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항일투쟁과 보천교 종교운동 |
1. 보천교단의 조직과 사상 / 109
2. 보천교의 성장 / 119
3.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의 수난 / 126
4. 보천교의 민족운동 · 독립운동 / 142
5. 종단,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 / 146?
1. 보천교단의 조직과 사상
역(易)의 원리에 근거, 24 방주제 이어 60 방주 선임
1916년 11월, 확대된 교단 조직을 강화하는 작업으로 역(易)의 원리에 근거하여 24방위에 대응하는 ‘24방주제(方主制)’를 만들었던 월곡은 1919년 10월,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60방주로 확대 조직할 것을 명령하고, 같은 해 10월 ‘24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 ‘ 60방주제’를 정하고 60방주를 선임하였다.
60 방주는 수(水), 화(火), 금(金), 목(木)에 해당하는 4명의 ‘교정(敎正)’과 동(東), 서 (西), 남(南), 북(北), 춘(春), 하(夏), 추(秋), 동(冬)에 해당하는 8명의 ‘교령(敎領)’, 24방위(方位)에 응(應)하는 24명의 ‘포주(服主)’와 24절후(節候)에 응하는 24명의 ‘운주(運主)’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직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60방주 |
12방주 |
사행 : 수 화 목 금 |
교정 |
사방 : 동 서 남 북 |
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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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 춘 하 추 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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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방주 |
24방위 |
포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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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운주 |
24절후 |
운주 |
60방주 조직 이후 5~6개월 동안 교인의 수가 급증하자 다시 60 방주제를 확장할 것을 계획하여, 1920년 4월에는 60방주 아래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대리 각 1인과 포교에 근면하고 성실한 6인의 임직(任職) ‘대임(大任)’을 선정하였다.
6인의 대임의 직명은 경례(敬禮), 교무(敎務), 절의(節義), 집리(執理), 찰이(察異), 행신(行信)이었으며, 6임의 각 임 아래 12 인의 임직 '12 임(任)’을 두고, 12 임의 밀에 '8임', 8임의 밀에 '15임’을 각각 선임하였다.
60방주의 각 방주 밑에 6임을 합하면 36 0명의 간부가 되는데 이것은 1년의 일수(日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밑에 12 임을 둔 것 은 1일 12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밀에 8임올 둔 것은 매시 팔각(八刻)에 해당되는 것이다. 8임 밑에 15 임을 둔 것은 매각 15분(현재 시의 2시간에 해당)에 해당한 것이었다.
이 간부들을 종합하면 방주(方主) 60명, 6임 360명, 12임 4,320 명, 8임 34,560 명, 15임 518,400명을 합하여 55만7천7백명에 이르고, 임직은 각 임에 1백명 포교를 기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이 최소 한 사람 당 1백여 명에게 포교했을 경우에는 줄잡아 6백만 교인이 된다.
물론 당시 전국 인구가 2천만명이었을 경우 보천교도가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데서 그 신빙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당시 교인 이나 제 3자의 말에 의하면 대흥리에 행사가 있어 교인들이 모이면 그 수가 수십만 명이었으며, 이들이 거처할 숙소만도 360여 동이나 됐다고 하니, 최소한 1백만 신도는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46)
이처럼 입교자 수가 많아짐에 따라 1921년 정월에 이르러서는 각도에‘정리(正理)’라는 직책을 두어 교체(敎開) 강화를 꾀하였고, 60방주로부터 15임에 이르기까지 그 소임에 따라 인장(印章)과 교첩(敎謀)을 발급하였다. 한편, 보천교 초기에는 증산의 성훈(聖訓)을 성문화(成文化)한 경전이 없어 종도들이 구술한 이야기를 듣고 신앙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체계적인 교의가 있을 수 없었고, 증산의 위대함만이 구전(口傳)으로 뚜렷이 부각되어 있을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월곡은 교조(敎祖) 증산과 자기 자신과의 연계를 신비화해 1909년 정월 3일을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정립하기에 이르렀고, 1909 년을 포교(布敎) 원년으로 선포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교세가 크게 확장된 1916 년 동지(冬至) 이후의 일이었다.
1923년 10월 20일에 간행된 최초의 활자 인쇄물인 보천교의 정기 간행물 『보광(普光)』 창간호 26쪽에는 아래와 같은 문답이 있다.
문 : 보천교는 몇 해 전에 창설하였으며 교조(敎祖)는 누구신가요?
답 : 거금 15 년 전에 증산천사(甑山天師)께서 개종(開宗)하셨지요.
문 : 천사(天師)의 씨명(氏名)을 말씀해 주시오.
답 : 천사의 성은 강(姜)씨요. 본(本)은 진주(晉州)요 휘(諱)는 일순(一 淳)이요
자(字)는 사옥(士玉)이요 호(號)는 증산(甑山)이십니다.
문 : 천사(天師)의 행장(行狀)과 귀교(貴敎)의 역사를 대강 말씀하여 주시오.
답 : 천사께서 천지공사를 완료하시던 기유(乙酉 1909년) 정월 3일에 교(敎) 의 대통(大統)을
우리 교주에게 전수(傳受)하신 후 교주께서는 일의(一意) 교화를 선포하신 결과 교도가
현재 수백만(數百萬)입니다.
위의 문답에서 볼 수 있듯이 보천교의 초기교단은 신앙대상이 증산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보광』2호 2쪽에서는 '배교심을 혁파(革破)하고 오직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천사(天師)께만 절하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교조 증산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하고 있다.
