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렬의 시국





차천자의 꿈 (7편), 박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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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한 . 중 . 일' 천자(天子)를 꿈꾸다

 

1. 월곡의 야망과 ‘천자등극설’ / 151
2. ‘왕자(王者)의 예’로 치른 모친 장례식 / 164

3. ‘초호화 궁궐’ 대성전 신축 / 168
4. 보천교 추진사업 - 계몽·기업 ·문화·출판/ 176

 

1. 월곡의 야망과 '천자 등극설'

 

월곡의 이력과 행적, 그리고 교단의 확대에 따라 일본 경찰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공작이 진행됨에 따라 1921년 교단이 공개된다. 동시에 태을교라는 세속의 명칭에서 벗어나 보천교라는 공식적인 종교명이 사용되면서 공개적인 종교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공개적인 종교 활동이라는 장점을 가져온 한편, 일본 경찰에게‘노출된’보천교를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통제 할 수 있는 조건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교단 공개에 따라 교단 활동이 왕성하게 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위축된 것이다. 물론 이는 당초 교단 공개문제로 보천교 간부들 과 토의할 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으며, 월곡은 이를 타개할 새로운 대책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조선 민중에게 메시아로 다가온 천자등극설(天子怪極說)’이다.


천자등극설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갑오농민혁명의 실패, 의병활동의 패배, 그리고 3 · 1운동의 실패 암울한 시대상황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은 은근히 각종 비결(秘訣)과 전설 속에 진해오는 이른바 풍운조화(風雲造化)를 부리는 도인(道人), 진인(眞人)의 출현과 그러한 조화를 체득(體得)하여 영광스러운 새 왕조를 창업할 인물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인 · 진인 · 영웅의 출현을 갈구하던 시대에 천자등극설은 당시 민중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층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운수(運敦)가 풍운조화 신통묘술을 임의로 하는 신인(神人)증산과 그러한 교통(敎統)을 이어받아 둔갑장신(造甲藏身) 한다는 월곡의 보천교, 도참적(圖域的) 해석, 그리고 온갖 풍설이 엮어져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새로운 돌파구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 것이다. 증산도문의 교통(敎統)을 전수 받았다고 자임한 월곡은 보천교의 창교를 증산으로부터 교통을 전수 받은 것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시켰다.


‘후천선계(後天仙界) 조화정부(造化政府)’의 개벽(開闢)을 최종 목표로 하는 증산의 핵심 사상이자 현실적 행위인 ‘천지공사(天地公事)'는 결국 조화정부는 곧 조선을 종주국으로 하는 새 질서 구축이라고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政)’과 ‘교(敎)’양면에서 으뜸이 되는 신정부(新政府)라는 뜻으로 조화정부를 파악하면, 1) 보천교운동의 최종 목표는 교(敎)의 정강(政綱)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봉건적 신왕조 개창’이라는 새로운 정부 수립에 있다. 이런 이해의 연장선상에서 독립운동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천자 등극설’의 이론적  배경


당연히 후천개벽 조화정부를 목표로 하는 최종 목표에서 첫 문제는 누가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가 될 것인가에 집중된다.


증산이 신정부를 수립하는 천지공사를 행할 때 월곡의 집을 ‘포정소’라고 한 것은 증산이 월곡을 ‘장차 개벽되는 새 정부에서 포정(布政)할 제위(帝位)에 등극할 인물’로 보았다는 증기로 일반적인 교인들의 신조(信條)가 되었다.

월곡은 극구 부인하였지만 그의 참모들은 역리학적(易理學的) 이론과 비결(秘決)에 나온 참언(讖言)을 총동원해 문제의 주인공을 월곡으로 지목했다.


특히 교단에서는 증산이 말한 선후천(先後天)시대의 교역설(交易說)에 입각하여 ‘우주 진행의 24방위에  자(子) · 오(午)를  선후천(先後天) 교역의 분기점으로 할 때, 현재는 오운(午運)이 지난 후천기(後天期)에 접어들어, 월곡이 증산에게서 도통을 받은 1909년은 후천운(後天運)이 개벽되는 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내세워  월곡이 후천세계(後天世界) 신정부의 주인공이 될 운수를 받았다고 이해하였다.


월곡의 등극설은 포교상 가장 큰 요목(要目)이 되었고, 특히 월곡의 제위 등극은 『정감록』 비결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선전이 더욱 큰 효과를 얻게 되었다.

