리리라”고 하였다.


이를 풀이하면 ‘조선은 바둑판(천하)이요, 조선 백성은 바둑돌이라, 장차 중국과 일본이 싸우리니 두 신선은 판을 대함과 같고, 두 신선은 서양사람으로서 두 쪽이 되어 하나는 중국을 후원하고, 또 하나는 일본을 후원하리라’는 내용이다.

 

*5) 이상호, 『대순전경』, 115쪽
*6) 원(寃)의 역사로서 인륜기록의 시초는 요왕(堯王: B.C. 2367) 의 아들 단주(丹朱: 종국 삼황제 헌원 강씨 6 대손)로부터 시작됐다. 요왕은 태평성대를 만든 성군이었으나 세자 단주는 천하통일의 꿈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자 왕권을 세자에게 세습시키지 않고 두딸(아황, 여영)을 우순(虞舜)에게 시집 보낸 뒤 천하의 왕권을 사위들에게 전했다. 천하통일의 꿈이 박살난 단주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한을 품게 되었다. 그 뒤 우순임금이 창오()에서 죽고 두 왕비는 소수와 상강에 빠져 죽었다. 이로부터 원(寃)의 뿌리가 깊이 박혀 지금까지 그 원들이 쌓이고 쌓여서 세상을 폭파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단주 해원을 첫 번째로 하고 만고의 한을 머금고 있는 원 역신들의 억울함을 푸는데 있어 그들의 곡해(曲解)를 살펴보아 이를 바르게 함으로서 그들에게 안정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7) 위의 책,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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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위기도>

"조선은 바둑판(천하)이요, 조선 백성은 바둑돌이라, 장차 중국과 일본이 싸우리니 두 신선은 판을 대함과 같고, 두 신선은 서양사람으로서 두 쪽이 되어 하나는 중국을 후원하고, 또 하나는 일본을 후원하리라." 

 

증산은 월곡의 집에 머물면서 ‘옥황상제의 권능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와 공사로써 천지의 모든 일을 새롭게 계획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보던 중 음(陰)과 양(場)의 조화를 거론하며 여성을 원했다.
이에 월곡은 자신의 이종누이로 미망인이던 고판례(高判禮)를 천거하였다.


월곡의 천거를 받은 증산은 고판례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수부(首婦)’로 명명하니, 당시 교단에서는 고씨 부인, 고수부(高首婦)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처소를 ‘수부소(首婦所)' 8)로 부르도록 했다. 증산이 고판례를 받아들인 것은 새로 세워질 조화정부(造化政府)의 왕후(王后) 결정에 대한 계획이라는 뜻에서 ‘후비도수(后妃度數)’라고 하였다.


1908년 1월 어느 날 증산은 10여명의 제자들을 뜰 아래 늘어 세운 뒤 고수부와 더불어 마루에 앉아 월곡에게 ‘망치’를 들게 한 뒤,증산과 고판례를 치며 동상례(東床禮: 혼례가 끝난 뒤에 신부 집에서 신랑이 자기 벗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를 받게 했다. 고부인이 방으로 들어가며 “죽으면 한 번 죽을 것이요, 두 번 죽지는 못하리라”하니 증산이 크게 칭찬했다.


증산은 다시 안내성에게 망치를 들게 한 뒤 월곡을 치며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자

월곡이 “역모(逆謀)를 하겠노라”고 대답하니

증산이 “네 나이 29세요, 내 나이가 38 이니라. 내 나이에 9세를 감하면 내가 네가 될 것이요, 네 나이에 9세를 더하면 네가 나 될지니,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나 되는 일이니라”고 하였다.


월곡은 이 말을 증산의 비결이 자신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이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포교 선전자료로 적절하게 활용했다. 증산 역시 월곡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너는 접주가 되라

제자에 대한 관심이 컸던 증산은 이미 동학에 몸담았던 월곡이 그의 수하에 완전히 자리잡기를 원했고,그래서 원래 동학교도였던 박공우(朴公又)9)와 함께 월곡을 자신의 후계 또는 의발(衣鉢)을 받을만한 국량(局量)을 갖춘 인물인가를 탐색하며 의식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거구였던 박공우는 일진회가 벌이는 동학운동에 월곡과 함께 적극 가담할 정도로 일찍부터 월곡과 절친한 동지였고, 후에 증산을 극진히 모신 것으로 교단 내에서 유명하다.


아호가 인암(仁庵)인 박공우는 1876년 6월 5일,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에서 본관이 밀양(密陽)인 아버지 박순문(朴順文)과 어머니 오묘전(吳卯田)의 장남(長男)으로 태어나, 김제군 금산면 원평(金堤郡 金山面 院坪)에서 장사(장치기꾼)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월곡이 27세 되던 해인 1907년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장순리(井邑郡  淨雨面 長順里: 고부 솔안) 박공우의 집으로 증산을 안내하는 바람에 증산을 만나게 된 그는 증산을 만난 다음 날부터 증산을 따르기 시작하여 천지 공사에서 후천개벽기의 천상 신병대장으로 임명받았고, 의통인패를 전수 받기도 하였다.

 

*9) 「안후상보천교운동 연구」 , 22쪽 참조.


증산을 만난 이후 그는 종도들 중에서 가장 수종을 많이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전라도 정읍, 고창, 흥덕의 세 장(場)을 치던 소위 장치기꾼으로 한때는 고창에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수십명을 전도하기도 했으나 뒷날 동학을 신앙하였다. 증산 추종 신도 가운데 체격과 힘이 세고 뚝심 좋은 성격에 의리가 강하였다.


싸움을 잘하기도 하였지만 누가 싸우는 것을 보면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 보다가 옳은 사람 편이 되어 같이 싸울 정도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체형은 전체적으로 장대하고 건장하였다. 얼굴은 쌍꺼풀이 있었으며 수염은 보통이었고 음성은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웅장했다. 행동이 소탈하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들었다.


