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4편), 박종렬

문서관리자 0 7,694

768dd5d0f201677a2bc8675dbe01bea7_1493715

 제2장  ‘조선의 메시아' 강증산의 후계자

 

1. 강증산과의 운명적 만남 / 53
2. 강증산,  그는 누구인가 / 67
3. 강증산 이적(異跡)과 천지공사 (天地公事) / 76
4. 월곡의 증산 승계 과정 / 90
5. 증산사상의 종교화 작업 - 보천교 창립 / 97

 

 

 

 

4. 월곡의 증산 승계 과정

 

기행과 이적을 보인 고판례에 의해 증산도문(甑山道門)에는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교단이 형성될 만한 조직도 자연스레 짜여졌다. 따라서 조직 정비가 필요해진 1914년에는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정식 교명이 사용되었다.26) 이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1~2년 사이에 모여든 교도는 상당수에 이르렀다.

 

월곡, 증산 따르는 교단 태동의 선봉장


태을주(太乙呪)를 외면서 전신(轉身)과 개안(聞眼)을 통한 신력(神力)체험이 공공연하게 벌어나자 도(道)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증산을 추종했던 기간이 채 2년도 안 된 월곡은 조직을 일궈내고 관리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판례 밑에서 교단운영의 실권을 담당하고 동문 이치복(李致福) 등과 함께 포교활동에 진력한 결과 입교자의 수가 날로 격증했기 때문에 고판례보다 월곡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 받았다.


월곡은 이 때 ‘증산이 자기에게 교통을 전수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고 교단 내외의 일체 권한을 전담하여 실질적으로 교단을 주재하였다.

 

*26) 『동아일보』의 1920년부터 1924년 기사를 참조하면 ‘선도교’라는 이름을 교단 안에서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종교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공개되지 않은 교병과 교단조직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탄압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가 증산으로부터 교통을 전수 받았다는 주장은 앞서 설명했듯이 증산이 사망했던 1909년 정월 어느 날, 증산이 월곡의 집에서 『현무경』이라는 쓰고 백색 병에 물을 넣고, 양지에 “길화개길실,흉화개흉실(吉花閒吉實, 凶花閒凶實:길한 꽃은 길한 열매를 맺고, 흉한 꽃은 흉한 열매를 맺는다)"이라는 글과 『병세문(病勢文)』 이 라는 글을 써말아서 병 속에 넣은 다음 병마개를 막아두고 그 병이 놓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아두었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 월곡의 아우인 차윤경이 술에 만취하여 “증산이 새 정부의 육조(六曹)를 조직하는 역모를 한다”고 외치는 바람에, 증산은 인근 천원 헌병대의 출동이 있을 것을 예측했다. 증산은 고판례와 월곡에게 다음 날 자정에 문틀을 막고 모든 제수를 화로불에 구르면서 술병은 병마개만 빼고 고사(告祀)를지내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다음 날 고판례와 월곡이 증산의 말대로 고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월곡은 증산의 ‘교통(敎通)전수’라는 것이다.

 

a93985918e41e0ea83e48bb3f7771bfb_1496225 

                       <風說이 전하는 太乙敎>
 

증산 사후 분열되는 증산도문과 탁월한 제자 중 하나로 월곡을 소개하는 당시 신문 기사. 월곡을 동학과 관련짓고 독립당의 혐의를 받고 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동아일보 1922. 2. 24)

 

이를 내세우며 교단의 운영권을 완전히 장악한 월곡은 고판례의 처소를 ‘예문(禮門)’이라 이름하고, ‘이 예문에는 자기의 승인 없이 교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자신의 부인이 수발을 들게 해 고판례(高判禮)와 교단간의 직접적인 접촉을 규제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도문들의 제자들은 하나 둘씩 불만을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증산 생존에 제자로 있었던 김형렬, 안내성(安乃成)등은 고판례의 문하를 나와 제각기 증산으로부터 자신이 교통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각자의 교단을 세웠고, 이치복, 김형국(金亨國) 등도 독립을 도모한다며 교단을 떠났다.