한 예로 당시 경남지방의 포교를 담당하여 단시일 안에 수만 인을 확보한 간부는 포교 요령으로 신도들을 설득할 때 천자등극과 연결지어 모집하였다. 선전 이론에서 무식자보다 유식자의 설득이 더 용이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 간부는 당시 경상도 지방에 문자를 아는 사람이면 대부분 상머리에 비결 관련 책자나 문건을 두고 있었는데, 포교할 때 후천의 운수가 증산의 교운과 월곡의 등극에 있다는 것이 비결에 예언 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하면 십중팔구는 입교(入敎)를 수락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정감록』, 『토정비결』, 『이석우비결』 등 많은 비결서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그 진위와 출처는 불명확했지만 여론 형성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본이  많은『정감록  비결』 3) 가운데 ‘광축(光丑)이 수변괴(雖變怪)나 증산이 통구하(通九夏)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광축’은 광무(光武)황제 신축년(辛丑: 1901년)을 뜻한다. 신축년은 강증산이 성도(成道)한 해이고, 이 때 강증산의 교(敎)가 구하(九夏: 천하)에 통위(通達)한다는 것을 예언한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 증산이 1901년 그의 나이 31세 때 전주 모악산(母岳山) 상원암(上院庵)에서 득도(得道)하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 말을 믿는 사람은 많았다.


정감록 비결에 ‘팔난유수운(八難流手運)에  명태을(鳴太乙)’이라는 구절은 태을주를 외우는 수련을 주로 하는 증산을 따라야만 절박한 삼재팔난(三災八雄)의 말세(未世) 운수를 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
였다.

이  비결은  또‘모악산(母岳山) 하(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니 천관산하(天冠山下)에  금인(琴人)이  봉새(奉璽)’라는 구절은 모악산 아래 금산사의 미륵불의 화신인 강증산이 창교함으로써 천관산(天冠山: 정읍 대흥리 앞에 있는 입암산) 머리에 금인(琴人: 월곡)이 옥새(玉璽)를 받들어 제위에 등극한다는 풍수지리적 해석으로 설득력을 얻었다.

왜냐하면 증산 자신이 금산사 미륵불로서 인간 세상에 화신하였다가 다시 미륵불로 돌아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결에 대한 해석은 포교상의 선전 자료이기 이전에 월곡 자신 스스로 이 비결에 따른 운세를 확신했었고 따르는 자들은 이 를 포교에 적절하게 활용했다. 4)
실례로 월곡이 2차 고천제 장소를 함양으로 확정한 것은, 전래의 비결에 ‘진인자 함양 상림원출(眞人自  咸陽 上林院出)’ 즉 ‘진인이 함양 상림원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에 따른 장소 선택이었다. 5)

월곡이 경북 영천군 신령면 옥선리에서 출생한 여처자(余處子) 데려다 제2부인으로 취하려 한 것도 비결과 관련이 깊다. 이는여 씨가 어려서부터 성질이 이상하여 말을 잘 하지 않고 37세까지 출가를 거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도인으로 여겨 장차 ‘후비(后妃) 감’이라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월곡이 교인 송수목(宋守穆)으로  하여금 그녀에게 청혼, 황석산 고천제 다음날 혼례를 올리려다 여씨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


월곡이 여씨를 취하려고 한 이유는 비결에 ‘인미위후(人未爲后)'라는 구절이 있는데  인미(人未)는 합자(合字)하면 ‘여(余)'자가 되므로 처자(余處子)를 가리킨다 하여 그를 후비(后妃)로 취하려 한 것이다. 

이 후비 취처(要妻)에 대한 계획은 강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음양을 갖추고 후비도수(后妃度數)를 본다고 하여 고판례를 취한 것을 본보기로 한 것이며, 자신을 제위에 등극할 사람으로 여긴 것으로 해석된다.