증산이 박공우를 자주 대동하고 다니면서 ‘네 뱃속에 경위(經緯)가 많은 연고라’ 하였으며, ‘나와 친구로 지내자’고 할 정도로 의로운 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성질이 너무 거친 것을 탓하면서 인품과 성격을 개조하면서까지 그에게 후천개벽 집행시 병겁으로 인명을 다스리는 신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의통(醫統)구원을 집행하는 조직인 6임 공사의 도수를 그에게 붙였고, 증산은 죽기 전날 밤에는 아무도 모르게 의통인패 만드는 법을 전수하였다.


유달리 정이 깊고 의리가 강한 성품이라 증산이 죽은 후에도 증산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을 하다가 1914년부터 정읍군 흥덕(興德)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그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 교단은 속육임과 겉육임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어느날 추종하는 신도들이 밖에서 돌아오는 박공우를 밖으로 마중 나와 보니 옷이 젖지 않았음을 보고 놀랐다. 그는 비가 오려 하면 단지 ‘오지 마라’고 말을 할 뿐인데 그러면 비가 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일본 순경에게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주문을 지성으로 읽으니 옥문이 저절로 열려서 나온 적도 있다. 김복덕(金福德)과 혼인하여 슬하에 5남(美道, 二道,  三道, 四道, 奉學)  5녀(今女, 順德, 順道, 順金, 良今)를 두었으며 셋째 아들인 삼도(三道)를 이옥수(李玉壽)와 혼인시켜 이중성과는 사돈이 되었다.


박공우는 특히 자신의 6촌 동생인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에게 증산 사상을 소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였던지 증산은 더욱 두 사람에게 각별함을 보였고, 다음과 같이 권유하기도 했다.10)

*10) 이 앞의 책, 111~112쪽

 

 원래 동학(東學)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으나 때가 아니므로, 안으로는 불량(不良)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 후천(後天)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다. 원한(怨恨) 이 장천(漲天)하였으니 그 신명을 해원 (解寃)시키지 아니하면 후천(後天)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政事)를 못하게 되리라


이어 증산은 ‘동학 역신 해원공사’를 통해 월곡에게 천자놀음을 할 수 있는 도수를 붙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신병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케 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월곡)이 12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또 증산은 “경석(월곡)에게 동학 역신(逆神) 해원도수를 붙였노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두루말이에 글을 써서 대공사를 처결하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였다.11)


 춘치자명(春雉自鳴)인 그 설화(說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경석(월곡)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甲午: 道紀 24, 1894)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요,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11) 『증산도 도전』 5편 147장


이미 동학의 교리에 빠져있던 월곡이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증산은 동학의 ‘궁을가'弓乙歌'’에 나오는 도통군자(道通君子)가 바로 자신이며 동학에서 말하는 ‘대선생(大先生)’ 역시 자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를 쉽 없이 따르고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증산의 설파는 새로운 사회운동 노선을 모색하던 ‘조직의 천재’ 월곡의 의도와 맞물려 후에 강한 힘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증산은 1908년 11월 28일,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씨(高氏)를 수부(首婦)로, 대흥리 월곡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했다.12) 그리고 상량공사(上採公事)를 할 때 월곡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오게 해 공사 마치며 월곡을 신임하는 한마디 말을 건넨다.13)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司)가 되리라. 14)


또 월곡에게 맡긴 사명이 컸던지 "한 짐을 잔뜩 지워 놓으니 이기지 못하고 비척거린다"15)고 위로하면서 다른 신도들과 같이 수련을 많이 시키면서, 태인 옛 고을의 행단(杏壇)에서 주장지법(主將之法)을 전수했다.16) 

또 언젠가 증산은 추종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 소원을 물었다. 이 때 월곡은 영토를 할양 받는다는 열지(裂地)를 원해 증산이 “너는 병부(兵部)가 마명하니라”고 말하자 월곡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증산은 “직신(直臣: 가장 믿는 신하)이 아니면 병권(兵權)을 맡기기 어려우므로 이제 특히 네게 맡기노라”고 말했다. 

이 때부터 월곡은 후일 증산을 이어 교세를 확장하고 보천교를 창시할 생각이 마음속에 움트고 있음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증산의 이 같은 언행이 적지 않게 계속되면서 월곡이 자신의 뒤를 이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적임자임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12) 『대순전경』 4장 115절
*13) 같은 책 4장 128절
*14) 같은 책 3장 33절
*15) 같은 책 3장 126절
*16) 같은 책 3장 30절?

 

2. 강증산,  그는 누구인가

 

월곡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예견한 증산은 이전부터 정읍을 중심으로 그 곳 민중들에게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비쳐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는 증산의 비범한 능력도 큰 몫을 했지만, 당시 암울한 시대상횡과 맞물려 있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선사회가 안팎으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던 19세기 후반, 전라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성은 진주(晋州) 강(姜)씨이고, 이름은 흥주(與周)인 농부가 살고 있었다.


1870년 음력 9월 어느 날 강흥주의 아내 권씨(權氏)가 친정에 근친(護親) 간 후 소나기가 내리는 대낮에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몸을 덮어 오면서 세상이 밝아지는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열 석달 만에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증산이다. 신미년(단기 4204년) 서기 1871년 음력 9월 19일이다.


훗날 증산도의 창시자가 돼 ‘조선의 메시아’로 일세를 풍미할 증산의 탄생을 『도전(道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오(康午1870) 년 9월 어느 날, 어머니가 친정에 근친하려고 가 계실때 대낮에 소나기가 내린 뒤 깊이 잠들었는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이가 내려와 폼을 덮으매 온 세상이 광명하여지는 꿈을 꾸고 이로부터 성령을 잉태하여 열 석달 만에 상제님을 낳으시니, 이때 성모 권씨의 나이 스물 두 살이더라.


