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후상의 보천교 연구소





무오년 제주법정사항쟁연구 (2편), 1996 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 안후상

문서관리자 0 411

戊午年  濟州  法井寺  항일  항쟁  연구

 

안 후 상

 

I.    서론
II.   사건을 보는 기존 시각의 문제점
Ill.  사건의 진행 과정
IV.  사건의 주도자들
V.  사건의 배경?
VI.  사건의 성격
Vll.  맺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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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사건의 배경


1. 사회 ? 경제적 배경


  일제 침략의 前期라 할 수 있는 1905 년부터 1915 년까지 10년 간은 일인 官吏가 郵의 次席으로 實權을 掌握, 조선인 군수를 조종하였다.  이는 1915 년에 日人  今村○이 島司로 부임하기 이전의 일이다. 이 시기를 식민지 行政의 준비 기간 혹은 移行기간이라 볼 수 있다.  이때 植民行政의 특징은, 지방의 모든 官暑최고 책임자는 조선인으로 배치하였으나, 주요 부서와 요직은 日人들이 장악하였다는 점이다.10)  침략 中期라 할 수 있는 1915 년부터 1935 년까지 20년 동안은 식민지 행정이 확립되고, 이어 일제의 민족 동화 정책이 강행된 시기였다.


  1915 년 5 월, 제주에는 日人 今村○ (4 년 재임)이 濟州島司로 부임하였다. 이때부터 각 관서의 책임자와 요직에는 日人이 대부분 배치되었고,철저한 日本化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前期에는 의병 투쟁과 주민들의 불복종 운동이 이어진 반면에 中期부터는 종교 활동을 통한 저항과 3.1 운동, 학생 운동, 사회주의 · 공산주의 · 무정부주의자들의 투쟁과, 自主通船운동, 해녀의 집단 항거 등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이처럼 항일의 분위기가 다른 어느지역보다도 활발해지자, 일본은 제주내 경찰력을 강화시켰다.


  1906년 도내에 光州警務顧問 소속으로 濟州分派所를 두었고, 1907 년木浦響察署 濟州分暑를 두었다가 1908년 제주경찰서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제주 內에는 3 개소에 巡使駐在所를 두어 警部이하 30 명 정도의 경찰관을 島內에 상주시켜 왔다. 11)  1916년 이후에는 외도 ? 애월 ? 한림· 고산 · 서귀 · 중문 등 주재소가 16개소나 되었다.  당시 1 面 1주재소 원칙은 전국적으로 1919 년 이후에나 실시12) 되었는데, 제주도에서는 무려 3년이나 빠른 셈이다.13) 그리고 일본인 순사 부장 밑에 일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 3, 4 인을 배치하여, 치안 뿐 아니라 보건까지도 담당14)하면서 도민에 대한 회유와 동시에 탄합을 강화해 나갔다. 1915 년 초대 濟州島司  今村O 때부터는 島司가 경찰서장을 겸임하는 등 島司에게 절대적 권력이 주어졌고, 15) 따라서 도내 식민 착취 구조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재판소는 1912년에는 光州地方法院濟州支廳、이 개청되면서였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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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급 교육 거관으로는 1907 년부터 1 년 사이로 제주공립보통학교, 정의공립보통학교, 대정공립보통학교 등 3개교가 설립되었다. 중등학교로는 1910년 濟州公立簡易農業學校가 개교되었다. 학교장이나 교사로는 日人 武官출신들을 기용, 도민의 저항 의식을 차단하였다. 日本式교육을 거부하는 다수의 도민들은 종전대로 書堂교육에 의존했으나,
19 1 8년부터는 서당 교육까지 규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17) 이는 도민들을 제도권 교육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식민 교육을 한층 강화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시도된 듯 하다. 따라서 西世와 倭世를 거부하는 토착 신앙과 보천교 운동에 편승한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일제는 농업 생산물의 증산, 수탈을 위해 種苗 개량과 근대 농법 도입 등 생산 기술 향상에 노력하였다. 이는 착취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였다. 1915 년 5 월, 三郡制가 單一郡으로 통합되면서 郡制에서島司制를 실시, 島司가 경찰서장을 겸했을 뿐 아니라, 제주도 내 農會長· 海女組合長· 山林會支部長등도 겸하였다. 이로써 도내 경제권은사실상 島司에게 집중되었다. 1 8) 1916년에는 서귀포에 濟州島  西歸浦支廳이 개설, 운영 (1917년)되었고 서귀포지청에는 별도의 지청장을 두었다. 19) 1914년에는 토지를 세부적으로 측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유토지를 신고하도록 했고 이때 신고에 누락된 토지는 강제로 일인들에게 불하해 버렸다.
이로 보아 식민 착취 구조20)가 남제주에도 극에 달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산업구조의 개편으로 인해 도민의 소외와 불이익이 한층 깊어지게 되었다. 당시 (1925) 일본인의 직업별 분포21)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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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직업