한편 증산도문이 다시 조직화되자 이에 따른 부작용과 당국이 경계하는 눈초리도 높아갔다. 갑자기 불어난 증산도문의 조직이 일본관헌의 감시를 불러일으키고, 이후 충돌을 유발하게 된다.


이런 상황의 전개는 물론 일본 관헌의 예민한 반응과 조선 식민지화를 위한 책략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탁월한 조직 관리자로서의 월곡이 구성해 낸 비밀스러운 조직에 주된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7)


월곡이 조직해 낸 결사체는 세간에서 ‘배일(排日)단체’, ‘독립운동 단체’, 또는 ‘독립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는 비밀결사체’ 등으로 소문나 있었다.28) 이것은 동학혁명기에 탁월한 조직가로 활동한 월곡의 이력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한편 월곡은 증산의 교통을 받아 교단을 꾸려나가면서 새로운 교리를 세우기보다는 증산을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입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강성상제하갑지위(姜聖上帝)’라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고 맑은 물을 올리며 고천(告天) 하였다. 그리고 신앙목적은 옥황상제인 증산의 신도적(神道的) 권화(權化)에 의한 ‘신화도통(神化道通)’과 천지공사 예정에 의한 ‘후천선계조화정부(後天仙界造化政府)’의 개벽에 참여할 것으로 삼았다.


그래서 태을주를 외우고 수련 공부를 하면 모든 교인이 개안(開眼)이 되고 통령(通靈)되어 병이 낫고 재앙이 물러가며, 신명(神明)과 교통하며 신통(神通) 묘술(妙術)을 임의로 하게 된다고 설유하였고, 증산의 도통을 받은 월곡에 의해 후천선계 조화정부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27) 이강오, 앞의 글, 13, 14쪽 참조. 갑자기 불어난 교단 조직을 이끌만한 인물은 당시 월곡

       뿐이었다. 그가 살아온 전력이 밀해주듯 동학운동 등의 정치적 사건들과 깊이 연관된 까닭에

       뒷날 교단 조직이 정치적 성격을 띤 비밀조직으로 인식되면서 일본 관헌의 경계를 불러 일으켰다.
*28) 당시 언론에서도 교단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도하였다. 『동아일보』1920년 부터 1923년에

       걸친 보천교 관련기시- 참조.

e7dfc69b8013c48188b3f0fce63c8686_1496303 

        <차월곡이 배일음모단체로 선도를 표방한다고 적시한 비밀단체 대검거 기사>
보천교, 즉 선도를 표방한 비밀단체가 독립운동을 일으킨다고 판단한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1921. 4. 26)

 

신앙대상인 옥황상제는 증산의 천지공사 관념에서 볼때 모든신단(神團)을 통솔하는 지도적 일신(一神)으로 이해되었다. 즉 우주 삼라 만상은 체(體), 용(用), 운행(運行)의 세 가지로 나뉘며 일(日)은 우주의 체상(體象)이고, 월(月)은 우주의 용사상(用事象)이며, 성(星)은 우주의 운행상(運行象)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일(日).월(月).성(星)을 상징하는 ‘삼광영(三光影)’을 봉안하고, 일광영(一光影)은 구천(九天) , 성광영(星光影)은 삼태칠성(三台七星)을 각각 상징한다고 보고, 중앙의 월광영(月光影) 위좌(位坐)가 옥황상제의 성령(聖靈)이라고 하여 신봉했다.


이러한 삼광영은 단순히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비유하면 일광영은 국체(國體)를, 월광영은 원수(元首)를, 성광영은 행정기관(行政機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삼광영에 대한 이해는 실질적으로 월곡이 증산의 도통이 자신에게 이어진다는 생각에 따라 지금은 선후천 교역기(先後天 交易期)를 지나고 있으며, 삼광영에 표시된 지상의 산형은 정읍 대흥리 앞의 입암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내장산과 서쪽의 방장산을 표시하여 후천선계의 개벽운이 자신의 거처가 있는 대흥리에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였다.