이 때 부친이 잠이 들었는데 신안(神眼) 이 열려 보니 두 선녀가 하늘로 부터 내려와 그 아내를 간호하더니 곧 아들을 분만하는지라. 낳으실 무렵에 선녀가 산모와 아기 상제를 보살피니 이로부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온 집을 밝게 둘러싸고 하늘에 통하여 이레 동안 계속되니라. 상제님께서 태어나시매 울음소리가 큰 종소리와 같이 우렁차시니라. (『道典』1 : 14)

 

강증산이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지금의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다. 그의 이름은 일순(一淳)이요, 자는 사옥(士玉)으로 장성한 뒤에는 스스로 호를 ‘증산(甑山)’이라 했다.


증산도에서는 강증산을 증산상제님이라 부르고 신앙한다. ‘증산’은 성숙과 결실을 뜻하고, ‘상제’란 우주만유를 맡아 다스리는 최고 신이며 주재지라는 뜻이다. 증산은 자신이 곧 ‘상제’이며 동시에 ‘미륵불’로서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했다.


서양의 기독교에 비견되는 동양 문명의 축은 불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깨달음의 궁극은 바로 미륵불의 도법(道法)이다. 미륵불은 개벽기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는 미래의 부처요, 구원의 메시아다. 예수가 전한 성부 하느님이나, 석가모니 부처가 전한 미륵 부처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증산도의 일반적인 사고 방식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再臨)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彌勒)의 출세(出世)를 기다리고, 동학(東學)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보냈느니라. (道典 2 : 43)

 

증산은 자신을 ‘하느님’, ‘천주’, ‘미록불’, ‘옥황상제’ 등에 비유했다. 증산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상제님인 증산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고 세계인류의 생명을 건지시는 참 하느님’으로 존숭(尊崇)한다. 

 

그 동안 한반도에서 미륙신앙의 대중화는 통일신라 시대의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로부터 발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율사는 장차 후천개벽기에 미륙불이 이 땅에 강세(降世)할 것임을 계시 받고 미륵불상을 세웠다. 

 

진표율사는 모악산 금산사에 밑 없는 시루(甑)를 걸어놓고 그 위에 미륵불상을 만들었으며, 뒤이어 금강산 발연사,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하고 한 평생 ‘미륵의 도’를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천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하늘과 땅의 때가 무르익어 미륵부처인 증산 상제께서 증산(甑山), 즉 ‘시루봉 산’이란 도호를 가지고 동방의 이 땅에 강림했다고 보는 것이 증산도의 기본 생각이다.


한편 증산도에 의하면 조선에서 증산의 탄생을 예고한 구도자가 있었다. 바로 그가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崔水雲. 1824-1864)이다.
그는 49 일간의 기도 끝에 1860년 4월 5일 마침내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법을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해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해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이것이 하늘에 계신 상제의 말씀이었다. 이때 최제우는 하늘의 상제로부터 ‘ 13자(字) 주문’을 계시 받았다고 하는데 바로 다음의 주문이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 천주를 모시고 새 세상의 조화를 정하게 되니 세상만사를 알게 되는 큰 은혜를 영세토록 잊지 못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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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록전>
진표율사에 의해 창건된 이 절은 율사가 밑없는 시루(甑)를 걸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우라는 계시를 받아 완공했다고 한다. 현재의 절은 1635년에지어진 목조건물로 국보 제 62호이다.?

 

그가 인류를 향해 외친 메시지는 ‘하늘의 상제가 직접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 새 세상을 연다.’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를 증산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현대의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익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에 이마두(마테오 리치 신부)는 원시의 모든 신성(神聖)과 불타와 보살(菩薩)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병계의 큰 겁액(劫厄)을 구천(九天)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當來佛) 찬탄설게(讚歎說偈)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眞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 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甲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辛未, 1871)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 왔나니,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수운가사(水雲歌詞)에서 말하는 ‘상제’ 는 나를 이름이니라.(道典 2: 27)

 

증산은 어릴 때부터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고, 위기에 빠진 생물을 보면 힘써 구했다.

일곱 살 되던 해인 정축년(1877) 에는 풍물굿(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렸다고 한다.
증산의 유년 시절을 『도전(道典)』 은 이렇게 전한다.

 

 점차 자라시매 얼굴이 원만하시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시며 지덕(知德)을 겸비하시어 총명과 혜식이 출중하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경애를 받으시니라.

어릴 때부터 호생(好生)의 덕이 많아 여섯 살 때 마당 구석에 화초를 심어 아담하게 가꾸시고 밭둑에 나가시어 나무를 즐겨 심으시니라.
자라나는 초목을 꺾지 않으시고 미물 곤충이라도 해치지 않으시며 위기에 빠진 생물을 보면 힘써 구하시니라.


이 해에 부친께서 훈장을 구하여 천자문으로 글을 가르치시는데,하늘 천(天)자와 땅 지(地)자는 집안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따라 읽으시나 그 뒤로는 따라 읽지 않으시거늘 훈장이 아무리 타일러도 끝내 읽지 않으시므로 할 수 없이 그친지라.


부친이 안으로 불러들여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하늘 천(天)자에 하늘 이치를 알았고, 땅 지(地)자에 땅 이치를 알았으니 더 배울 것이 어디 있사옵니까? 남의 심리를 알지 못하는 훈장이 남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치 못히리니 돌려보내사이다” 하거늘 부득이 그 훈장을 돌려 보내니라.


어린 시절부터 영기(靈氣)가 뚝뚝 흐르는 일순을 바라보고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영아(靈兒)요 신동(神童)이라고 부르더라 (道典 1 : 15)

 

증산은 열 살 무렵부터 가족을 따라 서산리 외가에 가서 얼마동안 살았다.