이후 월곡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모든 희망의 좌절과 교단 자체 내의 분열로 인해 그가 교단의 기본으로 하였던 증산의 신도교리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고, 이상호(李相昊)에 의해 발표된 사대 강령은 자기의 뜻이 아니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교리가 될 수 없음올 다음과 같이 말한다. 47)
일심(一心)이나 해원(解寃:)같은 것은 보천교가 아닐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는 것이며, 또한 거병( 祛病 )은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이지만, 이것이 곧 종교의 교리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세상은 언제나 질병이나 원한이 쌓여 있으라는 법이 아니니 병(病)과 원(寃)이 다하는 날에는 보천교는 더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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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1928년 신로(信路) 변경올 공식적으로 선언한 내용이다. 그리고 월곡은 1934년 5월에 전문사(典文司)를 통하여 혁신된 교 의 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새 교의 강령의 뜻을 설명한 『 대도지남( 大道指南)』의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인(仁)으로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나니 인의(仁義)를 행함은 인도(A道)의 시종澤終)이다. 인의(仁義)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그 성명(性命) 가운데 갖추어 있으니 사람이 스스로 포기하여 행하는 이가 드무니 사람이 인의(仁義)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사람의 도(道)를 인(仁)과 의(義)라 하고 맹자(孟子)도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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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참고로 『보천교연혁사』 상, 44쪽에는 ‘정부(당시 총독부) 발표가 600만명이고 교단발표가 200만명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47)『大道指南』, 1 - 5쪽
<의통인패도(醫統印牌圖)>
대순전경을 편찬한 이상호와 박공우 두 집안에서 한벌 씩 소장하 있는 의통인패도(醫統印牌圖). 증산은 숨을 거두기 하루 전, 박공우 를 불러 함께 자다가 깊은 밤에 "네 순설(脣舌)에 곤륜산을 달라 무진년 동지에 기두(起頭)하여 묻는자가 있으리니, 의통인패 1벌을 전하라. 나머지 1벌은 너희들의 차지가 되리라."고 말했다.
위와 같은 보천교 후기 교단의 교리로 인의(仁義)가 제시된 것 보천교 후기교단의 종교활동이 유교의 부흥운동과 비슷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만 했다.48)
그러나 이미 지적한대로 월곡의 말처럼 증산이 말한 대인대의(大仁大義 )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보천교 후기교단이 교의로 표방한 인의(仁義)는 증산의 성훈(聖訓)을 전통적인 유교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증산교측의 주장이다.
보천교의 강령은 경천(敬天), 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으로 요약된다. 강령은 교의(敎義)로 정해진 인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내세운 네 가지 윤리실현(倫理實現)의 벼리다. 『대도지남(大道指南)』에 기록 된 4대 강령(四大鋼領)의 뜻은 아래와 같다.
▷ 경천(敬天) 낳고 기름이 천지의 은덕이 아님이 없으니 일심으로 공경하여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 하늘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만물을 생성하는데 만물가운데 오직 사람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성품을 받았기 때문에 가장 귀한 것이다. 사람이 부정모혈(父精母血)을 받아 골육(骨肉)이 되었지만 성정(性情)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며 심증(心中)에 있는 영(靈)은 천지(天地)의 기(氣)다. 곧 나의 육신(肉身)을 낳은 이는 부모요 나의 심령을 명한 이는 하늘이니 천지는 내 부모요 부모는 천지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식된 이는 마땅히 부모 섬기는 마음으로 하늘을 심기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해야 한다. (『大道指南』 1 쪽)
▷ 명덕(明德) 스스로 그 덕(德)을 밝히는 것을 이름이니 마음 가운데로부터 화(化)하여 나오는 것이다. 덕(德)의 본체(本體)는 밝은 것인데 물욕(物慾)에 가리어 아기와 같은 순수한 덕성(德[生)을 잃어버린 것이다. 비유컨데 밝은 거울 에 티끌이 낀 것과 같고 깨끗한 그릇에 때가 낀 것 같아서 갈고 닦으면 본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니 덕(德)이라 인 (仁)이라 경(敬)이라 성(誠) 이라 함은 말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
덕(德)은 마음 가운데로부터 화(化)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비유하면 난초의 싹이 틀 때 싹의 가운데 허약했다가 두 잎이 갈라지고 또 갈라지면서 자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천하만물이 덕이 아니면 화(化)하지 못하니 도(道)에는 덕(德)이 있고 덕(德)에는 화(化)가 있으니 화(化)한 즉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萬物) 길러지는 것이다. (『大道指南』2쪽)
윤(倫)이라 함은 차례니 인륜(人倫)을 바로 하여 금수(禽獸)에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요순(堯舜)이 비로소 인륜(人倫)을 밝혀 구족(九族)을 화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본떠 이에 화(和)하였으나 세상이 성인(聖人)을 멀리하여 교화(敎化)는 오랑캐보다 못하고 풍속이 퇴폐(頹廢)하여 사람이 오상(五常) 있음을 알지 못하여, 아비는 그 자식을 자식으로 보지 않고 자식은 그 아비를 아비로 보지 않아 임금은 임금이 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가 되지 못하고 부부가 반목(反目)하고 노소 간에 예의가 없으며 같은 동포간에 서로 상잔(相殘)하여 금수(禽獸)에 벗어나지 아니하니, 이제 만일 바로 잡지 아니하면 인도(人道)는 끊어질 것이요
▷ 애인(愛人) 애인( 愛人) 이라 함은 내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이 만민(萬民)을 낼 때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똑 같은 자식 으로 보아 차등(差等)을 두지 않고 사랑하는 고로, 동포형제(同胞兄弟)라 하나니 마땅히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여 악을 숨겨 주고 선을 드러내며 단점을 덮어 주고 응졸한 것은 감싸면 오월(吳越)같은 원수까지라도 다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의 근심을 나의 일처럼 근심하면 다른 이도 내 근심을 자기 근심처럼 하여 저절로 오만과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지리니, 다른 이의 재주 있음을 몹시 싫어하는 이는 소인(小人) 이요 다른 이의 재주 있음을 내가 가진 듯이 하는 이는 군자(君子)다. (『大道指南』 5쪽)
보천교의 주의(主義)는 상생(相生)이다. 이것을 『대도지남』에서는 노인을 편히 하고 어린이를 품에 안으며 만물과 나를 하나로 조화 시키면 이 우주를 한 집안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4강령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과 주의(主義) 상생(相生)이 인의(仁義)로 부터 나오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나 인의(仁義)를 알고 행하지 아니 하면 열매 맺지 아니하는 헛꽃이요 궤 안에 든 명주(明珠)와 같아 모두 공(功)을 볼 수 없는 것이니 4강령과 상생은 인의를 행하는 요령(要領)’이라고 정리하고 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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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가 표방하는 목적은 대동(大同)이다. 이 대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천하(天下)로 하여금 공변되게 하고 상하사방(上下四方)이 균제방정(均齊齋方正)케 하여 동귀일치(同歸一致)케 하는 것이다.
인(仁)으로써 상생(祖生)하고 의(義)로써 서로 붙잡으면 인심(人心)이 같게 되어 천하가 대동(大同)이 되리라. (『大道指南』6쪽) |
월곡이 행한 무진설법 직후에 연중(年中) 7대 치성(七大致誠)이 정월1일, 정월 3일, 춘분(春分) 추분(秋分) 동지(冬至) 하지(夏至), 8월 15일 정해졌다. 월곡은 보천교의 교조 증산이 교통을 전해준 전수일인 정월 3일은 치성일에 넣고 증산 탄강일과 화천일은 치성일에 넣지 않았다.