이러한 증산사상의 해석을 통한 교단의 초기 신앙의 모습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고, 1922년에 이르러서는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교리 내용을 체계화하여 교리강령으로서 사대강령(四大綱領)과 목적이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월곡이 창시한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 (仁義)이다. 인(仁)으로써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는것이다. 그러므로,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종시(終始)가 되는 것이다. 사대강령(四大綱領)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目的)은 대동(大同)이었다.


교단 간부인 이상호(李相昊)가 정리한 보천교 교리에서 목적은 후천선경(後天仙境)으로 기술되어 있고, 이것은 죄악 · 질병 · 원한이 없고 부귀빈천의 격차가 없이 모두 평등 자족하며 남녀 평등하고 인
의(仁義)로 상생하고 신인(神人)으로 상화(相和)하는 극락무궁한 지상선경(地上仙境)을 만드는 개벽을 의미하였다. 이 때 체계화된 사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29)

 

 

【사대강령(四大網領)】

일심(一心):  일심(一心)을 개현(開顯)하여 신화(神化)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뜻한다. 신화(神化)는 사람이 일심으로 수양하므로 영육(靈肉) 일치(一致)의 실재신(實在神)이 된다는 것이고, 이 때 실재신이란 공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인간이 그대로 신(神)이 되는 것을 말한다. 증산은 일심이 아니면 신회될 수 없기 때문에 ‘신화일심(神化一心)’이라 말했다.


상생(相生):  생존경쟁(生存鏡爭), 우승열패(優勝劣敗)를 배격하고 상호부조(相互扶助), 공영(共榮)의 생활을 영위히는 것이다. 증산은 선천시대는 상극 투쟁의 시대이므로 후천선계의 개벽은 상극이 없고 상생만이 있는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해원(解寃): 상생의 첩경이다. 증산은 선천시대의 상극투쟁이 신명이나 인간들의 원한이 축적된 데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천지공사를 할 때 신명의 해원을 첫째 요령으로 하였다. 신명의 해원은 신명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보은의 의(義)를 가진다는 것이다.


거병(祛病): 일체 병마와 재앙을 제거하는 것이다. 신화일심된다면 무병장수함은 물론 신명이나 인간이 해원된 세계에는 모든 병마와 재앙이 없게 되므로 거병해원(病解寃)이라고 한다.

 

한편, 월곡은 1922년에 이르러 존상제(尊上帝), 숭도덕(崇道德), 친목동인(親睦同人), 망란음양(罔亂陰陽), 이재공정(理財公正), 절용후생(節用厚生), 불유탄망(不有誕妄), 무위자존(無爲自尊), 막회탐욕(莫懷貪慾), 신물시투(愼勿猜妬), 정직불아(正直不阿), 물훼타인(勿毁他人)  등 12계명을 정하고 교중에 선포토록 했다.


증산 사후 월곡은 증산의 사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은 교단 발전의 기반이 되어 증산 사상의 새로운 변화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화는 다른 종도들과의 불화를 잉태하였다. 월곡의 증산에 대한 이해 방식과 교단 운영은 월곡의 추종자를 양산하는 동시에, 반대파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월곡의 조직력과 종교적 카리스마는 증산 사후에 증산을 대신할 만한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정읍시의 홈페이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월곡은 일제(日帝)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였으며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방대한 기구와 조직을 가지고 교전(敎殿)을 경영하여 한 때 6 백만 교도를 거느리어 일세를 풍미(風靡)했으니 세칭 차천자(車天子)라 불러워진 것이다.