상업.교통업 

어업 

공무.자유업 

공업 

농림.목축업 

 기타업

계 

 호수

110 

100 

90 

16 

4

34 

 354

 인구

323

204

 348

 68

 154

1,105 

                                    <1925년 조선 총독부의 '제주도 생활 상태 조사' 자료 참고> 

?이처럼 조선인들 대다수는 l 차 산업 또는 원시 산업에 종사하는 한편, 상업 · 교통업 등 3 차 산업은 제반 일인들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알수가 있다. 특히 남제주의 경우, 어류 채취 등 원시 어업 조차도 일인에 의해 침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26년 말, 도내에 일본인들이 거
주한 곳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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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표에서 보면 1925 년 경에 남제주에 日人들이 유난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日人들의 경제력 독점에 대한 현지인의 불만이 오래 전부터 누적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민의 주산업이 在來 漁業이었으나 이것조차 일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일인들의 延觸巾着綱 般으로 무차별 남획에? 따른 도민들의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일인들의 어업 기지도 추자도의 大西里와 城山浦, 西歸浦등 남제주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이들 지역에 日人만이 다닐 수 있는 小學校? 의료 시설 · 우체국 ? 경찰관 주재소 등을 두었다. 다시 말해 제주도는 조선 최고의 정책적 식민지로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일인들은 이외 은행업, 석유 판매업, 전기업 등을 독점하였으며, 수산물 가공업, 임산물 가공업 등은 특혜를 받아 번창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현지인의 위화감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일인들은 당연히 교통업에도 참여하였다. 1912년부터 13 년까지 도민을 동원해 해안 부락을 연결하는 일주 도로를 개설했다 울창한 한라산의 산림 자원을 수송하기 위한 도로였다. 1914년부터 17 년까지 3 개 년계획으로 노폭 6m의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변 토지는 소유주로부터 무상 기부 형식으로 거둬들였다 이 역시 현지인들의 원성을 표출시켰다. 23) 

  제주도 해안가,특히 남제주는 해녀들의 경제 활동 비중이 상당하였다.

1914년 제주도의 수산물 어획고 225,270원 가운데 해녀들의 어획고가 135,470원이었을 정도로 해녀들의 경제 활동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해녀들의 출가(일종의 출어인 듯 함)로 인해 해녀 수급이 필요해지자 부산을 근거지로 하는 일본인 고리업자의 하수인 격인 客主들이 島內에 다니면서 해녀들을 모집했다. 객주와 계약없이 독자적으로 출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해녀늘의 출가 기간은 195 일, 체재 기간은 175 일 작업 일수는 87 일로 총 수입은 1 일 1 원 꼴이었다.  부산 왕복 배삵 7 원 20전, 식비 31 원 80전, 잡비 6원 50 전, 입어료 8원, 어업세 50 전 등 지출 경비가 무려 54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총 수입 87 원에서 54 원을 공제하면 해녀틀이출가 기간 동안 벌어들이는 순익은 33 원, 흉어일 때 객주에게 부채를지기까지도 했다· 이에 해녀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바로 1920년 4월 16일에 조직된 ‘해녀 조합’이 그것이다 24)
이외, 現傳에 의하면 법정사 인근의 도민은 火田民이 다수로, 이들 역시 식민 정책의 강화(효과적인 산림 수탈을 위해 화전 경작을 금했던 것 같다)에 따른 불만이 고조돼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일제는 한라산의 원목을 대거 본토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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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구조적인 착취는 주로 제주 남부 지방에 집중되었고, 따라서 무오년 법정사 사건의 한 遠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 당시(19 1 8 년) 경찰 총 병력 수는 5 천 4 백명, 1 那l 경찰서 원칙이며, 1 면 l 주제소원칙은 1919년 이후에 생겼다 강만길, 위의 책, pp. 26-27.
*14) 김봉옥제주통사., 도서출판 제주문화, 1987, p. 208
*15) 제주읍濟州둠勢~, 1936, p. 32 ;위의 책, p. 207
*16) 제주도, 앞의 책, p. 31
*17) 제주도 문화공보담당관실제주도지;(상), 1982, p. 286
*1 8) 김봉옥, 앞의 책, p. 207
*19) 제주도, 앞의 책, p. 29
*20) 김봉옥, 앞의 책 참고

*21) 김봉옥, 앞의 책, p. 209
*22) 제주도 문화예술담당관실, 앞의 책, p. 385?

