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 제2020년 4월 18일
발행번호 : 차월곡-20200418호
발행처 : 월곡차경석기념사업회
※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대중은 그 시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차월곡도 조선시대 말부터 일제강점기, 그 시대 대중이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21년 황석산 고천제에서
선포한 국호 '시국(時國)'은 시대에 당면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월곡의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 나라 이름을 ‘시(時)’라고 규정한 것에서부터
보천교 운동의 목적이 순수하게 종교를 통한 사회구원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천제는 월곡이 교주 취임을 목적으로 시행했지만, 실제는
당시 민중들의 희망이요 월곡의 야망이기도 했던 새로운 왕조(王朝),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행사였다.
이에 '연대기'에서는 차월곡 활동 시기의
국내외 정세와 동시대를 살면서 차월곡을 중심으로 서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여러 인물을 부분적으로나마 함께 실었다.
'연대기'는 앞으로 논문과 책의 자료를
통해서 꾸준히 수정·보완할 예정이다.
(월별로 주요 사건을 실었지만,
확실한 시기를 모르는 경우는 '?'로 기입했다. 자료가 확인되면 보완할 예정이다.)
국내외 정세 |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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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출처 |
- 신미양요
- 청일수호조약 조인 - 메이지 4년 |
1871 |
고종 8년 |
증산(1871~1909) 11월 1일 탄생
-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
홍범초의 『범증산교사』(한누리출판사, 1988) 91쪽에는 탄생일이 9월 19일 자시로 나옴 | |
- 고종, 제2차 수신사(김홍집) 일본에 파견 |
1880 |
고종 17년 |
월곡 탄생
- 7월 3일(음력 6월 1일) - 전라도 흥덕군 부안면 호암리에서 출생 고판례 탄생(3월 26일) - 전라도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 |
- 『범증산종단사(汎甑山宗團史)』 「태을교」 7쪽
-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6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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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러 육로통상조약 체결 - 조선 전역에 민란 발생 |
1888 |
고종 25년 |
차월곡, 고창 연기동을 떠나 정읍 대흥리로 이주 | ||
1893 |
고종 30년 |
차월곡의 아버지, 차치구는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를 설득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명분을 내세우는 조건을 제시하고 참여하기로 함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1992) 6쪽 | ||
1894 |
고종 31년 2월 |
2월 고부 봉기
차치구는 전봉준을 비롯한 김도삼(金道三)·정익서(鄭益瑞)·최경선(崔景善) 등 20인방(幇)과 함께 고부 관아 습격 - 차월곡 동행 |
-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6~67쪽
-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 안원전 『증산도(하)』 (대원출판사, 1991) 2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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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6~67쪽 | |||||
1차 동학농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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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차월곡, 차치구와 1차 동학농민운동 참여
- 차치구는 전봉준이 4월 하순, 동학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알리자 약 3,000여 명의 농민군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외치며 참여함 - 백산봉기(白山蜂起) 전봉준과 손화중은 마침내 전라도 각 고을 접주에 통문을 보내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으로 동학의 대도창명(大道彰明)을 위하여 도인(道人)들이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1894년(甲午 高宗31년) 3월 21일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탄신일을 기하여 동학교도와 다수의 농민들을 고부(古車), 백산(白山⸱現 全北 扶安郡 白山面 龍溪里)에 모이게 하니 3월 봉기(峰起)의 백산봉기(白山峰起)이다. 3월 21일 전후하여 백산에 집결한 주력부대는 무장(茂長), 영광(靈光), 장성(長城), 함평(威平), 무안(務安), 고창(高敞) 홍덕(興德), 정읍(井邑), 고부(古阜), 태인(泰仁), 부안(扶安), 금구(金溝), 김제(金堤) 등 도내의 농민군들이었다. 주요 인물로는 전봉준, 손화중을 비롯하여 금구(金溝) 김덕명(金德明), 태인(泰仁) 김개남(金開南) 최경선(崔景(卿)善), 정읍 손여옥(孫如玉·孫華中의 族姪) 유용수(柳容洙⸱ 孫華中의 妻男) 차치구(車致九•普天敎主 車京石의 父), 흥덕(興德) 고영숙(高永淑), 고부 정익서(鄭益西), 김도삼(金道三) 등을 비롯하여 각 고을의 유명 접주들이 참가했으니 이때 동학 농민군의 수를 관변 측 기록(東徒問辨)에는 만여 명이라 하였지만 약 4천명을 헤아렸다고 전봉준은 그 공초(供招)에서 말했다. |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18쪽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최현식, 신아출판사, 1994년 3판) 260쪽 제8장 인물지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84~86쪽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105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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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동학농민운동 때 차치구는 동학군에 합세하여 고부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정읍, 고창, 함평까지 점령 |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6~6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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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 차월곡 황토현 전투, 정읍 진격, 전주성 함락 시 차치구와 함께 동행
-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이김(5월 10일) - 정읍 진격 - 전주성 함락(5월 31일) 홍계훈의 관군과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현 장성군 황룡면)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관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1쪽
- [네이버 지식백과] 제1차 동학농민운동 (두산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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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청나라에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파병을 요청함에 따라, 청나라군 조선 파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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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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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진 조약에 따라 청군과 일군이 출동 - 청의 이홍장이 충청도 아산만으로 2,800명을 이끌고 출동, 일본이 8,000명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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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경복궁 점령
- 일본군에 의해 김홍집 친일 내각 출시 - 민씨정권 축출 및 흥선대원군 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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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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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 일본은 충청도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군함 포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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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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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운동