당시 입암면 대흥리는 농가 십여호로 이뤄진 가난한 촌락이었으나 교세(敎勢)의 엄청난 확장으로 전국에서 수 많은 교도들이 모여들어 7 백여 호에 이른 적도 있었다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5. 증산사상의 종교화 작업 - 보천교 창립

 

일제의 감시가 점점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월곡이 주축이 된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1917년 11 월, 채규일(蔡奎壹), 김홍규(金烘奎), 문정삼(文正三) 등 24명 을 가리어 팽창된 교단의 조직을 강화하는 작업으로 역(易)의 원리에 근거하여 24방위에 대응하는 ‘24방주제(方초制)’를 만들었다. 이어 방주들로 하여금 천지에 고명 서약하게 하고, 24방으로 된 인장을 분급하여 교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증산 2 대 교주로 월곡 옹립

 

월곡 자신은 이들을 통수하는 실질적 권한을 장악했으며 고판례는 허수아비 교주로 만들어버렸다. 실질적으로는 월곡을 중심으로 한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고판례는 1918년 7월 강응칠(姜應七) 등, 교인 일부를 데리고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祖宗里)에 교당을 세우고 ‘태을교(일명 선도교)’라는 명칭으로 분교하였다. 

 

월곡은 고판례가 떠난 뒤 그녀의 기반을 고스란히 차지하여 증산교의 제 2세 교주, 즉 교단의 제 1 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도문의 같은 반열에 있던 자들과 그들 제자들의 반발과 모함은 끝이 없었다. 교세 확장에 비례하여 관(官)과 민 (民)의 지탄이 고조되어 급기야 월곡을 관에 고발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고발 내용은 월곡이 사술얘띠폐로써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사인취재(詐人取財)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세력을 이용하여 황제 등극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고발에 따라 월곡은 인근 헌병대에서 구속돼 여러 차례 신문을 당했으며, 교단 내외의 사찰이 심하여 가끔 몸을 숨기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사태는 동학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는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목한 일제 관헌에게 탄압의 빌미 만을 만들어 주었다.


1917년 6월 무안군 장산도의 신도 김경범이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 구금되자, 평소 월곡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던 그의 아들은 월곡을 찾아와 여비로 금전 수백 원을 요구했다. 

이에 월곡은 여비로 금 10원을 주었는데 김경범의 아들은 이를 증거로 일본 헌병대에 “아비가 차경석을 신앙하여 많은 금전과 물품을 사기 당했는데, 이제 이 돈 10원은 그 중 돌려 받은 일부다" 라고 월곡을 고소, 10일 동안 구속 취조 당했으나 감옥에 있는 김경범의 사실 부인에 따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기도 했다.30)


일제의 증산도문과 월곡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월곡은 1917년 9월 25 일 포친 밀양 박씨 회갑연을 기화로 24방주와 주요 간부를 모아 놓고 집을 떠나 외유하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리에서 북도(北道) 재무책임자인 북집리(北執理)에 김홍규(탄허스님 31) 부친), 남도 재무책임자인 남집리에 채규철(蔡奎喆)을 각각 임명하여 천지에 고천(告天)하게 하여 그들에게 교재(敎財)를 부탁했다.


이어 월곡은 김형규, 문정삼을 남북도 신도를 설유, 교화하는 설유사로 명하여 24방주를 중심으로 연원체계를 조직하라 지시하고 고수부의 모든 예문납객을 금지케 하는 등 교인단속과 교단의 제반사를 부탁하였다. 32) 

월곡은 아우 윤칠(輪七)을 불러 “네가 경계해야 할 일은 너는 성품이 너무 과격하니 사람의 성품이 태강하면 수한(壽限) 에 부족하나니 너는 반드시 자관자서(自寬自恕)하여 타일 내가 집에 돌아올 때에 유감이 없도록 하는 것이 너의 도리니라”고 타일렀다.
또 동생 윤덕(輸德)에게는 “지금부터 가정사는 너에게 전적으로 맡기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당부하고 10월 4일 집을 떠났다.