*23) 김봉옥, 앞의 책 참고.
*24) 서귀포시 관광과, [서귀포시지] 서귀포시, 1987, pp. 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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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교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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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도내의 종교 활동


근대 제주에서 佛敎가 중홍의 발판은 1924년 李廳明(1 866-1951) 에 의해 수십 병이 모여 제주공립보통학교 내에 ‘濟州佛敎協會’를 組織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인 1901 년에 未化里安逢盧觀여사에 의해 포교당인 觀音촉가 창건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24) 安道月포교사는 安逢盧觀여사를 도와 포교당을 창건하였다. 25)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23년에 불교 관련 모임이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기록들이 있다.  이는 사건 주도자들의 종교적 성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사건의 성격 규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 내용을 소상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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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여러 종교 중 불교가 아직 발달치 못한 바, 黃神淵· 李大志· 이종영 · 백용석 · 윤성종 씨 외 7 인의 발기로 지난9 일 오후 4시부터 역내 東本願촉 내에서 발기회를 개최하여 제반 협의가 있은 후 폐회하였는데, 불원간 창립 총회를 개최 한다더라. 26) 

 

제주면 아라리 한라산 중턱에 觀音좋라 칭하는 절이 있을 뿐,근래 차차 포교 수단을 고쳐 제주역내와 제주변 삼양리 원당봉에 포교소를 설치하고,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나 세력이 미미부진하고 소수의 부녀자 신도만이 있을 뿐이다 27)

 

최초로 근대 불교를 도내에 퍼트린 사람은 李晦明이다. 이회명이 처음 제주도에 들어간 때가 1921 년 가을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해남 대홍사의 포교출장소(1925년) 또는 포교당(1928년)이 존재했고, 이는 大興寺와 기존의 관음사가 공동 관리하였던 것 같다. 또한 이때 敎派가 따로 없었고 禪敎兩宗이라 후에 칭했것 같다.28)

 

위 기록들에 의하면 제주에 근대 사찰이 들어간 해는 1924년 경이었고 그 勢도 미미했다고 적고 있다. 1923년 전후에야 일본의東本願寺가 제주 내에 설치된다. 오히려 불교보다는 천주교나 개신교가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1901년 천주교 신도는 약 1,000여명 정도였다. 1907년 평양신학교 1 회 졸업생인 李基豊이 제주도에 들어와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 교회를 설립하였고,1917 년에는 2명의 장로가 나왔다 1925 년 경에는 신도가 약200 여명 에 달했다. 29)

 

당시 제주도 내에는 기성 정통 종교보다는 혼합종교(Syncretism)의 특성을 지닌 신흥 종교가 활발하였다· 앞의 혼합 종교의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제주내에서 흔히 쓰는 ‘절’이라는 명칭은 불교 사찰 뿐만 아니라 찬물교계의 교당이나 수운교의 교당을 일컬었다 30) 이들 교단의 ??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자기 신앙 외에 여러개의 무속신이나 토속신 그리고 기성 종교까지도 포용 또는 도용하는 게 특정이다.

  둘째, 증산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에 姜一淳이 다녀 간 해는 1903년으로, 일찍부터 증산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던 것으로 파악된다.

 

2) 제주내 종교의 특징

 

제주에는 박기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1903년 초여름에 전북 함열에서 영광을 들렸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통영의 김세환을 만나고 있던 김형렬은 姜一淳의 명으로 제주도에 건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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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동아일보 (1926. 10. 28)

*28) [불교]  32호, 34호, 36호 참고

*29) 제주도 문화공보담당관실, 앞의 책 참고

*30) 이강오 [제주도의 신흥종교] ,한국의 신흥종교,대흥기획, 1992, pp. 1231-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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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께서 김기보의 집에 이르시니, 보리를 베어다가 마당에 가득 쌓아 놓았거늘, 상제께서 무슨 주문을 읽으시니 방목하는 말들이 ....31)

 