이 7대 치성 가운데 증산대성(甑山大聖)의 탄강일(誕降日)과 화천일(化天日)이 빠진 것을 월곡은 1934년에 설(說)한 중통지설(中通之說)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도(儒道)는 중심(中心)의 곳에 처하여 선한 이는 스승이요 악한 이는 경계하여 사군사부(事君事父)에 중도(中道)를 잃지 아니하므로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도법(道法)이 온전함을 천하에 얻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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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의 입교식은 옥황상제 하감지위(玉皇上帝 下鑑之位)라는 위패앞에서 아래와 같이 행한다.
봉청수(奉淸水) 진설(陳設) |
보천교 교인이 실내에서 나누는 인사배(人事點는 정중하다. 이 인사배의 절차와 형태를 보면 아래와 같다.
읍(揖) 하고 평신(平身)한다. 이때 손위 분이면 수상읍(手上揖) 이라 하여 공수(供手)한 손을 눈 높이까지 올리고 손아래 분이면 가슴 정도에 이르게 한다.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숙여 질하고 읍한 다음 손을 땅에 대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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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적시한 보천교의 종교 형태는 유교적 해석이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훗날 교단의 분열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8) 증산은 1904- 1905년의 9월과 봄 어느날, 함열과 불가지에서 신교(新敎)공사로 유불선(儒佛仙) 3자를 써 놓고 뜻 가는대로 짚으라 했다. 이 때 한 신도 가 유를 짚는지라 증산이 "부유(腐儒)니라"면서 "후일 너희가 이 폐해를 당하리라”고 예시했다. 증산도측에서는 이를 월곡이 27년 동안 ”헛 천자(天子)놀이를 하고“ 정읍에 십일전 건물을 짓고 신로를 유교로 변경한 뒤 보천교 교주를 지냈다”면서, 이는 홍성문이 회문산에서 27년간 헛 공부를 하여 이 헛 도수를 1, 2천의 ‘부유’에게 붙인 것으로 해석했다.
49)『대도지남』 5쪽
2. 보천교의 성장
교단에 대한 정식 교명을 선포하는 고천제가 1921 년 9월 24일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에서 삼업한 일본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열리고, 그 고천제에서 월곡에 의해 낭독된 제문(祭文)에 ‘국호왈시, 교명왈보화(國號曰時, 敎名曰普化)’라는 글귀가 처음으로 드러나면서50) 교단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선포한 교명은 ‘보화교(普化敎)'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고천제가 열리기 전부터 교단의 이름은 ‘보천교濬天約’라는 명칭으로 이미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일찍부터 월곡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두고 있던 조선 총독부는 고천제가 열리기 전인 1921년 1 월부터 8월까지 교인 검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개월 사이에 이상호, 김홍규 등 교단의 주요 간부와 일반 교인 1천 여명이 체포됐고, 이로 인해 일부 간부들의 배교행위(背敎行爲)가 속출하였으며, 이러는 가운데‘보천교(붑天敎)’라는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51)
50) 이영호,『보천교 연혁사』 상, 보천교중앙총정원, 1935, 14쪽, 22쪽 참조
51) 같은 책, 14 - 15쪽, 51 쪽 참
보천교라는 교명이 알려지게 된 경위는 아래와 같다.
1921년 8월 경기도 일본 경찰부에서는 교인 검거령에 따라 교단 간부인 이상호를 체포하여 40여일 동안 구속 취조하였다. 고문과 회유를 거듭한 일본 경찰부 고등과 주임 전변호(田邊鎬)는 고등과장 후지모도 모도이치(藤本源市)와 협의하여 이상호에게 교단의 공개를 권고하고 석방하였다.
이에 이상호는 석방된 즉시 임실(任實)에 은거하고 있던 월곡을 찾아가 전변호의 권고를 전달하고, 방주 수십 명을 모아 교단 공개 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이론이 백출(百出)하여 사흘동안 토론해도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있다가 월곡이 ‘‘몽사(夢事)가 길(吉)하다."고 하여 교단공개를 명령하고 교단공개에 관한 전권(全權)을 이상호에게 위임하였다. 52)
이때 이상호는 월곡에게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敎名)을 물었고, 월곡은 ‘보화교(普化敎)’로 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상호는 보화교라고 하면 생소해 총독부로부터 반일단체 결성이라는 의혹을 받을까 염려해 고천제에서 선포한 ‘보화(普化)'의 머리글자와 당시 공인된 종교인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머 리글자를 합하여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을 제출하기로 마음먹고 경기도 경찰부에 ‘보천교’라고 교명을 제출하였다. 53)
52) 이정립, 『증산교사』, 증산교 본부, 1977, 90쪽 참조. 경기도 경찰부 과장인 藤本源市가 "숨어서 포교하지 말고 관청의 양해를 얻어 공개적으로 포교 하는 것이 어떠냐"는 회유에 대해 이상호가 교단이 공개되면 활동하기가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공개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의 공개를 기점으로 오히려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치밀헤져 갔다.
53) 이정립, 『증산교사』, 증산교 본부, 1977, 90쪽 참조. 이 밖에도 『보천교 연혁사』, 『도훈』 등에도 이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상호의 이런 독단에 따라 교단에서 정한 정식 교명인 보화교 대신 보천교라는 이름이 일제당국에 전해졌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 교단올 보천교로 부르게 되었다.
고천제에서 ‘국호왈시, 교명왈보화’라 했다는 것은 월곡이 보천교를 통해 추구하고자 한 운동의 목적을 드러낸 것이다. 교단의 제문에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그 나라 이름을 ‘시(時)’라고 규정한 것에서부터 보천교 운동의 목적이 순수하게 종교를 통한 사회구원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천제는 월곡이 교주 취임을 목적으로 시행했지만, 실제는 당시 민중들의 희망이요 월곡의 야망이기도 했던 새로운 왕조(王朝),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행사였다.
월곡은 보천교 초기 교단의 성공적인 조직에 힘입어 교세를 점차 성장시키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함양 고천제와 같은 신비적인 월곡의 활약상이 입소문으로 번져 확대된 것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난세에 영웅을 찾는 민중들의 염원이 겹쳐지기도 하였다.