 

*30) 『보천교연혁사』, 상 8쪽
*31) 1913년 1 월 전북 김제 만경에서 김홍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택(金澤) 법명은 택성(宅成)이며 법호가 탄허. 어려서부터 한문학 전과정을 마치고 15세 되던 해 기호학파의 거유 최면암의 후학인 이극종 선생으로부터 유학 및 도교학을 수료했다. 그러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방한암스님의 명성을 듣고 대장문의 서한을 3년동안 교류하다가 21 세 되던 해 상원사에 입산했다. 평생 승려교육에 힘썼고 화엄론 40권, 보조법어, 사교(四敎), 사집(四集) 등 많은 불전을 번역하였다. 승려교육의 공로로 생전에 인촌(仁村)문화상을 수상했고 1983년 6월 5 일 향년 71 세로 입적한 후에는 국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32) 『증산교사』 59쪽

 

월곡, 수만 명 신도 조직화

 

월곡은 도피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포표하고 표단을 조직해 냈다. 강원도와 경상도를 유력하면서 몇 해 동안 수만 명에 이르는 교인을 확보하여 그 결과 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4방주제의 조직을 통해 포교상의 성과를 올린 월곡은 다시 조직을 확대하는 방안에 골몰하였다. 

 

1919년 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 서면에서 채규일과 김홍규를 불러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로 조직할 것을 명령하고, 같은 해 10월 경남 함양군 병곡면 덕기리(德基里) 대황산(大篁山)에서 ‘24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 ‘ 60방주제’를 정하고 60방주를 선임하는 고천제를 행하였다.


이 60방주제를 임명하는 고천제는 정토로 삼층의 제단을 수축하고 백목 장막을 두른 가운데 제수와 폐백을 풍성하게 갖추어 놓고, 60 인의 방주를 3회로 나누어 매회 2일씩의 간격을 두고 고명하는데 제1회에 교정, 교령의 12 인이, 2회에 24포주, 3회에 24운주가 각각 참배하게 하였다. 33)

이 60방주의 가운데서도 4인의 교정은 교단의 중추(中樞)가 되었으며, 특히 오행(五行) 중 중앙에 해 당하는 토의 지위는 월곡이 차지했다.


월곡은 60방주에게 발급하는 교첩(敎牒) 등의 문서에도 토자(土宇)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 ‘무기일월(戊己日月)’의 네 자가 새겨진 중앙인장(中央印章)을 사용하였다. 34)


이 인장의 중앙에 위치한 토(土)는 오행의 중심이요, 일월(日月)은 24절의 기강(紀綱)이요, 무기(戊己)는 24방위의 중앙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무기 (戊己) 에 입중궁(入中宮)’이라는 이론에 근거해 선후천(先後天)시대의 교역기(交易期)라는 뜻을 부여한다. 이로 미루어 중앙인장은 60방주의 중앙에서 후천(後天)시대의 새로운 통솔자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인들은 월곡의 교단조직은 곧 월곡을 제위(帝位)로 하는 새 정부의 조각(組閣)이라고 생각했으며, 여기에서 발급하는 인장과 교첩은 곧 관직의 임명장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보다 높은 교첩을 얻기 위해 포교 성적을 높이고, 보다 많은 성금을 앞다튀 바칠 정도로 교인과 교금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났다. 한편 월곡의 전국을 상대로 한 조직화 작업은 증산사상의 종교화라 할 수 있다. 증산 생전에 이미 그의 이적(異蹟)과 설유(說諭)에 감복한 많은 종도들이 그의 주위 에 운집 했지만, 그 동안 종교로서의 위상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월곡에 이르러서야 전 국민을 상대로 증산 사상을 바탕으로 종교화 작업을 추진한 셈이다.

 

60방주 조직 이후 5~6개월 동안 교인의 수는 물경 수십 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월곡은 다시 60방주제를 확장할 것을 계획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교단이 증대되고 60방주가 조직화 된 때까지도 교명의 제정이나 교주의 공식취임 절차가 없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 교단을 가리켜 ‘태을교(太乙敎) 35) ‘훔치교’ 36) ‘차천자교(車天子敎) 37) 등으로 불렀으나, 공식적으로 교단에서 선포한 교명(敎名)은 아니었다. 