하루는 부친이 벼를 말릴 때 몰려든 새와 닭의 무리를 심하게 쫓아내자 이를 만류하면서 “새, 짐승이 한 알씩 쪼아먹는 것을 그렇게 못 보시니 어찌 사람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부친이 듣지 않고 굳이 쫓으니 별안간 맑았던 하늘에서 천퉁이 치고 비가 쏟아져 말리던 벼가 다 떠내려가 한 톨도 건지지 못했다.


증산은 집안이 워낙 가난해 14살 무렵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이후 증산은 3년 동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도 하고 나무를 베는 벌목꾼 일도 하면서 하층 백성의 삶과 고통을 몸소 체험했다. 

 

증산은 이곳 저곳으로 유랑생활을 하다 17살 무렵 집에 돌아와 수년동안 객망리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며 공부했다. 산하(山河) 정기(精氣)를 호흡하고 산 속의 고요에 젖어 깊은 명상에 빠지곤 했다. 그는 시루산에서 공부할 때부터 호를 스스로 증산(甑山)이라고 했다. 청년시절에 접어든 증산은 도인으로서의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도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집에 돌아오시어 객망리 시루봉에서 큰 소리로 진법주를 읽으며 공부하시니라. 시루봉에는 큰 소나무가 우거지고 학이 수두룩히 날아드니라. 

 

객망동(客望洞)과 진독골(盡讀谷)을 지나 샘이너머를 거쳐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며 수년을 다니시는데, 근동 십여리 산천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지르시니 마을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밤에 집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하니라. 

 

시루봉 아래 샘이너머 길로 지주 왕래하시고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를 찾으시며 “도통 나온다! 도통 나온다!"고 큰 소리로 외치시니라.


젊으셨을 때 기력이 강장하시어 힘 겨루기를 좋아하시더니 아저씨뻘 되는 강기회(姜驥會)는 기골이 장대한 천하의 장사라. 이따금 그와 힘 자랑을 하시니라.


어느 널은 멧돌 밑짝의 중쇠를 이로 물어 올리시고, 어느 때에는 마당에 서서 발로 처마끝을 차기도 하시고, 한 손으로 용마름을 지붕 위로 던지기도 하시며, 또 한 팔을 뒤로 하여 땅을 짚으시고 발꿈치를 땅에 붙이신 채 장정(壯丁) 십여 인을 시켜 힘껏 허리를 누르게 하셨으나 전혀 요동하지 않으시니라.


한번은 김광문(金光文)이 보니 여러 사람과 힘 겨루기를 하시는데 돌절구를 머리에 쓰고 상모 돌리듯 하시니라.


점차 숙성하시매 얼굴은 금산 미륵불과 흡사하시고, 눈은 일월의 밝음과 같으시고, 음성은 맑은 천둥소리 같으시고, 몸가짐은 정대(正大)하시고, 도량(度量)은 너그럽고 관대하시고, 동정(動靜)이 정중(正重)하시고, 언론(言論)이 활달(活達)하시고, 사람을 보시는 눈이 신령하사고, 기상(氣像)이 웅장하시니라. 시루산에서 공부하실 때 호를 스스로 증산(甑山)이라 하시니라. (道典 1 : 19)

 

증산이 스물네살 되던 해인 갑오년 (1894) 에 태인 동골사람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분개해 보국안민(輔國安民), 

곧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기고, 30만 명이 넘는 농민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후 세상 인심은 날로 악화되고 관리들은 더욱 포학과 금품 요구를 일삼으니 백성은 고난과 궁핍 속에서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해 불안과 두려움이 온 사회를 엄습했다. 

 

증산은 이 무렵 광구창생(廣求蒼生)의 큰 뜻을 품었다. 천하사(天下事)에 뜻을 둔 증산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24세부터 호남지역을 주유(周遊)하였다.

 

 전주 종남산(終I南山)에 있는 송광사(松廣寺)에 가서 여러 날 동안 지내시는데 하루는 어떤 중이 무례하게 대접하는지라.
 

증산께서 노하여 큰 소리로 “요망한 무리들이 산 속에 모여 불법을 빙자하고 백악(百惡)을 감행하여 세간에 해독을 끼치니 이 소굴을 뜯어버리리라” 꾸짖으시고 커다란 법당기둥을 손으로 잡아당기시니 기둥이 한 자나 물러나는지라.
 

온 절이 크게 놀라 여러 중들이 몰려와 절하며 사죄하거늘 이에 노를 그치시고 그대로 두셨더니, 그 뒤에 법당을 여러 번 수리하여도 물러난 기둥이 원상대로 회복되지 아니하더라. (道典1 : 27)

 

갑오농민혁명 당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던 증산은 이 혁명운동이 실패할 것을 예견했다. 갑오농민혁명이 터진 그 해 5월, 증산은 어느 날 밤 꿈에서 ‘후천(後天)의 진인(眞人)’이라 자처하는 노인을 만나 천지 현기와 세계 대세에 대해 의논할 것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증산은 혁명 발발 몇 달 후 동학 접주인 박윤거를 만나게 되자 그에게 “동학군이 고부에서 난리를 일으켜 황토마루에서 승리하였으나, 결국에는 패망할 것이다. 그대가 접주라 하니 전란에 휘말리지 말고, 또 무고한 생민을 전란에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박윤거는 접주를 그만 두었다.


이것이 바로 갑오농민혁명의 패망을 예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주유(周遊)는 전라도 땅을 거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에 대한 눈을 떴고,이를 체화시켜 나갔다.

 

 세태(世態)와 인정 (人情)을 몸소 체험하시기 위해, 27살 되시던 해 가을에 드디어 천하유력(天下遊歷)의 길을 떠나시어,전라, 충청, 경기, 황해, 강원, 평안, 함경, 경상도 각지를 둘러 보셨습니다. 

