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후상의 보천교 연구소





무오년 제주법정사항쟁연구 (1편), 199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안후상

문서관리자 0 455

戊午年  濟州  法井寺  항일  항쟁  연구

 

안 후 상

 

I.    서론
II.   사건을 보는 기존 시각의 문제점
Ill.  사건의 진행 과정
IV.  사건의 주도자들

V.  사건의 배경?
VI.  사건의 성격
Vll.  맺으며

 

 

I.    서론


  1919년 기미년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5 개월 전인 戊午年 10월에 남제주도 좌변(지금의 중문)에 위치한 法井寺에서 항일 무장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경찰에 체포된 관련자만 66명,수형자 31 명의 총 선고 형량은 87 년 6개월,벌금형 (30원 씩)을 받은 사람이 15 명, 옥사자가5 명이나 되는 결코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단일 항일 투쟁으로서는 17명이 투옥된 만당 사건을 능가하며, 1919년 12월에 상해 임시 정부의 威北연통제 발각으로 54 명이 체포된 사건과 비슷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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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군다나 3.1 운동 당시 주모자로서 일본 경찰의 사법 처리를 받은 사람이 48명이었는데 비해, 무오년 법정사 사건은 관련자 46명이 징역형(3 1 명)과 벌금형 (15 명)으로 처벌된 것을 감안한다면,단일 사건으로는 3.1 운동에 버금간다는 것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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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친일불교론]의 저자 임혜봉(경기도 이천 지족암 주지)이 본고 작성을 위해 ‘정리해 준 원고’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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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사건의 파급을 우려, 봉기 주도 세력의 하나로 보이는 보천교2)를 종교 유사 단체로 비하해 탄압하였던 바, 그 봉기의 성격이나 규모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본고는 지금까지의 사건 관련 기록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당시의 검경찰의 자료와 재판 기록, 당시의 신문 · 잡지 기사 등을 종합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특히 무오년 제주도 법정사 사건의 주도 세력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사건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점에서 이 사건의 주요 관련자들의 종교적 성향을 면밀히 파악하고자한다. 이는 사건 발생 要因을 밝히는 단서이기도 하다.


  본고에서 채택한 참고 자료로는 앞에서 언급된 자료 외에 당시 본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큰 피해 세력으로 지금껏 언급되어 온 보천교측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사건의 성격 규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건의 사회 · 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제주 현지의 ‘지방사’ 자료를 참고했으며, 제주의 종교 상황을 비교적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강오의 『한국신흥종교총람』을 역시 참고 및 인용 자료로 채택하였다. 참고로 본고에서는 당 사건의 명칭을 ‘법정사 사건’으로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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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당시 姜甑山의 敎旨를 중섬으로 사람들을 조직해 낸 이가 바로 車京石이고, 조직의 근간은 24方主制였다. 이 조직에 동참하였거나 찬동하여 神行하는 이들을 세간에서는 ‘흠치교’, ‘太Z敎’, ‘仙道敎’라 불렀다 普天敎라는 이름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종교 단체로 등록되면서 불리워지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위의 여러 명칭을 보천교로 통일, 언급하고자 한다.  안후상, [일제하 보천교운동 - 교주 차경석을 중심으로] (상) ( [南民] 4, 서해문집,1992) ; 안후상, [일제하 보천교운동-교주 차경석을 중심으로] (하) [南民] 5,서해문집, 199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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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사건을 보는 기존 시각의 문제점