 

월곡이 교단의 주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으로 교주가 된 지 오래됐지만, 공식 취임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교주로서의 존칭도 없었다. 60방주를 조직할 때까지도 월곡이 다른 교인들과 상하 구별 없이 서로 경대(敬待)하여 지내왔기 때문에 60방주의 취임식이 있은 다음 방주들이 상의하여 월곡을 선생으로 숭배하고자 했다.

 

*32) 『증산교사』 59쪽

*33) 『보천교연혁사』 상 9~19쪽
*34) 『증산교사』 77쪽

*35) ‘태을교’는 이 교단에서 주로 외우는 태을주(太乙呪) 즉 ‘훔치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바하

      (?? ?? 太 乙天上元君 ????都來 ??喊?娑婆訶)’의 이름을 따서 고판례 때부터 불러오던 이름이다. 

      증산은 “‘태을주’ 주문은 충청도 비인 사람인 김경흔이 포교 50년 공부를 마치고 얻은 것으로, 

      선(先) 50년은 최수운 선생의 ‘시천주’요, 후(後) 50년은 김경흔의 ‘태을주’ 공부”라 하였다.

      이 주문은 역률(逆律)을 범해도 옥문이 스스로 열려 지상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의 빗줄이며, 하늘의 으뜸가는 

      생명구원으로서 혼유병고와 화액으로부터 생명을 일으키는 조화의 성약이다. 증산은 “오는 잠 적게 자고 태을주를 많이 읽으라.

      하늘 으뜸 가는 공부이니, 후천지시대에 동리 동리 각 학교에서 외우리라하였다.


*36) ‘훔치교’는 이 교단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태을주’ 머리의 ‘훔치’라는 어음(語音)을 따서 교단이

       사기술로써 남의 재물을 훔쳐 먹는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37) ‘차천자교’는 당시 교인들이 월곡의 등극설을 믿고 ‘차천자’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월곡은 “나의 양덕(凉德)으로는 사위(師位)에 오를 수 없으니 뒤에 교중에 도덕이 높은 이가 있을 때 스승으로 모시자”고 간곡히 사양하였고, 이후 교인들은 월곡을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주인장(主人丈)’으로 불렀다. 38)

 

월곡, ‘교주’보다 ‘주인장’으로 불리기 원해

 

월곡이 겸양의 덕을 발휘하여 주인장을 자처하고 『보천교 연혁사』 상편 10쪽에서 주인장이라 기록한 것은 증산이 “큰 운수를 받으려 는 자는 서전서문(書傳序文)39)을 많이 읽으라" 40) 이는 서전서문의 ‘후세인주(後世人主)’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38) 『보천교 연혁사』상 10쪽
*39) 書傳序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慶元己未冬先生文公令沈으로 作書集典하시니 明年先生歿커시늘  又十年始克成篇

       하니 總若干萬言이라. 嗚呼書豈易言哉리요

       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皆載此書로되 而淺見薄識으로 豈足以盡發蘊奧 且生於數千載之

       下하여 而慾講明於數千載之前하니 亦已難矣이나 二帝三王之治本於道하고 二帝三王之道

       本於心하니 得其心이면 則道與治固可得而言矣리라. 何者精一執中堯舜禹相授之心法

       也오. 建中建極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 曰仁 曰敬 曰誠言雖殊而理則一이니 無非所以

       明此心之妙也 至於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이오 言民卽謹其心之所由施禮樂敎化心之發也

        典章文物心之著也家齊國治而天下平心之推也心之德其盛矣乎인저二帝三王

       存此心者也夏桀商受亡此心者也太甲成王困而存此心者也  存則治하고 亡則亂하나니

       治亂之分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後世人主 有志於二帝三王之治인대 不可不求其道 有志於二

       帝三王之道인대 不可不求其心이니 求心之要舍是書하고 何以哉리요自受讀以來沈潛

       其義하고 參考衆說하여 融會貫通일세 乃敢折衷이나 微辭奧旨多述舊聞이요 二典禹謨先生

       盖嘗是正하사 手澤尙新하시니 鳴平惜哉集傳本先生所命故凡引用師說不復識別

       하고 四代之書分爲十卷하니 文以時異治以道同이라聖人之心見於書猶化工之妙

       於物이니 非精深이면 不能識也是傳也 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未必能造其微 於堯舜湯

       文武周公之書 因是訓 하면 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리라嘉定 己巳 三月 旣望 武夷 蔡沈 序

       노라.” 

