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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제2018년 6월 6일
발행번호 : 연대기 2-20180805호
발행처 : 월곡차경석기념사업회
일제의 |
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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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및 주요 사건 |
특징 |
시대와 사건 배경 |
출처 |
1871 |
음력 9월 19일 증산(1871~1909)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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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
1880년 7월 3일(고종 17년 음 6. 1) 월곡, 전라도 흥덕군(興德郡) 부안면 (扶安面) 호암리(壺岩里)에서 출생 1936년 윤 3월 10일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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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
부친 차치구(1851~1894)는 동학농민혁명 백산 2차 거병 시 동학군 장령 격(군단장급)으로 참여, 1894년 12월 29일 흥덕에서 관군에게 잡혀 그 앞산에서 분살형(焚殺刑) 당함. 월곡,
15세 나이에 부친 시신을 업고서 대흥리에 매장 |
보천교의 성립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의 본명은 윤홍(輪洪), 호가 월곡(月谷)이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정읍 근방의 농민군을 이끈 접주 차치구(車致九, 1851~1894)의 장남이다. 차경석은 동학농민전쟁의 재발(再發)이라 할 수 있는 ‘영학당(英學黨)의 봉기(峰起)’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진회(一進會) 전라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내는 등 한말 동학운동의 지도자였다. 일진회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고 내부 갈등이 점증되던 1905년 경 차경석은 일진회와 거리를 둔다. 그러던 중 1907년에 강증산(姜觀山)을 만난다. 강증산이 1909년 타계하자 그를 따랐던 이들이 흩어졌다. 이후 차경석의 이종누이이자 강증산의 부인으로 알려진 고판례(高判禮)가 기행이적을 일으키자 강증산을 따랐던 이들이 다시 돌아온다. 이때가 1914년경으로, 세간에서는 이들을 태을교(太乙敎) 또는 선도교(仙道敎)라 하였다. 차경석은 이들을 24방주제로 조직하고 비밀리에 예언과 기도를 통해서 국권회복을 도모한다. 1918년 제주도 법정사 항일항쟁 이후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포괄적인 조사가 오랜 기간 진행되었다. 포괄적인 조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最近に於ける朝蘇の治安狀況』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3.1독립만세운동 전후의 보천교 일제강점기 보천교 관련 연구자들의 보천교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두 가지다. 보천교가 민족운동 또는 민족종교 운동을 했다는 견해가 다수인 반면에 근대성과 민족성이 없는 보천교의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두 가지 견해에도 불구하고 1919년 전후한 시기의 보천교는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했다’는 데에는 연구자들의 이견이 없는 듯하다. 1919년 이전의 보천교 3.1독립만세운동 전후의 보천교는 항일(抗日)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차경석은 비밀 조직인 24방주제(1916)를 통해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집회를 갖곤 하였다. 관련자료에도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은 정치적 성향의 비밀결사체로 기록돼 있다. 예컨대 “대사상(大思想)과 신통묘술(神通妙術)로 신정부(新政府)를 건설한다” 또는 “조선의 독립을 음모하고 황제 되기를 도모한다” 등의 내용들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05쪽~416쪽 ) |
『대순전경』 3장 33절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65쪽, 91쪽, 111쪽, 126쪽, 251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266쪽 『보광』(1926, 창간호) 26쪽 보천교의 성립 ▶ 『最近に於ける朝蘇の治安狀況 - 昭和 8年.13年』 (朝鮮總督府警務局, 1933. 1938) 114쪽 3.1독립만세운동 전후의 보천교 1919년 이전의 보천교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 (普天敎中央協定院 ⦁ 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1장 후~2장 전 - (상)2장 전~3장 후 ▶ 『最近に於ける朝蘇の治安狀況 - 昭和 8年.13年』 (朝鮮總督府警務局, 1933.1938) 111쪽~132쪽 ▶ 동아일보 - 1921.4.26/ 仙道를 표방하는 비밀단체 대검거 - 1921.4.30/ 태을교 두목검거 - 1921.5.13/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태을교도 대검거 - 1921.5.14. / (회복단원 또 체포) - 1921.8.6. / (태을교인의 독립운동) - 1921.10.30. / (무과 출신으로 독립운동) - 1925.1.14. / .....(기도일에 난무) ▶ 조선일보 - 1921.2.19. / (독립운동하는 태을교 신자, 오는 21일에 2심판결) - 1921.4.12. / (선도교도 대검거, 경상남북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 닥치는 대로 체포) - 1921.4.26. / (훔치교의 일부인 허무맹랑한 선도교, 훔치교에서 분리한 선도교, 대정13년(1924) 3월 5일에는 교주가 왕이 된다고 유혹. 교도 100여명을 일망 타진) - 1921.5.13. / (국권 회복을 요망하는 태을교도의 검거. 이 교만 믿으면 만병회춘. 교주는 조선황제 된다고) - 1921.5.19. / (兼二浦 警察署에 검거된 태을교도의 자백, 교도가 55만 7천명만 되면 조선은 독립. 교주는 王, 13일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 1921.6.6. / (開眼法과 貫通法으로 ㅇㅇ 태을교도 검거, 오는 7월에는 옥황상제가 강림하여 괴질로써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교도로써 新政府를 조직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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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월곡, 정읍 고창 등에서 봉기한 영학계 사건에 연루 체포되었다가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됨 | |||||
1901 |
증산,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무극대도 득도 월곡, 부친 뜻 이어받아 동학운동에 종사, 일진회 가입해 전남북도 순회관으로 활동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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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12월 일진회가 벌이는 동학운동 가담했다가 일진회가 일제의 조선 침략 앞잡이로 친일을 하자 일진회 탈퇴, 손병희 추종 | |||||
1906~1907 통감부 시대 1906년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규칙>, <보안법> 제정됨, 당시 종교는 일반사회결사체의 하나로 취급되어 종교활동도 <보안법>에 의하여 관리됨 |
1908 |
월곡,
5월 17일 증산교 창시자 증산 만남 증산, 11월 28일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씨(高氏)를 수부(首婦)로, 대흥리 월곡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함 |
증산이 상량공사(上樑公事)를 할 때 월곡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오게 해 공사를 마치며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司)가 되리라' 함 | |||
1909 |
음력
6월 2일 증산 화천(化天) - 보천교 포교 원년(1916년에 정해짐) - 1909년 정월 3일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정립(1916년에 정해짐. 1909년 증산이 천지공사를 완료하던 정월 3월 교의 대통을 차경석에게 전수한 후 월곡, 일의(一意) 교화를 선포함 |
- 증산이 신정부를 수립하는 천지공사를 행할 때 월곡의
집을 '포정소'라고 한 것은 증산이 월곡을 '장차 개벽되는
새 정부에서 포정(布政)할 제위(帝位)에 등극할 인물'로 보았다는 증거로 봄 - 증산이 말한 선후천(先後天)시대의 교역설(交易說)에 입각하여 '우주 진행의 24방위에 자(子)∙오(午)를 선후천(先後天) 교역의 분기점으로 할 때, 현재는 오운(午運)이 지난 후천기(後天期)에 접어들어, 월곡이 증산에게서 도통을 받은 1909년은 후천운이 개벽되는 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내세워 월곡이 후천세계 신정부의 주인공이 될 운수를 받았다고 이해함 - 1909년 7월 그믐께 월곡과 김광찬(金光贊)이 김형렬(金亨烈)을 방문하고 장래 일을 의논하던 중 월곡이 "대성께서 당신이 곧 미륵불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화천하실 때에 금산사로 들어가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미륵전에 참배하여 당신을 대하듯이 정성을 들여 취할 길을 생각하면 반드시 당신의 감화를 받아 깨달음이 있으리라" 말하니 모두 옳게 여겨 치성물을 준비하여 금산사에 들어갔다. 이날 늙은 한 여승이 독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환영하며 "어젯밤에 금산사 여러 부처님과 오백나한(五百羅漢)과 호위신장(護衛神將)들이 일제히 밖에 나와서 어느 거룩한 행차를 맞아 들이는데 그 행차 뒤에 그대들이 따라 오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제 여기 나와서 기다리더니 그대들의 일을 보게 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오" 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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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한일합방 ~ 1919 총독부 무단통치 시대 1910년 경찰령 제3호 <집회취체> 발령 '당분간 정치에 관한 집회 혹은 옥외에서 많은 군중의 집합을 금지한다'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제령 제7호 <사찰령> 반포, 7월 <사찰시행규칙>을 만들어 총독부가 불교계 통제 관리함. 1915년 7월 <포교규칙>을 제정 공포하여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구분, 종교활동에 대한 인허가와 신고 내용 고지 |
1910 |
1910년 말부터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는 비밀결사적 조직운동, 즉 한국의 독립운동을 전개 | ||||
1911 |
- 증산 화천(化天) 2년 후인 1911년 9월부터 종도들이 유의경(柳宜卿)이
수련하던 방법으로 포교방법을 정하여 각처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교세가 크게 일어남 - 1911년 증산이 죽은 2년 뒤 증산의 수부 부인인 월곡의 이종누이 고판례가 이적을 보이자 증산도문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 그 뒤 3년 동안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와 서남해 대부분의 섬 일대에는 거의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이어지게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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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
최익현과 쓰시마 섬에 유배되었다가 살아 돌아온 임병찬(林炳瓚,1851~1916)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면서 이용구(李容珪)외 태을교도들을 규합하여 국권반환을 촉구하는 글을 일본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부에 보낸 혐의로 체포됨 (김철수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35쪽) | |||||
1914 |
- 세간에서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급속도로 세가 불어나자 이들을 태을교 또는 선도교로
부름. 특히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월곡이 주도권을 잡고 활동, 주목받기 시작함 - 5월 헌병대보조원 申成學, 張成元이 천원헌병대에 월곡을 고발(조선독립, 황제등극 사상), 월곡 구금된 지 9일만에 석방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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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
- 교도 김송환이 차경석을 전주헌병대에 고발('차경석이 오래지 않아 조선을 독립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된다고 칭하여 농촌의 우민을 유인하고 금전을 사기하고 음모를 도모한다'는 명목), 실증 없어 검거 않음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6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5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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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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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동지 이후 월곡이 실질적 교주가 되었으면서도 교주로서의 정식 취임절차가 없었기에 교주로서의 존칭 없이 주인장(主人丈)으로 불리움 - 역(易)의 원리에 근거하여 24방위에 대응하는 '24방주제(方主制)'를 조직하여 교체(敎體) 형성함 |
-
보천교 내 24방위의 임직을 두어 조직구성의 첫 틀 마련함 - 교중(敎中) 강령자(綱領者) 12인을 택해 수, 화, 금, 목, 동, 서, 남, 북, 춘, 하, 추, 동에 배치하고, 24방위의 방주를 임명하여 조직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포교 방식 택함 |
24방주가 조직되자 헌병대의 사찰과 탄압이 날로 심해짐. 월곡을 잡기 위해 전국에 걸쳐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강원도와 경상도 산간지대를 주유하면서 일본 관헌의 수색에서 벗어남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82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9쪽, 127쪽~1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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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 채규일(蔡奎壹), 김홍규(金烘奎), 문정삼(文正三) 등 24명을 가리어 팽창된 교단의 조직 강화
작업으로 역(易)의 원리에 근거해 24방위에 대응하는 '24방주제(方主制)'를 만듦. 이어 방주들로 하여금 천지에 고명 서약하게 하고,
24방으로 된 인장을 분급하여 교무를 분담케 함 - 4월 24일 '국권회복 표방' 사유로 월곡, 갑종 요시찰인물에 편입됨 - 6월 전남 무안군 신도 김경범 아들이 일본 헌병대에 ‘아비가 월곡을 신앙하여 많은 금전과 물품을 사기당했다’고 고소하니 천원(天原) 일본 헌병대 분견소(分遣所)에서 월곡을 체포하여 열흘 동안 구속 취조하다가 확실한 증거 없어 석방함 - 10월 교세 확장에 따라 일제 탄압이 가중되자 모친 회갑연 기화로 주요 간부들을 모아 외유 뜻을 전하고 정향 없이 집을 떠난 뒤 강원도 경상도 유력(遊歷)하며 은피생활(隱避生活)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포교활동 함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6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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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독립운동 | 1918.
10. 제주 법정사 항일 투쟁. 제주도 내 보천교 조직활동 왕성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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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사 교도 30명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 습격, 방화 전소 - 3.1운동 이전 일제에 항거한 단일 투쟁으로는 최대 규모 항일무장봉기 - 보천교의 박주석(朴周錫)이 주도 |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과 보천교 3.1독립만세운동 직전인 1918년 제주도 중문에서 도민(島民)과 보천교도들이 항일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때 교의 근간인 24방주제가 탄로 나면서 교인 수백 명이 구속되었다. 일부는 수배를 당하였으며, 구속된 이들 중에는 고문으로 죽은 자도 있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17쪽~421쪽)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은 논문 명칭,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은 책 이름임.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75~79쪽 明治百年史叢書 (1967)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증산교사』 60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7쪽, 129쪽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과 보천교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 (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상) 6쪽 후~7쪽 전 ▶ 金正明 編 『明治百年史叢書 - 朝鮮獨立運動 (第1券分冊, 民族主義運動篇)』(1967) 247쪽 ▶ 「濟州道騷擾事件」 (『暴徒史編輯資料高等警察要史, 日帝警察極秘本 影印版』) 265쪽 ~266쪽 ▶ 「濟州道治安狀況」 (『思想月報』第2券 第5號, 高等檢事局思想部,1932.8.15) 6쪽~14쪽 ▶ 光州地方法院木浦支廳檢事局, 刑事事件簿 第29號(1918), 光州地方法院濟州支廳, 受刑人名簿(1918) ▶ 동아일보 - 1921. 음4.30/ ...그와 같이 많은 교도가 보이는 것은 정치운동의 음모로 인정하고 무오년 11월에 전남 제주에서 그 교도를 검거하기 시작하여... - 1922.음2.24/ 獨立黨의 단체로 관헌의 엄중, 종적 잃은 차경석 ▶ 조선일보 - 1921.4.26/ 훔치교의 일부인 허무맹랑한 선도교, 훔치교에서 분리한 선도교, 대정13년(1924)... ▶ 『조광』(1938.10) 1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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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인들의 성금 10만원을 면화 포대 속에 감추어 나오던 교인 문인택(文仁宅), 강대거(姜大擧)가 목포항에서 돈을 꺼내다 경찰에 붙잡혀 조사 받는 중 고문에 못 이겨 보천교금(普天敎金)이란 사실을
토로하여 발각됨 - 교인 박종하(朴鐘河)를 체포하여 24방주의 조직 알아내 신기섭(申基燮)∙채규일(蔡奎壹) 등 19명 체포되고, 고판례와 월곡의 아우 윤칠도 체포 구금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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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방주제 탄로남 - 보천교인 검거 선풍이 전국적으로 확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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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판례는 강응칠(姜應七) 등, 교인 일부를 데리고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교당을 세우고 '태을교'라는 명칭으로 분교 - 월곡, 고판례가 떠난 뒤 교단 내 제 1인자가 됨 |
- 도문 내 같은 반열에 있던 자들과 그들 제자들의 반발과 모함이 본격적으로 시작됨. 월곡을 관에 고발하는 자가 속출함 | |||||
1919 |
- 4월 송대선(宋大善) 편에 보낸 편지에서 월곡은 ‘부천지대운(夫天地大運)은 비기인(非其人)이면 불명(不命)이요, 인간지대업(人問之大業)은 비기명(非其命)이면 불성(不成)이라. 인유기인(人有其人)하고 운유기운(運有其運)하며 기지소위(其之所爲) 역유기시(亦有其時)니...’ 등 주장함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 장문산, 2001, 295쪽) - 6월(음) 박희백 등 2인 ‘태을교인의독립운동’(경성 복심법원) - 6월 20일 교주의 동생 차윤칠 목포경찰서에서 형독으로 사망 - 피신지 강원도에서 60방주 제도로 개면하고 10월 함양군 대황산(大皇山)에서 60방주 제도 고천제 이후 1919년에서 1923년 사이 수백만 교인 몰려옴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6쪽) |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 - 3.1운동 이후 일제는 1919년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에 의하여 소위 '문화통치' 실시. 3.1운동 이후 국경을 넘어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하는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국내세력의 연계를 차단, 근본적으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근거지를 초토화하려 함 (김철수,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1쪽) - 사이토 총독은 <조선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해 각종 종교단체를 중앙집권화하여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여 어용화시키려 함 (김철수,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2쪽) - 문화통치의 핵심은 겉으로 유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실질적으로 민족운동전선을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통치방식이다. - 이러한 통치방식은 종교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됨 - 친일파를 양성하여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분열책을 일삼았다.(예: 민족종교진영 내 보수 대 혁신, 지방세력 대 중앙세력 등의 분열구조) 결과 일제의 교활한 문화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일제의 사주를 받는 친일외곽 단체를 만들어 민족종교세력을 약화시키고, 민족종교 내에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대동아의식을 퍼뜨려 친일종교로 만들어 민중들로부터 이반시키며, 사회규범의 일탈을 지목하여 사교화함으로써 사회적 낙인을 찍어 교단을 무력화시키는 등의 방법 통해 민족종교들을 말살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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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3.1운동에 종교세력이 크게 개입되었다고 보고, 우리나라 종교 실태를 파악하기 시작. 일본 내 메이지 정부는 법률상 새로운 종교의