1903 년 초여름에 .... 상제께서 호연과 형렬을 데리고 바닷가로 나가시니다. 바다에서는 해녀들이 허리에 정귀 호미를 차고 ......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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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은 1903 년에 제주에 들려, 바닷불이 사라지게 하는 기행 이적을 도민들에게 보여준다. 도민들은 이를 보고 놀라 증산을 많이 따른 투하다 이것을 보더라도 증산을 교조로 하는 普天敎가 당시(1 91 8년 이후) 제주에서 교세를 크게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로 말미암아 제주에서 발생한 신흥 종교나 다른 곳에서 발생해서 제주로 이입된 신흥 종교들은 거의가 증산의 영향을 받아, ‘후천개벽운도설’을 믿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외에 기복과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등 한라산 山神과 바다의 海運이 강조되었다. 33)

  맨 처음 유입된 신흥종교 교단은 1916년에 기록되어 있는 증산교계의 보천교였다.34) 그러나 보천교의 유입은 훨씬 이전으로 앞서 인용했건 증산의 제주 방문 시기인 1903 년인 것 같다.

 

  조계종을 제외한 신흥 불교계의 대부분이 1960년대 이후에 이입되억던 것을 보더라도 당시에는 여러 종교가 혼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0년대 불교계 신흥 종교 단체 중, 대한불교 미륵종과 대한불교 용화종은 증산교계에서 분파, 사실상 증산을 신앙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35) 이처럼 신흥 종교와 佛敎가 혼합된 예는 부지기수였다.

  1 898년 음력 4월 11 일,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속칭 소섬(牛島)에서출생한 金奉南에 의해 1937 년 1 월 15 일에 창설된 소위 찬물교에서 수없이 많은 교파가 갈라져 나왔다 이 가운데 龍華寺는 속칭 ‘타불교,라하는데 이는 ‘봉남교계’다. 봉남교계에서는 흔히 ‘아미타불’을 주송한다. 이 용화사를 세운 사람은 尹有善이라는 여자로 김봉남의 고향에서

1 899년 출생하였다. 윤유선의 부친 尹明洙와 김봉남의 부친은 普天敎徒였다. 

 

*31)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펀), f증산도 도전< , 대원출판사, 1992, pp. 461-463

*32) 위 의 책, pp. 461,463

*33) 이강오, 앞의 책, pp. 1231-1232

*34) 위의 책, p. 1229

*35) 위의 책, p. 1230.

 

  따라서 어린 봉남 역시 普天敎에 익숙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도들은 대개 3 대 교단의 교도들이었으며, 이 교단 저 교단을 넘나 들었다. 윤유선이 1984년 사망하자 그녀의 아들 권명환은 교인들을 이끌고 대한불교 태고종에 가입해 버렸다 36)

  따라서 당시 법정사 사건의 주역의 후손들 일부는 현재 승려 신분이거나 불교도다. 이들의 대부분은 대한불교 태고종에 소속돼 있다. 이들에 의해 자신들의 조상은 ‘승려 내지 불교도였다’는 데에서 법정사 사건이 불교계가 주도한 항쟁이라는 주장이 최근 있어왔던 것이다.

 

  근대 제주는 기성 종교와 토속 신앙 그리고 육지에서 건너 옹 신흥종교들이 중중복합돼 있었다. 37) 특히 甑山敎系인 普天敎? 彌勒敎? 東華敎? 大世敎와 東學系인 水雲敎등이 활약했다는 당시(1 913 년) 기록38)으로 보아 육지에서 건너간 신홍 종교의 활약이 대단하였고, 도내의 토속 신앙 뿐 아니라 기성 종교의 교리 체계나 신앙 대상까지도 흡수, 습

합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법정사 사건 당시 도민들의 종교적 성향은 대체로 ‘소속 불명’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36) 위의 책, pp. 1238-1239

*37) 이강오, 앞의 책, p. 1238.

*38) [朝光] (1938.10) , p. 1 85.

 

VI. 사건의 성격

 

普天敎는 그 교리 중에 日本人을 배척하여 이상 국가를 건설한다고 포교한 점이 두드러져 ‘불온이적 단체’로 규정받았다. 이들이 항일 구호를 외치며 주민을 동원했고, 군중의 힘을 벌어 주재소를 직접 습격,日本경찰과 일인 상인들을 잡아다가 응정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엄연한 항일 투쟁이 아니냐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보천교라는 종교 간판은 어디까지나 표면에 내세운 방편일 뿐, 실은 신앙을 빙자하여주민들로부터 재물을 거둬들여 이를 독립운동에 기여할 목적으로, 일본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애국 비밀 결사체가 아니냐는 견해도 성립될 수 있다. 그렇다면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막대한 재물은 김연일이나 차경석이 사복을 채우지 않고 순수한 독립 운동 기금으로 이용하여, 국권 회복에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천교가 혹세무민의 사이비 종교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39)

