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쇄 발행일 : 제2020년 4월 18일
발행번호 : 차치구-20200418호
발행처 : 월곡차경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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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업적

시대 배경

출처

※ 참고한 논문과 책에서 확실히 날짜가 언급된 것만 날짜를 넣었습니다.

19세기 전반적 상황

 19세기 조선시대 봉건적 사회의 붕괴와 함께 실학의 등장으로 평민들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곳곳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혁명적 이념이 등장하게 되었고 최제우에 의해 서학(천주교)에 대립되는 인내천 사상을 제창하게 되었다.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급격하게 동학에 동조하게 되었고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궐기를 통한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동학운동 [東學運動] (두산백과)

1851년

조선
(철종 2년)

 1851년 7월 3일 출생. 1894년 12월 29일 사망.
- 본명 차중필(車重弼), 자(字)는 치구(致九), 본관은 연안(延安)
- 1851년(철종 2년)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현 전북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에서 4형제의 막내로 태어남
- 장남인 월곡과 윤경, 윤칠, 윤덕 등 4명의 아들을 둠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1992) 6쪽
- 안후상 외, 『19세기 사상의 거처』 (도서출판 기역, 2013) 131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179쪽

1871?
(확인 필요)

조선
(고종 8년)

 평범한 사람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차중필은 성년이 되어 밀양(密陽) 박씨(朴氏)와 결혼    

1879년

조선
(고종 16년)

 - 천석지기 땅을 쓰면서 소작료를 내지 않는 양반들에게서 돈을 받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줌
- 9월 경의 일이다. 입암면 접지리 인근 지선동(芝仙洞)이라는 마을에 천석지기 임감역(任監役)이 살고 있었다. 임감역의 땅에 양반들이 소작료를 내지도 않고 맘대로 쓰자, 임감역은 차치구를 찾아가 양반들에게 소작료를 받아서 쓰라고 했다. 차치구는 소작료를 내지 않은 양반들을 불러 놓고 힘깨나 쓰는 두어 사람을 그 자리에서 꺾어버렸다. 그러자 양반들은 즉시 소작료를 가져왔다. 차치구는 받은 소작료의 일부는 임감역에게 되돌려 주고, 나머지는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 안후상, 「車月谷 出生에 관한 小考」『신종교연구』 2 (2000) 62쪽~63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 179~180쪽
- 흥덕의 접주였던 차치구는 열성으로 가혹한 고리대를 정리해 주고 억울한 송사를 풀어주거나 강제로 빼앗은 장지(葬地)를 되돌려 주는 일을 함    

1879년
9월

- (고창군) 연기동으로 이사 옴
- 연기동으로 이사 온  차치구의 부인은 바위 위에 청수를 떠놓고 극진한 치성을 드린 후 월곡을 잉태
   안후상 외, 『19세기 사상의 거처』(도서출판 기역, 2013)  134쪽

1880년
7월 3일

조선
(고종 17년)

 월곡 탄생    안후상 외, 『19세기 사상의 거처』(도서출판 기역, 2013) 131쪽

1888년

조선
(고종 25년)

 고창 연기동을 떠나 정읍 대흥리로 이주  1888년 이후 전국적으로 민란 발생  안후상 외, 『19세기 사상의 거처』(도서출판 기역, 2013) 130쪽

1892년

조선
(고종 29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수시로 농민들의 노동력과 쌀을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착취 -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
-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1893년
1월

조선
(고종 30년)

 조병갑이 해임된 뒤 다시 고부군수로 오자 동학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남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13~16쪽

1893년
11월

 - 전봉준 등 농민대표들이 조병갑을 찾아가 심한 세금 징수와                              노역 등을 시정할 것을 요구 - 농민들의 요구가 묵살되고, 농민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    

1893년
12월

 

 - 차치구는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를 설득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명분을 내세우는 조건 제시 - 차치구는 서구열강과 주변 강대국들인 러시아와 일본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야심으로 침략하는 것에 맞서 보국안민(輔國安民 :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이라는 명분을 내거는 조건으로 참여함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1992) 6쪽

1894년
1월

조선
(고종 31년)

 1월 차치구, 전봉준과 함께 손여옥과 정읍군에서 장령으로서 농민군 5,000명을 이끌고 참전    안원전, 『증산도(하)』 (대원출판사, 1991)  274쪽

1894년
2월

- 차치구는 전봉준을 비롯한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 20인방(幇)과 함께 고부 관아 습격
- 차치구는 농민군 1,200여 명을 이끌고 맨 앞장에 섬
-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음
① 전운사를 폐지하라 ②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③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④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⑤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⑥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⑦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⑧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
  -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 안원전, 『증산도(하)』 (대원출판사, 1991)  274쪽

1894년
2월~3월

- 고부군수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하여 전주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에게 보고하고, 김문현은 이를 다시 정부에 알리게 되었다.
- 정부에서는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 되자 그를 체포하여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동학운동 [東學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17쪽

1894년
3월

 차치구는 안핵사로 부임한 이용태가 농민군을 고문하고 집을 불태우자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유한필, 손여옥 등 혁명군 최고 책임자들과 함께 녹두장군 전봉준 바로 아래 서열인 장령(將領)으로 참전    안원전, 『증산도(하)』 (대원출판사, 1991) 274쪽