-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가 우세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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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 일본의 경복궁 점령으로 일본에 대한 분노 팽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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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월곡, 아버지 차치구와 함께 2차 동학농민운동 참여
- 차치구? 전봉준과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내세우며 2차 동학농민군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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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차월곡, 아버지 차치구가 삼례에서 11만 명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집결할 때 동행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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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차월곡, 차치구와 세성산 전투 참여
- 차치구,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진격하기 전 목천 세성산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움 - 동학농민군, 관군과 일본군에 버티다 37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크게 패함 |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5~26쪽
- 문화콘텐츠닷컴 「세성산 전투」 * 웹페이지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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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의 공주 공격
이인 전투
- 차치구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침 -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 - 김개남의 농민군 과 함께 공주로 진격을 준비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우금치로 후퇴 |
- 이현희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7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 180쪽 | ||
일본군의 동학군 진압 (동학군 우금치 대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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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아버지와 우금치 전투 참여
-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 동학군 1만여 명 중 500여 명이 살아남음 -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동학농민군이 궤멸 -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 |
이현희 J22?「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 동학학회 편 『동학, 운동인가 혁명인가』(도서출판 신서원, 2002) 2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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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 차월곡, 차치구가 이끄는 농민군과 원평*태인 전투에 참전했다가 패하자 전봉준과 함께 정읍 대흥리로 와서 몸을 숨김
- 차치구, 차경석 부자(夫子), 전봉준을 입암산성으로 피신시킴 - 차치구, 순창 피노리에서 전봉준과 헤어져 정읍 고향으로 옴 - 차치구, 정읍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 숨어 지냄 - 차치구, 이웃의 밀고로 관병이 가족을 인질로 협박하자 스스로 붙잡힘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6~27쪽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91쪽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2) 6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127쪽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139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0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이이화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 103~105쪽 (역사비평사 1994.1.15.) -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57쪽 (한겨레신문사, 1994.4.20.)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 181~183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2(쪽)~~25쪽 - 『일간스포츠』 2018.12.18. 「차길진의 갓모닝」 '내장사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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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 현감 윤석진은 차치구를 고문하고 동네 앞산에서 분살형(焚殺刑)(을)~ 시킴
- 아들 차경석은 아버지 차치구의 시신을 수습해 화장한 후, 유골을 내장사에 뿌림 |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60쪽 제8장 인물지 (신아출판사, 1994년 3판)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7~9쪽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96쪽, 140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0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김재영 『김재영의 역사 인문학』 ⸢대일 항쟁기 ‘보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 323~324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8.9.3.) - 이이화 『다시 피는 녹두꽃,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정읍 농민 대접주 차치구, 손자 용남⸥ 103~105쪽 (역사비평사, 1994.1.15.) -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160쪽 (한겨레신문사, 1994.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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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1년) |
12월 24일. 손병희, 동학 제3대 교주가 됨 | 손병희(孫秉熙, 1861~1921). 초명은 응구(應九)이고 호는 의암(義菴)이다. 청주에서 태어났다. 동학에 입교하여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되었고, 1894년 동학혁명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 장군과 합세하여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확장을 하였다.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 3대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덕 등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에 공헌하였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중 상춘원에서 죽었다.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49쪽 | |
- 흥선대원군 사망
- 중국 러시아, 독일과 조차 조약 - 프랑스 중국의 광저우 점령 - 중국, 변법자강운동(강유위, 이상사회인 '대동사회' 실현 위해 개혁) - 고종, 독립협회 해체 |
1898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2년) |
- 차월곡,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 동학군 잔여세력의 '영학당' 조직에 참여
- 1894년 동학농민군이 진압되자,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종교(동학)를 영국 종교(영학)로 위장한 영학당을 조직함 |
- 네이버 지식백과,「영학당」
* 웹페이지바로가기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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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과 청나라, 통상 조약 체결