  다음은 제주도 내 관지와 지역사지에 서술된 대목이다. 정확한 서술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봉기의 성격을 잘 피력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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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車京石은 金亨烈에 맞서 仙道敎라는 교파를 만들고 각지에 전해져서 信徒확장에만 종사했다. 大正7年, 국권 회복의 미병 아래 車京石및 경북 영일 출신 金運日퉁이 서로 모의해 同年9월 19 일, 舊孟蘭益會에 즈음하여 제주도 法井寺에서 교도 약 30명을 소집, ‘倭奴는 우리 조선을 倂合시켰을 뿐 아니라 倂合후에 官吏는 물론 상인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해 酷遇시켜, 실로 倭奴는 우리 조선 민족의 仇敵되어, 머지않아 佛務皇帝가 출현해 국권을 회복시키므로 교도들은 제일 먼저 제주도 內거주하는 官吏를 완전히 살해한 후 상인을 驅逐시켜야 한다.’며 설득, 10월 4 일 밤부터 다음날 5 일에 걸쳐 김연일은 그 配下를도내 각지에 보내 신도 33 명을 法正寺에 소집하고 스스로 佛務皇帝라 칭했다. 그리고 위와 같은 목적을 결행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그 방법을 협의해 대오를 정리한 후, 부근 각 面, 里長에게 ‘日本 官吏를 소멸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하므로서 다시 장정을 거느리고 참가하라. 따르기를 꺼리는 자는 군율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라는 의미의 격문을 배포하고, 6 일 밤부터 제주성 내로 향해 행동을 개시하였다. 도중에 전선을 절단하고 또 내지인의사 외 조선인 2명을 부상시키고, 다음날 7 일, 중문리에 도착하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방화, 전소시켰다. 이어 폭도 38 명을 검거할 수 있었고, 車京石, 金運日등 간부는 信徒들로부터 거둬들인 수만 원을 가지고 그 소재를 감추니, 지금 그것을 알 수가없다 (本書에 있어 客年(지난해 )11 月 27 日, 경무국의 ‘高驚第36610號 太乙敎徒 檢擧에 관한 件’이 첨부된 別冊의 한 내용이다 )40)

 

 

위 내용은 당시 검경찰의 기록으로, 지금까지 무오년 법정사 사건과관련해 기술된 제 내용은 위 기록의 범주와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사건의 시기와 가까운 때에 언급된 신문과 잡지의 기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9) 서귀포시관광과,앞의 책 pp. 276-277. 강용삼·이경수 편, 앞의 책, pp.220-221.

*40) 김정병 편명치백년사 총서- 조선독립운동 1967, p, 247.

 

 ?....그와 같이 많은 교도가 보이는 것은 정치 운동의 음모로 인정하고, 무오년 11월에 전남 제주에서 그 교도를 검거하기 시작하여,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ㅡ 그 교도중 참가한 사건이 있었고 .....41)

?차경석은 전기와 같이 교의 간부를 조직하고 교세 확장에 노력하던 중, 그때는 총독부에서 집회의 자유를 허락치 아니하던 때라 그와 같이 많은 교도가 모이는 현 정치 운동의 음모로 인정하고, 무오년 11월에 전라남도 제주에서 그 교도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목포에까지 검거의 손이 미치었으나 결국 모두 방면되었고, 작년에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그 교도중 참가한 사람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姜一享이가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은지 몇 해 후에 계룡산에 재림하겠다·’고 말하였다는 풍설있고, 또 차경석이가 천자가 된다는 풍설도 유행하여, 차례로 교도의 검거가 심하였던 터에 작년 봄에 전주에 모아 놓았던 돈11만원이 압수되는 동시에 당국에서는 크게 놀라 상해가정부로 보내려는 군자금으로 인정하고, 크게 검거되었고, 차경석은 작년 9월 24일에 함양군 황석산에서 그 교의 임원을 모으고 천지에 祭를 행한 후 드디어 종적을 감추었는데, 그후 검찰 당국에서

크게 수색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獨立堂의 단체로 관헌의 엄중, 종적 잃은 차경석’ 제하)42)

