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항일투쟁과 보천교 종교운동 |
1. 보천교단의 조직과 사상 / 109
2. 보천교의 성장 / 119
3.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의 수난 / 126
4. 보천교의 민족운동 · 독립운동 / 142
5. 종단,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 / 146
4. 보천교의 민족운동 독립운동
1919년, 일제하에서의 거국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중들 사이에선 초월적이고 신비적 방법인 종교운동에 참가함으로써 개인 구제는 물론 국가의 흥륭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번져나간다.
보천교가 일제시대에 많은 교인을 모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나라의 건국 내지 일제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바라는 민중 층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제 보천교의 교세를 실질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이용하려던 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은 빈번하게 보천교 교단을 찾아 정치적 아지트로 삼고자 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일제 치하의 지성(知性)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송진우 등은 월곡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독립투사 대부분이 보천교 비밀회원
또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인 장덕수, 안재홍, 신석우 등이 당 시로는 상당한 자금을 비축했던 보천교 자금을 받아 썼다는 설(說) 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설득력 있게 전해진다.
심지어 이들이 보천교의 비밀교도였다는 설도 있다. 월곡의 아들 용남은 이렇게 증언한다.
보천교에 비밀리에 가입한 분들 가운데 당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인으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수주 변영로, 동아일보를 인촌과 함께 만든 고하 송진우, 4 · 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허정, 해방 정국의 주역 중 한사람인 안재홍, 백관수 등 전라도 인물은 물론이고 당시 독립을 열망했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직 · 간접적으로 보천교와 인연을 맺은 비밀교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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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서울 청년회 소속인 최팔용, 장덕수가 모스크바 원동약소민족회의(遠東弱小民族會議)참가에 쓰일 경비를 월곡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또한 이미 학계에 소개된 바 있다. 65)
조선내 보천교 운동의 대세를 인정하여 종교운동의 실질적 방향을 정치운동 내지 사회운동으로 전환시켜 보려 했던 당시 지도층 인사들은, 보천교를 때로는 비판하면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조만식의 경우가 그렇다.
조만식은 상해로 망명하려다 체포된 1919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간 구금되었다 풀려난 후 1920년부터 1년여 간 정읍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 와 있었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66)
당시 조만식이 어떤 목적으로 보천교 본소에 와 있었는지, 와서는 무슨 일을 했는지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1923년에 창립된 물산장려회(物産奬勵會)의 물산장려운동과 보천교에서 추진한 왜산품(倭産品) 불매운동’ 및 ‘자급자족운동’이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추정할 뿐이다.
월곡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운동노선이 조만식의 운동노선과 일치 한다는 점도 관련성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월곡이 일제하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갖가지 사실이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보천교, 교단음악으로 농악 지정해 독립운동 고취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는 그의 『친필유고』에서 모스크바의 약소민족회의에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기로 하고, 여비 마련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이 월곡을 방문해 돈 만원을 받아, 이것을 내가 맡아 7인에 게 지급했다”고 밝혔다. 67)
이러한 일련의 소문과 사건은 보천교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인식되고, 보천교를 상징하는 심벌이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해, 68) 사실 여부를 떠나 민중들에게 색다른 선입견을 갖게 했다.
보천교 운동을 순수 종교운동 혹은 사이비종교로 보는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보천교는 종교차원의 운동을 넘어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고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그 역할이 단순한 자금지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한계가 있고, 현재로선 단지 당시 정황을 미루어 보건대 민족운동에 관여했을 것 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그러나 보천교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고, 민족정체감을 고취시켰기 때문에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종교운동적 측면에서 제공 했으며, 민중의 욕구를 수렵하고 집단적으로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
보천교 운동을 이런 자료를 근거로 민족운동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보천교 운동의 일환으로써 추진되었던 민족사업들이 실재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민족해방운동 진영에 자금을 제공한 것 외에 월곡은 전통 한복을 고집하여 한복차림으로 수사기관에 출두하고 보천교 음악으로 농악(農樂)을 지정했는가 하면 종교를 표방했지만 독립주권국가로서
‘시국’이란 국호를 선포하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를 목표로 활동 했다는 점이 그렇다.