-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 개통 |
1899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3년) |
- 차월곡, 1899년 5월 흥덕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개최하고, 5월 27일 고부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로 봉기한 뒤 흥덕·무장의 군아(郡衙)를 차례로 점령
- 차월곡, 동학농민전쟁에 이은 최대 규모의 농민봉기인 무술⸱기해 농민전쟁(영학당의 난)에 참전, 거괴통인巨魁通引이라는 죄명으로 형사刑死 처분 받음. 사형 직전 집행 사령의 호의로 석방됨 |
- 최현식 『갑오동학혁명사』 224~226쪽
(신아출판사, 1994년 3판)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4쪽, 7~9쪽, 14~18쪽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85쪽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93쪽, 96쪽, 105~106쪽, 108~109쪽, 111~112쪽, 141~142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감점기 보천교 민족운동’⸥ 3쪽 ((사)한국종교사회연구소(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에 제출한 보고서, 1996) - 김방룡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 (김재영 회갑기념 논문집, 2017. 10.21.)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1~142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네이버 지식백과, 「영학당」 * 웹페이지바로가기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36쪽~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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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학당 사건은 동학농민운동의 재발로 봄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66쪽 | ||||
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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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최시형 순도(1898. 6. 2.)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이상헌(李祥憲)이라 개명한 채 숨어 삶 |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0쪽 | ||
1901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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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민란 발생
- 한성전기주식회사, 한양성 내 첫 전등 점등식 거행 -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국가가 처음으로 연주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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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손병희, 미국에 가기 위해 일본 도착 |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0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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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 증산,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무극대도 득도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76쪽
- 증산도 『도전(道典)』 2장 1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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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 증산, 스스로 '옥황상제'라고 하면서 종교적 결사체 조직하고 포교 활동 시작- (1905. 1월) 내용과 중복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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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 1901~1909년까지 (이)~ 지상에 우주촌 선경낙원을 개창하는 천지공사 집행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77쪽 | ||
1902 |
? |
월곡, 부친 뜻을 이어받아 동학운동에 참여. 일진회 가입하여 전북 순회관으로 활동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1쪽 | ||
1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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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제주도에 다녀감. 제주도에 훔치교 확산 시작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50쪽 | ||
러일 전쟁 발발 (2월) |
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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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손병희,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일본 육군성에 군자금 1만 원 후원 |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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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8월 말 |
손병희, 전국에 진보회 조직 후 '문명개화운동' 추진 |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0쪽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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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 '대동회'를 조직. 대동회는 이후 중립회, 진보회로 이름(이)~ 변경. 이용구가 실무를 맡음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4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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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 손병준이 진보회를 매수하여 '일진회' 만듦
- 이용구는 일진회를 맡으면서 점차 일본에 협력 - 손병희는 처음의 목적과는 달리 일진회가 일본에 협력하자 이들의 노선에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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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월곡, 동학에서 추진한 소위 '갑진개화운동'에 참여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3쪽 | ||
1905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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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일본의 승리(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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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 증산, 천지대도를 터득하고, 스스로 '옥황상제'라고 하면서 종교적 결사체 조직하여 포교활동- 1901. 8월 내용과 중복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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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증산은 동학의 사상을 전부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손병희의 문명개화적 근대화 노선에는 반대함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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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산은 최제우의 제자 손병희를 '사설로 민중을 무혹하고, 오히려 민중을 수탈하는 무리'라고 비난 | |||
- 러시아 혁명 시작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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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48~50쪽 | ||