 

1)  이강오, ‘보천교', 『전북대논문집』,  제8집, 1966,  23쪽 참조
2)  위의 책, 23쪽 참조. 월곡의 후손들이나 교인들의 말에 따르면 월곡은 일본 관헌에게  진술할  때 “나는   교중천자(敎中天子)일  뿐"이라고  단호히  말했다고 한다. (안후상, 위의 논문, 39쪽 재인용)
3)  비서(秘書)의 일종인 『정감록 비결』은 조선조 초기 정감과 이심의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러종류의 이본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 본 역대의 변천 등을 기록하고 있는 일종의 예언서로 정씨가 왕이 된다는 예언으로 정여립 사건 등, 역성혁명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었고 조선조 민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비결들의 출처와 진위가 불확실하다.
4)  이강오, 보천교, 23- 24쪽

5)  三國志  에 오(吳)나라의 손권(孫權)이 육손에게 병권(兵權)을 위임하는 의례장소가 바로 황석산(黃 石山)임을 착안, 월곡은 증산의  모든 권능을 위임받는 고천제의 장소를 함양에 있는 황석산에서 상징적으로 행한 것으로 보인다. 증산이 어느날 제자들에게 소원을 묻는 자리에서 월곡에게 병권 맡기겠다고  한 적이 있는데 증산이 했다는  ”곤이외(?以外)는 장군이 제지(制止)하라”는 말도 삼국지에서 손권이 바로 병권을 위임한 의례 석상에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
6)  여처자파의 주장에 따르면 월곡이 고천제를 행한 후 곧 여처자와 결혼할 생각으로 여처자를 황석산 밑에 머물게 하였는데, 고천제를 마친 다음 여처자와 결혼식을 하려고 예복을 갖추고 여처자의 처소로  갔지만 여처자의 불응으로 물러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에 일본 경찰이 여처자의 처소에 찾아와 월곡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여처자가 월곡을 물리친 덕분에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처자는 앞 일을 아는 여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강오,  앞의 글, 2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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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국, 일본의 천자등극>

차경석이 1924년(갑자년) 4월8일 한.중.일 천자로 등극한다는 소위 갑자등극설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

갑자등극설에 대해 공소하고 있다는 내용 등 당시 신문보도는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4.1.12)

 

 

이 밖에도 앞서 설명한대로 월곡이 발부하는 중앙인장(中央印章)에 ‘무기(戊乙) ? 일월(日月)의 가운데  토(土)’를 새겨 넣은 것이나,  그가 입는 복장의 색깔올 황색(黃色)으로 하는 것 등도 모두 천자 등극이라 는 포부에서 제위를 상징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7)

 

7) 이강오, 같은 글, 25쪽 


월곡, ‘대시국’ 황제로  등극하다

 


한편 월곡은 자신의 등극설을 믿는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 용하여 자신의 카리스마 확립을 통해 위상을 높였다.


24 방주를 조직하는 자리에서 하나의 봉서(封書)를 간부들에게 주면서 월곡은 ”이것은 신서(神書)로서  내가 받은 것이니 이 다음 중대한 행사가 있을 때 개봉하여 보라”고 하였고 그 후 60방주 조직때에  이를  개봉하여 보니 그 안에는 ‘천하지하천상지상(天下地下天上地上)’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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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 선풍>

태을교, 즉 보천교도에 대한 검거선풍은 비단 안동지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간부들은 이 문구를‘ 천하지하(天下地下)'는 천간지지(天干地支) 윗자의 합성으로 계해(癸亥)를  뜻하며, ‘천상지상(天上地上)’은 천간지지(天干地支) 윗자의 합성으로 갑자(甲子)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 계해 (癸亥)와 갑자(甲子)의 양년, 즉 1923년과 24년 사이에 월곡이 등극하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던 것이다.


이  때 교단의 간부였던 채규일은 즉석에서 월곡에게 ‘폐하(陛下)라고 불러 내용상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맺었고, 이로 말미암아 월곡의 이른바 ‘갑자등극설(甲子怪極說)’이 교단 내외에 사실처럼 인식되고 세간에서는 "월곡이 동양 3국의 천자로 오르게 된다”는 유언(流言)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유포된 첫번째 갑자등극설(甲子怪極說 1924년)은 교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황석산(黃石山: 皇石山으로도 불림) 고천제 때(1921년 9월)는 ‘국호왈시(國號曰寺)’라는 문구를 제문에  사용함으로써 등극설은 사실화되었고, 방주들에게 수여하는 교첩(敎牒)이 일반인들에게는 왕이 수령방백에게 내리는 직첩(職牒)으로 받아들여져 천자등극설은 업청난 세를 얻으며 확장해 갔다.

이렇게 해서 1919년에서 192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보천교에 입교한 자가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하였다. 8)


천자등극은 민중의 ‘심령위안’ 역할

 

이  갑자등극(甲子怪極)의 희망은 그 해 이상호의 ‘보천교 혁신운동이 제기되고 이것이 교단 내부의 일대혼란으로 이어지면서 약화되기 시작했고, 고대하던 시국(時國)의 개국(開國)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 9) 이라는 친목단체의 창립으로 변질되었다.