1. 제주도내의 시각


1) 종합 정리


  1913 년에 경상북도 사람 金運日이 普天敎포교를 위해 濟州道 中文面  法井寺에 根據를 두고 布敎에 힘을 쏟으니, 敎勢가 크게 확대되었다. 김연일은 보천교 首領  朴明洙 (異名  周錫)와 함께 1 9 1 8 년 9월 盂蘭益會 때 교인 33 인을 집합시켜 ‘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한 후 관리들은 물론 倭商人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虐待하고 있다.  이제 머잖?아 佛務皇帝가 출현하여 國權을 회복할 것이니, 우리는 첫째로 제주도에 거주하는 倭奴 官官사들을 죽이고, 倭商人들을 섬 밖으로 축출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선동,음모를 꾀하였다. 특히 김연일은 스스로 佛務皇帝임을 자임하며 都大將에 朴明洙를 임명하여 대오를 편성케 하니,好近里및 인근 부락민 400 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먼저 西歸浦의 日人들을 공격하려 했으나 정보를 미리 입수한 경찰의 강화된 경비로 인해 방향을 바꿔 中文里의 경찰 駐在所를 습격해 불사르고, 倭警과 日本 商人 3 명을 납치하였다.  이에 일제는 木浦에 주둔시켜 놓은 경찰 병력을 제주도에 상륙시킴으로, 일단의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들과 敎徒들의 충돌 결과 교도들은 오합지졸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때, 기독교 尹明植목사와 尹容赫 전도사가 宣敎次 法還里로 가던 도중, 河原里에서 쫓겨 도망가던 교도들에게 붙잡혀 무차별 구타당하기도 했다.  朴明洙 이하 12명의 주동자가 체포되었고, 김연일도 도망가다 붙잡혔다.  체포된 김연일은 治安維特法 위반으로 징역 4년(실제는 10년이다)을 언도받았고, 朴明훈이하 33 명도 3 년에서 6년형을 받았다. 특히, 朴明洙는 수감 도중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는 등 옥사자가 5 명이나 되었다.

도내 시각은 대체로 이 사건을 항일 운동에 근접한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체가 ‘邪敎인 보천교’라는 데에 그 평가가 매우 비판적이거나, 평가 자체가 유보되는 딜레마가 었다.


2) 근거 문헌
① 서귀포시 관광과(편집), [西歸浦市誌],  서귀포시,1988년, pp.275-277.
② 제주도 공보담당관실(편집), [濟州道誌] (上),  제주도,1982, pp.390-391.
③ 邊昇奎,  [제주도약사], 도서출판 제주문화, 1992, pp. 201-202.
④ 姜龍三? 李京洙, [대하실록 제주백년], 泰光文化社, 1984, pp.211-2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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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천교 측 시각


1) 종합 정리


戊午年 9월(거사일은 정확히 양력 10월 5 일이었고,9월은 음력으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주의 金廷日이라는 術土가 佛務皇帝라 자칭하고, 島民수백 명을 거느리고 경찰관 駐在所를 습격하여 巡使 두어명을 쳐죽였다. 이에, 木浦에 주둔한 경찰 大部隊가 제주도에 들어가 이들을 토벌함에 島民들은 흩어지고金廷日은 도망해 버렸다. 경찰은이 사건을 太乙敎徒의 소행이라며 엄밀히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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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에 文仁宅이 조사를 피해 敎金10 여 만 원을 棉花包袋 안에 넣어 몰래 가지고 나오다가 木浦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 검거되고 말았다. 이에 文仁宅 외 方主(당시 보천교는 ‘ 24方主制’로 급속히 조직확장을 꾀하고 있었다)인 朴鍾河를 검거, 고문한 끝에 太乙敎의 24方主조직이 탄로나게 되었다.

  결국, 太Z敎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高判禮와 車輪七 (敎主인 車京石의 實弟) 등 교단의 지도자급 인사와 方主 18 명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체포된 이들은 반정부 음모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뒤이어 교주격인 車京石에 대한 검거령이 내려지는 등 일명 ‘太Z敎徒에 대한 검거 선풍’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검거돼 수감된 자는 文仁宅, 朴鍾河외 高判禮, 車輪七, 申其燮, 蔡奎喆, 金文振, 崔善默, 宋永大, 李元有, 李基浩, 孫吉彦, 宋範奎, 李極蘇, 朴聖培,朴善一,  曺學O 등이다.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車輪七과 南道執里(재무책임자) 蔡奎喆등이 刑毒으로 고생하는 등 체포된 모든 이들에게도 惡刑 이 가해졌고, 이 가운데 金文振은 형독으로 사망하기까지 했다.

  이듬해 己未年 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大驚失色한 경찰은 이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그 해 5 월 5 일 木浦檢훌局에서 모두 不起所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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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거 문헌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 普天敎中央總正院, 1935 , p. 12.
李正立, [甑山敎史],  증산교본부, 1977, pp. 60-6 1.
李康五, [普天敎], 『全北大學敎論文集dl(8 집), 全北大文理大學, 1966, p. 22.