60 방주제의 성공적인 안착이 가속력을 갖게 되자 교단은 기하급수적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면만 부상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상으로 볼 때 방주제에 지방 편중의 폐습이 있다는 비판이 불거졌고, 마침내 1926년 1월에는 월곡이 종래의 60 방주를 모두 도태시키고 대신 포교 관할기관으로 ‘남북선포교사무소(南北鮮布敎事務所)’를 두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후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1927년 6월 다시 방주제가 부활되었고, 이에 따라 60방주의 교첩(敎帖)이 새로 분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이 발생했지만 교도 수는 계속 증가되었다.
즉, 1923년 교도 수가 격증하자 여방주제가 조직되어 직제를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 1월에는 각 방주의 육임 중에서 공적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선화사(宣化師)로 임명하여 방주와 동등한 대우를 하도록 했다.
남녀 신도에 차별을 두지 않았던 교단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실시된 이 조치는 더욱 확대되어 1924년 9월에는 28명의 선화사를 4정방(正方)으로 분장하는 조치로 이어졌고, 11월에는 선화사 밑에 두는 6임의 임명을 교령(敎令)으로 제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어 선화사 6임 밑에 방주제의 12임과 같은 12임을 두고 그 밑에 6임인 보수원(保守員: 후에 자강원-自强員으로 개명)을 두는 등 방주제와 동일한 식의 임원을 두었다. 선화사 28명, 6임 168명, 20임
2,016명, 8임 1,612 명, 15임 24,190 명을 합하면 26만260명에 달하는 여성조직이 간부로 있었다.
교인 수의 폭발적인 증가에 발맞추어 중앙기관이 설치되었다.
1923년 집행기관인 총정원(總正院)과 외교기관인 총령원(總領院)이 설치되고, 1927년에는 총정원 내에 육사(六司)의 부서를 두어 육사장(六司長)을 임명하였다. 1931년에는 협의기관으로서 협정원(協定院)이 설치되고, 그 아래에 정의원(正議員) 약간 명이 두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에 월곡의 교령(敎令)에 따라 총정원이 봉쇄되는 조치가 내려지지만, 이를 대신해 '6임 총무소’가 설치되었고, 1932 년에는 이것이 ‘인의사총무소停義士總務所)’로 개칭되었다.
이후 필요에 따라 중앙기관의 개폐가 이루어졌는데 대체적인 체제는 아래의 표와 같다.
구분 |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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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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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원 (三院) |
총정원 (總正院) | 외정원 (外政院) | 교무집행기관 (외정원: 남자직제, 내정원: 여자직제) |
내정원 (內政院) | |||
총령원 (總領院) |
외교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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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원 (協定院) |
협의기관 |
||
육사 (六司) |
전문사 (典文司) |
문서 일체 담당 |
|
포정사 (布政司) |
포교 일체 담당 |
||
전의사 (典儀司) |
예의 일체 담당 |
||
경리사 (經理司) |
재정 일체 담당 |
||
수호사 (修好司) |
섭외 일체 담당 |
||
사도사 (司度司) |
법도 일제 담당 |
한편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교단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일찍이 전국적인 조직올 위해 방주제를 활용했던 월곡은 정리(正理)를 임명하여 교령(敎令)에 의해 해당 도내의 교무를 통괄하게 했다.
1921년 시행된 정리제도는 정리 아래에 정리를 보좌하여 교무를 협찬하는 부정리(副正理), 정리의 지휘를 받아 교무를 집행하는포정(布正), 그리고 포정을 보좌하며 교무를 협찬하는 선정사(室正師, 부포정에 해당)를 두었다.
그리고 1922년에 이르러서는 중요 도시에 지방기관을 설치하였다. 서울에는 일종의 포교 총괄기관인 진정원(眞正院)이 설치됐고, 기타 도시에도 진정원이 설치되었으며, 각 군에는 정교부(正敎部)를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강화했다.
이 밖에도 교인들의 단체적인 노동을 통해 산업을 진흥시킨다는 취지에서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자치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을 통해 수공업이 장려되었다.
보천교는 이러한 교세 확장과 더불어 완전한 종교조직으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교도들을 한 곳으로 응집시키는 상징화 작업이 진행되어 교장(敎幸)과 교기(敎棋)가 제정되었다.
정자(井字)로 되어 있는 교장의 정(井)은 수원(水源)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水)는 만물을 생성자육(生成慈育)하는 것으로 보천교의 덕화가 수원과 같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천교의 중심지인 정읍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교기는 황색 바탕에 정자(井字)를 적색으로 아로새긴 것으로 보천 교의 7대 치성일 내지 기념일에 교단 본부와 가정에 게양했다.
한편, 교세의 격증과 함께 교리에 있어서도 혁신된 강령과 주의가 발표되면서 교단은 분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중들의 정신적 공백기를 메우는 종교적 구원의 성격을 가진 보천교가 도첩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신도를 늘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의 싹을 드러낸 것이다. 이 분열은 금전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다름 아니라 신로(信路) 변경에 따라 증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신앙대상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신로변경을 통해 드러난 보천교의 교리는 유교적인 면에서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역학적인 이론을 주로 한 것이어서 증산을 원류로 하는 보천교의 신앙 대상인 천(天)과 신(神)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월곡의 입장에서 천(天)은 증산이 주장한 신명귀신이 아니라 음양 오행의 작용으로써 만물이 생성 발육하는 도(道)의 대원(大源)이 되고, 신(神)은 상제로서의 신이 아니라 천(天)에 따라 음양이 작용하는 신묘 불가사의한 힘이 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원리적인 이해가 심화되었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우주관이 다시 부활된 듯한 월곡의 신로 변경에 따른 신관(神觀)에는 어느 구석에서도 상제(上帝)로서의 신은 인정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천(天)은 도(道)의 체(體)가 되고, 상제(上帝)는 도(道)의 용(用)에 불과하며, 사람이 천(天)을 공경한다는 것은 사람이 인의(仁義)의 천심(天心)을 공경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증산이 옥황상제의 재생(再生)이며, 천지공사를 직접 행했다는 것은 그가 천상의 옥황상제로서 내려 왔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이 천심을 체득하여 상제(上帝)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것은 월곡이 증산과의 차별화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인간의 적극적인 종교행위를 강조하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증산을 교조(敎祖)로 받들었던 교단 내의 간부들은 월곡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증산을 추종하는 교단 내 인사들은 월곡의 카리스마에 눌려 혁신 교리에 따르면서도 신앙 면에서는 여전히 교조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봉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증산이 천지공사로써 예정된 교리를 행하고 있는 교도들이 증산의 신도(神道)를 사도(詐道)라고 배척하는 것과 증산의 성령(聖靈)을 부정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拉着) 이 아닐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월곡의 신로 변경을 증산의 교리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월곡 지지자들은 상제는 더 이상 인격적인 신이 될 수 없다는 신념 하에서 삼광영의 월광영은 증산의 신주가 될 수 없다고 보고, 상제를 우주 자연을 용사(用事)하는 조화의 힘으로만 해석했으니 이미 그 분열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교리 해석상의 문제는 교세의 급성장과 궤를 함께 하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단의 발전은 동시에 분열을 예고하고 있었다. 교세의 급증 과정에 일제의 감시와 교인들의 기복적인 신앙 태도가 복합적으로 개재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3.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의 수난
월곡과 보천교의 성장에 대해 기득권 세력은 물론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태어난 신흥종교, 주도권을 상실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보천교단에 대한 고발과 탄압으로 이어졌다.