- 친일단체 일진회, 한일 보호조약 촉구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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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는 일진회를 맡으면서 점차 일본에 협력. 일진회가 추구한 근대적 문명개화운동은 러일 전쟁 이후 변질.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될 때까지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에 적극 협력 | [네이버 지식백과] 일진회 [一進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일본 제국, 독도를 병합, ‘다케시마[竹島]’로 명명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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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일진회, '일진회 선언서' 발표 -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69쪽 | |
-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7월)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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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늑약 체결 (11월)
- 민영환, 을사보호조약 늑결을 개탄하며 자결(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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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 손병희, 일진회와 결별하고 동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인 '천도교' 정식으로 출범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5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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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후신이었던 일진회의 全羅南北都 巡廻官의 지위로 1905년까지 동학운동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일진회의 친일親日행위에 의의를 제기하고 일진회를 탈퇴 (이하삭제: 월곡은 일진회가 벌이는 동학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진회가 조선 침략의 앞잡이로 활동하자 일진회 탈퇴하고 손병희 추종) |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4쪽, 8~9쪽, 14~18쪽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1992)
- 안후상 ⸢정읍학⸥ 제6호 ⸢보천교 성립에 있어서의 동학⸱강증산⸥ 85쪽 (「정읍학」 제6호) - 백원철⸱안후상⸱이병렬⸱이대건 『19세기 사상의 거처』 ⸢근대 민중종교운동과 고창⸥ 112쪽, 142쪽 (고창문화연구회, 도서출판 기역)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 보천교 민족운동’⸥ 3쪽 ((사)한국종교사회연구소(서울대 종교학과 윤이흠)에 제출한 보고서, 1996) - 김방룡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 (김재영 회갑기념 논문집, 2017. 10.21. - 『근현대인물 한국사-정읍인물 33인을 중심으로』 ⸢차경석 편⸥ 141~142쪽 ((사)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5.8.15)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48~5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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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통감부 설치 (2월)
-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 부임 - 전국에서 항일의병 봉기 |
1906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10) |
증산, '만국의원'을 차려 질병에 시달리는 민중을 돌봄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80쪽 | |
1월 |
손병희, 일본에서 귀국. 천도교 중앙총부 설치, 지방교구 설치 |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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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손병희, 일진회를 친일적 매국조직으로 이끈 이용구와 간부를 출교 시킴 (59인 출교 사건) |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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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손병희가 동학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진보회 시위사태를 연출하고 정치투쟁으로만 일관하고, 이용구를 출교시키면서 막대한 비용을 낭비하였으며, 중앙총무를 짓는다고 전국의 동학교도의 돈을 털자 불만을 품고 손병희와의 갈등이 생겨 그와 헤어짐 | 안원전 『증산도』(대원출판사, 1991) 281~282쪽 | ||
1907 |
대한제국 고종황제 (광무 11년 순종 1년 융희 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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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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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사건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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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차월곡, 강증산과 운명적 만남(김제군 수류면 원평) |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3쪽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7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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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강제 퇴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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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 연호를 융희로 변경 - 순종 황제 즉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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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증산, 11월 28일 월곡의 이종누이인 고판례(高判禮)를 수부(首婦)로, 월곡의 집을 포정소(布政所)로 정함 | 증산이 신정부를 수립하는 천지공사를 행할 때 월곡의 집을 '포정소'라고 한 것은 증산이 월곡을 '장차 개벽되는 새 정부에서 포정(布政)할 제위(帝位)에 등극할 인물'로 보았다는 증거로 봄 |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쪽, 266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65쪽에서는 고판례를 수부로 하고, 월곡의 집을 포정소라 한 시기를 1908년으로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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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상량공사(上樑公事)를 할 때 월곡에게 백목(白木)을 더 가져오게 해 공사를 마치며 '너는 접주(接主)가 되라, 나는 접사(接司)가 되리라' 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65쪽 | ||
1908 |
대한제국 순종 황제 (순종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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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증산, 고수부와 혼례 | |||
일제, 동양척식회사 설립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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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증산, 병부(兵部)를 차경석에게 맡김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50쪽 | |
1909 |