급기야 제왕(帝王)이 되어야 할 월곡은 조선총독부가 은밀히 민심 혼란을 위해 ‘월곡은 정무총감 시모오까 다다하루(下岡忠治)의 명령에 복종하는 친일세력’이라고 유포하면서 일반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8)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 1922년경 보고서에 따르면 백만교도로 교세가 확장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9)  시국대동단의 시국(時局)도 월곡이 국호로 선포했던 시국(時國)의 차음(借音)으로 풀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갑자등극설은 갑오농민혁명, 끊임없는 의병들의 저항, 그리고 3·1 독립운동 실패 후 조선 민중이 다시 한번 가져 본 나라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즉 월곡의 천자등극설은 절망과 도탄에 빠진 식민지 백성들에게 한가닥 위로가 되는 ‘심령  위안자’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집요한 일제의 고등 회유술책에 휘말려 친일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새로운 왕국건설이라는 소문이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녀 그 힘이 배가된 것이며, 3 · 1운동 이후 새로운 형태의 민족운동을 모색하고 있던 계층과 운동 실패로 낙담에 빠져 있던 하층 민중에게 복음(福音)으로 받아들여진 데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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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교첩(敎謀)이 직첩(職謀)으로 이해된 것은 억압된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 욕구와 현실로부터의 탈출감을 교묘하게 자극시켜 교단 활성화에 이용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갑자등극설의 영향력이 약화되기 시작하던 1922년부터 보천교 본소가 있는 정읍 대흥리에는 이른바 차천자 궁궐이라는 성전(聖殿)  '오천금궐(吳天金闕)’이 세워지고 방주임직(方主任職)을 가진 자들의 주택인 방주공실(方主公室) 50여 동을 건립하는 공사로 인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각지로부터 이주한 교도들이 살 집을 수천 가구 세우게 되고, 이들로 인해 작은 도시가 형성될 정도로 교단의 홍성한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대흥리가 앞으로 들어설 새 왕조의 왕도(王都)라는 풍문 때문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었던 것이다. 십일전공사(十一殷工事)로 불린 이 공사는 일찍이 증산이 제시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1925년 1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일제의 갖은 박해와 종단 간부들의 배교 행위, 그리고 교단 내부의 문제 등으로 중단되었다가 1928년 1월부터 ‘사정방(四正方) 사무소’를 두고 일을 분담하면서 활기를 띠고 다시 시작되었다.


갑자등극설의 약정시한인 1924년에는 교인 한 사람 당 수저 한 개씩을 모아 무려 1 만8천근이나 되는 대종(大鐘)을 주조하였고, 당시로선 보기 드문 대규모 건축공사가 시작되었으니, 세간에서는 ‘월곡이 천자(天子)가 되어 대궐을 신축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완공된 십일전(十一殿)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넓이만도 두 배가 크고 웅장하고 호화스러웠으며, 건축양식은 중국 천자궁( 天子宮)을 본떠 황금색 기와를 사용, 호화의 극치를 더했다. 특히 건축 물에 사용된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가 사용할 정도였다. 10)

한반도에서 독립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십일전 건축은 차천자의 천자 등극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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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 축조, 십일전 건설 등 이러한 일련의 천자로서의 상징조작과 함께 또 다시 기사등극설(己巳登極說 1929년)이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비결에 ‘진사(辰巳)에 성인출(聖人出)’이라는 구질에 부합하여 새롭게 드러난 기사등극설은 십일진 신축공사가 끝나고, 1929년 3월 15일에 준공식과 아울러 신축된 십일성전(十一聖殿)에 삼광영(三光影: 신앙대상으로 모시는 日光影, 星光影, 月光影, 三靈位)의 봉안식을 거행한다는 통지가 ‘차경석이 기사년(己巳年)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신축 된 궁전에서 천자등극식을 갖는다’는 소문으로 변하여 꼬리를 물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11)