제주도는 원래가 미신 사교가 많은 곳으로 大正2년(1913년) 경부터 姜甑山을 敎祖로 한 보천교 · 미륵교 · 東華敎, 大世敎와 최제우를 교조로 한 東學系의 水雲敎등이 들어와서, 大표 8년에 金運日이란 자가 그들 사교도를 규합하여 가지고 자칭 불무ㅇㅇ(佛武ㅇㅇ)라 하는 제주도 대정면 산방산)에서 ㅇㅇ식(ㅇㅇ式)을 거행한 후, 약 3백 명의 민중을 선동하여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불을 질러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는 등 그들 사교도는 여전히 불온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음으로 ...... (‘검거의 직접 동기’ 제하)43)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관계 기관 또는 언론들은 무오년 법정사 사건을 정치 운동 또는 독립 운동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주체나 배후 집단을 보천교로, 보천교는 곧 사교 집단으로 분류해 버렸음을 위 자료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앞서 나온 각주 39) 의 시각과 같다.

 

*41) [동아일보] (l921.4.30)

*42) 위 의 신문(1922.2.24)

*43) [朝光] (1938.10) , p. 1 85.

 

 

 ?19 1 8  년 2 월 25 일, 정오 쯤 순사들이 와서 姜土成에게 부인(고판례)의 계신 곳을 묻는지라, 응칠(차경석의 아우)이 부인께 ‘반드시 화(福)가 있을 듯 하오니 잠깐 피하소서.’ ... 얼마 아니하여 순사들이 부인과 응칠을 체포해 가니, 대저 이때에 차경석의 간부

수십 명이 목포경찰서에 검거되어 모든 일을 부인에게 미루었으므로, 드디어 부인이 체포되었다.44)

 

대흥리 차경석의 교단에서는 불미스런 일이 날마다 일어나므로 관할 경찰서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던 중에, 교인 수십명이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어 모든 일을 태모님께 떠넘기매, 경찰에서 태모님을 체포하려고 조종골로 찾아오니라.정오 쯤 되어순사들이 와서 강사성에게 태모님 계신 곳을 묻는지라, 응칠이태모님께 달려와 걱정하며 말하기를 ‘반드시 화가 있을 듯 하오니 잠깐 피하시옵소서.’ 하니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 당

한 일을 피하면 되겠느냐.’ 하시며 즉시에 消滅陰害符에 解魔呪를 적어 불사르신 후에 ‘내가 이미 알았노라 그러나 이번에는내가 順하게 받아야 뒷일이 없을지니, 피하는 것이 불가하니라.’하시고 태연히 앉아계시더니, 얼마 안 되어 순사들이 들어와 태모님의 행방을 찾으므로 태모님께서 순사들을 불러오게 하시어 몇 마디 말씀을 나누신 후 목포 경찰서로 가시니다. 태모님께서 응칠과 함께 정읍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시고 이튿날 목포 경찰서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으셨으나 별다른 증거가 없으므로,응칠은 11 월 12 일에 석방되고, 태모님께서는 그 이듬해인 기미(己未1919)년 1 월 3 일에 석방되시니다. 45)


 

*44) 이정립, 앞의 책, pp. 240-24 1. 

?*45) 증산도 도전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pp. 931-932 

 

위 내용들은 분명 무오 법정사 사건과 연관이 있으며, 따라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피해를 크게 본 측은 보천교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근에는 다른 견해도 있다.

 

 ?

....이 사건에 대해 기록된 ‘경북고등경찰요사’와 지난해 8월에제주보훈지청이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광주지법 목포지청 검사국의 범죄인명부〉를 분석한 결과 보천교도들만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 불교계 스님들이 중심이 돼 보천교도틀을 일부 끌어들인 사건.... 46)

 

....이 사건이 당시 법정사라는 절을 본거지로 스님과 신도’ 지역 주민에 의해 봉기된 것인 만큼 ‘무오법정항일투쟁난’이라 바꿔 불러야 한다며 ...... 47)

 

....이 사건은 보천교에 의한 항일 봉기가 아니라 법정사 사찰을 본거지로 한 불교인들이 주동이 된 항일투쟁사건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48)

 

 

이러한 현지의 언론과 연구자들의 대대적인 발표로 [동아일보] (l994.1. 6), [불교신문](1994. 3. 2) 등지에 무오년 법정사 사건을 ‘보천교의 난’이 아니라 ‘불교도가 일으킨 항일 봉기’이며, 따라서 보천교도에 의해 주도됐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봉기의 주도자들을 사교인 보천교도로 매도한 데 대해 명백한 명예훼손으로 이의 회복을 벼르고 있다는 후손들의 각오까지도 보도하였다. 이러한 것은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보천교의 난이 아닌 이유'에서도 기인한 듯 하다. 