대한제국 순종 황제 (순종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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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보천교 창립 1909년 정월 3일 교통수수(敎統授受)일로 정립(1916년에 정해짐) 1909년 증산이 천지공사를 완료하던 1월 3일 교의 대통을 차경석에게 전수한 후 월곡이 일의(一意) 교화를 선포함 | 증산이 말한 선후천(先後天)시대의 교역설(交易說)에 입각하여 '우주 진행의 24방위에 자(子)∙오(午)를 선후천 교역의 분기점으로 할 때, 월곡이 증산에게서 도통을 받은 1909년은 후천운이 개벽되는 해'라고 하여 월곡이 후천세계 신정부의 주인공이 될 운수를 받았다고 봄 ※ 『현무경』: 유일한 증산 친필로 '천지개벽'의 내용을 기록한 경전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1~92쪽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6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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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증산 화천(化天). 음력 6월 2일 | |||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기유각서 체결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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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월곡, 김형렬, 박공우, 김자현 등이 증산의 시신을 구릿골 뒷산 장태날 기슭에 모심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8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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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께 월곡과 김광찬(金光贊)이 김형렬(金亨烈)을 방문하고 장래 일을 의논하던 중 월곡이 "대성께서 당신이 곧 미륵불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화천하실 때에 금산사로 들어가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미륵전에 참배하여 당신을 대하듯이 정성을 들여 취할 길을 생각하면 반드시 당신의 감화를 받아 깨달음이 있으리라" 말하니 모두 옳게 여겨 치성물을 준비하여 금산사에 들어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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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김형렬과 함께 금산사에서 14일간 수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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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수련을 마친 후 정읍 대흥리로 와서 『현무경』을 옮겨 씀 | |||
청나라와 일본 간에 간도협약 체결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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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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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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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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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합방 (8월) - 일제, 대한제국을 '조선'이라 함 (8월) -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임명됨 (10월) |
1910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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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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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2, 34, 266쪽 | |||
안명근의 체포를 시작으로 황해도 안악의 민족주의자를 검거(안악 사건)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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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월 |
- 증산 화천 2년 후 증산의 수부 부인인 월곡의 이종누이 고판례가 이적을 보이자 증산도문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
-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와 서남해 대부분의 섬 일대에 태을주 소리가 이어짐(1911년 9월 내용과 중복-85)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88쪽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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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설립 (음력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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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사건 발생 -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민족주의자들을 검거하기 시작(105인 사건)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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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월곡, 고판례와 함께 선도교(일명 원태을교) 창립 (9월 19일) 후에 태을교가 또 창립되어 이를 원태을교라 함 월곡, 고부인을 보좌함 고부인은 많은 신도를 이끄는 권리를 월곡에게 주어 보천교 창립의 계기를 줌 | 고판례(고수부)가 증산의 탄강치성을 올린 후 교인들을 소집하고, 자신의 신통력을 보여줌. 고판례, 신도들에게 포교하라고 명함. 종도들이 (柳宜卿)이 김경학에게 치병을 받아 장티푸스가 나은 사람)?은 아침저녁마다 맑은 물을 올리고 태을교 주문을 읽어 신안(神眼)이 밝아졌으며, 이로부터 포교가 시작됨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71쪽, 17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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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 화천(化天) 2년 후인 1911년 9월부터 종도들이 유선경(柳宜卿)이 수련하던 방법으로 포교방법을 정하여 각처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교세가 크게 일어남 | 고판례, 9월 19일 증산의 탄강치성을 올린 후 증산의 성령을 접하여 신정(神政)을 행하면서 날마다 물형부(物形符)를 받아서 불에 태움 차월곡, 증산이 고부인만 알고 제자는 모른다 하며 원망. 고부인이 차월곡에게 부(符)를 받으라 하니 차월곡이 붓을 들고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으나 부가 내리지 않음 고부인이 박공우에게 술을 가져오라 하니, 박공우가 기뻐함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71쪽, 17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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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원태을교와 함께 일제의 주목을 받기 시작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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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3년 동안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와 서남해 대부분의 섬 일대에 거의 태을주(太乙呪) 소리가 이어짐 (1911년 6~9월 내용과 중복-80) | - 홍범초 「보천교 초기 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제10집,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85) 175쪽 | |||
중국, 신해혁명 (1911~1912. 청나라 멸명과 중화민국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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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멸망 (2월) - 일제 토지사업실시 (8월) |
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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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렬, 태을교 창도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50쪽 | |
- 이완용, 조중응 조선권업회 조직 (1월)
- 안창호, 미국에서 흥사단 조직 (5월) |
19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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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일(후에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 제주도 도착 | ||