3. 양측 시각의 문제점


  당시 일본 경찰은 法井寺 사건이 더 이상 파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사건 관련자들에게 엄중한 형벌을 가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봉기 주도 세력인 일명 太Z敎(이하 普天敎)를 或世誌民하는 類似宗敎集團이라고 매도해 버렸다. 『濟州道誌』나 『西歸浦市誌』에는 바로 위와 같은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普天敎沿革史』와 『甑山敎史』에도 역시 보천교도 김연일을 중심으로 한 교도들이 일으킨 봉기이며, 이로 인해 전북 井邑의 일명 보천교 간부 및 교주 격인 차경석이 체포되거나 수배당하는 사건으로 서술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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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양측 시각은 모두 단순한 記述에 불과하디. 봉기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봉기 주도자들의 성분과 평가는 안 돼 있거나 일부 과소평가되는 등 왜곡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제주도지]나 [서귀포시지] 에는 봉기 주도 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보천교를 사교 집단으로, 법정사 사건을 폭동이나 반란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건 관련자료의 빈곤으로 口傳에 의지해 서술되었거나 일제 검경에 의해 왜곡된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정도다. 이는  [보천교연혁사] 나  [증산교사]도 마찬가지다. 특히 [보천교연혁사]나  [증산교사]에는 당시 법정사 사건을 단순히 언급만 해놓은 채, 교단의 피해만을 부각시켜 놓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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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사건의 진행 과정


1. 모 의


  제주도내 ‘地方史’를 근거로 법정사 사건의 모의 과정을 아래와 같이 구성할 수 있다.  1913 년부터 제주도 中文面소재 法井寺에 金運日이 들어와 포교를 시작해,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들의 주요 포교 수단은 ‘甲子年 甲子月 甲子日에 佛務國이 건설되며, 이때 교인들은 모두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에, 경찰은 이를 普天敎運動의 일환으로 보고, 김연일이 거처하는 法井寺를 갑시하기 시작했다.

 

  김연일은 자신의 일급 참모격인 朴周錫과 함께 교도들을 상대로 ‘왜노가 우리나라를 병탄하고,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이제 멀지 않아 佛務皇帝가 출현, 우리라의 국권 회복올 도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를 대비하여 日本 管束들을 죽이고 日本 商人들을 섬 밖으로 몰아내야 한다.’며 反日思想을 고취하였다. 이때가 1918 년 9월 18일이다.10월 3 일 교도 대표 33 人이 모여 의논한 끝에 부근의 3 개面 13?개里의 각 里長에게 위와 같은 내용의 檄文을 돌리고, 好近里 등 인근 부락민을 강제로 동원하다시피 해 약 4 백명을 끌어모았다.  습격 태상
은 西歸浦소재 濟州道 支廳과 경찰 주재소였고, 일인 상인들이 사는 거리도 포함되었다.3) 

2. 거 사 

  10월 5 일 서귀포 中文里일대의 길목에는 낫과 팽이 그리고 엽총으로 무장한 농민들로 줄을 이으니, 그 수가 무려 4 백여 병이나 되었다.
박주석의 지휘 아래 거사가 진행되었다 김연일은 가답자들이 점차 늘어남에, ‘佛務皇帝인 나에게는 佛力이 있다. 이제 왜놈이나 開化人을 몰아내고 佛力에 의하여 지상천국을 만들고, 오늘의 교도에게는 영화로운 자리를 누리게 하리라’고 기세를 돋우웠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경비를 강화했다. 이에 봉기대는 대오를 반대로 돌려 수 개의 전신주를 쓰러뜨리고 전선을 절단하였다
이어 中文里 주재소를 습격,방화하니 봉기대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들은  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과 일본인 상인 3 명을 납치 구타하였다.4) 