 

천하를 주유하실 때 맨발로 먼길을 가시고, 풀밭에서 노숙하시고, 인가에서 걸식하시고, 여러 날 동안 굶으시고, 들에서 곡식을 거두시고,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기도 하시니라. 

농부를 만나면 대신 밭을 갈아주시고, 시장에 가서 상인들을 도와주시고, 장인(匠人)과 함께 일을 하시니라. 

 

누대에 올라 농악을 들으시고, 노인을 만나 옛일을 말씀하시고, 관리를 만나 정치를 들으시는 등 만고(萬苦)를 체험하시고 만상(萬相)을 친히 둘러보시니, 이로부터 박학(博學)과 광람(廣覽)을 따라 혜식이 더욱 명철해지시므로 이르는 곳마다 신인(神人)이라는 칭송이 높더라. (道典 1 : 30)

 

증산은 이렇게 수년 동안 곳곳을 유력하며 민심과 풍속을 살피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지운(地運)과 기령(氣靈)을 관찰한 뒤 30세 되던 1900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3. 강증산 이적(異蹟)과 천지공사(天地公事)

 

‘후천개벽’의 천지대도를 열다

 

고향에 돌아온 증산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세상을 널리 구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요술 공부로 알았고,일본 경찰은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하여 체포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순경이 올 때를 미리 알고 삿갓 쓰고 길을 나서니 ‘강삿갓’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향 시루산에 올라가 명상을 하던 증산은 어느 날 갑자기 전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중에서 황급히 가는 사람을 만나자 증산은 “그대가 혼사로 중매자를 찾아 나섰으나, 그 중매자는 지금 그대의 집에서 기다리는 중이네" 라고 일러주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곧 집으로 되돌아가 집에서 기다리는 중매자를 만났다. 

 

이러한 예언은 한 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이렇듯 범인의 경지를 넘어선 행동을 보여주며 전주에 도착한 강증산은 그 길로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대원사로 들어가 아무도 자신의 방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이 때가 1901 년 5월이고, 그의 나이 31 세였다. 

 

증산도측의 자료에 따르면 증산은 49 일 동안 아무 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공부에 전념, 천지공사를 통하여 우주촌 선경낙원을 열어주는 준비를 하였다. 

마침내 그해 7월 5일 혼선을 다한 고행 끝에 증산은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게 되었다.


천지공사(天地公事)란  '우주 일년 하추(夏秋) 교차기를 맞이하여 사람으로 강세(降世)한 증산이 조화정부를 결성하고 지운(地運)을 통일하여, 지나온 선천상극의 5만년 인류사를 심판하고 가을개벽을 집행하여 후천 5 만년 상생의 우주문명을 설계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증산도의 설명이다.


이는 종전의 법도로는 세싱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 증산이 무극대도의 도통문을 연 것이다. 모악산에서 하산한 증산은 본가에 돌아와 선령 (先靈)의 공명첩을 불살랐다.


선령들의 공명을 등에 업고 공명을 세우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으로, 양반의 기운은 묵고 낡은 기운이며, 새로운 기운은 상민에게서 솟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낡은 것을 불사르고 새 것을 맞이하는 개벽(開闢)이었다.

 

이어 증산은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이 지상에 우주촌 선경낙원을 개창하는 천지공사를 집행했다고 『도전』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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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이 그렸다는  <봉룡도>

 

 증산께서 대원사에 가신 6월 16 일부터 스무 하루 만인 신축년 음력 7월 7일에 천둥과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상서로운 큰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탐음진치(貪淫瞋癡)를 비롯한 모든 마(魔)를 굴복시키시고 무상의 대도로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여시니라. 이로부터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시고 우주의 조화권능을 뜻대로 행하시니라.(道典,  2: 10)

 

이제 혼란하기 짝이 없는 말대(未代)의 천지를 뜯어 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神明)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 (天地開闢)이라.(道典 2: 24)

 

증산 상제님께서 선천개벽 이래 상극의 운에 갇혀 살아온 뭇 생명의 원(寃)과 한(恨)을 풀어 주시어, 후천 5만년 지상 선경세계를 세워 온 인류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니, 이것이 곧 인존 상제님으로서 9년 동안 동방의 한국 땅에서 집행하신 천지공사(天地工事)라. 

 

이로써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로잡아 천지 속에서 일어나는 신도(神道)와 인사(人事)를 조화(調和)시켜, 원시반본(原始返本)과 해원 · 상생 · 보은정신으로 지나간 선천상극(先天相克)의 운(運)을 끝막고 후천 새 천지의 상생운수를 여시니라. 이에 만고원신(萬古寃神), 만고역신(萬古逆神)과 세계문명신, 세계지방신을 거느리시어, 신명정부(神明政府)를 건설하시고 앞 세상의 역사가 나아갈 이정표를 세우심으로써, 상제님의 대(大) 이상향(理想鄕)이 도운(道運)과 세운(世運)으로 전개되어 우주촌의 선경낙원이 건설되도록 물 샐 틈없이 판을 짜 놓으시니 이것이 곧 천지공사니라.(道典, 5 : 1)

 

천지공사의 집행은 천상(天上)으로 볼 때 조화정부(造化政府)를 결성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증산이 혼란에 빠진 신명세계를 통일하여 신명통일정부인 조화정부를 결성하고 천 · 지 · 인 삼계의 모든 일을 직접 주재한다는 것이다.


지(地)에서는 지운(地運) 통일 공사로 증산이 인간 생사존망의 모체가 되는 지운(地運)을 통일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간의 일체의 시비와 갈등을 해소하고 지상에 통일문화시대를 여는 것이다. 