자유를 조건부로 인정하면서도 일부는 공인하는 정책을 펼쳐 국가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공인종교’와 ‘비공인종교’로 분리하여 종교를
통제했다. 이러한 정책은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 보천교에 대해 외형적으로는 유화정책을 사용하면서 이면에서 교단 분열과 조직의 약체화를 꾀함 - 보천교를 식민지 종교통제정책의 본보기로 삼아 탄압함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2쪽~23쪽, 15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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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는 법령상 불교, 기독교, 신도 이외의 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했다. 아직도 세간에서는 '신흥종교' 또는 일제강점기 '유사종교'로 불리었던 종교에 대한 인식이 아주 부정적이다. 보천교가 그중 하나다. 그간 보천교에 대한 편향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학술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에게조차도 일반인들이 시각을 달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8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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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처인 강원도 울진군 서면에서 채규일과 김홍규를 불러 종전의 24방주제를 다시 확대하여 60방주제 창설, 보천교의 내부조직의
완성함 - 10월 경남 함양군 병곡면 덕기리(德基里) 대황산(大篁山)에서 '24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 '60방주제'를 정하고 60방주를 선임하는 고천제를 함 - 3.1운동 이후 보천교에서 민족주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남 3.1운동 이후 보천교가 급격히 성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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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인의 방주를 3회로 나누어 매회 2일씩의 간격을 두고 고명(임명, 해임 따위의 인사에 관한 명령을
적어 본인에게 주는 문서)하는데, 제1회에 교정, 교령의 12인이, 2회에 24포주,
3회에 24운주가 각각 참배케 하였다. - 오행(五行) 중 중앙에 해당하는 토의 지위는 월곡이 차지, 60방주 가운데 4인의 교정은 교단의 중추(中樞)가 되었다. - 월곡은 60방주에서 발급하는 교첩(敎牒) 등의 문서에도 토자(土字)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 '무기일월(戊己日月)'의 네 자가 새겨진 중앙인장(中央印章)을 사용하였다. - 토(土)는 오행의 중심이요, 일월(日月)은 24절의 기강(紀綱)이요, 무기(戊己)는 24방위의 중앙을 의미함과 동시에 '무기(戊己)에 입중궁(入中宮)'이라는 이론에 근거해 선후천(先後天)시대의 교역기(交易期)라는 뜻이다. - 중앙인장은 60방주의 중앙에서 후천(後天)시대의 새로운 통솔자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인들은 월곡의 교단조직은 곧 월곡을 재위로 하는 새 정부의 조각(祖閣)이라 여기고, 여기에서 발급하는 인장과 교첩은 곧 관직의 임명장이라 생각하였다.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0쪽(1919년에 대황산에서 고천제)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86쪽(1921년 황석산에서 고천제) 『보천교연혁사』 상 9쪽~1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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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 1929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에 의한 '문화정치' -친일파 양성, 교단을 무력화시켜 민족종교 말살. 민족종교 내에 내선일체(內鲜一體)와 대동아의식들을 퍼트려 친일종교로 만들어 민중들로부터 이반시키며, 사회규범의 일탈을 지목하여 사교화함으로써 사회적인 낙인을 찍어 교단을 무력화시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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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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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음) 태을교인 趙俊浩 사건(강원도의 태을교도 독립단원 검거의 건) - 8월 경성에서 체포된 이상호가 수감 중 職本 고등과장에게 회유되어 교주와 상의, 본교의 4대 강령(일심, 상생, 해원, 후천선경)을 천명하고 교명을 ‘보천교’로 등록함. 겨울, 경북 청송군 경찰서에서 소위 제령7호 위반혐의로 교도 3천여 명 검거함 - 12월(음) ‘훔치교의 일부인 허무맹랑한 선도교’ 이치홍 사건(경성복심법원) 등 다수의 ‘태을교도 국권회복운동’ 발생 |
"강원도 경찰부에서 태을교도로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不違蘇人 17명을 검거하였다. 그들은 1920년 음력 4월에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다’고 하며 신도들을
비밀히 결속하였다. 또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도 태을교도 14명을 검거하였는데, 원래 倚天敎 교도였던 김문하가 排日사상을 갖고 1920년
12월 5일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으며 태을교도의 수령 차경석은 올해 중에 황제가 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2017) 473쪽~475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9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상생출판, 2017) 473쪽~475쪽 안후상, <식민지시기 보천교의 '공개'와 공개 배경> 2012, 신종교연구 제26집, 1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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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
독립운동 |
- 경북 청송에서 방주 권태호(權泰鎬)에 의해 60방주 조직 내용 누설됨 | - 교인 3000여 명이 검거됨. 이 과정에서 교도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고, 700여 명 기소, 도망 다닌 교도는 3만 여 명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34쪽 안후상, <식민지시기 보천교의 '공개'와 공개 배경> 2012 신종교연구 제26집, 152쪽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 63쪽~6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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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방주 아래에 대리 각 1인(身言書判을 갖춘 1인 대리)과 '6인의 대임'
선정 (60방주 * 6임 = 360간부(1년의 일수)) - 6인의 대임의 직명은 경례(敬禮), 교무(敎務), 절의(節義), 집리(執理), 찰이(察異), 행신(行新) - 6임의 각 임 아래 12인의 임직 '12임(任)' (1일은 12시에 해당) - 12임 아래 '8임' (매시 8각(八刻)에 해당) - 8임 아래 '15임'을 선임 (매각 15분(현재 시의 2시간에 해당)) 방주 60명, 6임 360명, 12임 4,320명, 8임 34,560명, 15임 518,400명 = 55만 7700명 임직은 각 임에 100명 포교를 기준으로 임명, 이들이 최소 한 사람당 100여 명에게 포교했을 경우 약 600만 교인이 됨. |
교단과 교본소의 규모 1919년 보천교는 24방주제를 60방주제로 확대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일제는 60방주제를 '기미만세 독립운동의 재발'로 바라보았으며, 경상북도 청송, 안동 등지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일제는 당시 보천교의 60방주 조직을 독립만세 운동의 재발로 인식하였다. 60방주제 60방주 아래 방주 대리 1명과 6명의 6임(任)이 있다. 6임 아래에는 12임(임)이, 12임 아래에 8임, 8임 아래에 15임이 있다. 방주 60인, 방주 대리 60인, 6임 360인, 12임 4,320인, 8임 34,560인, 15임 518,400인 등을 모두 합치면 교단의 간부는 557,700명이 된다. 1인이 10명을 포교해야 간부가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교인은 600만 명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29쪽~431쪽) |
교단과 교본소의 규모 60방주제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 8장 후 - (상) 8장 후~11장 전 ▶普光 第4號 (普光社, 1924.3.27.) 8쪽 ▶開闢(開闢社) - 제38호, 1923.8.1. 29쪽~36쪽 - 신간 제1호, 1935.11.1. 62쪽~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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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3·1운동에 관여한 임규(林圭)가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보천교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함 | 임규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받았다. 임규가 이는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려는 독립운동 자금으로서, 임규는 당시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衡平司長)이라는 간부였다. 또한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 측 회원이었다.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59쪽, 69쪽, 83쪽, 100쪽, 104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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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독립운동 |
1월 64방주 12임 조직으로 전국 지방관청에서 교인검거 선풍 일어남 1월 강원도 고성 徐錫柱 사건(‘김홍규 등 10인 판결문’, ‘계혈로 맹세한 태을교도의 공소’) 1월 그뭄 경부터 각 지방관청에서 보천교 교인에 대한 검거선풍 일어남. 경북 안동재판소에서는 보천교에 대한 처벌 특별법 만들어짐 봄 전주에 모인 10만 원 압수, 이를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려는 군자금으로 인정하고 대검거 실시, 강원도 일대 및 삼남지방에수 천 명 신도 검거됨 2월 10일 채선묵, 김홍규 황해도 부임차 평양역에 내리다가 체포되어 김홍규 42일간 구금됨 5월 김문하 사건 및 태을교도 국권회복운동 발발 7월 김영두의 교금 도취관계로 경기도경이 수색하여 4만여 원 발견함. 김영두 등이 경성에 태을교 간판 붙이고, 무고하여 이상호 체포됨 8월 김홍규가 김영두 도금사건으로 검거됨 9월 경기도 경찰부 顧本 고등과장 일행이 교주를 방문 |
일제의 보천교 탄압 치성금(致誠金) 또는 교금(敎金)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유용한다는 혐의를 본격적으로 받던 해가 1920년이다. 더불어 교인(敎人)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된 해도 1920년이다. 당시에 교인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이다. 1921년 3.1 독립만세운동 이후의 최대 규모의 검거선풍이라 할 ‘청송사건’은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경계심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신문들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보천교가 연계돼 있다거나, 한국의 독립이 보천교의 최대 목적이라고 보도하였다. 청송사건 3.1독립만세운동 전후의 보천교는 일관헌의 요시찰 단체였으나 그 조직이나 활동상은 좀체 파악되지 않았다. 보천교의 방주 조직이 기본적으로 비밀 결사적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1921년부터 보천교의 조직을 파악한 일제는 무자비한 검거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른바 ‘청송사건’으로, 검거된 교인들의 심문 내용을 통해서 보천교운동의 내막이 서서히 드러났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42쪽~444쪽) |
일제의 보천교 탄압 청송사건 ▶ 동아일보 - 1921.10.29/ 십만 원의 독립자금 - 1922.2.24/ 화부회의를 기회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일 ▶ 조선일보 - 1921.6.6/ 開眼法과 貫通法으로…...普天敎徒의 檢擧, 오는 칠월에는 옥황상제가 강림하여 괴질로써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교도로써 신정부를 조직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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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에 보천교 대표 2명 포함됨 |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직된 외교 지원 단체 원래 명칭은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韓國外交後援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한 밑에 있었다. - 태평양회의는 미·영·일·중 등 9개국이 참여해 군축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가 열린다고 미국 대통령 하딩(Harding,W.G.)이 발표한 것이 1921년 7월 10일경이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8월 13일 프랑스 조계 백이로(白邇路) 439호 교민단회관에서 100여 명의 동포가 참석한 가운데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를 조직, 임시의장에 홍진(洪震)을 선출하였다. 같은 해 8월 18일 제2차 총회가 개최되어 독립지사 54명이 출석, 규칙을 제정하였다. - 제2조에서 위원회의 위치를 상해의 프랑스 조계 내에 두고, 제3조에서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 후원을 이 회의의 목적으로 하였다. 제5조에서 전임직원(간사)은 모두 11명을 두되 총회에서 선거, 회무(會務)를 집행 처리하게 했고, 분담사무는 간사장 1명, 서무간사 6명, 재무간사 4명으로 구성하였다.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58,
70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태평양회의 한국외교후원회' 항목 네이버백과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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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제도 시행 '정리(正理)'라는 직책을 두어 교체(敎體) 강화를 꾀하였고, 60방주로부터 15임에 이르기까지 그 소임에 따라 인장(印章)과 교첩(敎牒)을 발급 - 정리 아래 정리를 보좌하여 교무를 협찬하는 부정리(副正理), 정리의 지휘를 받아 교무를 집행하는 포정(布正), 포정을 보좌하며 교무를 협찬하는 선정사(宣正師, 부포정에 해당)를 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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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검거 선풍이 붊 안동재판소에서는 보천교인을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까지 만듦 (형량: 방주-징역 6년, 6임-징역 4년, 12임-징역 2년, 8임-징역 1년, 15임-구류 또는 벌금형) ←이영조(李英兆), 최선묵(崔善默), 김홍규 등 수명의 교단 간부 체포되고, 거액의 교단 재산이 강탈됨 1920년~1922년은 보천교의 대규모 수난기였음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0쪽, 123쪽 | ||||
- 7월 경기도 경찰부의 경시(警視) 김태식(金泰湜)은 자신이 조직한
동광회(東光會)의 사람들을 파견해 차경석을 만나 ‘양해하라’, 곧 '교단 조직을 세상에 공개하라'고 권유하였다. 이때 차경석은 교단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큰 건물이 필요하고 또 방주회의가 열릴 때 협의할 것이라며 연기하였다. - 8월 김홍규 등 간부들을 검거 압박, 고천제 전날(9월 23일)에 경기도 경찰부 후지모토 고등과장과 김태식은 사람들을 다시 보내 차경석과 면담하여 양해하라는 권고를 재차 함 - 8월 이상호 경성에서 체포 구금됨. 10월 석방시 경기도 경찰부의 후지모토 고등과장의 교단공개 회유를 듣고 경성으로부터 내려와 차경석을 만나 협의함 - 이에 차경석은 출판물 허가와 관청 양해 얻음을 재가함 - 이후 이상호는 1922년 관청 양해를 얻고 경성 동대문 밖 창신동에 '보천교(普天敎) 진정원(眞正院)'이란 간판을 걸고 보천교 공개에 앞장섰다. 이때 ‘정(井)’자 교기(敎旗) 만들어 사용함- 월곡은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 공개에 대한 회유 속에서 고천제가 무산될 것을 우려해 이상호가 요구하는 보천교를 공개한 것으로 보임(안후상, 「식민지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 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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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이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으로 '보화교'로 할 것을 이상호에게 명령하였으나, 이상호는 보화교라고 하면 생소하고 총독부로부터 반일단체
결성이라는 의혹을 받을까 하여 독단적으로, 고천제에서 선포한 '보화(普化)'의 머리글자와 당시 공인된 종교인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1922년 교명을 '보천교'로 제출하였다. - 정자(井字)로 된 교장의 정(井)은 '수원(水源)'을 의미함 - '수(水)'는 만물을 생성자육(生成慈育)하는 것으로 보천교의 덕화가 수원과 같음을 뜻함 - 교기는 황색 바탕에 정자(井字)를 적색으로 아로새긴 것으로 보천교의 7대 치성일 내지 기념일에 교단 본부와 가정에 게양함 |
안후상, 「식민지 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 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
- 함양 황석산에서 9월 23일 2차 고천제 올림 - 고천제에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 함. '보화'는 '조화를 널리 세상에 편다'라는 뜻임 (보천교 창립사에 있어 포교기구와 행정기구의 조직강화라는 면에서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다 할 것임) - 이로써 보천교는 종교에서 정치의 장으로 옮아감(황선명, 잃어버린 코뮨, 신종교연구 제 2집, 한국신종교학회, 2000. |
*
'국호를 시국이라 한다' 고 한 부분은 보천교연혁사에는 '교명왈 보화'라고만 기재되어 있음 이강오 교수의 논문(보천교, 1966년, 전북대)에서 '축문에는 '국호왈시'라고 되었다 함'이라는 각주를 달고 있다. 즉 구전을 다시 전한 것임. 도전, 보천교연혁사에는 '교명보화'와 괄호로 '축문미상'을 적고 있다.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 서설」 보천교 학술대회 2017년, 11쪽~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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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에서 전국 각지에 교인의 검거명령을 내리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1921년 1월에서 8월 사이 이상호, 김홍규 등 교단의 주요 간부와
일반 교인 1,000여 명이 체포됨 - 이로 인해 일부 간부들의 배교행위가 속출, 그런 가운데 '보천교(普天敎)'라는 명칭이 세상에 알려짐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1쪽~106쪽, 119쪽, 120쪽 이정립, 『증산교사』(증산교본부, 1977) 90쪽 『보천교연혁사』 『도훈』 보천교 교리연구 1, 유철, (보천교학술대회) 113쪽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 서설」 보천교 학술대회 2017년, 11쪽~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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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 11. 7. 월곡의 노모(老母) 별세.