또한 월곡은 항일독립운동과 맥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협의를 둔 일본경찰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고, 이같은 현 실은 보천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민족의 동정을 예민하게 감시하는 과정에서 비밀리에 일취월장하는 월곡의 종교활동에 감시의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제에 의한 보천교의 수난은 교단이 공식적으로 형성되기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1914년 5월 초, 월곡은 같은 마을에 사는 헌병보조원 신성학(申成學)과 이웃 마을인 단곡리에 사는 장성원(張成元)에 의해 고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월곡이 신통묘술을 부려 공중을 향해 금전을 부르면 청구하는 대로 떨어지고, 대사상(大思想)이 있어 매월 14일과 그믐날 밤 집에 직접 가보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헌병 소장에게 무고한 것이다.
고발에 따라 천원 · 삼거리 · 고부 · 정읍의 헌병대가 연합하여 월곡의 집을 정찰했으나, 마침 그날 밤에는 제사가 없었다.
이날 월곡 가족 전원과 일꾼들까지 개별적으로 정읍군 입암면의 천원헌병대에 끌려가 구타와 신문을 당했고, 월곡은 구속되어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집안을 뒤지고 신문을 했지만 특별한 증거가 없어 9일만에 월곡은 석방되었다. 54)
1915년에는 금구 사람 김송환(金松煥)이 그의 아내와 함께 월곡 문하에 의탁하기를 간청하자 허락하였다. 이에 김송환은 그의 가족 모두를 데려 와 월곡 집에 기거했는데 마침 그의 아내가 사태(死胎)로 인해 죽음에 이르렀다.
일본 경찰, 월곡 체포령
월곡은 그 부인을 의약으로 힘써 치료하여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러던 중 김송환은 포교를 빙자해 외출이 잦아졌고, 집에 돌아올 때는 항상 호화사치품을 사 가지고 들어오는 등 공금을 낭비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월곡은 김송환의 낭비벽과 지출되는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 김제 지방의 유력자 나기중(羅基中)에게 위탁하여 농토와 가옥을 대부하여 김제로 이사하게 배려했다. 그러면서 김송환 이 원하는 대로 좋은 가옥을 제공하였다.
이사간 뒤 얼마 안돼 김은 "금전 1천 원을 지급하여 주되 만일 주지 않으면 제도와 빈객의 출입함을 알고 있는 자신이 수만 원의 피해를 입게 해주겠다”는 편지를 그의 아버지 편에 보내 협박하였다. 이를 받아본 월곡은 “아비가 되어 자식의 서찰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체면에 손상될 일이요, 또한 금전을 호의로 청구하면 돈이 있는 경우 혹 지급할 수 있지만 위협공갈하면 돈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단 한푼도 지급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송환의 부친은 서찰의 내용을 자신이 알았더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미안해하며 떠나려했다. 월곡은 늦은 저녁이라 출발을 만류하다가 하는 수없이 엽전 한 냥을 여비로 주어 보냈다.
김송환은 이 내용을 듣고 바로 전주 헌병대에 가서 “정읍 입암면 대홍리에 사는 차경석이 머지 않아 조선을 독립시켜 자신이 황제가 된다며 농촌의 어리석은 백성을 유인하여 금전을 사기하는 등 음모를 꾸미고 있으나, 정읍 분대와 파견소는 모두 이미 매수되어 소용 없을 터이니 헌병대장이 직접 가서 일찍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정부차원의 큰 우환이 될 것이다”고 고발했다.
헌병대장이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정읍 분대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조치를 취해 대흥리 분소를 수색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 55)
그후 1916년에 24방주를 조직하여 교세를 확장하자, 헌병대의 사 찰과 탄압은 날로 심해졌다. 월곡을 잡기 위해 전국에 걸쳐 체포령 까지 내렸으나 그는 강원도와 경상도 산간지대를 주유하면서 일본 관현의 수색에서 벗어났다.
교단 조직의 확대가 급속히 이루어지자 총독부의 경계는 삼업했 다. 헌병의 보천교인에 대한 수색과 검거는 극에 달했다. 이에 격노한 보천교인과 헌병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1918년 9월 제주도에서 김연일(金延日)이란 술사(術士)가 불무황제(佛務皇帝)라 자칭하고 섬사람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서 순사 두어 명을 살해하고 자신은 도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목포 주둔 일본경찰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여 김연일 일당을 토벌하였다.
일본 경찰의 보천교도 탄압
경찰은 이 사건이 보천교도의 소행이라는 협의를 두고 업중하게 조사하던 중 제주교인들의 성금 10만원을 면화 포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오던 교인 문인택(文仁宅),강대거(姜大擧)가 목포항에서 면화를 매각하면서 돈을 꺼내다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사과정에서 고문에 못이겨 보천교금(普天敎金)이라는 사실이 발각되었고, 교인 박종하(朴鍾河)를 체포한 경찰은 엄중 취조 끝에 24 방주의 조직까지 알아내 박종하 · 신기섭(申基燮) · 채규일(蔡奎壹) 등 19 명이 체포되고, 증산의 미망인인 고관례와 월곡의 아우 윤칠도 목포 검사국에 체포 구금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칠은 월곡의 거치에 대한 심문올 받을 때 형독(刑毒)을 입었고, 채규일도 남도(南道) 집유라는 재무책임자였기 때문에 금전의 사용처를 심문받는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 밖의
교인들도 반정부 음모사실을 추궁 받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일부는 이듬해 석방되었지만 수사과정에서 24방주 조직까지 탄로나면서 보천교인의 검거선풍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56)
그러나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경실색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불기소 처분하였으나, 계속되는 탄압은 교도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일제는 '3·1운동’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방식의 변화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총독이 있었다. 그의 1차 임기 (1919 - 1927)와 제2차 사이토 총독 시대(1929 - 1931) 를 합치면, 역대 총독 10명 중 재임기간이 가장 길었다. 사이토 1 차 재임 후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총독 시대(1927- 1929)가 잠깐 열리는데 종교 탄압은 여전했다.