3. 진압과 검거 

일제는 이를 통고받고 목포의 진압 경찰 부대를 제주도에 상륙시켰다. 제주도에 상륙한 부대는 도민들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구타 ?색출하니,의분으로 일어셨지만 훈련되지 않은 봉기대는 패주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박주석 이하 12 병의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佛務
皇帝라 자칭하던 김연일은 天帝淵서쪽으로 달아나다 체포되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일본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기독교 목사와 전도사를 붙잡아 구타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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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서귀포시 관광과 [서귀포시지] (서귀포시 1988, pp. 275-277) 앞의 책의 관련 내용은 최근에 발견된 일제 겸경의 문건 내용과 매우 가깝다
* 4) 위의 책 pp. 276-277‘ ’강용삼 ? 이경수 [대하실록 제주 백주년] (태광문화사,1984, pp. 211-221) ;李英浩 普天敎 沿革史 (上)(보천교중앙총정원, 1935, p. 12),李正立 [甑山敎史](甑山敎本部, 1977, p. 60)
* 5) 위의 책 참고. 당시 보천교는 변화해 가는 세태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갓과 도포 사용을 고집했으며, 기독교나 西學그리고 양인을 배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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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은 김연일 이하 주모자급틀을 취조하면서 교도로부터 거둬들인 성금이나 시주의 내막을 캐물었다. 별도로 육지에서는 보천교 간부들을 대거 검거해,고문과 구타를 자행하였다.6)


IV. 사건의 주도자들


  요근래 무오년 법정사 사건을 언급하는데 있어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봉기 주도자들의 종교적 성향이다. 봉기 주도자들의 종교적 성향은 당시에 작성된 문헌(겸경의 자료와 재판 기록, 당시 신문 · 잡지기사 또는 보천교 측의 기록물 등을 말한다.)에 의해서만 확인할 수가
있다.
  참고로, ‘暴徒史編輯資料 高等警察要史’의 기록에 의하면 주모자 31명(재판 기록에는 총 34 명) 가운데 김연일과 정구룡, 강민수가 승려로,박명수만이 보천교 수령으로 돼 있다. 따라서 위 자료만을 가지고 본다면 법정사 사건은 승려들이 중심이 돼 일으킨 ‘불교계의 항일 운동’으
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재판 기록이나 겸경 자료와 대다수의 신문· 잡지 등에는 이 사건이 ‘보천교도의 폭동’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思想月報’에는 불교도가 가담했다는 언급이 있다.7) 위의 여러 자료와 現傳에 의거한 당시 사건 주도자들의 종교적 성향과 주도 내지 가담 정
도는 아래와 같다.

 

* 6) 서귀포시 관광과, 앞의 책, p. 276
* 7) 검경 기록으로는 <제주도 소요 사건>, ["暴徒史編輯資料高等警察要史(日帝醫察極秘本 影印版] pp. 265-266  [思想月報] (제2 권 제 5 호), 고등검사국 사상부,1932(8.15), p. 6-14 및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 [刑事事件簿] (제29호),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1918.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受刑人名簿]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1918.  등이었다.


1. 불교도 

 

  金運日(1871-1940)은 사건의 핵심 인물로 기록에 의하면 승려다 경북 영일군 동해면 출신으로, 당시 法井寺 주지였다. 김연일은 보천교 수령 박병수와 도모해 사건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만세 운동 정도?

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는 징역 10년 형을 받았으나,뒤에 5년 감형으로 1923년 6월 6일에 석방되었다. 鄭龜龍(異名 九龍)은 당시 30으로 역시 김연일과 같은 영일 출신이며, 징역 3년을 받았다. 姜敏洙는 당시 나이 39세로, 역시 경북 영일 출신이며, 징역13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적어도 동향 출신으로 불교도였던 듯 싶다. 그러나 이들 외, 가담자들에 대해 승려라고 표기된 그 어떤 자료도 없다.  단지, 당시 사건 관련자의 후손들 몇몇은 관련된 先代들이 승려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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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천교도


위 자료 ‘폭도사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에 의하면 보천교인으로는 박주석 한 명 뿐이다.  그러나 사건 발생 원인에 대해  ‘원인은, 仙道敎에 대한 경찰의 取調가 엄중하므로 김연일은 미리 친교가 있는 선도교 수령 박주석과 공모하였다·’라는 내용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것은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보천교도들이 경찰의 탄압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당시 보천교는 전국적인 조직 (24方主制)을 통해 ‘국권회복’을 외쳐왔다.8) 경찰의 탄압으로 교도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있었고,이에 김연일과 보천교 수령 박주석이 보천교도들을 선동, 사건을 도모했을 가능성이 짙다.