문정삼(文正三)이 이성영(李成英)을 임실군(任實郡) 상월리(上月里) 이기양(李起陽)의 집에 있는 월곡에게 보내 부고를 전달할 때 장례비를
만원(萬圓)으로 예산하고 출금표를 요구함 - 1922년 6월 사설묘지 설정 허가 난 후 7월 20일 정읍군 정읍면 고직동(庫直同) 왕모래등(王母來嶝)에서 장례 거행 시 장례 참석 신도가 10여 만 명에 달하고, 장례를 왕자(조春)의 예로 행하였으므로 그동안 저축했던 교금(敎金)이 탕진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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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도시에 지방기관을 설치하여 포교활동을 강화함 서울과 기타 도시에 포교 총괄기관인 진정원(眞正院) 설치, 각 군에는 정교부(正敎部) 설치함 - 2월 서울에 교단 조직의 서울 사무소인 보천교 진정원이 세워지면서 보천교의 종지(宗旨) 및 교리 등이 만들어짐 - 비밀포교가 공개포교로 바뀌고, 그 세(勢)는 한때 천도교를 능가함 |
보천교경성진정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리면서 보천교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태을교∙선도교∙훔치교 등이라
불렀다. 교명 '보천교'의 의미를 '普는 廣也며 大也이오 天은 萬物을 覆하나 私가 無함으로 갈옷 普天이라 하나라'라고 당시 교단에서
밝혔다. (普天敎報, 창간호 1922. 7. 보천교진정원 43쪽) (안후상, 「보천교의 '반일성(反日性) 연구'를 위한 연구사적 검토」 『한국종교』 제39집(2016) 27쪽~55쪽) |
보천교의 공개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는 1922년에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을 낳게 하였다. 보천교 내 신진 지식인이자 간부인 이상호(李祥昊)가 1922년 조선총독부 종무과에 ‘보천교’라는 이름을 등록하면서, 그리고 서울에 ‘보천교경성진정원’이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보천교'라는 교명이 공개되었다. 이렇게 공개된 보천교는 일제의 정교한 탄압과 회유의 대상이 되었다. |
이정립, 『증산교사』(증산교본부, 1977) 『보천교연혁사(상)』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2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23쪽 보천교의 공개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 (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 27쪽 후~28쪽 후 - (상) 49쪽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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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 1922년 1월 반용리(盤龍里) 김영길(金永吉)의 집에서 채경대(蔡慶大)
김형식(金亨植) 이규선(李圭宣) 등 14인이 보천교를 떠나 새 교단을 세움 - 1922년 1월 월곡, 임실군(任實郡) 고덕리(高德里)에 은거(隱居) 중 방주 몇 사람에게 명하여 제사(製寫)하여 교인에게 12계명 반포함. 여기에서 '존상제(尊上帝)는 교조 증산대성(甑山大聖)을 숭봉하는 것'이라 밝힘 - 1922년 2월 보천교 간부 이상호는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에 수십 간 집을 사서 교단 사무소로 정하고 교단 이름은 보천교, 사무소를 진정원(眞正院)이라 일컫고, 교단 종지(宗旨)를 성명(聲明)하여 10여년 간의 비밀운동을 공개운동으로 전환, 이로써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敎名)이 비로소 세상에 나옴 - 동아일보 1922년 2월 23일자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거병(祛病) 해원(解寃)의 신조(信條), 신축(辛丑)년에 도통(道通)한 증산(姜一淳) 자칭 옥황상제(玉皇上帝)’ 제하(題下)의 글이 화제가 됨 - 8월 '고흥사건' 발생 - 11월 동지 치성제 거행시 경무국 간부 등 50여 명이 교주 체포를 시도함 |
고흥사건 1922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교인과 경찰간의 난투극이 벌어졌다. 보도 내용이 난투극이지 경찰이 교인을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일명 ‘고흥사건'이다. ‘고흥사건’은 일부 언론과 사회단체에서 경찰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일련의 사건 관련 교인들을 도리어 소요죄나 보안법 또는 직무방해죄, 치안법 등을 적용 구속하였다. ‘고흥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의 대(對) 보천교 정책이 바뀌게 된다. 보천교의 사교화(邪敎化) 또는 사교화(詐敎化)를 꾀해 민중으로부터 이격(離隔)시키겠다는 정책이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2017, 445쪽~449쪽) |
고흥사건 ▶조선일보 - 1923.5.1/ 고흥총살사건의 공판. 공무집행 방해라고 징역 6개월 ▶매일신보 - 1922.8.21/ 태을교도 폭행 顚末. 교도들이 먼저 경관을 폭행, 생명이 위급하여 권총을 발사 - 1922.8.25/ 태을교도 폭행 사건과 발생전후의 顚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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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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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에서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는 데 자금을 대 줌. 자금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에게 건네 주어 당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에게 전해주게 함. 당시 1만원(현 10억 원)을 지원함 ★1924년경 창덕궁 대조전 공사에 쌀 한 가마니가 5원 30전 이었음 |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극동 인민 대표 대회 極東人民代表大會) (국사편찬위원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 극동 인민 대표 대회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 회의에 대응하여 개최된 회의였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을 모스크바로 불러 연석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운동 지원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대회에 9개국이 참가했으며 참가자는 144명이었다. 이 중에 한국인은 52명으로 가장 많은 수가 참석하였으며, 의장단에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이 선출되었다. 서구 열강의 일본 식민통치 묵인과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 실망한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을 떠나 이 회의에 상당수 참여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 문제에 대해서 워싱턴 회의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 극동 인민 대표 대회는 워싱턴 회의에서 미, 영, 일, 불이 체결한 ‘4국 조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흡혈귀 동맹’으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
보천교와 한국 독립운동 일제를 긴장시키고 급기야 일제의 탄압과 회유를 구사케 한, 앞서 언급한 풍설이나 민중의 결집 이외의 보천교 활동은 또 있다. 보천교의 교금이 국내외 몇몇 독립운동 세력에게 지원된 것이다. 김철수(金綴洙)나 임규(林圭)의 증언에 따르면 독립운동 세력에게 지원된 금액은 약 6만원이다. 이같은 사례를 들어, 보천교가 민족 문제에 적극 개입한 것처럼 해석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보천교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대를 은연중 퍼뜨리면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확산시켰다. 전라북도 정읍의 입암산 아래에 경복궁에 버금가는 교본소를 짓는가 하면, 잡지를 발행하고 신문사를 인수하였다. 전국 곳곳에 진정원(眞正院)을 설치하고, 실력양성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보천교와 독립운동 자금 1920년대 초반 청송사건의 배경은 3.1독립만세운동과 같은 종교에 의한 대규모 사회운동에 대한 일제의 우려와, 보천교의 수상한 자금, 비밀결사적인 조직운동 등이다. 3.1독립만세운동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는 대규모 사회운동의 동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웠다. 정교분리가 강조되는 분위기에서도 보천교는 전근대적 형태의 후천선경의 신정부 건설론을 빠르게 퍼뜨렸다. 뿐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함께 식민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한국을 독립시킬 것이라 선전하였다. 이처럼 보천교의 활동에는 반일성(反日性)을 바탕으로 한 민족성이 내재돼 있다. 독립운동 단체에 흘러 들어간 보천교의 교금이 적지 않다는 전언이 있다. 최근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사회주의자들, 김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열단, 정의부 등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에 건넨 보천교의 자금은 최소 6만원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2017, 450쪽~455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69쪽 역사비평(1989년 여름호)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4쪽. 국사편찬위원회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국사편찬위원회 바로가기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6쪽 보천교와 한국 독립운동 보천교와 독립운동 자금 ▶ <口述> - 김철수(편자 주: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던 김철수) 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고 이범재(편자 주:구당) 화실에서,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 내게 말했다... (차용남의 구술, 1991.1.21. 차용남의 자택에서) - 안후상: 보천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는데... - 이강오: 3.1운동 당시 48인의 하나인 임규라는 자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5만원을 받았다. 임규는 금마 출신이다......임은 상해 임정 수금책인 소병언과 친했다. 송진우, 장덕수의 선배이기도 한 임이 보천교와 관련을 맺었던 것은 바로 동학 때문이었다. 임은 보천교 차경석에게 돈을 받아 장덕수에게 주었고, 하와이에 가서 다시 라영균에게 주었다. 다시 라영균이 받은 즉시 영국 옥스퍼드대학으로 유학했기에, 혹 유학 경비로 쓰지 않았나 추측한다......중략 - 김철수(이균영 편), 「김철수 친필유고」 『역사비평』 제5호 (역사문제연구소, 1989) 354쪽/(편자 주: 이때가 1922년 경이다) -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는 생전에 김효명(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재봉의 친자이자 원불교 교무)에게 당시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증언했고, 그 녹음된 자료(녹음테이프 100여 개가 넘는 분량으로, 일부는 풀어서 자료집 『지운당』을 발간하였다.) 그 가운데 차경석의 자금지원과 관련한 증언이 여러 번 나온다고 김효명은 증언했다..... ▶ 『普光』 - 제1호(1923.10.25) 21쪽~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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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교리내용을 체계화한 교리강령으로서 사대강령(四大綱領)과 목적이 정리됨 - 존상제(尊上帝), 숭도덕(崇道德), 친목동인(親睦同人), 망난음양(罔亂陰陽), 이재공정(理財公正), 절용후생(節用厚生), 불유탄망(不有誕妄), 무위자존(無爲自尊), 막회탐욕(莫懷貪欲), 신물시기(愼物猜忌), 정직물아(正直勿阿), 물훼타인(勿毁他人) 등 12계명을 정하고, 교중에 선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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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는 인의(仁義), 인(仁)으로써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는 것. 그러므로 인을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종시(終始)가 되는
것이라함 - 사대강령(四大綱領)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 -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 목적(目的)은 대동(大同) - 사대강령(四大綱領)은 일심(一心), 상생(相生), 해원(解寃), 거병(袪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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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5월 15일 낙성한 십일전(十一殿)의 호천금궐(吳天金厥)에
일월성(日月星)을 상징한 신단(神壇)을 봉안(奉安), 이를 삼광영 신단이라 일컬음 |
교세의 급격한 확장과 반일성 1922년 전북 정읍의 대흥리(大興里)에 보천교 본소가 자리잡으면서 교세가 급격히 확대되었다. 당시 민족적 좌절감과 열패감에 젖은 민중은 차경석의 보천교를 민족운동의 구심체 정도로 생각하였다. 예컨대, 3.1독립만세운동의 실패에 따른 신비적이고 복고주의적인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이 당시 민중의 정서적 측면을 자극한 것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22쪽~425쪽) |
김재영,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84쪽 교세의 급격한 확장과 반일성 ▶ 동아일보 - 1921.6.22/ 갑자년 3월15일에 차황제의 출현설 - 1921.10.7/ 갑자년을 기약하고 독립운동, 태을교도 공소 - 1922.2.21/ 怪敎 太乙 -甲子年 4월을 기하여 鷄龍山에 車皇帝- - 1922.10.26/ 자칭 大時國 皇帝 -태을교주 차경석이 국호와 관제를 발표- - 1925.1.14/ 분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대동단(3) -稻藁중 藏身術 천자를 꿈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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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
- 1월 주요 도시에 진정원 건설 교령 내림 - 8월 15일 보천교 敎憲 제정 - 11월 蔡京大(채규일 동생) 객망리에 三聖敎 설립 - 11월 여방주제 조직 동서남북에 여방주 주요 간부를 둠 그 밑에 각 6명의 방주를 둠. 그 외에는 남자 방주제에 준해(6임, 12임, 8임 등) 60방주제를 만듦 남자 방주제와 동일하게 부인들로 구성된 이러한 여방주제도는 다른 교단이나 조직체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든 보천교만의 독특한 조직임 - 12월 24일 일본 신흥종교 오오모토와 제휴. 오오모토 간부 보천교 본소 방문(1925. 7. 22. 재차 방문) - 12월 만주지역 의열단에 가입 활동하는 강일姜速이 태을교 대표로, 裵同知(본명 裵致文, 裵浩告)가 보천교 대표로 북경 국민대표회에 참가(‘의열단원 검거의 건’ 1923.12.26) - 총정원(總正院, 집행기관)과 총령원(總領院, 외교기관) 설치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8쪽 | ||||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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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 논의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대표 배치문(裵致文)과 강일(姜逸, 일명 姜弘烈) 2명 참석함.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배치문과 강일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함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 자료집, 20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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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의 대표회의 당시 임시정부는 내부적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부터 각지의 국민 대표들이 모여 협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2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1923년 1월 개최되었다. -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한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 등의 촉진선언문이 상해에서 발표되고, 그해 4월 북경의 군사통일회가 적극적으로 소집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각지 동포들로부터의 호응 속에서 마침내 국민대표회의준비회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 민족 대표들은 1923년 2월 21일 선서문과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전자에서는 대동 일치를 주장하고 희생정신으로 공결(公決)에 절대 복종할 것을 서약하고, 후자에서는 국민의 완전한 통일을 견고히 하자는 내용이었다. - 국민대표회의 대표들의 공통된 의견은 각계의 의사를 합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공산주의자라도 광복할 때까지는 독립운동에만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
보천교와 실력양성운동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1998.9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안후상) ● 1923년 1월20일에 열린 물산장려운동 창립총회, 같은 해 4월 30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보천교 간부 이득년, 임경호, 주익, 고용환 등 4명 포함됨 ● 이외, 물산장려회 회원으로 보천교 간부 이종익, 임규 등이 있었음 ● 물산장려회 기관지 <산업계>를 보천교에서 운영하는 출판, 인쇄소 '보광'에서 출판함. <산업계>에 보천교 관련 광고가 게재되기도 함 ● 당시 자급자작 및 토산장려 등은 보천교의 운동과 상통한 측면이 있음 조선물산 장려회 기관지 <산업계>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 자료집, 2016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민대표회의' 네이버백과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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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인쇄소를 설립해 『보광(普光)』잡지가 발간됨.
보광사 출판사 설립. - 11월 부인방위(婦人方位) 조직 만들어짐 - 민립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으로 대표되는 실력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참여(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30명 중 임경호(林敬鎬), 주익(朱翼) 등 4인이 보천교 간부, 주익은 3∙1운동과 상해 임정에도 참여함. 또한 1923년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100명의 대표자 중에는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 배홍길(裵洪吉)과 김종철(金種喆), 보천교 청년당 강일(姜逸)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함. 특히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군자금 모집 임무 수행함) |
한국잡지정보관(사진
보유)
바로가기 제호: 보광(普光) 발행인: 이성영 발행처: 보광사 발행일: 1900. 01. 01. 분류: 종교지 간별: 월간 보광사는 1923년 경성진정원 내에 설치. 사장은 이성영(이정립). 1923년 10월 창간호 발행을 시작으로 1924년 3월 제4호를 발행하고 폐간함. 바로가기 (이단문고, 보광잡지 1924년 판 보유) |