1차동학농민운동
1894년
4월~5월

 1차동학농민운동
- 차치구는 전봉준이 4월 하순,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알리자 약 3,000여 명의 농민군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외치며 다시 봉기했다. 이를 1차 동학농민운동이라 함
- 전봉준이 외세와 집권층에 반기를 들고 백산에서 농민 대회를 열었다.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흥덕(興德) 등의 접주들과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참여. 백산에 모인 농민군은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움
- 1차 동학농민운동 때  차치구는 동학군에 합세하여 고부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정읍, 고창, 함평까지 점령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60쪽 제8장 인물지 (신아출판사, 1994년 3판)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4~6쪽, 16쪽, 16쪽 각주16)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84~86쪽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105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18쪽

1894년
5월

- 동학농민군 부안관아 습격
-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이김(5월 10일)
-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음
- 정읍 진격
- 전주성 함락(5월 31일)
홍계훈의 관군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관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 톈진 조약에 따라 청군과 일군이 출동 청의 이홍장이 충청도 아산만으로 2,800명을 이끌고 출동 일본이 8,000명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 동학군은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 -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황토현 전투
- 동학농민군에 대한 급보를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부보상대(負褓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함.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임.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
-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함
- 동학농민군이 수세에 몰린 것을 안 홍계훈은 이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함. 즉 정부는 고부군수·전라감사·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함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톈진 조약
중국 톈진에서 청국과 여러 외국 간에 맺은 조약의 총칭 1884년 갑신정변 후 일본과 청이 맺었다.
텐진 조약의 내용은 조선에서 '청 · 일 양국 군대는 동시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이다. 이 조약은 1894년 청 · 일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이에 일본 군대는 텐진 조약에 의거해 군대를 조선에 파병할 명분을 얻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톈진 조약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주)신원문화사)
[네이버 지식백과] 톈진조약 [天津條約(천진조약)] (두산백과)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1쪽
-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1894년
6월

 전주화약 성립
- 전주화약 성립.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10여 일 만에 철수하고 해산
- 차치구는 전봉준을 비롯한 2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순창과 남원에 머무르며 사태 관망
- 전라도 53개 주와 읍에 민간자치 개혁기관인 집강소 설치(6월 22일)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2쪽

1894년
6월

- 조선정부는 전주화약이 성립되자 청군과 일본군 철수를 요청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3쪽

1894년
6월

- 일본은 조선정부에 내정간섭을 하며 철수하지 않음
- 일본은 새벽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대원군을 내세운 친일정권 수립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3쪽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생
- 일본은 충청도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함 포격
   

2차 동학농민운동
1894년
9월

 2차 동학농민운동
-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 팽배
-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가 우세해짐
- 차치구는 전봉준과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내세우며 2차 동학농민군 봉기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4쪽

1894년
10월

 차치구는 삼례에서 11만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4쪽

1894년
11월

 세성산 전투
- 차치구,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기 전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움
- 동학농민군은 최신 무기로 공격하는 관군과 일본군에 버티다 37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함
- 세성산 전투의 패배는 농민군의 전략과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북접의 우수한 전투부대가 궤멸되었을 뿐 아니라 지리산 요충지역의 상실과 함께 관군의 병력을 공주성 수비에 집결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줌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5~26쪽
- 문화콘텐츠닷컴, 「세성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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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동학농민군 공주 공격 이인 전투
- 차치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침
- 동학농민군은 뒤에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
- 김개남의 농민군 5,000명이 북상하여 함께 싸우고 공주로 진격을 준비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우금치로 후퇴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7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180쪽

1894년
12월

-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 1만여 명 중 500여 명이 살아남음
-  7일간 우금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지는 못함
-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동학농민군이 궤멸
-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 (도서출판 신서원, 2002) 28쪽

1894년
12월

 - 차치구는 우금치 전투와 원평•태인전투에 참전했다가 패하자 전봉준을 비롯한 10여 명과 함께 장성의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에 몸을 숨김. 
아들 차경석도 함께함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91쪽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139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0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이이화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 103~105쪽 (역사비평사 1994.1.15.)
-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57쪽 (한겨레신문사, 1994.4.20.)

1894년
12월 29일

-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정읍 고향으로 옴 - 정읍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냄
- 정읍군 소성면 광조동(광주골) 최제칠(崔濟七)의 집에 피해 있다가 밀고로 관병이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자 스스로 붙잡힘
- 흥덕 현감 윤석진은 차치구를 고문하고 동네 앞산에서 분살형(焚殺刑)을 시킴
- 아들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한 후, 유골을 내장사에 뿌림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60쪽 제8장 인물지 (신아출판사, 1994년 3판)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7~9쪽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96쪽, 140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0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이이화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 103~105쪽 (역사비평사, 1994.1.15.)
-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60쪽 (한겨레신문사, 1994.4.20.)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2쪽~25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127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 181~183쪽
-  『일간스포츠』  2018년 12월  18일 「차길진의 갓모닝」 '내장사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