 朴周錫은 일명 朴明洙 또는 命珠라고도 한다. 당시 나이 56세로 본적지는 제주도 구우면 금악리이지만 출생지는 전남 진도군 동면이다. 당시 보천교 간부로 징역 7년형을 받았으나,  부역 중 옥사했다. 봉기의 선봉장으로, 제일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3. 기타


위의 4명 외에는 종콘적 소속이나 성향이 명확히 표시돼 있지 않다 다만, 몇몇은 현존한 후손에 의해 ‘승려’ 또는 ‘불교도,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후손의 증언에 의해 불교도로 분류된 자들은 위의 3 인 말고도 方東華, 長林虎, 金用忠, 金明敦, 金商彦, 姜昌奎, 崔泰祐, 韓允玉, 金三萬 등이다. 보천교도로 분류된 이는 현전을 근거로 위의 박주석을 포함해 趙桂成, 金武錫, 姜奉煥등 4 언이지만,이들의 후손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9) 그러나 이것으로 당시 주동 인물들의 종교적인 성향을 판단하고 규정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바가 있다. 또한 당시 제주내 종교의 실상을 잘 파악하지 못한 면도 있다.  당시 제주내에서 만큼은 불교와 보천교가 명확히 구분된 시대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본고 후반부에서 다루기로 하자. 구속 · 수감된 이들 외에도 現傳에 의거해 보천교도로 알려진 강상백이라는 인물은, 배후에서 본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그의 비문에 기록돼 있다. 법정사 사건과 관련해 검거되지 않은 인물이나 배후 인물들이 상당수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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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체포자의 형량과 옥사자


이들의 죄명은 소요보안법 위반이다. 체포자 수는 옥사자를 포함해 도합 66명, 수형자 총 31 명의 형 량은 87 년 6개월, 벌금형 (30원 씩)을 받은 자는 15 명이다. 옥사자는 朴周錫(1921 년 목포 감옥에서 옥사), 姜春根, 姜壽五, 金奉和(1 919년 대전 감옥에서 옥사) 5 명이다. 체포자 66 명중, 불기소 방면은 18 명이다. 형량의 多順으로는 김연일 10년, 강창규 8년, 박주석 7 년, 방동화 · 김상언 각각 6 년 등이다. 후에 김연일은 5 년감형으로 1923년에 출옥했고, 강창규, 방동화 등 주도자급들도 형량의 반 정도를 감형받아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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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안후상, 앞의 글 참고.?

?* 9) 제주보훈지청의 이대수는 사건 관련자의 후손 상당수가 보천교 본소가 있던 전북 井邑에 그 本籍을 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아래 통계는 각주 기의 자료와 현지 주민과 사건 관계자의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봉기 주도 인물 중 ‘검찰 송치 인원’은 총 66명, 이 중 주소별로는 서귀포 서홍 l 명, 서귀 월평 11 명, 서귀 도순 17 병, 서귀 하원 19병, 서귀 대포 2 명, 서귀 영남 4명,서귀 중문 1 명, 서귀 상예 1 명, 서귀 법환 l 명, 서귀 회수 2 명, 한림 금악 2 명,안덕 사계 2 명, 제주 오등 1 명, 제주 오라 1 명 등이다.  

?본적지 별로는 서귀 서홍 2 명, 서귀 도순 10 명, 서귀 하원 18 명, 서귀 월평 10 병, 서귀 영남 5 병, 서귀중문 1 명, 서귀 상예 l 병, 서귀 대포 l 명, 서귀 법환 1 명, 서귀 회수 2 명, 한림 금악 2 명, 안덕 덕수 3 명, 안덕 사계 2 명, 제주 오등 1 명, 제주 오라 1 명, 경북 영일 5 명, 함북 l 병 등이다. 다음은 검찰 송치 인원 및 형량으로 총 66병 가운데 정역형 10년이 l 명, 8년이 1 명, 7년이 l 명, 6년이 2 명, 4년이 4 명, 3 년이 4 명,2 년이 4 명, 1 년 6월이 2 명, 1 년이 11 명, 6월이 1 명, 도합 31 년, 그리고 옥사가 2명, 벌금형 (30 원)이 15 명, 불기소가 18 병이다 연령 별로는 60-65 세가 4 명, 55-59세가 4 명, 50-54세가 5 명, 45-49세가 7 명, 40-44 세가 11 명, 35-39 세가 8 병, 30-34세가 11 명, 25-29 세가 5 명, 20-24 세가 9 명, 19 세 이하가 1 명, 미상이 1 명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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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사건의 배경" 부터는 ?무오년 법정사항쟁연구 (2편)에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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