보천교의 교헌(敎憲) 보천교 내의 신진 지식인들은 보천교를 근대 종교로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잡지 『普光』을 창간하고 <시대일보>를 인수하였다. 앞의 잡지 『普光』에는 ‘교헌(敎憲)’이 게재되었다. 교헌은 교주 차경석의 최종적인 허락이 있었겠지만, 당시 신진 지식인 이상호와 이정립이 주도하였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2017) 437쪽~441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88쪽~96쪽 보천교의 교헌(敎憲) ▶ 『普光』 제2호(보광사 1923.2.1) 40쪽~46쪽/ 普天敎 敎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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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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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 진정원 불온문서 사건에 관한 건(1923. 10.2) -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 30명 중 임경호(林敬鎬), 주익(朱翼), 강일 등 4인이 보천교 간부. 주익은 3·1운동과 상해임정에도 참여.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군자금모집 임무 수행(윗칸 내용과 중복됨- 강일과 주익 등에 대해서 더 설명함.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음. 군자금모집 임무 수행이 중요함. 보천교 지원금 전달책이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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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하자 '보천교 민혁설(民革說)'을 주장하던 서울 보천교 진정원에서 불온문서(일제 칭) 3종을 인쇄하여 전국 진정원을 통해 배포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됨 - 보천교의 공식적 조직인 진정원에서 '도이왜적(島夷倭敵)'을 주창(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2016) 1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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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362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3쪽, 95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산조합'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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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화 운동 | - 실력양성운동 전개 -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 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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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로(信路)
변경 1909년부터 이제까지 교조 증산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했으나 월곡은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모든 희망의 좌절과 교단 자체 내의 분열로 인해 그가 교단의 기본으로 하였던 증산의 신도 교리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고, 1922년 이상호(李相昊)에 의해 발표된 4대 강령은 자기의 뜻이 아니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교리가 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大道指南』 1쪽~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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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와 이성영 형제가 월곡이 증산의 진정한 계승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자, 이의 주장이 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증산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키거나 부정함 - 월곡은 증산의 신권 숭배를 중지하고, 실천적인 도덕, 즉 유도(儒道)로 교리의 방향을 전환함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2쪽) - 차경석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영위 봉안식이 무위로 돌아가 신도들에 대한 권위와 신망이 떨어지자 상제님에 대해 회의를 품고 신앙의 진로를 완전히 유교쪽으로 굳히게 되었다. 차경석이 신앙의 진로를 유교로 바꾸게 된 것은 1928(무진년 '무진설법') 1월 3일의 '정삼치성' 때로 본다.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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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로 변경으로 '증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신앙대상에 대한 문제가 대두됨 | 기존 입장 교조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봉, 상제로서의 신으로 봄 (증산이 옥황상제의 재생(再生)이며, 천지공사를 직접 행함 증산이 천상의 옥황상제로서 내려옴) |
- 신로 변경으로 증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신앙대상에 대한 문제가 대두됨 - 증산을 원류로 하는 보천교의 신앙대상인 천(天)과 신(神)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침. 이로 인한 분열 가속됨 - 1928년 무진설법에서 확고한 차이를 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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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입장 - 증산의 신권 숭배 중지, 실천적인 도덕, 즉 유도(儒道)로 교리의 방향을 전환함 - 증산의 탄강일과 화천일을 치성일에서 제외 (김방룡,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 26쪽)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9쪽) - 유교적인 면에서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역학적인 이론을 주로 함 - 천(天)은 증산이 주장한 신명귀신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작용으로써 만물이 생성발육하는 도(道)의 대원(大源)이 되고, 신(神)은 상제로서의 신이 아니라 천(天)에 따라 음양이 작용하는 신묘 불가사의한 힘이 된다고 봄 - 자연과 인간에 대한 원리적인 이해가 심화되었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우주관이 다시 부활된 듯이 보이는 신에 대한 관점에서 상제(上帝)로서의 신은 인정되지 않음 - 천(天)은 도(道)의 체(體)가 되고, 상제(上帝)는 도(道)의 용(用)에 불과하며, 사람이 천(天)을 공경한다는 것은 사람이 인의(仁義)의 천심(天心)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고 봄 - 증산이 옥황상제의 재생(再生)이며, 천지공사를 직접 행했다는 것은 그가 천상의 옥황상제로서 내려왔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이 천심을 체득하여 상제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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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
갑자등극설(천자등극설) 유포 - 1922년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 및 개벽 등 잡지를 통해 갑자년(1924년) 월곡 차경석이 황석산 고천제를 통해 천자(황제)로 등극한다는 풍설이 대대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함 즉, 갑자년(甲子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에 교주 차월곡이 충청남도 계룡산에 또는 전라북도 정읍의 입암산 아래 도읍을 정하고 천자(天子)로 등극한다는 설 - 동아일보의 경우 24건, 조선일보 7건, 주요잡지로 '개벽' 및 '별건곤'에서 기사화 함. 내용은 대단히 부정적임 |
천자등극설(갑자등극설) 관련 문헌 및 논문 『보천교 일반』(전라북도(조선총독부) 1925) 42쪽~46쪽 "1918년경부터 국권 회복國權俠回復의 미명美名을 표방하여 신도의 마음을 붙잡고, 국권회복 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왕도王都를 정읍에 두고 각 교도는 대저 계급에 따라 상응하는 관위를 주고 또 보천교를 신앙하는 자는 만사 뭇한? 바와 같이 이루어진다는 감언으로 입교를 권유" 김재영, 「보천교 천자 등극설 연구」 『한국종교사연구』 9집(2001) 116쪽 "갑자년(1924) 천지등극설이 유포되자 조선총독부는 일본 왕실에 대한 불경행위라 보고 고등법원에 넘겨 정읍검사국에 지시, 보천교 간부 10여 명을 호출 심문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홍범초, 「보천교 초기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10 (1985) 179쪽 "차경석의 갑자등극설은 동학혁명, 계속된 의병운동, 3·l운동 실패 후 조선민중이 다시 한 번 가져본 나라의 독립에 대한 꿈이었다." 노길명, 「초기증산종단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일제하 증산종단의 민족운동』(순민사 1997) 61쪽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심화된 상황에서 민중들, 특히 동학혁명의 실패를 체험한 자나 3·1운동이 실패한 다음 실의에 빠져있던 민중에게는 소위 ‘차천자 등극설’이 그 내용이야 어떠하든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내포하였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천자등극설은 3·1만세운동을 전후하여 더욱 확산되기 시작하여 1920년대 보천교의 교세의 증가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朝蘇出版警察月報」第106號(1937. 6)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에서 인용) ‘出版不許可の理由及 記事該當要旨(業務資料) - 「未完成」’이 있는데, 그 금지사유를 보면 임진왜란에서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과 같은 한국 무장의 武勇행위를 賞揚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켜 조선독립을 시사 선동할 수 있다는 점과 보천교 간부 한 사람이 차경석의 초상화를 의뢰하려 秋江을 찾아와 대화하는 중에, “선생도 물론 알고 있듯이 지금 신천지는 정감록에 의하면 井邑에서 개시된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으며, 이미 車천자님은 정읍에 대궐(宮城)을 세워 등극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시일이 다가오고 있다.”라고 한 점을 그 이유로 지적하였다. 박종렬, 『잃어버린 차천자의 꿈』(장문산, 2001) 150쪽~163쪽 (제4장 한.중.일 천자를 꿈꾸다 1. 월곡의 야망과 천자등극설) "... (1921년) 교단 공개에 따라 교단 활동이 왕성하게 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위축된 것이다. 물론 이는 당초 교단 공개문제로 보천교 간부들과 토의할 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으며, 월곡은 이를 타개할 새로운 대책을 세우게 된다. 그것이 바로 조선 민중에게 메시아로 다가온 '천자등극설(天子怪極說)’이다." 김탁, 「보천교의 예언사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7) 38쪽 "보천교의 예언은(갑자년, 기사년의 천자등극설)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믿어졌다. 보천교가 일제강점기 특히 1919년 3.1만세운동이 수포로 돌아간 이후의 시기에 급격하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일제의 강점을 벗어나기 위한 시도와 투쟁으로 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곧 새 왕조가 보천교의 교주 차경석을 중심으로 세워져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하리라는 예언은 ‘정신적 차원의 독립운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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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 서설」 보천교 학술대회 2017년 11월 1. 일제강점기 언론의 ‘보천교와 차경석’ 보도실태 중에서 1) 신문보도실태 (11쪽~15쪽) "1922년 10월 26일 동아일보 기사는 보천교에서 1921년 9월 24일경남 함양 황석산에서 고천제를 지냈던 결과를 기사화 한 내용이다. 보천교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기록한 『보천교 연혁사』에 따르면 1921년 황석산고천제 당시 교명을 ‘보화교’로 선포하였고, 고천제를 마친 뒤에 궐석된 일부 교직을 채웠으며, 교주자리를 신설하여 차경석이 비로소 교주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보천교공식 내부자료인 『연혁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동아일보 기사는 고천제에서 거론되지도 않았던 ‘새로운 국호와 관제 등을 발표’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그것도 새로운 나라의 국호는 ‘대시국’이었으며, 교주 차경석이 스스로 황제로 칭하였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에서 보이는 육임, 도정리, 포장등 교직은 이전에 이미 설치된 내용들이다. 다시 말하면 동아일보에서 보도한 육임. 이십팔임, 도정리, 포장 등은 보천교 내부의 조직 명칭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새로 건국된 대시국의 관제로 변하여 이후에는 차경석이 무지몽매한 인민들에게 그 관제를 팔아서 금품을 갈취하였다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왜곡 변조, 날조, 조작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물론 당시 이 기사를 작성한 동아일보 기자가 전혀 취재조차하지 않고 전혀 없었던 일들을 날조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그런 얘기들을 들었을 터다 1921년 9월 24일에 있었던 황석산 고천제 내용(?)을 1922년 10월 26일에 보도한 것이 첫 번째 근거다. 문제는 1년도 더 지난 일을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근거는 「‘태을교주차경석이 국호와 관제를 발표하앗다는 풍셜’」이라는 기사의 리드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말 그대로 ‘풍설’을 보도한 것이다. ‘풍설’이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라면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을 가리킨다. 그런 풍설이 있었다는 데야 굳이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기사화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중략... 차경석과 보천교 관련 내부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아직까지 차경석 혹은 보천교에서 천자등극을 의도적으로 기획, 추진했었다는 문헌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간접적인 자료는 발견된다. 또한 그 근원지에 대한 유추도 가능하다. 천지 등극설과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굳이 천자라고 했다면 교중천자敎中天子라는 후손의 증언이다. 차경석의 3남 차봉남은 차경석이 일제 관헌에 진술할 때, “왕희지가 필중천자筆中天子라면 이태백은 시중천자詩中天子이며 나는 교중천자일 뿐이다. 나는 정치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교인들이 붙여준 칭호에 불과했다며 끝까지 천자등극을 부인했다고 하였다." 강영한,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보천교학술대회, 2017년 "...중략... 이는 곧 차경석의 고천제가 동학혁명이나 3· 1운동 이후 좌절하고 실의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음을 말한다. 차경석과 보천교는 이런 상황에서 국권회복, 독립, 신정부, 새로운 나라와 같은 미래지향의 희망 아이콘으로 인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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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등극설과 보천교 성토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보천교는 황석산 고천제(1921)에서 국호를 ‘시(時)’라 선포하였다. 이러한 풍설은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을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갑자년(1924) 등극설은 보천교 내외에서 큰 관심을 가졌다. 갑자년 등극설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자 기사년(1929) 등극설이 다시 유포되었다. 1929년 성전 십일전(十一殿) 내 삼광영(三光影) 봉안식을 계획하였다. 일제 경찰은 삼광영 봉안식 행사를 ‘내란죄’로 규정하면서 불허, 교인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주요 언론 자료 ▶ 동아일보 - 1923.7.16/ 보천교 선교사가 허탄한 말로 백성을 속이고 돈을 사취 ▶ 조선일보 - 1925.1.18/ 보천교 성토, 경찰이 금지 - 1925.2.12(석간)/ 金海의 훔치 성토, 엄중한 경계리에 죄악 聲討 - 1925.2.18(석간)/ 보천교 군수 帖紙 1장에 3천원, 군위군 천율동의 어리석은 부자, 붉은 비단 군수 첩지에 3천원 - 1925.2.26/ 참정권 전에 주먹. 동경에 있는 보천교 임경호에게 동포 30명이 습격하여 소동 - 1925.3.6(석간)/ 妖怪輩 ‘훔치’ 聲討, 馬山에서 대성황. 경찰의 심한 간섭 아래 대성황. 요괴배 죄상을 일일이 적발해 - 1925.6.27(석간)/ 훔치와 굿을 복멸, 안주 각 단체 긴급회의 ▶ 매일신보 - 1924.7.13/ 荒唐無稽한 妄說로 詐欺한 보천교도, 조선왕이 된다고 속이고서 미성년자에게 천원을 편취 - 1924.8.3/ 無知한 보천교도 迷信으로 사람 죽여, 문둥병 환자를 치료한다고 개미를 먹이고 양잿물을 발라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62쪽~4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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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인 1인 당 수저 한 개씩을 모아 무려 1만 8000근이나 되는 대종(大鐘)을
주조함 - 1월에 각 방주의 6임 중 공적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선화사(宣化師)로 임명, 방주와 동등한 대우 함 - 9월에 28명의 선화사를 4정방(正方)으로 분장함 - 11월에 선화사 아래 6임의 임명을 교령(敎令)으로 제정 - 선화사 6임 밑에 12임(방주제의 12임과 같음)을 두고 그 밑에 6임인 보수원(保守圓, 후에 자강원으로 개명)을 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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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화 |
각 교도는 푸른 옷을 입고, 또 본소의 노동자 편의를 주기 위하여 기산조합소를 둠. 수공업이 장려되었으며, 교인들의 단체 노동을 통해 산업을 진흥시킴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 1992, 48쪽~55쪽) | 기산조합 1924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신도의 노동조합적 성격을 띤 자치기구 1919년 보천교가 60방주라는 전국교구를 갖추고 수십만 신도를 확보함에 따라, 교주 차경석(車京錫)은 이러한 교세확장을 기반 삼아 천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로 바꾸고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여, 신세계의 조화정부건설을 꾀했다. 이때 보천교 본부건설을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였고, 이 노동자들을 바탕으로 기산조합이 형성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대흥리 노동자들에게 편익을 주고 직조 등의 수공업을 통해 산업진흥을 꾀하는 자치기구라 하지만, 1924년의 갑자년은 천자등극설과 무관치 않기 때문에 위의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기산조합장에 이름난 장사 서상근이 선임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 차경석의 천자등극에 반대하는 일부 보천교 간부들의 개혁운동 전개 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가 일종의 근위대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이 기산조합은 일종의 노동보급대 및 신변호위대 성격을 가미한 노동조합적 성격을 띄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각 부서까지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진 것은 서상근이 1924년 8월 보천교 혁신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함에 따라 자연 소멸하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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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상해임정, 독립운동자금 모집코자 보천교에 요원 파견함 | 동아일보 1924. 4.1 기사 | ||||
문화∙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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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시대일보사’ 인수. 보천교를 맹렬히 비판하던 『동아일보』와 맞서기 위함 (김재영,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학술대회
자료집, 2016) 40쪽) - 이상호는 '시대일보사'가 자금난으로 폐업할 지경에 빠졌으니 교중에서 금 2만원을 출자하여 이를 속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차경석을 설득, 이때 이상호는 동생 이성영(정립)을 편집국장으로 이미 총독부에 제출하여 허가를 얻은 상태였음. 이종익(李鐘翊, 이상호의 혁신운동에 가담하여 출교 처분), 이성영(李成英), 임경호(林敬鎬)는 각자 자기 세력을 구축하여 사장직과 주요간부직을 탐내어 서로 전권을 행사하고자 난전투구를 벌려 '시대일보' 경영은 실패로 돌아감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40쪽 |