그렇다면 월곡 차경석이란 인물과 보천교는 어떻게 식민지 조선에서 태동하여 하나의 거대한 집단으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시대상과 그의 성장 배경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보천교는 월곡이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쳐 가는 가운데 탄생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6. 종단,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
한차례 휘몰아쳤던 보천교에 대한 수난이 뜸해지자 이번에는 월곡 개인에 대한 고소 · 고발사건이 뒤를 이었다. 1920년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잇달았던, 대부분의 고소 · 고발은 금전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1929년 6월 방주대표였던 채규일이 월곡의 명의로 된 거액 8만원의 보관증을 경기도 경찰부에 제시하면서 보관금 반환청구를 하는 고소를 했고, 뒤이어 박종하 · 채규상(蔡奎象) 등, 주요간부들도 보관금 반환청구를 하는 고소를 하였다.
특히 그들은 월곡이 1926년 1월에 1주일간 일본 천황(天皇) 메이지(明治) 사진을 걸어 놓고 동도지(東桃枝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로 만든 활을 쏘았으며, 자신이 등극한 후에 관직을 수여하겠다고 사기 취재(取財)하면서 황실용 물품을 비치해 놓고 아침마다 조견례(朝見禮)를 받는 등 황실모독을 내세워 일본 경찰에 고발했다.
이에 고등법원에서는 정읍검사국에 의뢰하여 대질신문을 하였지만 증거 불층분으로 20일만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1930년에는 교도였던 이원유(李元有)의 고발이 이어졌다. 그는 월곡이 고관대작의 벼슬을 준다는 조건하에 보관증을 받고 금 2만원을 납입하였는데, 결국은 사기 당했다는 것이다. 월곡이 황제로 등극하여 곤룡포(袞龍袞龍袍) · 용상(龍床)등을 구비하고 있다는 고발도 함께 했지만 이 문제 역시 증거불층분으로 기각되었다.
1931년에도 교인 강재석의 고소가 이어졌는데, 그는 1922년 여름 하방주(夏方主) 조재승(曺悌承)의 소개로 관작(官爵)을 수여한다고 하여 3천원을 월곡에게 납부했으나 결국 사기였다는 내용인데 이것도 결국 증거서류 미비로 기각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발생한 고소 고발 사건은 모두 월곡 개인에 대 한 사기사건이거나 월곡의 등극설(怪極說)에 대한 고발이었다.
이처럼 교인들의 고발사건이 빈번한 것은 대개 그들이 처음 입교 할 때에 허위와 사기술에 넘어갔다고 하는 불평의 발로였으며, 간부급에서는 자신들의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비해 층분한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불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동학 · 증산사상 바탕으로 이상세계 구현 노력
월곡의 사상적 기반은 동학과 증산사상이다. 이 두 사상은 모두 현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불만을 수렵, 새로운 이상세계를 구 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라 잃은 민족의 희망을 등에 업고 어느 정도 신비감을 바탕으로 신출귀몰한 이적(異蹟)을 행함으로써 광대한 포교사업을 착실하게 진행하던 월곡은 어느 징도 교단의 기반을 갖추고, 시간이 경과함 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여론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층분한 역량을 비축했다.
동시에 신도들의 배교 행위와 고소 · 고발사건이 이어지고, 종단이 침체되자 월곡은 종단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종단을 공개할 때부터 예견된 여러 모순이 터져 나오고, 일제의 회유와 강압이 이어지면서 처음 창교(劍敎)할 때의 기개와 고천제 통해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만천하에 보였던 그 저력을 다시 한번 내보이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혹독한 탄압, 국내 지도자들과의 마찰, 급팽창한 교단 내의 내홍 등으로 당초 의도와는 달리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된다
* 제4장 '한.중.일' 천자(天子)를 꿈꾸다는 다음편부터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