이 시기의 정무총감으로는 미즈노(水野鍊太郞 1919-1922), 아리요시(有吉忠一, 1922-1924), 시타오카(下岡忠治, 1924-1925), 유아사(湯淺倉平, 1925-1927) 등이었다.
54) 보천교연혁사』 상 2쪽
55) 위의 책, 상 6면
56) 『증산교사』 60쪽
3 · 1운동 후 민심순화 차원에서 1919년 9월 10일 새로 부임한 사이토는 자신의 조선통치 구상을 담은‘ 시정방침(施政方針)을 발표했다.
문화적 제도 혁신으로 조선인의 행복과 이익의 증진을 도모하며 장차 문화의 발달과 민력의 충실을 기해 정치상 사회상의 대우에 있어서도 조선인이 내지인(內地人)과 똑같은 취급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다. |
9월 2일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강우규의 폭탄공격을 받았던 사이토가 내놓은 ‘시정방침’은 유난히 ‘문화’를 강조했다. 해군대장으로 조선총독에 임명된 그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조선강점 이후 ‘무단정치(武斷政治)’와 차별성을 강조한 것은 3·1운동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문화정치의 내용으로 내세운 것은, 민간인의 총독임명, 헌병경찰 제의 폐지, 지방자치의 실시, 언론 · 출판의 보장 등이었다. 그러나 이후 실시된 상황을 보민 허울뿐이었음이 드러났다.
문화정치의 진정한 의도는 친일파를 양성,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고 독립운동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일제는 3·1 운동 후 조선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이라는 비밀문서를 통해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자로 관리를 삼고 친일파 지식인을 장기적 안목에서 양성한다.
사이토 총독의 보천교 파괴공작
사이토는 친일분자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각종 친일단체를 조직케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국민협회, 대동동지희, 대정친목회, 대동사문회, 조선인 소작인상조회 등 분야별로 다양한 친일단체들이 만들어졌다. 57)
이러한 문화정치에 대한 저항으로 ‘문자보급운동’이 일어났다.
1929 년 『조선일보』에서 민중문화 향상을 위한 문자보급운동을 시작했는데,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가르치자! 나 아는 대로' 라는 구호가 박힌 <한글원본>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 운동은 1934 년까지 계속되었다.
월곡을 독립운동 단체의 수괴(首魁)로 생각하던 일본 경찰은 보천 교 운동을 공개적으로 노출시켜 조직을 파악하고 해체시키려는 공작을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벌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사이토가 직접 월곡을 방문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이토 총독이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소로 아버님을 직접 찾아와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사실이냐’고 확인을 했답니다. 이때 아버님께서는 ‘하늘이 응하고 백성이 따르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이 땅이 우리 땅이니 독립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
문화정치를 표방한 사이토는 보천교 운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고, 매수·파괴공작을 진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이토에 이어 온 야마나시도 돈을 밝히는 총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불교재산을 많이 몰수하는 등 죄악이 큰데 보천교에도 많은 금전을 요구했지요. 특히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과 짜고 종교계를 괴롭혔지요. 강대련은 당시 친일파로 유명했는데 많은 일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
57) 대한매일, 1998. 12. 13.: 정직한 역사 되찾기(17회) 一 친일의 군상 "수 년전 기자는 자료수집차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기자는 '사이토(齋藤實)문서' (제2 · 5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가 재임시절에 수집한 문서)를 검색하다가 3 · 1만세 의거 직후 조선인 밀정이 작성한 정세 보고서 하나를 발견했다. 제목은 『朝鮮/最近卜對應策(조선의 최근과 대응책)』, 작성자는‘조선 평양(朝鮮 平壤)’출신의 ‘선우순’이었다. 총 40쪽 규모의 이 정세보고서는 3 · 1의거 직후 조선내 각 지역 · 종교세력간의 움직임과 이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임시·영구대책을 상세히 언급한 것으로 전적으로 총독부 당국을 위헤 작성한 것이었다. 밀정 중에서도 ‘먹물’을 먹은 고급 밀정의 ‘작품’인 셈이다
강대련(姜大蓮 1 875- 1942)은 용주사 뿐 아니라 한국 근세 불교사에서도 큰 오점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호는 금허(鈴虛), 대련(大蓮)이고 첫 법명은 보영(寶英), 속성은 강(姜)씨로 경남 진주 출신으로 14세 때 부친이 죽자 금강산 장안사에서 부친을 천도하고 진허(震虛)스님에게 출가하였다.
1901년 순헌비(淳獻妃, 고종의 계비)로부터 만금(萬金)을 받아 해은암(海恩庵) 해광전(海光殿) 등을 신축하고 1906년에도 다시 순헌비에게서 6천원을 하사받아 해인사 대장경판 정장(針裝)을 보수하고 불경 1,400권을 간행하여 금강산 정양사(正場寺)에 봉안하면서 빠진 책을 보충하게 하였으며, 1911년 용주사의 주지로 부임, 1914년 11월 25일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설립하였다.
이 모임은 해인사 주지 회광(晦光) ? 법주사 주지 진하(震河) 등 수십 명이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는데, 회광이 그 대표자였고 대련은 부회주를 맡았다. 또한 용주사 주지를 계속 맡고 있던 그는 1915년 조선사찰 30 본산 연합사무소를 각황사에 두고 그 위원장을 맡았다.
그가 참여했던 이들 두 단체는 대표적 친일불교 단체로 평가된다. 1919년 10월 사이토 총독에게 제출한 ‘조선불교기관 확장 의견서’라는 일종의 건의서는 그의 불교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료다.