시대일보(時代日報) 1924. 3. 31. 창간, 1926. 8월 종간됨 1924. 3. 31. 최남선(崔南善)이 서울에서 창간하였던 일간신문. 발행되었던 신문의 일부가 현재 서울 종로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장 겸 주간 최남선, 전무이사 서상호(徐相灝), 정치부장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 염상섭(廉想燮), 경제부장 김철수(金喆壽)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 신문은 주간지 『동명東明』을 내고 있던 최남선이 1923년 6월 3일 통권 41호로 마지막 호를 내고, 7월 17일 일간신문으로 제호를 바꾸어 발행한 것으로,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제일의 사명으로 내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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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4쪽 - 亞細亞局第3課關機授제32743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시대일보' 바로가기 (시대일보 일부가 종로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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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 사건 1. 설립 경위 - 1924년 9월 시모오카 주지(下岡忠治)가 조선정무총감으로 신임新任되자 보천교에서는 핵심 간부 문정삼과 임경호를 일본 동경으로 파견, 면회하고 보천교의 취지 등을 알리도록 조치함 - 시모오카 총감은 ‘교단 내에 별도 기관을 설립하면 극력으로 원조하겠으니 시국광구단時局匡救團을 설립 조직하라’고 제안함 2. 시국대동단 결성 - 차경석은 동양도덕상 광구단보다는 ‘현재 대세가 대통大同이 아니면 평화할 수 없고 더구나 서양 세력이 점차 동양을 침범하니 이때를 당하여 동양황인종은 상호 대동단결하여 세력을 공고히 하지 않으면 백인종의 화禍를 면키 어려울지니라. 이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대세를 추측한 고로 임술년(1922년) 정월에 12계명을 교시하였는 바 친목동인(親睦同人)이라는 일구(一句)가 바로 그 뜻이요, 동인(同人)은 즉 대(大) 동양민족을 지칭함이니 그러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 칭하라’고 하며 시국대동단이라 개칭·결성, 그 취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적인 강연회를 계획, 실시함(1924~1925) - 문정삼, 임경호에게 시국대동단 조직의 책임을 위임하고 강연회와 활동 내용을 다음과 같이 지시함 “조선 13도에 강연사(講演師)를 선정하는 방법은 각 도에 3인씩 도합 39인을 정하되 3인 중 1인은 우리 교(敎)의 방주(方主)로부터 정하고 2인은 교외인(敎外人)으로 조행(操行)이 방정하고 선구지식이 유여(有餘)하고 언어에 한숙(嫺熟,익숙)한 사람을 선정하라. 선정된 이들은 경성 가회동 진정원에서 입교식을 거행하고 신도가 된 후에 대동단의 주의와 오교(吾敎)의 진리를 학습하였다가 강연할 시는 비위원이 먼저 출발하여 설비를 완료한 후에 교인 중 강사가 연단에 먼저 올라 교리를 설명한 후에 외인 강사는 ‘대동단’의 취지를 설명하라. 대동인도, 몽고 등에 재(在)한 각 신문기자를 매사에 2인씩 또 사회단체 수뇌자 외 총독부 이하 고등관 전부를 초대할지며 발회식(發會式) 행시에는 교중간부도 다수 참석하여야 할 터이니 발회식 거행일을 예(豫)히 본소에 보고하라. 또 대동단 취지서를 내가 검열한 후에라야 인쇄할 터이니 원고를 작성하거든 곧 본소에 부송할지어다.“ - 이어 월곡은 발회식 준비비, 취지서, 인쇄비, 신문기자 및 관리 초대비, 강연회비, 강연 여비 등을 정산하여 금 3만원을 지급함. 이렇게 하여 마침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園)’이 출범하게 됨 3. 시국대동단, 월곡의 설립 취지 벗어나 운영 - 시국대동단의 강연회는 1925년 1월 10일 광주로부터 시작되어 대구, 부산, 군산, 포항, 김천, 금릉, 밀양, 안동, 김제, 김해, 영산, 평양, 통영, 신천, 순천 등으로 이어진 후, 1월 27일 정읍을 마지막으로 끝남 - 강연회는 보천교의 주의를 알리는 것이 아니었고, 비보천교도였던 십일단체연맹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주장과 말잔치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강연회는 구조적으로 친일적 강연 일색으로 인해 대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 임경호, 채기두는 이달호(당시 경성 진정원장)와 함께 중앙명령과 달리, 발회식 일자도 통지 안하고 취지서도 검열을 받지 않은 채 인쇄함. 강사 등도 교단 간부 중에서 한 사람도 채용하지 않고 임의로 선정해 각지에 통지함. - 시국대동단의 대구진정원 강연에서 친일 어용단체였던 11연맹이 강사로 등단, 교도들과 충돌함. 이후 경북진정원장 민영성의 조사결과 본소 및 대구진정원 간부들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임경호, 이달호가) 시국대동단 강연과 일자 및 11연맹 강사 등단을 추진함을 알게 되어 이를 저지함. (강영한,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보천교학술대회, 2017년, 211~217쪽) 4. 시국대동단 활동에 대한 반응 - 시국대동단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민족적 감정에서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 그래서 대동단이 가는 곳마다 청중들은 연단에 뛰어 올라 연사에게 모욕을 주며 구타를 하는 등 수라장을 만들었다. 심지어 보천교의 친일행위를 규탄하면서 교당을 파괴하며 교도를 능욕 구타하는 것이 예사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부산정교부사건' 과 '제주도 성토사건'. - 시국대동단의 활동에 대해 청년지식인층은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이러한 보천교를 ‘친일파라 지목하여 공격’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바로 각 언론과 사회 단체의 ‘보천교 박멸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보천교에 대한 식민권력의 탄압이 중단되거나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청의 단속은 더욱 더 엄중해지면서 보천교는 고립무원의 상태에놓여 있었다.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45쪽) 5. 월곡, 보천교 간부 및 시국대동단원 일본 파견 - 월곡은 시국대동단이 조직된 이듬해 1925년 정월에는 보천교의 대동단 조직의 공적을 알려 동정을 구하기 위한 계책으로 보천교인 3명과 대동단원 9명을 일본에 파견. - 일본에 파견된 보천교 간부들은 45일 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쓰루커치丸山關吉와 같은 저명인사와 언론인들을 초대하여 로비활동을 하였다. 대의사代議士(일본중의원) 의원 수백멍을 두차례 초대하여 보천교 취지와 대동단주의를 강연함. 보천교를 홍보하고 시국대동단의 공적을 알림. 6. 시국대동단 해체 - 보천교 박멸운동으로 보천교가 더욱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차경석은 시국대동단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단원을 각지 경찰서장과 군수에게 보내 협력을 요청하였고, 나아가 보천교 중앙본소 총령원안에 시국대동단간판을 걸고 강연활동의 재정비를 도모했다.(보천교일반, 1926, 89~!90쪽) 이때가 4월 중순이었다. - 총독부에서는 시국대동단이 강연활동을 계속하도록 종용함. 시모오카 정무총감의 면회요구로 차경석은 5월경에 총독부를방문. 시모오카와의 면회는 형식적인것에 머물렀지만, 경무국장 미츠야 미야마츠三失宮松와는 구체적인 내용을 회담. - 1925년 6월30일, 차경석은 시국대동단 해산을 결정함 |
시국대동단에 대한 평가 및 문헌자료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53쪽 "대동양을 일가족과 같이 하여 같은 인종간에 전쟁 참살을 피하고 서양세력의 침해를 피하고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많은 비용을 들이고 정신적 고통과 노력을 인내하면서 먼저 조선, 일본에 취지를 선전하고 정부와 협력하여 대대적으로 장래사업을 경영코자 한 것이다."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12쪽, 213쪽, 230쪽 보천교는 관과 민간으로부터 어떠한 동정도 얻지 못하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침체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친일과 관련해 차경석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실 당시 국내에서는 친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 아니오? 당시 일부 종교단체들이 항일을 했다며 민족종교라고 내세우지만 보천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고 민족의지를 강조한 집단이나 종교가 어디 있었습니까? 보천교는 그래서 일본 총독부가 ‘유사종교’라는 애매한 용어로 희석시키며 말살한 겁니다. 보천교를 놔두고는 조선 통치가 어렵다고 본 거지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보천교가 망한 뒤 1930년대 후반 이후 국내에서 이렇다 할 만한 항일운동집단이나 일제에 대한 뚜렷한 저항이 사라진 것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중략... 보천교 교세가 막강할 때는 총독부까지도 유화책을 쓰며 타협하려는 듯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보천교운동은 국권회복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그러다가 점차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는 1923년 이후에는 총독부 경무국의 교단조직 파괴 공작이 부쩍 늘었다. 교단 내부에 팽배한 위기의식은 다른 때와는 달랐다. 따라서 ‘막연한 회생(回生)’을 전제로 하는 운동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이의가 자주 제기되기도 하였다. 자치주의나 타협주의는 이러한 때에 논의되었으며, 시국대동단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출현하였다. 홍범초, 『범증산교사』(범증산연구원, 1988) 109쪽 시국대동단의 본래 설립 목적은 “대동양(大東洋)을 한 가족과 같이 보고 같은 동양 인종간에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서양세력의 침해를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보천교에서 많은 금전을 투입하고 정신상의 노고를 인내하면서까지 조선과 일본 사회에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 일본 정부와 협력해 장차 대대적인 사업을 경영하려 한 것은 바로 증산의 핵심사상인 대통(大同)건설론에 입각한 것"이다. 홍범초, 『증산교 개설』(창문각, 1982) 98쪽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유사하고, 유교의 대동사상이나 불교의 세계주의보다도 오히려 우리민족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시국대동단의 취지는 ‘일제하’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식민지 정책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약점을 지니게 되었다."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 1992, 63쪽 "보천교운동은 이처럼 친일과 항일이라는 양면이 있으며, 그 내면에는 개인적인 이익을 염두에 둔 친일과는 그 성격이 다른 교리 해석상의 문제가 강하게 내포된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8, 376쪽 "시국대동단 활동의 실패는 보천교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급격히 감소시켰고, 이후 교단이 “더욱 폐쇄적이고 골수 신앙으로 국한되어지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정치적 성향의 교조직이 신앙 단체로 고착화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5.30., 45쪽 "1924년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의 결성은 보천교를 반민족적인 집단으로 매도케 하여 민심이 등을 돌리도록 함으로써 보천교의 분열을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보천교연혁사』 상, 102쪽 "시국대동단을 조직한 본래의 목적은 대동양(大東洋)을 한 가족과 같이 보고 같온 동양 인종간에 전쟁의 참화(慘禍)를 피하고 서세(西勢)의 침해 를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금전을 투입하고 정신상의 고로(若勞)를 인내하면서 먼저 조선과 일본사회에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 일본정부와 협력하여 장차 대대적인 사업을 경영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연사가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서 연사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고, 시국대동단의 본 취지가 그릇 전해져서 보천교는 관민(官民) 양 편의 이해와 동정을 모두 잃고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일반민중의 어육(魚肉)이 되고 말았다." 강영한,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보천교학술대회, 2017년, 211~217쪽 "일제는 보천교가 혹시나 할지도 모르는 민족운동을 사전에 막고 궁극적으로는 위험시 되는 이 비밀단체를 해체시키기 위한 전략도 펼쳤다. 그것은 매우 치밀하여 보천교를 공개시킨 이후 이 단체를 이용하여 우리 민족 내부에서 보천교에 대한 반감, 즉 보천교에 대한 반민족주의적 행태를 노출시켜 민족 내부의 여론을 분열키고, 궁극적으로 민족 스스로가 보천교를 비판·반대, 나아가 박멸하자는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이런 전략에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시모오카 주지下圖忠治의 시국광구단時局佳救團 설립 제안이다." 노종상, 월곡차경석 연구서설, 보천교학술대회, 2017.11, 12쪽 "동아일보 기사의 경우 ‘보천교’ 263건 가운데교주 차경석의 천자등극설 관련기사 24건, 보천교내홍(혁신운동등) 내용 15건, 시대일보사건 10건, 심지어 사기사건(돈사취 등) 19건, 보천교 및 보천교산하 시국대동단 성토 및 박멸기사 36건, ...중략 ...조선일보의 경우 보천교 관련 기사는 265건 가운데 보천교 내홍(혁신운동, 시국대동단 연설회성토) 52건,..." 시국대동단 해체 보고서 ( 주일영국 대표의 외무성 보고서), 1925, 영국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From Sir C.Eliot, (Tokyo). No. 384 Dated 29th July 1925. Reviewed in registry 27th Aug. 1925. F: Japan Dissolution of the Jikyoku dai do dan . Refer to Tokyo dispatch No.99 of 13th March (F 1277/1277/23) and transmits copy Seoul dispatch No.42 of 17th July forwarding extract from "Seoul Press" reporting dissolution of the above association owing to withdrawal of financial support of Futen kyo. Report appears correct as Association's Seoul office has been clos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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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 대동단의 반(反)저항 논리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자료집』 2017) 보천교 운동이 쇠퇴한 것은 기사년(1929)등극설이 경찰의 저지로 무산된 뒤부터다. 하지만 1924년경부터 조선총독부와의 모종의 타협이 있었고, 당시 지식인들은 이런 보천교를 성토하였다. 보천교는 <시대일보> 인수 사건으로 인한 격한 내분과 함께 당시 지식인들의 성토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시국 대동단’을 출범시켰다. 1. 시국 대동단의 조직 1923년 <시대일보> 인수 문제가 계기가 돼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이상호, 이정립 등의 신진 지식인들이 보천교 내 보수파 간부들이 주도하는 교운동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시 보수파 간부들은 일본의 고위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보천교를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을 숭상하며, 상생(相生)을 종지로 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목적으로 인류가 대동화합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라고 선전하였다. 이때 조선 총독부 고위 관리들은 '서양의 세력이 동양을 침입하는 이때를 당하여 동양 황인종은 상호간 대동 단결로써 세력을 공고히 하자'고 강조하면서 시국대동단 결성을 요구하였다. 시국대동단 활동은 곧바로 각 언론 및 사회단체의 ‘보천교 박멸운동’으로 이어졌다. 시국대동단은 실패하였고, 보천교의 대(對) 사회적 영향력은 빠르게 감소하였다. 2. 혁신운동과 교운동의 쇠퇴 시국대동단의 취지는 물론 보천교의 교리적 측면을 고려하였지만 일제의 ‘대동아공영’과 유사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교리적인 한계와 한시적인 천자등극설, 그리고 일제의 교묘하고도 집요한 탄압 등은 보천교운동을 쇠락하게 만든 가장 큰 배경이다.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자료집』 2017, 470쪽~490쪽)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38쪽 전, (상)39쪽 후~48쪽 전, (상)49쪽 후, (상)51쪽 후~52쪽 후, (상)54쪽 전~55쪽 후, (상)53쪽 후~56쪽 전 ▶ 동아일보 - 1925.1.12/ 糞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 대동단(1) - 奇怪 중에. 罔測 중 罔測, 時局大同團 - 1925.1.15/ 糞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 대동단(4) - 玉皇上帝 大怒 - 1925.1.16/ 糞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 대동단(5) - 이상호의 失脚과 임경호의 간계 - 1925.1.17/ 糞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 대동단(6) ▶ 조선일보 - 1925.1.11/ 甲子 後의 보천교(둘) - 1925.3.19/ 兩道大會 또 禁止, 전라북도와 함경남도에서 ▶ 매일신보 - 1925.1.10/ 內鮮融和의 시국대동단, 각파유지와 보천교 악수, 내선인 정신적 결합을 공고히 하고 대동단결하여 문화 향상이 目的, 재작일 白水에서 發會 - 1925.1.18/ 시국대동단 강연성황, 도처에 대성황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38쪽 전~39쪽 후 ▶ 『개벽』 제50호(개벽사, 1924.8.1) 33쪽~34쪽/ 문제의 시대일보 분규의 전말과 사회여론...(편자 주: 보천교의 時代日報 인수 계약서) ▶ 동아일보 - 1924.9.17/ 보천교 혁신회 - 1924.9.29/ 보천교 박멸운동 - 1927.2.15/ 보천교 내홍, 개혁단 측 발표 ▶ 조선일보 - 1925.11.13/ ‘車天子’ 暗殺 陰謀로 普天敎 新舊派 大暗鬪 ▶ 매일신보 - 1924.10.12/ 보천교 內紛 再燃, 밤이 늦도록 다투고 나중에는 격투까지 일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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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김좌진의 만주별동대(滿洲別動隊)에 2만 원 군자금
제공함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5쪽) -포교는 물론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여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려 함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자각하고 민족적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임 -일제, 1923년 7월 만주 독립군단 총사령관 김좌진의 밀사 참모 유정근(兪政根) 검거 후 김좌진과 보천교 간부와의 연락 상황을 발견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6쪽) |
- 김좌진 군자금 사건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1920. 10. 21∼26.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으로 대대적인 병력을 이곳에 투입한 일본 때문에 군자금이 부족해 다음 전투 준비를 못 하는 상태에 처함 김좌진은 보천교에서 받은 2만여 엔으로 부하를 소집하여 일본에 맞서 무력행동에 나섬 (亞細亞局第3課關機授제32743號) |
보천교가
조만식과 박자혜를 통해 만주 정의부 요원을 끌어들이려고 한 이유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자금 지원을 기대하면서 보천교와의 관계를 모색함 -국내 일부 사회단체가 보천교 박멸운동을 펼치던 1924년, 혁신운동으로 보천교의 내분이 격화되었다. 또한 보천교를 두고 친일이니 사기단체니 하는 사회의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이에 보천교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덜어내기 위해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소통을 시도하여 위기에 처한 보천교가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퍼뜨려 민중의 결집을 시도함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 2016, 74쪽~75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 2016, 70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97쪽 네이버 지식백과, ‘청산리 전투’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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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 1924. 3월 상해 임정에서 보천교 본소에 군자금 모집하려 하였으나 경찰에 체포됨 | 동아일보 1924. 4. 1 | ||||