 

  첫째, 김연일이 스스로 '불무황제 라 칭했다는 데서 '불교도' 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보천교에서는 지도자를 皇帝나 天子로 곧잘 표기하였다.49) 오히려 불교도라면 ‘황제’라는 칭호를사용했을 리 만무하다.

 

  둘째, 당시 기록50)에 의거해 볼 때 주동자의 일부가 승려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승려’라고 표기된 인물은 겨우 김연일, 정구룡, 강민수등 세 명 뿐이다. 앞의 3 인은 불교도로 인정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당시 봉기에 참가했던 이의 후손들의 주관적 증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46) [한겨레신문] (1994.3. 1 )

*47) [한라불교] (제84호)

*48) 위 신문(1993. 12 . 2)

*49) [동아일보] 1921.4.30, 1922.2.21. 1922.2.24 참고

?

*50) '제주도 소요사건' 暴徒史編輯資料高等警察要史 (日帝警察極?本 影印版) pp.265-266면에 불교도 3인이 명시된 것 외는 재판기록등 여타 관변 기록에 관련자의 종교 성향이 명시돼 있지는 않다. 단지 [사상월보]에는 불교도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합병 후에도 191 8년 가을 불교도 김연일이라는 자가 불무황제라 핑하여 도내에 있는 왜노관리를 박멸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선도교도를 선동하였다. 도대장 이하 隊伍軍職을 임명하고, 좌우중면에 각 이동장에게 격문을 보내어 수백명의 폭도를 모집, 화승총, 죽창, 곤봉등으로 무장하고 전주 수십개를 쓰러뜨리고 전선을 절단하고 이어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여 공문서와 집기 그리고 가재도구 등을 파괴, 방화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종류의 반항 내지 배타적 폭동행위는 도민의 성격으로 유전 배양되고 있다. ....' [思想月報] (제2권 제5호), 고등검사국 사상부 1932(8.15), pp. 6-14)

*51) 안후상의 앞의 글 참고. ,[한국역사연구회 편한국사 강의] 한울아카데미,1990, p. 277.   

 

  설령 김연일과 일부 주도자가 불교도였다고 해서 사건 관련자 대부분이 불교도였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불교도가 일으킨 항일 봉기’로 표현함은 더더욱 타당치 못하다.

 

  일부 연구가는 당시 주민으로 생존자였던 양창옥 씨의 녹취 기록을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뚜렷한 사실이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따라서 무엇보다도 당시 또는 당시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기록물’을 위주로 당시 사건을 해석하고 판단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口傳이나 자료들 그리고 이미 市史나 道史에 실린 내용들을 한꺼번에 부정하려 함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불교도가 일으킨 난은 ‘항일 봉기’라하고, 보;천교도가 일으킨 난을 그저 ‘폭동’이라고 표기 또는 인식하는 식의 기존 관점은 일제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이다.

 

  당시 보천교는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로 일제에 의해 분류되었으나 (제주보훈지청의 이대수가 뽑은 자료에 의하면 보천교도의 독립운동 참가자(독립유공자공훈록 제 6권에 나타난 관련자)는 강일순, 차경석등 보천교도가 70명으로 나타났다.), 분명 민족 운동 내지 사회 운동이었음이 밝혀졌다 51)

 

  당시 보천교는 지금의 종교 개념은 아니었다- 敎名도 없었고, 단지 정치적 성향의 인물인 차경석이 동학 운동의 소멸을 틈타 전국적인 조직을 통해 정치 세력화에 성공하니, 국호를 ‘時’라 선포하는 등 복벽주의 성격의 ‘국권 회복 운동’과 ‘천자 등극 운동’을 공개적으로 펼친다. 이는 보천교가 당시 사회 운동체로 손색이 없음을 말해 주며, 제주내

특히 식민 모순이 첨예했던 남제주에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다. 특히이곳 도민들의 종교 성향은 토착 신앙이 강해 보천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다. 이러한 보천교 운동이 비밀리에 확산한 가운데, 민족의식이 강한 육지의 몇몇 승려들이 들어와 보천교 운동을 이용한 듯하다. 승려들의 개입으로 사전의 치밀한 계획과 전략 ? 전술이 구사되고 강령이 채택되는 등 규모나 체계상으로 보아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유일한 ‘항일 봉기’로 보인다.