이러한 소문은 일본 경찰에게 민심을 자극하여 소동을 일으킨다는 판단으로 이어졌고, 이에 경찰은 봉안식의 무기 연기를 명령하였다. 이후에도 일제는 온갖 이유를 붙여 심일전의 성령봉안식(聖靈奉安式)을 끝내 허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보천교의 성전 봉안식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갔고, 등극설의 와해는 교인 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월곡의 카리스마가 서서히 붕괴되는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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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등극설은 침체에 빠진 보천교운동을 활성화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등극실패는 역설적으로 월곡을 중심으로 한 보천교 세 력을 급속하게 위축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10)  이 십일진은 1936 년 월곡이  세상을  뜨자 곧바로  일제에  의해 불과 수천원에  경매에  부쳐져  모두  뜯겨졌으며, 십일전 일부는 불교도들이 뜯어다가 서울의 ‘태고사', 오늘의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보화문은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는데 당시 옮겨짓는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게 되었다고 진한다.
11)  이강오, 위의  책,  27쪽 참조 

 

교묘한  유화책… 월곡 ‘친일파’로 오도돼

 

독립운동 집단으로 인식돼 온 월곡과 보천교 교단 간부들은 1926년까지 수배 상황에 처해 많은 교인들이 체포, 구금 또는 고문을 받았으며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교단조직이 워낙 강고해 섣불리 보천교운동을 중지시킬 수 없다는게 당시 총독부의 입장이었다. 앞서 서술한 대로 사이토()총독은 남도 순회 당시, 보천교 본소에 찾아와 교인들과 면담하는 등의 유화책을 쓰기도 했다. 보천교에서는 이를 포교에 활용하려 했고, 월곡은 일제와 타협을 거쳐 조선 내 일정한 영향력 확보를 시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보천교가 ‘일본을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려 한다’는 소문은 이때 나돌았는데, 일제도 조선지배에 보천교를 적절히 이용하려 하였다. 이처럼 일제와 보천교 교주 월곡은 동상이몽속에서 서로 영향력 행사를 위해 ‘전략적 타협’을 시도한 셈이다.

증산의 해원상생(解寃相生)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대동건설론(大同建設論)은 이런 시기에 등장했다. 이 대동건설론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주장과 맞물려 미묘한 정치적 쟁점이 돼버렸다.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園)의 활동이 그 시발점이다.


이때부터 친일(親日)인지 항일(抗日)인지 모를 보천교 운동의 방향에 대해 지식인들은 ‘세계관 없는 종교’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러한 운동은 교단의 우파적(右派的) 입장에 선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됐고, 지도부에서는 일제의 혹심한 탄압과 분열책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묵인했으리라는 짐작 또한 가능하다. 결과는 총독부가 당초 원하던 대로 돼버린 것이다.

총독부는 교단와 민중들을 이간시켜 조직의 힘이 쇠락해지기 기다려 교단을 해체시킨다는 방침이 그것이었고, 이같은 사실은 월곡이 죽은 뒤, 교단이 처참히 해체된 데서 입증되었다. 


2. '왕자(왕자)의 예'로 치른 모친 장례식

 

1921년 11월 7일, 월곡의 노모가 별세하자 인근에 있던 신도 문정삼은 이성영을 임실군 상월리 이기양(李起陽)의 집에 기거하고 있던 월곡에게 급히 보내 부고(訃告)를 전달하였다.

문정삼은 이성영에게 "차교주에게 누구로 하여금 대상(代喪)케 할 것인가”를 물어보고, "누가  좋으냐고  물으면 자신을 천거하라”는 내용의 전갈과 함께 장례비로 책정한 1만원을 결재해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고를 받은 월곡은 그를 수행하던 교단 간부들에게 “내가 객지에서 모친상올 당하여 분상(奔喪 급히 돌아감)도 못하는데 그대들이 호상(護喪)한다면서 만원으로 빈약하게 치상(治喪)하려 하느냐"고 말하며 장례비를 보다 많이 책정하려 하였다. 이에 이성영이 나서서 “사대부 상사(喪事)에 1만원의 장례비는 오히려 과분하다”고 설득하여 장례비 책정에 대한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문정삼의 부탁대로 이성영이 대상문제를 거론하자 월곡은 “그대의 형(이상호)이 서울서 예문에 밝은 사람을 데리고 수일 안에 본소에 당도하기로 하였으니 서로 의논하여 만일 예문에 대상을 허락한다면 그대가 대상을 행하라" 12)고 당부하였다.