 

인(人)에서는 세운(世運) 공사로 만고원신(萬古寃神)을 온 지상 인류에게 붙여 신인합발(神人合發)로 해원시켜, 20세기 세계 정치질서 변화가 지구촌 일가의 세계일가(世界一家) 통일정부로 나아가도록 역사질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리고 도운(道運) 공사가 이루어져 만고원신(萬古寃神))을 전세계 종교판에 붙여 신인합발로 해원시키시며, 증산도의 종통전수공사(宗通傳授公事)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문화를 통일하는 일꾼 지도자
가 출현하도록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때 천지공사의 재료는 인류의 과거사 일체이며, 천지공사의 결론은 후천 지상선경(地上仙境)이 된다는 것이 증산도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 건축사가 시멘트 · 벽돌 · 철근 등을 재료로 하여, 자신의 이상을 건축물에 구현하듯 증산은 선천 역사 일체를 재료로 하여 대이상향에 입각해 후천선경을 디자인하였고, 이것이 바로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것이다.


천지대도를 열고 탐음진치(貪淫瞋癡)의 네 가지 마(魔)의 극복을 중심으로 섬-아 천지공정 (天地公庭)을 펴고자 한 증산은 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건지기 위해 여기 저기를 순방하고 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증산의 수제자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고, 그의 이적이 민중들에게 서서히 각인(刻印)되기 시작했다.

 

만민을 교화하고 세상을 평안케 한 상생의 도


그의 순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내외 정세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1904년 러 · 일 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1 국토기- 일본군에 짓밟히게 되었고, 러시아의 패배가 확정된 후 조선은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맺어 그 지배하에 편입됐다.


이런 정세 속에서 증산은 그를 따르는 종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개벽이란 쉬운 것이다. 천하를 물로 덮어 모든 것을 멸망케 하고, 우리들만 살면 무슨 복이 되리요. 

대체로로 제생의세()는 성인의 도(道)요, 제민혁세(濟民革世)는 웅패(雄覇)의 술(術)이라.

이제 천하가 웅패에 의해 괴롭혀 진 지 오래되었다. 내가 상생의 도(道)로써 만민을 교화하고, 세상을 평안케 하리라.

 

그러나 세상의 혼란은 멈추지 않았다. 1906년에 이르러 국내 사정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 땅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해 왔으며, 조선왕의 궁성을 일본 경관이 호위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해 이미 경제권은 박탈되었고, 학제(學制)마저 변해 버렸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 항일의병이 봉기했으나 일제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는 가운데 전라, 경상, 충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증산은 종도들의 공부와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이며 ‘만국의원’을 차려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돌보았다.


월곡이 증산을 만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증산을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이한 월곡은 동학혁명과 일진회 활동, 외세의 침략 등에 큰 회의를 느끼고 있던 터라 그는 기존의 상황극복 방법을 수정하였고, 시국관 또한 크게 변하였다. 

증산의 독특한 도(道)에 대한 수련은 그 명성이 그의 생전(生前)에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가 지닌 독특한 수련을 행하는 일파(一波)가 세상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월곡은 증산과의 만남과 수련과정 속에서 자신만이 증산의 비결을 전수 받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판례가 증산과 인연을 맺고 ‘수부(首婦)’로 정해지게 된 내력은 증산교리 상 ‘음양의 조화’에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증산은 월곡 집에서 천지공사(天地公事)17 를 보면서 음양(陰I場) 조화를 거론하며 여성을 원했고, 월곡은 자신의 이종누이로 미망인이던 고판례를 천거해 월곡이 받아들였다. 

 

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고판례를 ‘증산의 첩’이라 비아냥거렸지만, 도문의 사람들은 첩의 개념으로만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증산이 각종 공사(公事)를 행할 때 고판례는 항상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세속적 부부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천지공사, 혹세무민하는 사술로 비난받아

 

당시 일반인들은 증산의 괴이한 행동과 알듯 말듯한 그의 말에 대해 ‘광인(狂人)의 짓’ 또는 ‘요술(妖術)을 부려 혹세무민(惑世誣民)-는 사술(邪術)’이라 비난하였다. 그러고 이런 민간의 이야기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관(官)에서도 그를 체포하려 시도하였다.18)


이러한 민간의 곱지 않은 시선과 관의 감시는 증산도문의 일부 사람들마저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하게 하였고, 결국 문도들은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월곡만은 끝까지 그를 추종하였다.


1909년 증산은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써 흰병에 물을 담은 뒤에 양지(洋紙)에 글을 써서 권축(卷軸: 表裝하여 말아놓은 書畵의 축)을 지어 병 입을 막아 놓고 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정을 놓아둔 뒤 19) 사흘째 되던 날 고사(告祀: 한 몸이나 집안에 액운이 없어지고 행운이 오도록 神靈에게 비는 제사)를 지내게 했다.20)

 

*17) 이강오 [보천교],『전북대논문집』 제8집, 1966, 4쪽 참조.  강증산이 옥황상제의 권능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와 공사로써 천지의 모든 일을 새롭게 계획하였다고 하여 천지공사라 한다.
*18) 이강오, 앞의 글, 13쪽 참조
*19) 같은 책 4장- 129절
*20) 이 같은 책 4장- 131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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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약방>

물과 금이 가득 차 있다는 구릿골(銅谷)에 자리잡은 동곡약방은 증산이 천지공사를 할 때 사람과 우주를 치료한 곳이다. 증산이 의통(醫統)으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광제국. 동곡약방이란 나무랫말이 붙어 있는 이 집의 두 평 남짓한 모퉁이방에서 증산은 1901 년부터 숨을 거두기까지 9년 동안 천지공사를 벌였다. 

천지공사란 우주를 뜯어고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기틀을 짜는것으로 사람과 사람, 신령과 사람 사이에 생긴 그릇된 원한을 풀고 선천시대에 잘못 짜인 천지도수를 바로잡는 작업을 말한다.