일본의 조선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승려로서는 이를테면 일본 승려와 우리 나라 양반 자제들과의 결혼 같은 것을 적극 주선해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거꾸로 우리 나라 승려와 일본귀족들과의 통혼을 주선해 본다면 이건 또 어떠할 것인가 |
3 · 1운동의 기운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1919 년 10월에 쓴 그의 이러한 친일 행각은 불문(佛門)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22년 3월 각황사에서 열린 ‘불교유신회'모임에서 김상호(金尙吳) 등 청년승려 1백여 명이 대련의 친일 행각을 성토한 뒤,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불교계 대악마 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 大惡魔 姜大蓮 鳴鼓逐出)’이라고 쓴 장대를 들고 북을 두드리며 종로거리를 행진한 이른바 ‘명고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이 사건 이후로도 총독부의 비호 속에 입적할 때까지 일정한 형태의 권한을 계속 지닐 수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그의 과오는 지울 수 없게 되었다.
보천교도 3천여명 검거, 7백여명 기소, 수십명 사망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보천교에 대한 일련의 탄압이 진행되었다.
3·1 운동에 경악한 총독부는 한민족(韓民族)의 독립의식이 고조되는 당시에 수백만의 교도와 60방주라는 거대한 조직을 가진 비밀스러 운 교단을 함부로 취급할 수 없어, 부심 끝에 탄압과 회유라는 중책을 병행할 방침을 세운 것이다. 58)
58) 『보천교』 19쪽
1920년 1월에 경북 청송에서 방주 권태호(權泰鎬)에 의해 60방주 조직내용이 누설되었고, 경찰은 이를 ‘기미만세 독립운동’을 재발시키려는 음모단체로 규정,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교인 3천여 명을 검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교도 수십명이 죽음을 당했고, 7백여 명이 기소되었으며, 체포되지 않고 도망 을 다닌 교도의 숫자가 3만여 명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기소된 7백명 가운데 129명은 고등법원까지 상고하였으나 결국 징역 2년6개월에서 9개월까지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59)
1921년 1월에 대규모 검거선풍이 또 다시 일었다.
전국에서 수천 명이 검거되었고 그 중에 강원도 교인으로 체포된 사람만 해도 7백 명이 넘었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더욱이 안동재판소에서는 교인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까지 만들어 방주가 체포되면 징역 6년, 6임이 체포되면 징역 4년, 12 임은 징역 2년, 8 임은 징역 1년, 15 임은 구류 또는 벌금형으로 하는 등,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검거 신풍을 기록했다.
이때 이영조(李英兆), 최선묵(崔善默), 김홍규 등 수명의 교단 간부가 체포되었다. 이 밖에도 보천교는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많은 교인들이 구속되었고, 거액의 교단 재산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해 곤경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의 일로 이 때가 바로 보천교의 대규모 수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1921년 함양 황석산 밀에서 고천제를 준비할 무렵, 배교자 김영두(金英斗)의 고발로 인해 일제의 수사망이 압박해 왔지만 월곡은 이를 교묘히 피했고, 다음해 전북 임실의 성수산(聖壽山)에 은거하고 있을 때 권석두(權錫斗)의 밀고에 의해 경찰의 수색망이 좁혀질 때에도 아슬아슬하게 거처를 옮겨 체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월곡의 은거는 교인들과 일반 민중들에게 그가 신통묘술을 부리는 사람으로 여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 대해 당시 주요 신문들은 적지 않은 비중을 두고 보도하였다. 『동아일보』는 1 922 년 2월 24일자 신문에서 보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월곡은 교(敎)의 조직올 확장하던 중, 총독부에서는 당시 집회를 허락 하지 않던 때라 이를 정치운동의 음모로 인정하고, 1918년 11월에 전남, 제주에서 그 교인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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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차경석황제 등극 도모’ 보도
『동아일보』 1921년 4월 26일자에는 ‘선도(仙道)를 표방하는 비밀 단체 대검거’라는 제목으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도모하는 배일음모 단체(排日陰謀團體), 이들 단체에서 거두어들이는 교금(敎金)을 독립적 립금으로 인정, 차경석을 수배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60) 같은 해 5월 13일자에 실린‘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태을교인(太乙敎人) 검거’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차경석은 국권(國權)을 회복하고 금년 중에 황제가 되려고 운동 중이다”라고 보도했다. 61)
이 밖에도 ‘국권회복단원 또 체포’라는 기사에는 “시내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조선 국권을 회복한다는 취지로써 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여러 가지 비밀사상을 고취하던 태을교를 믿는 교도를 계속 체포하였다”고 하여 월곡을 중심으로 한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보도했다. 62)
59) 『증산교사』 89쪽
60) 『동아일보』 19 21년 4월 26일
61) 『동아일보』 1921 년 5월 13일
보천교를 독립운동을 하는 종교단체로 보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보도로는 『동아일보』 1 921년 8월 6일자 기사다.
이 기사에는‘태을교인의 독립운동’이라는 제하에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다 발각됐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8월 25일자에는 ‘태을교를 표방하고 독립운동올 맹세한 단체 공소’라는 제목을 뽑고 “서 석주라는 자가 조선독립을 위해 독립자금 3백여원을 모았다가 고소 당했고, 강원도의 이주범 등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발각돼 체포되었 다”고 집중 보도하였다.
당시 독립운동의 돈줄로 보천교를 지목했던 일제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고, 보천교가 독립자금의 원천이었음을 증거할 수 있는 언론 보도는 『동아일보』 1 0월 29 일 기사 '십만원의 독립자금’이다. 당시 이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상해에 보내려 했다는 등,
차경석을 국내 독립운동의 두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1.10.29)
전라북도 정읍군에 큰 교당을 짓고, 백만 명의 신도가 있다 하는 태을교(太乙敎)는 전라북도와 층청남도의 두 경찰부에서 늘 주의하여 오던 중, 지난 음력 9월 16 일에 모처에서 그 교 간부가 비밀희의를 한다는 말을 듣고, 진기(前記) 두 경찰부에서 미리 변복한 경관을 다수 파견하여 비밀 리에 수탐한 결과, 과연 그들은 태을교라는 명목 아래 두려운 큰 음모를 하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교단 간부인 최도홍 · 김홍규 · 고편상 · 고태규 · 옥원익 등을 체포하는 동시에 가택수색까지 하여 다수의 불온문서를 발견하고, 김홍규의 집마루 밑에서는 지화와 은화를 합하여 십만칠천오십원을 넣은 항아리를 발견 ...(중략)…
그 때의 태을교로 말하면 순수한 신앙뿐이었으나 재작년에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로는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여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코자 모 군자금으로 쓰기로 결의하고, 그 돈은 김홍규가 보관하기로 되어있어, 전기(前記)의 항아리에 넣어서 마루 밑에 파묻어 둔 것이라 하며, 이와 같이 독립운동에 착수한 이후로 교내의 조직을 변경하여 교주의 아래 12명의 제자를 두고 그 아래에는 다시 60여명의 교직원을 두어 독립이 되면 12제자는 각 대신이 되고, 그 아래의 교도는 … |
이어지는 동 신문 1921년 10월 30일 기사는 '무과출신으로 독립운동' 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문을 게재했다.