부산 정교부(正敎部) 사건 1924년 12월경 부산 국제관(國際館)에서 시국대동단 강연이 있을 때 청년 수백명이 이를 듣다가 격분하여 연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보천교의 교기(敎旗)까지 찢었고, 을축(乙丑 1925)년 1월 부산 청년들이 경남 각 군의 청년단들을 연합하여 보천교 부산정교부를 파괴하려 하므로, 정교부에서 부산경찰서장을 만나 청년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렸는데도 2월 초에 각 지방 청년들이 모여 시민대회를 열고 보천교 부산정교부 성토(聲討)를 결의함. 보천교에서는 정교부 보호를 위해 수백명의 교인이 농수(籠守), 경찰서에서는 안심하고 해산하라 하여 흩어져 돌아갔는데 2월 7일 오후 2시경에 청년과 시민 수만명이 몰려들어 정교부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정교부의 건물과 집기가 파괴되고 교도 40여명이 중상을 입음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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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성토(聲討) 사건 -1921년에는 (제주)도민의 6~7할이 보천교인이라고 할 정도에 이르렀다. 보천교는 1922년 총독부의 양해를 얻은 뒤 제주도 최남단 모슬포에 정교부를 설치하여 당당히 교권을 집행케 되었고, 1924년 연사들을 이끌고 시국대동단의 취지를 선포하면서 이에 동조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년들이 보천교 성토회를 조직하고 보천교를 비방하는 연극을 공개 상연하는 등 보천교의 박멸을 위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관에서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26쪽) -모슬포에 사는 송영하(宋永夏)라는 사람이 '보천교 성토회'를 조직하여 보천교를 비난하는 연극을 공연하였다. 이에 제주 보천교 정교부원들은 순사에 명예회손죄로 고발했으나 경관은 송영하의 편을 듦 -송영하 일파는 '정교부'의 간판을 맘대로 떼어 내 바다에 집어넣고 보천교도들에 대해 많은 모욕을 퍼부었다. 이에 몇 사람이 항의했으나 친일파 청년배 수천 명이 교도들을 구타하여 중상에 빠뜨렸다. 이에 경관은 수수방관하였다.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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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 1924년부터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에
성전(聖殿) 호천금궐(昊天金閩)이 세워지고 방주공실(方主公室) 50여 동(棟)이 건립됨 - 1925년 3월 15일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들이 수집한 놋그릇과 숟가락을 녹여 무게 1만 8천근의 대종(大鐘)이 주조됨. 이 종은 직경 8척(尺), 높이 12척(尺)의 거대한 규모로 교단 입장에서는 공사 진행으로 교단의 민심 수습에 큰 효과를 보았음. 여기에 중앙 교당으로 십일전(十一殿) 신축을 착공하였는데 그 장엄한 규모는 대궁전을 연상하게 되어 세간에서는 이 신축공사를 차천자(車天子)의 대궐 신축공사라고 했음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 장문산 2001, 295쪽) - 5월 24일 보천교 간부들(김형욱·최종호·김승민) 일본에 수일 체재, 오오모토교 왕인심랑/데구찌 오오진사부로(出口王仁郞)과 만남 - 1925년 7월 해주(亥主) 임경호가 교단을 이탈, 8월에는 화주시(化主) 채규일(蔡奎全)이 이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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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매립공사가 난관에 처함.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수백 명의 인부들이 일손 놓은 채 교금이 계속 낭비됨 - 1925년 정월 16일 보천교에서 신전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상호가 차교주를 만나러 정읍에 내려왔을 때 정읍경찰서가 이상호를 보호한다는 역할을 못했다. 이에 정읍경찰서는 보천교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보천교에서 부지를 매립하기 위해 흙을 운반할 토거(土車)궤도를 부설코자 도로사용 허가원을 정읍에 제출하자 여러 핑계를 대며 허가를 연기하고 채석용 화약사용 허가원과 장대목 운반도로사용 허가원도 내주지 않아 수백 명의 일꾼이 쉬게 되어 막대한 손해를 입게 하였다.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65쪽) →일제가 도로사용 허가원과 채석용 화약사용 허가원, 토목공장 설치허가원 및 장대목(長大木) 운반을 위한 도로사용 허가원 체출을 미루(게 하)고 허가를 하지 않음. 총독부는 각 지방 관청에서 대흥리 본소에 납입하는 성금을 압수하여 교도들에게 반환토록 명령, 재산가들을 협박하여 보천교에 돈의 차용을 금지하도록 압박함 |
교본소의 건설과 십일전 (十一殿) 보천교는 1925년 2월에 성전(聖殿) 십일전(十一殿)의 건축공사를 시작하였다. 십일전 외에도 45채의 전통 와가(瓦家)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로 구성된 교본소를 건설함. 이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당시 민중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교본소 토목공사에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150만원(현 원)이라는 거금이 소요되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31쪽~437쪽) |
『보천교연혁사』
61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68쪽~169쪽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김재영,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행방, 한국신종교학회 , 신종교연구 5권, 2001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9쪽.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1쪽~496쪽 교본소의 건설과 십일전(十一殿) ▶ 張泰善 編, 井邑郡誌(1937.1.20) - 19쪽~20쪽/ 보천교 본부...... ▶ 동아일보 - 1922.2.24/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敎主의 死와 대분열- - 1922.9.18/ 수만명의 태을교도가 정읍에 모여 - 1922.9.19/ 식표만 45만장 - 1922.12.24/ 보천교 본소에 360동 건축 - 1924.9.29/ 보천교 박멸운동 - 1932.6.16/ 宗敎類似團體 敎徒는 十萬 혹세무민하는 각종종교, 最近 總督府調査 ▶ 조선일보 - 1925.3.29/ (時評)훔치와 경찰(一) - 1925.5.12(석간)/ 훔치교에 誘惑된 60여호의 농민 - 1925.11.19(석간)/ 斷髮은 不能 - 1925.11.14(석간)/ 高原에 훔치 蔓延, 우매한 농민 600호를 벌써 그들이 붙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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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과 탄갈자 보천교는 착취와 억압의 식민지 질서를 거부하고 새로운 이상사회를 민중들에게 약속하였다. 이러한 운동에는 민중뿐 아니라 지식인, 재력가들도 가세하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미래의 정부에서 고관대작을 약속 받았다. 대신 교운동의 재정적 뒷받침을 수락하였다. 1925년에 시작된 성전 십일전(十一願)의 건축과 대종(大鍾)의 조성 등은 재력가들의 전폭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경석이 천자(天子)가 되어 대궐을 신축한다는 풍설이 나름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을 때, 가산(家産)을 지고 보천교 본소 주변으로 이주하는 일명 탄갈자(彈揚者)가 속출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일제는 ‘성도운동(聖都運動)’이라 하였다. 당시에 한꺼번에 45만 명이 식사할 정도의 ‘식표’가 발급되기도 하였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자료집』(2017) 425쪽~428쪽) |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과 탄갈자 ▶ 村山智順, 『朝鮮의 類似宗敎』(朝鮮總督府, 1935) 944쪽 ▶ 동아일보 - 1925.1.16/ 계룡산으로 이사 - 1925.1.18/ 훔치교와 시국 대동단 ▶ 조선일보 - 1925.3.2/ 任紙까지 賣喫코자, 소위 평남 훔치 육임회, 평양 청년들은 박멸계획 - 1929.7.18/ ...訢外 蔡圭臺(전 보천교도)이가 대정 12년(1923 2월 15일)... ▶ 光州地方法院 濟州支廳, 刑事事件簿(1940年 形公合 第2號)/ 앞의 사건부에는 ‘강석구(姜석구)는 1917년 보천교에 입교, 정읍에 재산을 가지고 이주, 탕진하고 26년에 제주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 (口述) - “교단의 최고위 간부 이상호와 이성영은 형제로 고향인 해남의 거부였는데, 전 가산을 처분하여 가지고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로 옮겨, 차경석 교주의 수제자가 되었다.” (1990.7.20. 이정립의 처.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 증산교본부에서) - “당시 나의 부친(홍세순)은 충남 천안군 성환의 만석지기였다. 성환읍내 수만 평의 전답을 전부 팔아 보천교에 들어갔다. 나오실 때에는 그야말로 빈털터리였다.” (1995.6.16. 1996.8.23. 홍세순의 아들 홍수영. 천안시 성환읍 미륵사복지회에서) - “현재 대흥리에 거주하는 사람들 거의가 과거 탄갈자이다. 교가 해산되자 오갈 데 없이 이곳에 눌러앉았다.”(1990.11.1. 당시 교인 손장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손장현의 자택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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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음력 4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과 하강충치(下岡忠治), 차월곡 면회 위해 정읍 보천교 본소 방문 - 이들은 시국대동단의 활동 문제 외에도 보천교의 만주 이주를 보천교 측에 요구함. 시국대동단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만주 이주를 요구했지만, 차월곡은 불응함 |
조선총독과 경무국장의 보천교 방문 시국대동단의 조직과 활동은 그간 경찰의 수배를 받아오던 차월곡의 사면 또는 복권과도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1925년 음력 4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삼시궁송(三矢宮松)과 하강충치(下岡忠治 )가 차월곡 면회를 위해 전북 정읍의 보천교 본소를 방문하였다. 이어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이 보천교 본소를 전격 방문하였다. 식민통치에 보천교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회유 1925년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 본소를 찾은 하강충치(下岡忠治)는 시국대동단의 활동 문제 외에도 보천교의 만주 이주를 보천교 측에 요구하였다. 시국대동단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만주 이주를 요구하였지만, 차월곡은 불응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보천교의 만주 이주를 요구한 배경은 좀더 궁구해봐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하강충치(下岡忠治)는 자신의 요구에 불응한 차월곡을 문정삼에게 권총을 주어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뒤에 문정삼, 임경호, 이달호 등은 잇달아 탈교해 보천소 본소를 습격하였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는 보천교운동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반(反)저항적 시국대동단의 결성에 대한 답례 차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1926년에 조선총독 제등실(齋藤實)이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 본소를 방문하였다. 보천교는 조선총독의 방문에 대한 사례 차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60방주제를 전격 폐지하였다. 1927년에 다시 60방주제가 부활하였다. 조선총독의 방문에 대한 답례 차 차경석은 조선총독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조선총독의 면회가 좌절된 이후부터 보천교는 이전의 당당함을 잃어버렸다. 일제 탄압정책에 농락당한 보천교의 대외 교섭 상대는 조선총독이나 경무국장이 아닌 전주경찰서장이나 정읍경찰서장이었다. 조선총독 방문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천리(淺利)가 1928년에 보천교를 방문하였다. 식민정책에 대한 보천교의 협조를 기대하는 방문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보천교를 농락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의 보천교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91쪽~496쪽) |
조선총독과 경무국장의 보천교 방문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회유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총감이 귀임후...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상)69전~71전 ▶ 조선일보 - 1925.3.18/ 보천교의 罪惡은 총독부에서도 認定 ▶ 동아일보 - 1928.10.10/ 淺利 경찰국장이 보천교주 차천자를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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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총독의 보천교 파괴공작 월곡을 독립운동 단체의 수괴(首魁)로 생각하던 일본 경찰은 보천교운동을 공개적으로 노출시켜 조직을 파악하고 해체시키려는 공작을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벌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사이토가 직접 월곡을 방문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이토 총독이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소로 아버님을 직접 찾아와 ‘독립운동을 한다는데 사실이냐’고 확인을 했답니다. 이때 아버님께서는 ‘하늘이 응하고 백성이 따르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이 땅이 우리 땅이니 독립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문화정치를 표방한 사이토는 보천교운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았고, 매수·파괴공작을 진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이토에 이어 온 야마나시도 돈을 밝히는 총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불교재산을 많이 몰수하는 등 죄악이 큰데 보천교에도 많은 금전을 요구했지요. 특히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과 짜고 종교계를 괴롭혔지요. 강대련은 당시 친일파로 유명했는데 많은 일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30쪽~132쪽 | |||||
독립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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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1. 조만식(趙晩植) 권총단 사건 정의부 독립운동 자금('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죄 사건'으로 알려진 '정의부 및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계획에 관한 건) - 정찬규(鄭燦奎), (만주에서) 정의부 제4중대 임시특파원이라는 견서(肩書)를 받고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됨. 보천교는 재외 독립운동을 후원할 것, 그 방법으로 만주에서 개척사업을 일으켜 생활이 곤란한 보천교도들을 이동시켜서 생산기관을 조직하고 그 이익금을 독립단에 제공. 이를 위하여 자본 30만 원을 지출하며, 보천교는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여 자산가 조사, 길 안내 등을 하기로 하였다.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50쪽~151쪽) |
- 천진불변단장(天津不變團長) 조만식이 요인 암살, 군자금
모집 목적으로 본소에 잠입함. 1년
동안 보천교 수호사장(외교업무담당)을 지내다 상해로 망명했던 조만식(趙晩植)이 1925년 요인 암살과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을
가지고 보천교에 잠입, 1달 만에 체포됨. 조만식은 1919년 중국 천진에서 명제세(明濟世) 등
8명과 함께 '天津不變團'을 조직한 바 있다.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5쪽) - 전북 정읍의 한규숙(韓圭淑)의 집에서 조만식(趙晩植), 정찬규(鄭燦奎), 정상엽(鄭常燁), 최상룡(崔尙龍) 등이 검거됨 1926년 최고 1년 6개월의 징역형 선고 받음 - 한규숙은 보천교의 수위간부, 정찬규는 만주의 3부 가운데 하나인 정의부 요원 - 조만식은 체포 직전 차월곡과, 만주에 생산기관을 조직하고 보천교인들을 이주시켜 민족사업 논의, 권총을 이용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함(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147쪽) - 박자혜(朴慈惠)는 보천교 부인선포사(婦人宣布師)로 신채호의 부인으로, 보천교와 만주의 정의부를 연결함. 조만식은 박자혜를 통해 한규숙을 알게 됨. 1923년 음력 11월에 여방주제를 조직한 뒤 1924년 6임 중 공적이 우수한 자를 선화사(선포사)로 임명. |
보천교와 정의부 대한정의부(大韓正義府, 이하 ‘정의부’라 함)는 1920년대 중후반에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한민족의 군정부(軍政府)였다. 체계적이고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설립된 재만 독립군 가운데 하나인 정의부가 당시에 유사종교 또는 사이비종교 단체로 지탄을 받던 보천교와 관계를 맺었다. 1920년대의 주요 신문은 보천교에서 내기로 한 만주 개척비 30만원을 받아가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권총과 실탄을 소지한 채 국내에 잠입했다가 1925년 11월 경에 검거된 사건을 보도하였다. 검거된 이들이 재판을 받던 1926년의 신문에서는 보천교의 30만원을 받아가려던 권총단은 ‘정의부 별동대원’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55쪽~462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 59쪽~75쪽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7. 김철수,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2016. 145쪽, 149~151쪽 보천교와 정의부 ▶ 동아일보 - 1926.11.14/ 민족운동 자금으로 30만원 반출 ▶ 조선일보 - 1925.11.21/ 보천교 최후의 준동, 금전으로 正義府를 농락, 所謂 36만원 問題와 보천교의 罪惡 - 1925.12.14/ 정의부원 검거 사건 내용 - 정의부를 이용하려는 보천교 일파의 음모 - 1925.12.18/ 제2회 연극에 실패한 妖의 보천교(하나) - 1925.12.19/ 제2회 연극에 실패한 妖의 보천교(둘) ▶ 매일신보 - 1925.11.19/ 道形事課에 檢擧된 拳銃團 2명. 사건내용은 절대 비밀, 시국을 표방한 강도인 모양 - 1925.11.21/ 道形事課에 檢擧된 拳銃團의 내용. 활동 중심지는 정읍, 사건은 전혀 미연에 방지 - 1925.11.19/ 정읍 권총단 사건. 連累 3명 또 捕, 不日內 京城에 移送) - 1925.11.25/ 정읍 권총단 내용. 차경석을 威脅하고 30만원을 빼앗으려다 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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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 월곡이 일본 천황(天皇) 메이지(明治) 사진을 걸어 놓고 동도지(東桃枝,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가지)로 만든 활을 쏘았으며, 자신이 등극한 후에 관직을 수여하겠다고 한다면서 황실모독을 내세워 고발됨 | - 20일 만에 불기소 처분 | 보천교의 ‘미신 사교화’ 보천교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당시의 일제는 완벽하게 포착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제는 국민대표회의나 의열단, 그리고 김좌진 등과의 연계를 파악한 일제가 보천교의 ‘자금’을 크게 우려하였다. 또한 보천교와 국외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예의 주시하였다. 특히 보천교와 만주의 정의부 간의 관계를 일제는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일제는 1920년대 초반부터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보천교운동에 동조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비롯한 여타 민족종교의 사교화(邪敎化)를 통해 민심 이격을 꾀하였다. 더불어 내분을 조장하는 등, 교세가 약화되기를 기다렸다가 탄압을 가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6쪽~502쪽) |
▶ 『開闢』 - 제7호, 1921.1.1. 29쪽~32쪽 / 迷信의 감투를 벗으라 - 제10집, 38호, 1923.8.1. 37쪽~341쪽/ 井邑의 車天子를 訪問하고, 晉州 飛鳳山人 ▶ 村山智順, 『朝鮮の占卜と豫言』(朝鮮總督府近澤影印本, 1933) - 591쪽 - 593쪽~594쪽 - 655쪽~656쪽 ▶ 동아일보 - 1921.9.8/ 仙道大王의 제자 이인언의 控訴 - 1922.2.23/ 風說이 전하는 태을교 - 去病解寃의 信條 - 1922.8.19/ 훔치교도와 대충돌 - 1925.1.13/ 분교 중에 준동하는 시국대동단(2) - 玉皇鄭歌 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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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하수일리 박인원(朴仁遠)이 연와대금(煉瓦代金) 청구소송을 제기하여 (교본소) 공사 진행에 차질. 이 재판은 8년간 계속되다가 보천교측이 패소함 | ||||||
- '보천교류는 모두 소탕방침'(다나까 경무국장 담화)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52쪽) | - 조선일보 1926. 6. 1일 기사로 삭제됨 | |||||
- 박종하(朴鐘河), 채규상(蔡奎象) 등이 배교 |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3쪽 | |||||
- 1월에 교령(敎令)으로 60방주 조직을 모두