(사진 좌: 동곡약방 입구, 사진 우: 동곡약방 앞 모습)

 

『현무경』은 유일한 증산 친필로 천지개벽의 내용을 기록한 경전으로 천지인신유소문(天地人有巢文: 천지인신이 일체를 이룬 글 집, 즉 진리의 집을 가러키는 용어, 현무경 허무장 2절에 있는 내용)이다. 증산은 종래의 공자, 노자, 부처, 예수 같은 대(大) 성인은 어느 면에서 지역신(地域神)을 탈피하지 못한 부분적 교파의 창시자로서 전 인류를 상생과 평화로 이끌기는 고사하고 환경 파괴와 전쟁방지면에서도 한계가 드러났다고 보았다. 

 

산은 그래서 우선 주역에서 말하는 음양오행 순환 원리도 옛 복희 · 문왕 시절과는 다르게 파악하여 바른 정역(正易)이 나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 · 녀로 대표되는 음 · 양의 차별이 철폐되는 새로운 차원의 우주달력같은 순환 질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병든 인간과 지구, 인간이 지구의 암 벙어리로 전락하는 비리를 합리적으로 바로잡는 그 해법으로 『현무경(玄武經)』을 제시한 것이다.


현무경은 영부(靈符: 개벽의 도구로써 해인이라고도 함. 환인, 환웅, 단군을 통해 내려온 천부3인은 바로 영부를 가리킴)를 통한 천문 40자의 이치를 일러주어 누구든지 온전한 신인(神人) 이 되는 수련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무경은 모든 종교와 문화의 진액을 뽑아서 새로운 문명의 기틀을 만들어 놓은 개벽의 결정판이다.


현무경은 단순한 문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영부(해인)로 만들어진 정전이기 때문에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현무경이 증산 유일의 친필경전인 것을 알면서도 각 종단에서 이를 지금까지 외면해 온 이유도 실은 이처럼 난해한 현무경의 내용 때문이었다.


현무경의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은 ‘거룩한 경전’이라는 뜻이고,불경은 ‘부처님의 경전’이라는 뜻이라면 현무경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증산이 지었으니 ‘증산경’ 혹은 ‘천지개벽경’이라고 할 수 있는 데도, 굳이 현무경이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현무(玄武)는 본래 5방 신장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동방은 청룡(靑龍), 서방은 백호(白虎), 남방은 주작(朱雀), 북방은 현무(玄武)라고 한다.
실제 이런 짐승들이 각 방위를 맡아 다스리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청룡이나 백호, 주작, 현무, 구진(句陳), 등사(騰蛇) 등은 결코 짐승의 이름만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북방을 맡은 짐승은 ‘거북이’라고 하지만, 현무는 거북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위적인 개념보다는 근원적인 우주의 법칙을 가리키고 있다. 현(玄)을 가리켜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는 ‘하늘의 도(道)가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라고 하는데 대강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자를 풀이해서 보면, 우주의 기강을 세우고 가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을 풀이하면, ‘우주의 법칙을 세우고 가르는 아주 깊고 미세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문(千字文)에 이르기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이라고 하였는데, 하늘을 현(玄)이라고 한 것은 황제내경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즉 하늘이 검다는 것은 실제 하늘의 형상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하늘의 성질을 가리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검다는 것은 속이 깊어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현(玄)은 본래 수기(水氣)를 말하는데, 수기를 보통 검은 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허허창창한 우주의 공간은 수기로 충만하기 때문이며, 수기는 아직 형상적인 빛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상태를 일컫는 것이다. 아직 형상적인 빛으로 드러나기 이전이므로 검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혼돈과 무질서한 상태로 보는 것이다.


무(武)는 ‘호반 무’라고 하는 것으로 힘을 가리킨다. 즉 현을 드러내는 힘을 가리키는데 현을 원리(原理)라고 한다면, 무(武)는 동력(動力)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다. 현(玄)은 비록 형상적인 빚은 없으므로 ‘밝음’이 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참다운 ‘밝음’은 바로 이런 현을 가리킨다. 

이런 참 밝음이 현상으로 드러난 상태를 가리켜 ‘무’라고 보면 된다. 무라는 글자의 뜻을 풀이 하면 ‘만물을 주살(활로 쏘는 것)하여 하나로 그치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란 것은, 참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참 진리 안에서 하나로 통일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글자가 바로 무다. 그러므로 현무는 ‘참 밝음이 실상으로 드러난 상태’를 가리킨다.


현무경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은, 선천에서 후천으로 개벽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태초부터 감추인 현무가 실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영부(靈符)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영부는 천지공사시에 천지인신(天地人神)이 상생때이 합석하여 정한 후천의 공약(公約)이므로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삼라만상의 근본 철칙이며 이것을 현무라고 규정한 것이다. 

 

영부란 쉽게 말하면 부적(符籍: 여러 가지의 符끓이나 상서로운 길조 등을 표현한 부도)이다. 부적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액막이를 하기 위해 몸에 지니든지, 아니면 문지방에 붙여 놓는 이상한 그림을 연상할 것이다. 대개 그것들은 경면주사(鏡面朱沙)를 사용하기 때문에 붉은 색으로 되었지만 현무경은 붓으로 먹물을 갖고 쓴 것으로 검은 색이다.


이러한 현무경을 직접 쓴 증산은 그 해 4월, 월곡에게 이 책 한권을 주고, 종도(宗徒)들에게 “그 글이 나타나면 세상이 그것을 다 알게 될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이제 천하를 도모코자 떠나리니, 이 일을 본 후에 돌아오리라. 내가 없을 때, 너희들이 나를 보지 못하여 애통하며, 이 곳에 내왕하는 거동이 나에게 선연하게 보일 것이다. 내가 너희들의 등뒤에 있어도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만 서로 만날 것이다. ... 상말에 ‘이제보니 수원 나그네라’ 하는 말이 있듯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대하다가 다시 보니 낯이 익고 아는 사람이더라’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의 얼굴을 잘 익혀 두어라. 진실로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내가 장차 열석자로 오리라.