이성영은 "소생은 본소 내정 출입이 없어서 대상을 집행하기가 불편하고 문정삼은 자래로 안팎일을 총괄하여 왔으니 문정삼으로 하여금 대상을 행하게 함이 편하겠다”고 문정삼의 주장을  전하였다. 이에 월곡은 "문정삼이 가(可)하나 피신 중이므로 집행할 수 없을지 모르니, 가능하다민 문정삼으로 집상(執喪)하게 하고 불가능하다면 그대가 집상하라”며  의견을 정리하였다.

 

12) 이때는 이상호가 보천교 혁신운동을 일으키기 3년 전이다 


이렇게 장례에 관한 대체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월곡은 이성영이 떠날 때 그를 정문 앞에 서게 하고 그 앞에 청수를 놓고 재배(再拜)행한  뒤, 이성영에게 “나의 정신을 그대에게 붙여 보내노니 장의(葬儀) 범절(凡節)을 조심하여 집행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이성영이 월곡과 결정한 일을 문정삼에게 보고하자 문은 예문판단을 기다려 자신이 집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11월 9일 이상호가 채규일, 채규철, 유종상과 함께 와서 이런 경과를 듣고 ‘예문에 대상은 허락하지도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이어 이런 대상은 문정삼의 야심이라 불가하다고 반박하고, 문정삼에게 불가함을 통고해 버리고 마침내 장지인 월곡의 선산 밑을 향해 운상(運喪)해 나아갔다. 그러나 운상해 가는 도중 일제의 무장 경관이 방해공작을 벌여 장의(葬儀)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상여를 다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장의가 중지돼 시체를 가빈(家嬪)으로 봉안(奉安)하고 사설묘지 허가를 기다려야 했다. 한편 장의를 연기한 뒤 문정삼은 월곡에게 채규일과 이상호가 자신을 질투하여 대상을 반대했다고 말하고, 더욱이 채규일은 1919년 8월에 발표한 경고문을 마음대로 수정하여 공포하였던 사실도 고해 바쳤다.

이런 와중에 월곡은 이상호가 제보한 ‘형사대의 12월 상월리 급습’을 피해 고덕리로 거처를 옮겼고, 1922 년 정월에는 왕방리(王方里) 김성옥(金成玉)의 집에 머물면서 부근 성수산 속에 기도장막을 짓고 기도를 했다.


그러나 교도를 가장하여 한규숙(韓圭淑)과 노좌대(盧左大)를 따라 함양경찰서 밀정 권석두에게 정탐되어 다시 형사대에 의해 포위되는 신세가 되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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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두는 함양 경찰서에서 5백원을 받고 월곡을 잡아주기로 약속한 밀정으로, 조선인 순사를 대동하고 인근 주재소의 지원을 받아 기도막사 주변의 바위틈에서 사흘을 지키다 허탕을 치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때 월곡은 백설이 온 산을 뒤덮은 데다가 기도막사 네 귀퉁이에서 찬바람이 불고 너무 허진하자 백은중(白般中)을 보내 상윌리 근처 도덕동 산 속에 기도막사를 짓고 막 옮겨간 다음 날이었다.

 

김성옥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옮겨간 거처를 일러주는 바람에 월곡은 49일 기도 중에 습격을 받았으나 야밤에 무사히 벗어나 정읍으로 돌아왔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해가 바뀐 1922년 6월, 일제로부터 사설묘지 허가가 난 후, 7월 20일 정읍군 정읍면 삼산리 고직동 왕모래등(王母來嶝)에서 모친 장례식을 거행했는데 당시 모인 신도 숫자만 10만여  명에 달했으며 월곡은 모친의 장례를‘왕자(王者)의  예’로 행하였다. 14)

워낙 대규모로 치러진 장례식이라 그 동안 저축하였던 교금 상당액을 탕진하였다. 이러한 과도한 장례로 교금을 낭비한 일에 관하 여 방주들 사이에 불만과 불평이 크게 일어났고, 월곡은 이 불평을 선동한 책임을 채규일에게 물어 부과(付過)를 명하였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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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증산교사 』 , 95쪽 참조. 월곡은 그를 체포하려는 형사대의  습격을 피하여 1922년 1월에는 임실군 왕방리로 피했고 다시 도덕동(道德洞) 성수산(聖壽山)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하다가 간신히 정읍으로  돌아와 대흥리 부근에 숨어 있으면서 모친의 장례준비를 진행하였다.

14) 『증산교사』, 95쪽 참조.
15)  같은  책, 95쪽 참조 

 

 

8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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