 

 

당시 교인들이 서전서문을 암송할 때 후세인주를 ‘후세주인(後世초λ)’이라 고쳐 읽었다는 데에서도 그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41) 

 

아무튼 이즈음 총독부에서는 전국 각지에 교인의 검거명령을 내리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1921년 1월부터 8월까지 수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월곡이 이에 대항하였으니 교단 내외는 자못 소란스러워졌다. 

 

이같은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월곡은 경남의 함양 · 안양 등지의 교인 집을 전전하면서 제 2차 고천제를 계획하였다. 이 때의 고천제를 정리(正理) . 포장(布長)의 임명식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제는 월곡이 그 동안 심력을 기울여 이룩한 교단에 대한 교명의 선포와 자신의 공식적인 교주 취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1921 년 9월 24 일,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덕유산 남쪽 함양 황석산에 대규모의 제단과 풍성한 제수를 갖추어 각도의 ‘정리’와 3 백 60군의 ‘포장’, 그리고 60‘방주’를 합하여 1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휘황찬란한 춧불을 밝히고 고천제를 행하였다. 

 

이 때 9층 제단에는 천지일월성신을 그런 ‘일월병(日月屛)’을 두르고 ‘구천하감지지위 (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 (玉皇上帝下鑑之位)’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感之位)’라고 쓴 삼위목(三位目)을 설치하고, 그 앞에 ‘수명우천 애민여자(受命于天 愛民如子)’라고 새겨진 옥패(玉佩)를 만들어 놓고42) 월곡이 3층 제단에 올라 제례를 행하였다.
제문에는 ‘국호왈 시, 교명왈 보화(國號曰 時, 敎名曰 普化)’라고 하였다.43)

 

*40) 『대순전경』 3장 137절
*41) 홍범초, 『범증산교사』, 88쪽 참조
*42) 『보천교연혁사』, 14쪽 참조
*43) 『보천교 연혁사』에는 ‘敎名曰普化敎’만 기재되어 있으나, 축문의 실제 내용은 ‘國號日時’라고 씌어졌다고 한다 

 

f988aafa241dddefddb227a6bad2e8b0_1496396

〈自稱 大時國 皇帝>
차경석이 시국을 선포한 것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 교도들은 일제하의 민족종교 보천교 교주인 차경석을 차천자라고 불렀으며, 그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나라를 독립시킬 것으로 확신했다. 차경석는 실제로 ‘대시국(大時國)’이라는 국호와 구체적인 관제를 선포하여 그 꿈이 실현되는 듯 했으나 일제의 회유책과 교단의 분열로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다.(동아일보 1922. 10. 26.) 

 

이로써 월곡은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단의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時國)’이라는 나라의 황제의 지위에 등극함을 하늘에 고했다. 황석산 고천제는 보천교의 창립사에 있어 포교기구와 행정기구의 조직강화라는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다.


또 이 행사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월곡의 신통묘술과 제위등극에 대한 신망이 더욱 두터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각 도 경찰이 월곡을 체포하기 위해 삼엄한 경계망을 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월곡의 소재와 고천제에 대한 준비 공작을 세밀히 탐지하여 고천제가 열리는 황석산 골짜기에 월곡을 비롯한 간부급 교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만반의 경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위기상황을 돌파하여 당당하게 고천제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월곡이 승천입지(昇天入地)하는 신통묘술이 아니고서는 경계망을 뚫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카리스마는 더욱 강화됐다. 