 

VII. 맺으며

 

법정사 사건은 단순히 한 종교, 한 종파의 불이익을 타파하기 위해주도하였거나, 이를 위한 주의주장이 있었던 폭동이나 항거는 아니다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사건이 ‘보천교의 난 또는 폭동’으로 알려졌고’ 그렇게 불려져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일제의 교묘한종교 정책의 한 소산일 것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였다. 예컨대ι ‘과뢰 집단화’ 또는 ‘사회 규범으로부터의 일탈’ 등을 조작 ? 유도해, 내부 분열을 획책하고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를 차단한 다음 박멸한다는 것이다‘ 52)

 

  본 사건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앞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다. 즉, 겸경에 의해 이미 공개된 자료나 口傳에는 ‘미신 사교인 보천교도가 주도한 사건’으로 돼 있으나, 공개되지 않은 컴경의 문건에는 ‘불교도와 보천교도가 일으킨 사건’으로 돼 있는 것이다.

 

  1922년에서 1925 년 사이에 島內에서 ‘보천교 성토대회’가 수 차례열렸다 1939년을 전후해서 ‘보천교 계통의 사건’이 또 한 차례 발생하는데, 이;때에도 교도들이 대거 검거 · 구속되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그리고 ‘총포화약취체령시행규칙’ 등 위반과 ‘불경사기 및 강간치상죄’ 등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은 ‘사기 및 강간치상죄’였다 이는 당시 자료(재판 기록이나 신문 기사)로 파악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도민들은 보천교가 사회 규범으로부터 일탈한 저급한 종교 내지는 반인륜적인 사교 미신 집단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법정사 사건 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30년대 말까지 보천교를 불온한 단체로 지목해 탄압한 반면, 보천교의 일 단체인 時局大同團은 친일을 연상토록 적극 지원하는 등 정책의 이중성을 보였다. 이러한 것은 결과적으로 보천교 운동을 민족 감정과 이반한 운동으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도민의 보천교에 대한 매우 좋지 않은 선입견은 최근까지도 확인할 수가 있다. 따라서 사건 관련자의 후손들은 先代가 보천교도라고 하기보다는 불교도였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사건 관련자 일부는 세월이 흘러 불교로의 전향을 시도한 듯 하다. 또한 중중복합된 신앙 체계로 볼때 보천교 운동이 쇠하면서 자연스럽게 근대 불교를 받아들였을 가능성 또한 본고 앞부분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근대 제주는 토착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나 보천교가 중중복합되면서 정체불명의 신앙자가 다수 양산되었다. 법정사 사건 관련자들 역시 ‘정체 불명의 신앙자’들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최근에 일부에서 제기하고 있는 ‘불교도가 주도한 사건’은 분명히 아니다 첨예한 식민 모순에
직변했던 궁핍한 島民들이 식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국권 회복’을 외쳤으니, 그 주도 세력은 식민지 하의 島民들이었다. 이들은 모순에 찬 세상의 변화를 위해 육지보다 먼저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했으니, 이는 분명 독립 운동이다. 그러나 방법과 목
적에 있어서는 서구의 민족주의나 유교의 복벽주의 또는 불교의 그 어떤 사상의 영향보다는 동학과 보천교로 이어지는 ‘後天開關思想’ 53)영향을 크게 받았음이 분명하다.♣

 

*52) 尹以敏(서울대 종교학과)은 일제가 종교 단체의 내부 분열을 유도 · 유도, 박멸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했다. 동시에 순화 위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내세우는 신홍 종교 즉 일제에 의해 분류된 類似宗敎團體들을 회유, 순화하기란 매우 어려웠으며, 단속하여 제압하기에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들에 정책 유형 4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健{蟲集團化해서 내부 분열을 촉진시키고, 둘째, 이간과 내부 분란을 초래케 해 조직이나 역량을 와해 또는 소진시키고, 셋째, 반민족 행위를 유도해 민족 감정과 유리시켜 외부와의 연계 및 외부의 동정이나 지원을 차단하며 넷째,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면을 조작 또는 부각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거나, 외부의 비난을 윤도해 탄압한다는 것이다.

 

*53) 제주내 신홍 종교 사상의 일반적 특정은 민간 신앙 또는 토착 신앙을 바탕으로 한 '海運이 열리고 말세에 구세주가 나타난다는 選民擇地說'과 증산의 ‘ 後天開關 운도설’이다.(이강오, 앞의 책, p. 123 1.) 이는 이상적 세계를 대망하고 종말론과 新天地思想을 근간으로 하는 이른바 千年王國主義;(Millenarianism) (윤이흠,  [한국종교 연구] 2, 집문당, 1988, p. 173.) 또는 新天地待望 思想으로 팍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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