도태시킴 기존의 방주는 각 지방열이 있어 서로 의견이 불일치하므로 포교관할기관을 대전을 중심으로 둘로 분리함. 북선(北鮮-대전이북, 회장에 임치삼으로 하고 경기, 강원, 황해, 평안, 함경의 교도 관할. 남선(南鮮)은 회장에 김정곤으로 하고 전라남북, 충청남북, 경상남북 교도는 남선 사무소에서 관할 - 1926년 조선총독 제등실(齋藤實)이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 본소를 방문하였다. 보천교는 조선총독의 방문에 대한 사례 차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60방주제를 전격 폐지하였다. 1927년에 다시 60방주제는 부활하였다. - 3월에 부채 문제로 유지하기 힘들어 남북선 사무소 간판을 철폐함(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3쪽 -6월 채규일이 배교 후 경기도 경찰부에 가서 보천교주로부터 받은 금 8만원의 보관증을 위조하여 고소를 제기하고 그 외 박종하, 문정삼, 채규상 등이 합동하여 교주에게 보관한 금전을 반환하여 주도록 무고하고 차교주 천자등극설을 지어냄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4쪽 - 1926년 10월 이달호는 임경호(林敬鎬), 문정삼(文正三), 채규일 등과 연락하여 경성 진정원에 증산교 간판을 걸고 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보천교 혁신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보천교 박멸을 계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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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의 방문에 대한 답례 차, 차경석은 조선 총독의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조선총독의 면회가 좌절된 이후부터 보천교는 이전의
당당함을 잃어버렸다. 일제 탄압정책에 농락당한 보천교의 대외 교섭 상대는 조선총독이나 경무국장이 아닌 전주경찰서장이나 정읍경찰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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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1쪽~49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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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 1927년 1월 10일 이달호 일파는 대흥리 본소에서 곤봉과 죽창으로 만나는
교도를 난타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달호의 누이 이달영(李達榮)의 통기로 이 사실을 알고 대비하였던 수백명의 교도들이 반격을 가해 일대 혼전이
벌어졌으나 혁신파 측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리어 많은 피해를 입은 채 돌아감 - 6월3일 방주제 부활되어 이에 따라 60방주의 교첩(敎帖)이 새로 분급됨 - 6월 4일 28선화사 임명 - 1923년에 설치한 총정원 내에 육사(六司)의 부서를 두어 육사장(六司長) 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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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 이상호 등이 이전에
탈교한 林敬鎬와 용화동에 東華敎 창립 - (총독부) 경무국장 천리(淺利)가 본소 방문함 - 1월 4일 주송수련(呪頌修鍊) 금하고 유교에 따른 正坐修心法(무진설법) 선포 - 1928년 정월 4일 월곡이 교도 수백명이 모인 앞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걸어놓고 음양 진퇴소장(陰陽 進退消長)의 이치와 천지인 배합(天地人 配合)의 도(道)를 3일간 설법(說法)함 - 1928년 정월 초 3일 치성 후 월곡, 사정방주(四正方主, 金木水火의 男女 方主)에게 말하기를 ‘수십년 동안 노력해 온 일이 허사(虛事)로 돌아갔으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함 - 1928년 윤 2월 1일부터 대성전 건축공사를 속행(續行)할 때 사정방사무소(四正方事務所)를 새로 설치하고 각부(各部)를 두어 공사를 분담케 하니 수부(水部)는 토차(土卓) 기와만들기 기와올리기 토역(土役) 담쌓기를 맡고, 화부(火部)는 목재(木材) 목역(木役) 일체를 맡고, 금부(金部)는 제지 철물 단청을 맡고, 목부(木部)는 석역(石役) 수도공사를 각각 분담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사함 |
- (1926년) 조선총독 방문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천리(淺利)가 1928년 보천교를 방문하였다. 식민정책에 대한 보천교의 협조를 기대하는 방문이었을 것이다.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보천교를 농락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의 보천교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2017, 491쪽~496쪽 | |||
1929년 |
십일전 완공(1929. 3. 15) 1925년 기공 이후 4년 만에 완공 - 십일전: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임. 또는 교주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하는데, 경찰의 의심을 피해 십일전이라고 했다 함(즉 十(십) 자와 一(일) 자를 합치면 토(土) 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뜻임 - 역학적으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數)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종(始終)을 뜻한다. - 부지 10,000여 평, 건평 350평, 높이 99척, 제탑(祭塔) 3개, 4대 문루 - 완공된 십일전(十一殿)은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2배 넓음. 웅장 호화로움(십일전-정면 7칸, 측면 4칸, 길이 100자/경복궁 근정전-정면 5칸, 측면 5칸) - 들어갈 때부터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이 걸렸으며, 공사비용만 150만 원이 듦(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 십일전은 남쪽에 솟아 있는 입암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워진 오좌자향(午座子向)임. 현세가 선천(先天)과 달리 운수(運數)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되었다는 의미임 -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정화당(井華堂)∙총령원(總領院)∙총정원(總正院)∙태화헌(泰和軒)∙연진원(硏眞院) 등 45동의 크고 작은 부속건물로 구성돼 흡사 대궐을 연상하게 함 |
십일전(十一殿)에는 태극수 1과
무극수 10을 합한 11의 조화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조화사상이 들어있다. (최제우
동학의 조화사상에 뿌리를 둠.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학술대회자료집 2016, 95쪽~96쪽) 십일전 정면 7칸, 측면 4칸, 길이 100자, 광 50자, 기둥 24자 성탑 내 중앙에 입암산, 왼편에 삼성봉, 오른편에 방장산 그리고 산위에 해와 달, 칠성을 그린 벽화 있었음 경복궁 정면 5칸, 측면 5칸 근정전 내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 벽화 있음 십일전은 1936년 차 교주가 세상을 뜨자 곧바로 일제당국에 의해 불과 수천 원에 경매 부쳐져 모두 뜯겨졌다. '십일전' 기둥 및 건축물 일부는 헐값의 경매로 부쳐져 후일 '태고사'라는 절의 대웅전 건축에 사용되었다. 이 절은 종로에 있는 '조계사'로 바뀌었다. |
- 1929년에 예정된 삼광영(三光影) 봉안식(奉安式)이 ‘기사년 등극설’로 확산되면서 교세가 일시 확장되었다. 또다시 민중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상황을
일제는 좌시하지 않았다. 일제는 삼광영 봉안식을 불허함과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내란음모’로 규정하였다. - 기사년 등극설 소문은 일본 경찰을 자극하여 경찰은 본안식을 무기 연기를 명령하였다. 이후에도 일제는 온갖 이유를 붙여 십일전의 성령봉안식(聖靈奉安式)을 허가하지 않았다. - 일제가 조작한 ‘내란 음모’ 사건은 전라북도 정읍의 교본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경찰이 교본소에 주재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1933년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주된 탄압 이유는 ‘사이비 종교의 혹세무민’이다. 이때 정읍경찰서는 교본소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켰다. -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정읍 대흥리의 경제적 종교공동체는 마비되었다. 1,000여 호에 달하는 5천여 명의 교인들은 아사의 위험에 빠졌다. 이때 차경석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연명케 하는 벽곡(辟穀)을 강조하였지만, 벽곡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발생하였다. 배고픔과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기사년 등극설은 침체에 빠진 보천교운동을 활성화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등극실패는 역설적으로 월곡을 중심으로 한 보천교 세력을 급속하게 위축시킨 원인이 됨. - 학계에서는 갑자,기사년 천자등극설의 진위 여부에 대한 연구가 확대 될 전망. 즉, 천자등극설이란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인 유사종교정책과 민족운동 탄압으로 수행된 보천교 박멸정책과 이에 편승한 주요 여론매체의 동조로 형성된 일종의 '차경석 죽이기'로 허위라는 것이다.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서설, 보천교학술대회, 2017, 상생문화연구소) - 1920년대 말부터 발생한 고소 고발 사건은 모두 월곡 개인에 대한 사기사건이거나 월곡의 등극설(登極說)에 대한 고발이었다. |
이강오,
『보천교』 27쪽 박문기, 『본주』 115쪽~116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72쪽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107쪽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8쪽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서설, 보천교학술대회」 2017, 상생문화연구소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김재영,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행방」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5권, 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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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양식은 중국 천자궁(天子宮)을 본떠 황금색 기아를 사용, 호화의 극치 이룸.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하는
의미 → 경찰의 간섭으로 다시 보통기와 올림 -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가 사용함 - 한반도에서 독립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차천자의 천자 등극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 1929년 3월 15일에 준공식과 아울러 신축된 십일성전(十一聖殿)에 삼광영(三光影, 태극의 본체. 신앙대상으로 모시는 日光影 星光影 月光影, 三靈位)의 봉안식을 거행 → 이것이 '차경석이 기사년(己巳年), 기사월(己巳月)에 신축된 궁전에서 천자등극식을 갖는다'는 소문으로 변함 - 1929년에 십일전(十一殿) 신축공사가 끝나자 이해 3월 15일을 택하여 준공식과 아울러 십일전에 보천교의 신앙 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봉안식을 거행한다고 전국 각지의 교도들에게 통지함. 신축된 십일전 영위봉안식 거행은 차교주가 기사년인 1929년 기사월(己巳月, 4월) 기사일(己巳日, 16일)에 신축 궁전에서 등극식(登極式)을 거행한다는 ‘기사등극설’로 유포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
'- 경제적 공황기에 곡식 금하고 솔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벽곡 시행(수많은 사상자 속출) - 1월 3일 치성시 차경석의 처 이씨 부인 개안으로 시아버지가 옥황상제 신위에 있음을 보았다고 함(4대 교리 폐기, 1934년 5월 새로운 교리 발표) - 2월 총리원장 민영성∙권중기 등 배교 - 3월 10일경 주재소 수석순사부장이 순사 10여명 대동하여 수호사에 와서 경비선을 가설하고 경찰관 출장소라는 간판을 걸고 교중의 주식을 먹으며 주야로 감시함 - 3월 15일 신축성전 내 삼광영 봉안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정읍경찰서 불허 - 6월 4일 차경석 정읍검사국에 출정 (일주일간 메이지 사진 걸어놓고 동도지로 만든 활을 일본천황에게 쏜다는 불경죄와 내란죄, 교주 등극 후에 벼슬을 준다는 사기취재, 옥새 곤룡포 면류관 용상 등 황실용 물품을 비치하고 매일 아침에 조견례를 받는다는 등 고발 당함) - 9월 정읍경찰서 경관 20여명 교단 수색 - 방주 대표였던 채규일이 월곡 명의로 된 거액 8만 원의 보관증을 경기도 경찰부에 제시하면서 보관금 반환청구를 하며 고소, 뒤이여 박종하∙채규상(蔡奎象) 등 주요 간부들이 보관금 반환청구를 하며 고소(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됨) - 교도 이원유(李元有)의 고발 있음. 월곡이 고관대작의 벼슬을 준다는 조건하에 보관증을 받고 금 2만원을 납입, 결국 사기 당하고 월곡이 황제로 등극하여 곤룡포(袞龍袍)∙용상(龍床) 등을 구비하고 있다고 고발함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46쪽 | |||||
1930 |
- 1930년 1월 23일 차교주가 교단 간부들을 모아 치성 때 흥배기복(興拜起伏)을 법도 있게 하기 위하여 신축한 성전의 연진원(硏眞院) 앞 광장에서 예식(禮式)을 연습시키려 할 때 정읍경찰서 고등계
순사부장 마에다 도라요시(前田寅吉)가 와서 서장의 명령으로 새로 건축한 성전의 사용은 허가가 없으니 잠시라도 사용할 수 없다고 금지하여
본소 정침전(正寢殿) 앞뜰에 서 배례식(拜禮式)을 연습함 - 1930년 5월 23일 정읍경찰서 경관 23명이 정읍 대흥리 본소를 방문, 성전 내외와 차교주 가묘(家廟)의 신주독(神主櫝)까지 열어보고, 심지어 차교주 및 교주 형제친척의 거실에 들어가서 천장과 벽장의 벽지까지 찢어보며 교주가 교도들에게 벼슬을 준다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수색하다 그대로 돌아감 - 대흥리 앞 재령봉(宰靈峰)에서 애곡제(哀哭祭, 보천교 망함을 통곡하는 고천제) 지냄 - 1930년 6월 12일 문정삼(文正三)은 한로주(寒露主) 이중창(李仲昌) 등의 내응을 받아 보천교 혁신단이란 이름 아래 교주 토죄문(敎主 討罪文)을 인쇄하여 뿌리고 배교자(背敎者)와 부랑자 등 50여명을 모아 자동차에 분승(分乘) 혹은 도보로 대흥리(大興里) 비룡교(飛籠橋)까지 다가오니 수호사장(修好司長) 원약제(袁若濟) 등 교도들이 폭력을 사용 않고 교유지(敎有地) 통과를 극력 저지하니 출동한 일본 경찰이 오후 5시경 해산령(解散令)을 내려 흩어져 돌아감 - 9월 김중선의 선도교 사건(선도교도의 불온계획 검거의 건) - 11월 (교도) 김언수가 삼성교에 轉敎 강상백이 제주도에 돌아가 水山敎 창교함 |
기사등극설과 잔여세력의 활동 1929년에 예정된 삼광영(三光影) 봉안식(봉안식)이 ‘기사년 등극설’로 확산되면서 교세가 일시 확장되었다. 또다시 민중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상황을 일제는 좌시하지 않았다. 일제는 삼광영 봉안식을 불허함과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내란음모’로 규정하였다. 삼광영 봉안식의 실패와 교본소의 황폐화 일제가 조작한 ‘내란 음모’ 사건은 전라북도 정읍의 교본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경찰이 교본소에 주재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1933년에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주된 탄압 이유는 ‘사이비 종교의 혹세무민’이다. 이때 정읍경찰서는 교본소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켰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정읍 대흥리의 경제적 종교공동체는 마비되었다. 1,000여 호에 달하는 5천여 명의 교인들은 아사의 위험에 빠졌다. 이때 차경석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연명케 하는 '벽곡(辟穀)‘을 강조하였지만, 벽곡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발생하였다. 배고픔과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보천교 잔여세력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 1930년대 초반에 일제의 탄압으로 수많은 교인이 보천교를 이탈하였다. 이들 일부는 각지에서 비밀리에 조직을 복원해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반국가 단체로 몰리면서 탄압을 받았다. 채경대(蔡慶大)는 인도교(人道敎), 증산교(甑山敎)를 연이어 창립하였고, 과격한 반일사상을 유포시켰다는 이유로 검거, 기소되었다. 보천교 교인이었다가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조직하고 스스로 교주가 된 강승태(姜昇泰) 역시 보천교가 했던 방식대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 강원도 평강의 선도교(仙道敎), 전라북도 부안의 원군교(元軍敎), 전라북도 정읍의 선교(仙敎) 등도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0년대 초반 중대 사상사건 총31건 중 6건이 보천교의 잔여세력과 관련이 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503쪽~527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295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70쪽.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 78쪽 기사등극설과 잔여세력의 활동 삼광영 봉안식의 실패와 교본소의 황폐화 ▶ 조선일보 - 1929.7.2/ 정읍경찰 아연 활동, 보천교도 40여 명 검거, 중요 간부 내란죄로 送局, 소위 등극 준비의 음모 발각 - 1929.7.9/ 미신의 窟-井邑, 대흥리에서 本社 特派員 趙岡熙, 發信, 斷末魔의 최후 사술, 차경석의 소위 登極說, 自相踐踏으로 曅竟 內訌이 不絶, 警察에 檢擧, 取調되기까지 - 1929.7.25/ 검사국 취조를 ‘등극대’의 출세라고, 어리석은 교인도 속지않을 말을 지어내서 교인을 속이는 차경석, 醜態百出의 차경석 - 1929.7.22/ 소위 차천자 검은 何物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하)7장 전~8장 후 보천교 잔여세력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 ▶ 「警察情報綴-平高等祕密文書 第839號」(平高祕第839號 昭和10年(1935) 7.26. 平康警察署 京城地方法院檢事正殿) - 0517쪽/ 선도교의 不穩計劃에 관한 件 - 0518쪽~0525쪽/ 1. 仙道敎의 기원 및 조직 - 0525쪽~0531쪽/ 2. 仙道敎의 목적 및 不穩計劃 - 0531쪽~0532쪽/ 3. 布敎의 수단 방법 - 0532쪽~0533쪽/ 4. 布敎狀況 및 신자의 분포 상황 - 0533쪽~0535쪽/ 5. 仙道敎의 詐取 行爲 - 0535쪽/ 6. 平康郡 내에서 仙道敎의 활동상황 - 0537쪽~0538쪽/ 총독각하에게 드리는 보고서 - 0541쪽~0552쪽/ 仙道敎 劃策 상황 ▶ 光州地方法院 濟州支廳 刑事事件簿(1940年 形公合第2號) - .....위 姜承河(昇泰)에 대한 불경.... ▶ 조선일보 - 1935.11.10.(석간) / (차경석을 위시 보천교 간부 取調, 최근 포교 방침이 바뀌면서 某種의 嫌疑를 받아) - 1936.7.25. / (平北경찰과장 아연 긴장, 熙寧 兩郡서 活動, 內容은 보천교 事件과 赤色秘社事件, 今後도 擴大될 形勢) - 1937.8.20.(석간) / (표면은 종교적. 이면은 정치적. 平康서 京城으로 護送車 중에서 金重燮과 일문일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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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
- 교인 강재석은 1922년 여름 하방주(夏方主) 조제승(曺悌承)의 소개로 관작(官爵)을 수여한다고 하여 월곡에게 3천원을 납부했으나 사기당했다고 함(증거 서류 미비로 기각됨) | |||||
- 협정원(協定院) 설치, 그 아래 정의원(正議員) 둠 - 월곡의 교령에 따라 총정원 봉쇄 조치가 내려지고, 이를 대신해 '6임 총무소' 설치됨 - 한병수, 자칭 태을진인이라 하고 경성에 人天敎 별립. 조재승 등 서백일과 함께 구례군 대덕산에 금산사미륵불교포교소 설립 - 4월 己塵조합장 서상근 금산면 청도리에 신단 설치. 설영태 등 일본 천리교와 제휴할 목적으로 교주인장을 위조하여 금전계약, 교도 유인함 - 윤5월 정읍경찰서 측이 조선총독부령 단발령의 「유고문」을 가지고 와서 각 교도에게 교단 명의로 발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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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
1932년 월곡은 교주의 직인을 '인의유신(仁義有信)' 넉자로 새기고 육임을 인의사(仁義士)로 고치고, 1931년에 설치된 '6임
총무소'를 '인의사총무소(仁義士總務所)'로 개칭, 경북 성주(星州)의 유생(儒生)
송호눌을 비롯하여 간부들과 일반 교도들로 하여금 집지례(執贄禮)를 행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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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
- 1933년 부안사람 박인택(朴仁澤)이 홍순옥(洪淳玉) 등과 탈교하여 같이하는
교인들을 모아 부안군 산내면(山內面) 지서리(知西里)에 원군교(元君敎)를 세움 - 1933년 3월 7일 이후 각 도에 정리(正理), 포정(布正), 선정사(宣正士)가 지방 순회하며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는데 지방관청에서는 일종의 유사단체(類似團體)로 취급하여 순회사를 위협, 구타 혹은 고문으로 포교를 방해하고 교기 및 교첩 등을 찢음 - 1933년 5월 21일 경북 부정리(副正里) 이달상(李達相)과 포정(布正) 김승렬(金承烈) 2인이 영덕군(盈德郡) 달산면(達山面) 대지동(大枝洞) 이기대 방(方)에서 돈신록을 검열하고, 그달 23일 돌아오는 길에 인사차로 그 군의 경찰서를 방문한즉 불문곡직하고 단발을 안했으니 국적(國賊)이라 하고 순사 10여 인이 달려들어 삭발당한 후 1주일간 구류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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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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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5월 전문사(典文司)를 통하여 혁신된