 

이 말은 바로 증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종도들은 아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산은 종도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너희들은 죽어도 믿겠느냐?"
“죽어도 믿겠습니다"
그러자 증산은 “참는 자가 나의 사람이며, 기다리는 자에게 도통줄이 열릴 것인즉,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참지 못한 자에게 던지는 말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 누워 병을 앓기 시작했다.


‘내가 장차 열석자로 오리라’ ... 죽음 암시


증산은 또 잠시 약방과 뜰에 번갈아 가며 누웠다가 어느 날 월곡을 불러 여러 글귀를 쓰게 한 후 불태우게 하였고, 수박에 소주를 넣어서 우물에 담갔다가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월곡이 수박을 가져다주자 증산은 “내가 이 수박을 먹으면 바로 죽으리라. 내가 죽은 후에 염도 하지 말고 널 속에 지금대로 넣어 두는 것이 옳으리라." 라는 말을 남기고 대청에 앉아 태을주를 읽었다. 증산은 이날 이른 아침에 월곡을 불러 말하기를 “정가(鄭哥), 정가, 글도 무식하고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냐”고 했다.


이어 증산은 김형렬에게 밀주 한 그릇을 가져 오라 해서 마신 뒤 김형렬에게 몸을 의지하며 작은 소리로 태을주를 독송하였다. 그러고 종도들이 모두 나가 있을 때 조용히 숨을 거 두었다.


증산의 죽음을 증산도에서는 화천(化天)이라고 했다. 이 때가 1909년 8월 9 일로 인간의 수로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증산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허망한 일이로다. 대인의 죽음이 어찌 이렇게 아무 이상이 없이 잠자는 것과 같으리오." 하니, 갑자기 비가 오면서 우뢰가 크게 일고 번개가 번쩍였다고 한다.


어찌 보면 ‘계획된 죽음’인 증산의 화천에 많은 교인들은 크게 낙담하여 각기 흩어져 돌아갔고, 월곡을 비롯해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金自賢)만이 남아 치상(治喪)하여 시신을 구릿골,뒷산 장태날 기슭에 초빈으로 모셨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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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렬은 치상 후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고, 월곡은 대흥리로 돌아와 때때로 비룡산(飛龍山)에 올라가 옥황상제를 부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22) 그 뒤 월곡은 증산이 생전에 수련공부를 시킬 때 “때가 되면 도통(道通)이 되리라"라는 말을 상기히면서 김형렬과 함께 금산사의 조용한 방에 들어가 14일간 기도 수련을 하였다. 증산이 영감에 의해 도통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기도 수련을 마친 월곡은 김형렬과 함께 정읍 대흥리로 가 깊이 간직하고 있던 『현무경(玄武經) 을 옮겨 썼다. 현무경은 증산이 화천하던 1909년 그 해 설날 월곡의 집에서 써 놓았는데, 1911 년 고수부가 교단을 개창할 때 이 경을 간수하고 있었다. 

 

이 현무경의 사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월곡 종도의 자부(子婦)인 최씨가 간직해 오던 것이 진본이다. 그러나 이 진본은 사라져 없고, 여러 사본 가운데 김형렬의 것은 총 25쪽으로 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18쪽은 물형(物形)의 형상을 가진 부(符)와 글씨로 되어 있고, 7쪽은 글씨로만 되어 있는데, 신비한 부(符)와 서(홈)로 이루어진 이 현무경은 합리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조화(造化) 비장(秘藏)의 경(經)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고판례는 증산이 사망한 후 금산사 미륵전(彌勒殿)서 증산의 생신기념(生辰紀念) 치성(致誠) 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증산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등의 신통한 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했다.23)

 

고판례의 기행 이적


고판례의 이적을 본 월곡은 급히 증산의 신임을 받고 있었던 김형렬을 찾아가 그가 보관 중이던 ‘약(藥)장’24)을 찾아와 신주독25)으로 모셨다. 그러자 고판례는 살아있을 때의 증산과 같은 기행이적(奇行異蹟)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 때가 바로 증산이 죽은 뒤 2년째인 1911년이다. 

 

증산이 말세의 병액(病厄) 에 대비하는 ‘의통공사(醫統公事)’로써 금산면(金山面) 동곡리(網谷里) 자기 처소에 만들어 둔 약장은 증산의 교통(敎通)이 전수되는 신기(神器)로 여겨진 영물이었다.


이로써 증산이 ‘세상에 다시 나오리라’는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도통문(道通門)이 열리리라’는 바로 그 증산의 이야기가 고판례에 의해 약장을 자기의 처소로 옮겨다가 증산성령(甑山聖靈)의 신주(神主)로 모시면서 주도되는 것이라 하여, 증산의 사망으로 심한 회의를 품었던 제자들은 다시 고판례를 따르게 되었다.


고판례를 추종하면서 증산도문은 고판례를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월곡은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서서히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21)『증산천사 공사기』, 145쪽
*22)『보천교사』,  67쪽

*23) 이강오, 앞의 글, 13쪽 참조
*24) 후에 약장이 월곡의 집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태극도(太極道)의 교주 조철제(趙哲濟)가 이 약장을 강증산의 교통(敎通)이 전수되는 신기(神器)라고 하여 밤중에 월곡의 집을 침입하여 약장과 궤짝 하나를 훔쳐 도망가다 약장을 버리고 궤짝만 가져갔다는 것이다. 그 후 약장은 증산의 사위 양덕진이라는 사람이 소송에 이겨 그에게 넘어갔다.

*25) ‘신이 의지하는 곳’이라 하여 흔히 무당들이 신단(神壇)으로 설치한다.

 

* 4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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