 

특히 황석산 고천제가 열리기 수일 전부터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1 주일간 계속됐다. 교인들의 집회장소와 제천(祭天)행사를 무사히 치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운(天運)이 월곡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확신으로 변하여 교인들의 ‘차천자 등극’이라는 신념은 더욱 굳어져 갔다. 

 

그러나 황석산(黃石山) 고천제가 일제 감시를 피해 무사히 진행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월곡에게 은둔처를 제공하고 있던 함양의 교인 서만식이 매부인 일본경찰 고등계 간부인 김기엽을 거액의 금전으로 매수, 신변 안전 및 모든 비밀이 보장된 것이었다. 

 

황석산 고천제는 또 배교자인 김영두 일파가 밀고하여 일본 경찰의 수색 압력이 가중되어 오자 은둔처를 수시로 옮기던 중 ‘동광회(東光會)’44)의 지도자인 김태식(金泰湜)이 수백만 교인을 가진 월곡을 달래어 자신의 동광회와 합작시키려는 회유공작을 역이용, 무사히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는 설도 있다. 

 

김태식이 밀파한 사람들을 접견한 월곡은 “동광회와 화해하여 정부의 공인 하에 정정당당한 종교단체로서 활동할 것을 약속하면서 이러한 중대사는 방주 집회 시에 결의하여야 할 것이므로 대제 거행 후에 그 자리에 모인 간부들과 협의하여 결행할 것”이라고 역으로 제의하였다는 것이다. 즉 일본 경찰과 손잡고 있었던 동광회는 월곡을 체포하는 것보다 그를 회유하여 그들의 세를 넓히고자 의도하였기 때문에 월곡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 때 월곡은 함양 경찰서 형사를 거액의 금전으로 매수, 고천제 날짜를 ‘실제보다 하루 늦은 날로 보고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동시에 동광회 밀사는 회유가능성을 보고하고 고천제가 있기까지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기로 일본 경찰과 합의하였다. 

 

일본경찰은 회유공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천제를 기다려 거기에 운집하는 천여 명의 간부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판단, 매수된 형사의 거짓 정보와 동광회 밀사의 말을 믿고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고천제는 월곡이 의도한 대로 무사히 치러졌고, 월곡은 고천제를 치른 후 평민복장으로 변장하여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갔다.45) 결과적으로 월곡의 신출귀몰한 능력이 아니라 전략과 전술을 통해 상대방을 역이용하고 거짓 정보를 통해 적을· 혼란시킨 월곡의 지략(참I훼이 고천제 성공 요인이었다. 

 

이렇게 일본 경찰이 월곡과 그 교단에 대해 탄압을 가해 온 것은 단순히 혹세무민하는 종교집단이라는 일부의 평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세를 확장시켰고 당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보천교의 장기목표가 총독부의 심기를 뒤틀리게 했기 때문이다. 월곡은 증산이 역설한 ‘후천개벽시대의 상등국 조선의 전권획득’올 운동의 최종목표로 삼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식민지 상황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히고 있었다. 

 

그는 획기적인 60방주제를 통해 민중을 조직화하고, 조직의 중심이 돼 전국적인 운동을 총괄하였다. 형식상 종교를 통해 파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상 월곡은 국내의 민족해방운동가들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 즉 그는 그들과 호응하여 조선의 전권을 일본으로부터 획득하고자 하였고, 이에 반해 민족해방운동가들은 보천교의 조직과 자금을 활용할 기회를 갖고자 하였다.

 

*44) 당시의 11 연맹과 같이 일제의 정책을 협조하는 친일단체로 결성된 것.?

*45) 이 때 월곡은 일꾼 차림으로 옷을 바꿔입은 뒤 지게에 술통을 지고 경찰의 눈을 속여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강오, 위의 글, 21 쪽 참조

 

 

5편에서 계속됩니다. 

 

 

 

 

 

Comments

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네이버밴드에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