교의강령을 발표, 새 교의강령의 뜻을 설명한 대도지남(大道指南)의 내용 공개함 - 월곡, 이영호에게 『보천교연혁사』 편찬 지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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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교단의 교리로 인의(仁義, 1923년 인의도덕 교리 창도)가 제시됨으로 보천교 후기교단의 종교활동이 유교의 부흥운동과 비슷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킴 - 월곡의 말처럼 증산이 말한 대인대의(大仁大義)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보천교 후기 교단이 교의로 표방한 인의(仁義)는 증산의 성훈(聖訓)을 전통적인 유교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고 증산교측 주장함 - 보천교 강령(교강): 인의(仁義)를 핵심에 두고 교강을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이라 함 - 보천교 주의(主義): 상생(相生) 노인을 편히 하고 어린이를 품에 안으며 만물과 나를 하나로 조화시키면 이 우주를 한 집안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4강령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과 주의(主義) 상생(相生)이 인의(仁義)로부터 나오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나 인의(仁義)를 알고 행하지 아니하면 열매 맺지 아니하는 헛꽃이여 궤 안에 든 명주(明珠)와 같아 모두 공(功)을 볼 수 없는 것이니 4강령과 상생은 인의를 행하는 요령(要領)이다. - 보천교 목적: 대동(大同) - 연중 7대 치성(七大致誠) 1. 정월 1일 2. 정월 3일 3. 춘분(春分) 4. 추분(秋分) 5. 동지(冬至) 6. 하지(夏至) 7. 8월 15일 *정월 3일: 증산이 교통을 전수해 준 전수일. 증산 탄강일과 화천일은 7대 치성일에 빠짐(증산의 신권 숭배 중지) |
교본소와 십일전 훼철 1920년대 후반부터 경찰은 정읍의 보천교 본소에 상주하였다. 조선총독부 간부에서 말단 경찰, 그리고 기자들까지 보천교로부터 금품을 갈취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경찰이 노골적으로 보천교 교금을 압수하였다. 보천교는 1929년에 노선의 변경을 한때 시도하였다. 1932년에는 개신 유교에 가까운 노선으로 변경을 시도하였다. 노선 변경의 시도는 신파와 구파로 갈려 격한 대립을 낳게 되었다. 예컨대 강증산을 교조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쪽과 강증산을 교조에서 배제하려는 쪽으로 갈리어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경찰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교단에 해산 권고 조치를 내렸다. 일제의 탄압과 내분으로 지리멸렬해 있던 1936년 3월 차경석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였다. 차경석의 타계 소식을 접한 전주경찰부와 정읍경찰서 소속 형사대 70여 명은 교의 치성금 수합금지 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중앙본소를 수색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 정읍의 천원주재소 소속 경찰들이 중앙본소에 유숙하면서 건축물 내부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또한 협정원장과 수호사장, 경리사장을 불러서 십일전(十一殿)을 위시한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당국에 제공하라고 위협하였다. 1936년 6월 6일 주요 간부 24인을 연행해 보천교 해산, 신건축 포기, 삭발 등을 강요하였다. 경찰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허락없이 십일전 내 개금된 성상과 제기, 신앙대상인 삼광영(三光影)벽화와 도금된 제단 등을 뜯어갔다. 같은 해 6월 15일 정읍경찰서 소속 경찰 수 십 명이 난입, 중앙 본소 시설물들을 철거해갔다. 정읍경찰서에서 보천교의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경매하려 하자 정읍의 유지들이 '보천교 건물은 역사상 일대생광(一大生光)인즉 이곳에 대학교와 병원을 세우자'며 경매에 참여하려 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보천교의 씨앗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 상징물들의 존재를 목적으로 백만 원에 낙찰을 원한다고 한들 낙찰을 반대하겠다'며 관련 경매를 반대하였다. 경매에 앞서 경찰은 유령단체인 ‘보천교재산처리위원회’로 하여금 재산포기 각서를 쓰도록 하였다. 십일전을 두고서 경매에 들어갔으나 어느 누구도 경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인 강호장차랑(江戶長次郞)이 경매가의 절반인 500원에 십일전을 낙찰 받았다. 십일전의 건축 비용은 50만원인데 비해 경매가는 터무니없는 500원이었던 것, 낙찰자인 강호장차랑은 경찰이 하수인이었으며 그 대금 500원도 경찰로 넘어갔다는 전언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십일전 경매는 정상적인 경매가 아닌 압수였다. 강호장차랑이 낙찰받은 십일전을 조선 불교계가 사들여 서울로 이축하니, 현 조계사(曹溪寺) 대웅전(大雄殿)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자료집』 2017, 527쪽~532쪽) |
『대도지남』 1쪽~6쪽 『道訓』 108쪽~109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3쪽, 114쪽, 116쪽 ,117쪽, 118쪽, 295쪽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71쪽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527쪽~536쪽 교본소와 십일전 훼철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속)7쪽 전~12쪽 전/ 1936년 3월10일에 聖師主의 병세 더욱 심하사 회춘의 힘이 없으므로 聖母主 명에 의하여 병탑을 정침으로 옮긴 후 下世하시니, 즉 申時라. 부고 및 전보를 각 도 正理所 郡敎約所 布正 집지인에게 발송하다... 교운동의 소멸과 한국의 종교·사상 단체의 위축 ▶ 『最近に於ける朝蘇の治安狀況-昭和 8年. 13年』(朝鮮總督府警務局,1933.1938) - 106쪽/ <종교 및 종교 유사단체의 상황> - 111쪽/ <종교 유사단체> ▶ 조선일보 - 1935.2.10/ 불교를 중심으로 四大 종교 선택 결정. 60여개 類似 종교단체는 통제 정리, 當局의 宗敎 復興 운동 - 1936.6.10/ 전조선 類似宗敎에 不日 中에 大鐵槌. 普天敎·甑山敎·東華敎 등 종교적 行事의 撤廢를 斷行 - 1936.6.14(석간)/ 民衆을 欺瞞榨取하는 邪敎團體 일제 탄압. 보천교를 위시하여 유사종교는 剿滅코, 公認宗敎統制도 强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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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신사참배 강요, 유사종교 해산령 |
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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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3월 10일 교주 차경석 사망 - 보천교 해체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경부 등 경관 50여명 출동하여 장례를 경계함. 전주경찰부 지휘로 교증(중) 회의를 정지시킴. 각 지역의 교도들의 운집을 <보천교에 대한 존폐문제가 결정되기 전>이라는 이유로 돌려보냄 총독부 경찰부는「보천교 교무집행은 일체금지, 정리소 교약소 간판을 철폐, 성의금 취급자 엄벌」공문 발송 - 4월 30일 일제 ‘심전개발정책’ 실시 - 6월에 경찰서장이 보천교의 해산과 십일전 건물의 포기, 교인의 삭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십일전 경매를 행함 |
교운동의 소멸과 한국의 종교·사상 단체의 위축 1935년 일제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보천교를 탄압하였다. 탄압의 명분은 또 하나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신앙을 내세우지만 항상 정치적 지위 획득을 그 이상으로 삼거나 이를 표방한다’는 이유였다. 1936년 차월곡의 타계로 보천교는 소멸하였다. 보천교운동의 소멸은 기성 종교나 사상 단체에도 큰 부담이 되었다. ‘농촌진흥운동에 저해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민족종교는 물론 당시 공인종교까지 통제하고 더 나아가 한국의 종교·사상단체의 활동까지 억압하였다. 차월곡의 타계를 계기로 한국의 ‘유사종교 취체 강화책’이 본격화되었고, 더불어 한국의 종교·사상 단체는 크게 위축되었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533쪽~5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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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
1945 |
- 11월 3일 김구는 (~로부터) 여의도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측근들에게 "우리가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빚은 정읍 대흥리에 본소를 둔 보천교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것을 말함(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100쪽) | ||||
1946 |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선언' -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선언을 함.(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1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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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이후 선도(仙道)라는 이름의 종교운동에 차경석이 중심역할을 할 때부터 '남조선운수론'이라는 개념과 교리를 가지고
있었음. - 동학 교주 최제우는" '만국활계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이라는 표현을 하며 12국 괴질운수를 당할 세계 차원의 위기에서 모든 나라를 구원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계책이 남조선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함. - 이승만의 '정읍 선언'에서 남한 단독정부수립과 보천교의 '남조선운수론', 동학의 '만국활계남조선'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107쪽~108쪽) - 전혜송 일본 코난대 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이승만이 정읍을 선택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발언을 한 것은 물산장려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던 이순탁(李順鐸)의 존재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과 인촌 김성수, 동아일보와의 관계도 그 배경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119쪽) |
포츠담
선언 - 1945년 7월 26일 미∙영∙중 수뇌가 독일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 원칙 협의하고 제8항에서 한국의 독립 재확인 - 1945년 12월 모스크바 미∙영∙소 삼국외상회의 8.15해방 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에 각각 미군과 소련이 진주한 상태에서 한국 독립의 절차를 논의.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한 5년간 신탁통치 방안을 작성 이에 대해 남북한 단체들이 모두 반대하였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북한 좌익세력이 갑자기 수용함. 남한의 김구, 이승만 등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반대운동 전개 미소 양국의 입장 차이와 남한 우익세력의 신탁통치 반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5월 6일 성과 없이 휴회. |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 2016) | ||
1947 |
- 1947년 월곡의 아우 차윤덕(車輪德)이 보천교의 교리는 자기의 형 차월곡이 창도한 것이니 월곡을 보천교의 교조로 신봉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증산은 광인(狂人)이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폭언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
1961 |
- 1961년 12월에 구파측은 문교부의 한국 고유종교 통합계획에 의거하여 동도교(東道敎)에 편입되었으나 뒤에 신구파간의 분쟁사실을 안 문교부는 동도교 편입을 각하(却下)함 | |||||
1970 |
- 1970년 음력 11월 1일(양11. 29) 보천교 구동서(具洞書) 이순만(李順萬) 김진화(金鎭華) 김관선(金觀善) 김병삼(金炳三) 등은 증산교의 배동찬(裵東燦) 박기백(朴者伯) 정혜천(鄭惠天) 한인희(韓寅熙)와 법종교(法宗敎)의 이봉기(李奉基) 김노택(金魯擇) 김형길(金炯吉) 등과 함께 증산천사 진리연구준비위원회 결성 시도, 이들과 달리 다음날 음력 11월 23일 동도교(東道敎) 연례 총회에 참석한 홍범초가 증산신도친목회(曾山信徒親睦會)로 참여하자 여기에 찬동한 교인들이 원평(院坪)에 있는 보화교(普化敎)에서의 동도교 총회 끝에 법종교에 모여 증산신도 친목회를 결성하기로 합의 | |||||
1973 |
- 증산종단 협회가 1973년 음력 3월 27일 규모가 큰 증산교단 통일회를 법종교(法宗敎)에서 창립하여 회장에 이환우를 추대할 때 보천교도 강덕중(姜德中)이 부회장에 피신됨 | |||||
1975 |
- 1975년 양력 5월 25일 법종교에서 보국안민 결의대회에 보천교 참석, 1980년 음력 9월 19일 법종교에서 증산종단연합회정화대회(甑山宗團聯合會淨化大會)를 열어 법도(法度) 있는 교단 건설, 국민정신을 바로 잡을 새 윤리의 확립, 주체사상의 확립 등 종교차원의 정화(淨化)를 추진할 때 보천교 참여, 1983년 음력 6월 24일 금산면(金山面) 금산국민학교 교정에서 평화통일기원식에 보천교 총령원장 강덕중(姜德中)이 연합회 부회장이 됨, 윤기선은 기원문 봉축함 | |||||
1985 |
- 1985년 11월 16일 서울 종로구 청진동 서울관광호텔에서 민족종교 상호 간의 권익과 발전을 도모하며 나라의 융성과 세계평화 건설 목적으로 하는 한국민족종교협의회를 창립할 때 보천교 참여, 강덕중 총령원장이 자문위원 됨. 1986년 12월 2일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민족종교지도대회를 개최할 때 보천교에서도 강덕중, 김관선(金觀善) 참여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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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대웅전에 남은 보천교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 2017. 12. 13 1894년 겨울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조선 중앙군-일본군 연합 부대가 맞붙었다. 동학군은 참패했다. 참전했던 동학 접주 차치구(車致九)는 관군에 처형됐다. 1921년 그 아들 차경석은 보천교(普天敎)를 창시했다. 증산교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의 제자다. 보천교 교리 또한 후천개벽이었다. 천지개벽의 문이 열리고 조선은 세계의 종주국이 된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차경석 자신이 있었다. '시국(時國)'이라는 국호까지 내세웠다. 식민의 시대, 새 국가를 이미 세웠다고 선포했으니 사람들 이목이 쏠렸다. 갑자년 혹은 기사년에 차경석이 왕위에 오른다는 말이 돌았다. 사람들은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라 불렀다. 잡지를 발행하고(1922. '보광'), 신문을 인수했다(1924. '시대일보'). 1922년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와 전북 정읍에 보천교 공동체를 건설했다. 본전 이름은 십일전(十一殿)이라 했다. 십일(十一)은 흙(土)을 뜻했다. 신도 수가 60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까지 나왔다(서울대 종교학과교수 故 윤이흠). 보천교가 한 일은 이러했다.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 5만원 지원, 1924년 김좌진에게 군자금 2만원 제공(1924년 11월 26일 일본 외무성 기록), 1925년 만주 정의부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간부 체포. 1920~1940년 독립운동과 관련해 조선일보에 실린 보천교 기사는 모두 83건이었다.(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막강한 조직력과 신도수, 그리고 독립에 대한 의지로 총독부에는 아주 힘센 깡패 같은 존재였다. 사이비로 몰아붙이는 총독부의 와해 작전 속에 차경석은 1936년 죽었다. 이듬해 총독부는 유사종교 해산령을 공포하고 보천교를 해산시켰다. 정읍 보천교촌은 철거됐다. 십일전은 경성에 창립된 불교 사찰 태고사가 매입해 1938년 서울로 옮겨갔다. 태고사는 훗날 이름을 조계사로 바꿨다. 지금 조계사 대웅전이 바로 그 보천교 본전이다. 외벽에는 민화풍 조각이 그대로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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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란 교명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은 1922년이다. 『보천교연혁사』에 의하면 포교 원년을 1909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증산이 '화천(化天)한 해이다. 즉 증산의 사후 월곡이 교통을 이어받아 보천교가 창립되었다고 본다. 보천교란 교명이 생기기 이전에는 '태을교(太乙敎), 선도교(仙道敎), 훔치교, 천자교(天子敎) 등으로 불렸다. 김형렬의 교단은 태을교, 고수부와 차경석의 교단은 선도교로 구분되었고, 외부에서는 외우는 주문에 따라 태을교, 훔치교 등으로 불렀다. (김방룡,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 23쪽) 보천교 교도의 숫자는 발표 주최측이나 연구자에 따라 다소 다르다. 1925년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 밀러의 워싱턴 국무성 보고서에는 그 수가 600만 명이라고 하였다. 보천교 내부와 총독부 자료에는 공통으로 나오는 간부 55명이 나오는데, 1명이 10명을 포교해야 간부가 될 수 있었다는 근거에 따라 신도수를 600만으로 추산(윤이흠 교수, 서울대 종교학과)했다. 이화여대 박준식 교수는 300만~600만으로 추정했다. 박종렬 교수는 600만으로 추산했다. 1935년 무라야마 지준의 연구에서는 1920년대 한때 간부가 55만 명이었지만 1934년에는 1만 6000명으로 급감된 것으로 나온다. 1920년 전후에는 1930년대와 달리 수백 만 명에 달하는 보천교 열풍이 불었다. 보천교의 교세는 부침이 컸지만 한때는 한반도에서 중심적 종교사회 세력이었다. (남창희, 「보천교의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 2016, 99쪽~100쪽) 보천교 비판세력 ● 1920년대: 보천교 비판세력은 민족주의좌파, 기독교계, 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 가운데 '서울파'와 '화요회' 등이 극좌파로서 이들이 보천교 박멸운동을 전개함 ● 1930년대: 반종교운동의 영향(좌파). 1930년대 지식인들의 보천교 인식은 이전보다 더 부정적임. 이들 지식인의 인식은 일제의 인식과 동일 계몽과 미몽 사이 ● 新과 舊, 正과 不正, 科學과 迷信 등이 당시 지식인들의 담론이었음 ● ‘개벽’(천도교)과 ‘보광’(보천교)의 대결 ● ‘개벽’ - 보천교를 새로운 사조를 따르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매도함 종교와 미신이라는 문명 개화적 기준의 이분법적 잣대로 보천교와의 차별성 부각함 그러나 보천교는 ● 당시 민중의 심성: ‘계몽’보다는 ‘救世主 願望’에 바탕 한 보천교의 새로운 국가 건설(후천개벽지상선경 사회건설)에 쏠림 ● 새로운 국가건설 -> 후천선경국가 건설이라는 풍설은 '천자등극 운동'으로 왜곡됨 ● 보천교운동→민족 • 민중 운동. 근대적 민족의식은 미약해도 '민족적(혈연, 역사, 문화) 자각을 함 ● 당시 지식인 - 무지몽매로 표현되는 '미몽'과 ‘야만’이라는 자기모습(보천교)을 부정하려고 ‘문명’ 또는 ‘계몽’을 강조 ● 당시 민중의 심성 - 복벽적 사고 잠복. 당시 복벽적 사고는 조선왕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救世主願望' ● 도시 지식인들의 '천자등극설' 인식 - '무지'하고 '몽매'한 상징적 사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보천교 ● 대한독립 의군부 - 복벽주의를 기반 ● 대한민국 임시정부 - 공화주의를 기반 ● 의열단 -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를 기반 ● 조선민족혁명당 - 사회주의를 기반 ● 보천교 - 후천개벽주의 or 선도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보천교 ● 보천교운동 = 민중운동 ● 당시 민중 = 농민 ● 농민 = 미 계몽, 미 계몽 = 惡, 악 = 보천교 ● 하지만, 민중의 요구에 따라 발생된 게 보천교. 따라서 보천교운동은 곧 민중운동임 ● "유사종교는 오히려 민중의 생활요구에 의해서 발생하고 민중의 종교의식에 의해서 성장하며, 민중의 생활사상에 이끌려 활동한다. ...... 유사종교가 민중을 희롱한 게 아니며, 유사종교의 활동이 오히려 민중의 생활 요구에 응한 것" (村山智順) 일제강점기, 보천교를 보는 관점 ● 일제 - 독립운동단체로 인식, 탄압함 ● 민중 - 신정부 건설운동으로 인식, 적극 참여함 ● 지식인 - 무지 몽매한 미신사교로 인식함 ● 일부 지식인 - 보천교 운동에 참여함 현, 학계의 보천교를 보는 관점 ● 한국 민족⦁민중 운동을 보는 학계의 고정된 틀은 다분히 이분법적임 - '친일'과 '항일'이라는 고정된 틀 속에 갇힘 ● 제3의 가능성(후천개벽, 지상선경사회 건설 등)은 인정하지 않음 ● 최근, 보천교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달라짐. 민족⦁민중운동으로 바라보려는 학자들이 다수 ● 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등에 대해서는 관련 연구를 지원함 그 결과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민족운동사 부문에 관련 내용이 수록됨 ● 온라인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1968년 8월 정부의 영구 보존 및 준 영구 보존의 문서 등을 수집⦁관리⦁보존 및 열람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국가기록원에서 분류해 놓은 독립운동판결문임 ●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에서 여타 종교 관련 검색어로 검색 시- 아예 없거나 극소수의 판결문만 나옴 ●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을 봐도 여타 종교보다 보천교의 항일 건수가 몇 배 많음 ● '독립운동관련판결문'을 검색해 봐도 여타 종교의 판결문보다 보천교의 판결문이 상당히 발견될 것으로 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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