강원도 양양군에 사는 김홍식은… 육군 참위가 되었으나, 미구에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 양양으로 돌아가서 불평을 품고 있더니, 한일합방이 되매 더욱 불평을 품던 중 재작년 삼월에 조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매 기회를 보아 독립운동을 참가코저 하던 중에, 태을교인 백담구와 상의하고 수만의 교도와 돈을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키다가 발각 체포되었다. |
결국, 당시의 언론보도로 추측해 보면 보천교는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할 수 있고, 최소한 독립운동과 적지 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보천교가 모은 엄청난 돈이 독립운동에 쓰이거나 쓰일 자금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보천교 조직은 지리산에서 총기와 화약을 만들어 기회를 보아 봉기하며, 월곡은 조선의 황제가 된다는 등의 수많은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일본 경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63)
보천교, 일제에 조직적으로 저항
이런 보천교의 독립운동 관련 행동들은 마침내 일본 경찰이 보천 교 본소에 상주하는 결과를 낳았고, 일제의 감시와 감찰 활동은 더 욱 강화되어 교단의 집회 때마다 경찰이 출동했다.
보천교의 항일의지가 강했던 사실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버님은 조부님이 그렇게 된 게(분형당한 사실: 필자 주) 조선 정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외세, 특히 일본 때문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1909년에 비밀리에 보천교를 만들어 이듬해 합방되자마자 일본놈이 아니라 왜놈들을 가만둘 수 없다고 싸우신 겁니다. 일본과 조직적으로 처음 싸운게 보천교라는 것은 1920년대 당시 동아일보에 다 나와 있어요.
그래서 아직도 친일파들이 설치고 있는 이 나라에서 보천교를 제대로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
일제의 보천교단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던 중 전남 고흥에서는 태을교인과 경찰이 층돌한 사건이 발생했다. 1922년 6월 16 일 오전, 보천교의 집회를 감시하던 경찰과 교인 및 그 집회에 참가했던 주민들 사이에서 난투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난투극에 머물지 않고 경찰의 권총발사로 확대되어 교인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교인을 사살한 경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집회를 주도한 교단 간부들만 체포된 것이다. 당시 일간지는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고,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동아일보』 19 22년 6월 27일, 30일, 7월 2일, 3일, 6일자 신문 및 『메일신보』 8월 19 일, 21일, 25일, 11 월 19 일, 21일자 신문에 이 사건이 보도됐다.
이 사건을 놓고 『동아일보』와 『매일신보』의 보도는 거의 일치했지만 사건을 보는 시각과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편차를 보였다.
『매일신보』는 ”이곳 주민들은 교인들의 폭행을 미워하며, 주민으로 교인인 자는 이후 촌락 밖으로 축출하리라”하고 ‘‘태을교에 대한 주민의 태도는 아주 냉랭했다”라고 검찰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옮겼지만 『동아일보』는 같은 사건에 대해 ”이 곳 주민들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검찰에게 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검찰 발표는 거짓이다’라 하더라”고 보도한 정황 설명을 통해 반대 논조를 피력 한 것이다.
일제, 월곡에게 ‘만주 이민' 권유
사회 문제화된 이 사건에 대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적반하장으로 교인들을 ‘소요죄', '보안법 위반, ' '직무 방해죄', '치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해버렸고, 보천교 내부에서는 일본의 탄압과 감시를 못 이긴 배교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민중들의 보천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되었다.
한편, 일제의 보천교와 월곡에 대한 감시와 탄압은 그의 항일운동에 대한 이력(履歷)에 기인하는 것이었으며, 탄압만으로는 층분히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제는 월곡으로 하여금 만주(滿洲)로의 이주를 권하는 등 다양한 회유책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 국토의 10분의 1을 살 수 있다는 엄청난 재력을 가진 보천교였지만 계속되는 탄압과 내홍(內訌)으로 번진 고소 고발 등의 수난은 심각한 재정의 소모로 이어졌다.
수백만 명을 헤아리는 교인들이 가산을 기울이면서 바쳐온 재정은 거대한 것이었지만, 관의 탄압에 대한 무마공작에 많은 돈이 소모되었고, 특히 김영두 도금사건(盜金事件)으로 인한 십수만 원과 강대학의 목포수난으로 제주도 교인 헌납금 7만원의 압수는 교단 재정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1만원은 요즘의 1억원에 상당하는 화폐가치, 필자 註)
이에 더하여 2차례의 고천제에 투입된 교금도 금전적 타격을 주었다. 1922년 이상호에 의한 경성진정원의 설치로부터 1923년 경성진정원 내의 보광사 인쇄소의 설치, 1924 년 『시대일보』 인수는 막대한 교단재산의 손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재정난에 대해 월곡은 교재(敎財)의 보완책으로 ‘돈신록(敦信錄)' 64)이라는 장부를 작성하여 각 지방에 분급, 교인들의 성금을 등급에 따라 기재하게 하고, ‘포성장(褒誠狀)'을 작성하여 갑 · 을 · 병 · 정 · 무의 등급별로 인쇄하여 성력(誠力)이 특수한 교인에게 등급 별로 수여하였다.
이같은 방법으로 교금올 모집한 보천교는 1923년 각 도에 진정원을 설치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고, 1924년 혁신회 사건 이후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 비용으로 5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출 하여 또 다시 재정난에 빠지고 말았다.
보천교의 성장은 일제의 탄압을 가중시켰고, 엄청난 세로 불어난 교단은 이에 비례한 일제의 가중되는 압력으로 수난이 계속되었다.
62) 『동아일보』 1921 년 5월 14 일
63) 『동아일보』 1 921년 6월 22일
64) 성금을 등급별로 기재하고 포성장(褒誠狀)을 수여하는 방법은 보천교의 마지막 수탈방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강오, ‘보천교', 31쪽 참조
6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