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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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 발발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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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논문(1992) 26쪽 | ||
일본, 독일에 선전포고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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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곡, 고판례 밑에서 교단 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주도권을 잡아 활동
- 세간에서 교단을 형성할 정도로 급속도로 원태을교 교세가 불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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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장기동(張基東)의 도움으로 전남 순천에 교당을 짓고, '태을교'의 본소로 삼음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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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정식 교명 사용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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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조선독립, 황제등극' 등의 명목으로 고발되어 구금 (96과 중복) |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8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2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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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전문학교령 발표 < 전문학교 설치 가능> 개정 사립학교 령 발표 (3월) |
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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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교인 511명, 여자교인 27명 등 총538명 등록. 포교소 5곳으로 발전 | 조규태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보천교의 성립과 그 민족운동사적 의미」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3쪽 | |
조선, 일본어 사용제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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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조선독립, 황제등극' 등의 명목으로 고발되어 구금(94와 중복)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38쪽 | |
고종의 9남 이우, 대한제국의 황제 등극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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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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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원태을교 교권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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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진해에 군항 설치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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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원불교 창시자), 전남 영광에서 깨달음을 얻음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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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석,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리에 포교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5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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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차경석, 6월에 천원 헌병분견소에 체포되었지만 증거 없어 10일 만에 석방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51쪽 | ||
조선의 초대총독인 데라우치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오름(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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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 원불교 창교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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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가와 요세미치, 제2대 조선총독이 됨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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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24방주제 갖춤
- 24방위의 임직을 두어 보천교 조직구성의 첫틀을 마련 - 종교교단으로서 체제를 갖춤 - 보천교의 첫 교단 조직 |
교중(敎中) 강령자(綱領者) 12인을 택해 수, 화, 금, 목, 동, 서, 남, 북, 춘, 하, 추, 동에 배치 24방위의 방주를 임명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8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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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방위의 방주 임명 (역(易)에 근거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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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포교 방식으로 포교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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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동지(冬至) 이후 실질적인 교주가 되었으며, 교주로서 정식 취임 절차 없이 '주인장(主人丈)'으로 불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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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24방주 조직을 갖춘 뒤 일제의 감시와 체포령이 내려져 비밀리에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를 다니며 독립운동과 포교활동 함 | 24방주가 조직되자 헌병대의 사찰과 탄압이 날로 심해짐. 월곡을 잡기 위해 전국에 걸쳐 체포령 내려짐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8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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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28쪽 | |||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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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간도에서 한국인의 거주권과 토지소유권 인정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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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월곡, '국권회복표방' 사유로 '갑종요시찰인' 편입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7쪽 | ||
순종 황제 일본 방문 뒤 돌아옴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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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월곡, 금품사기로 헌병대에 고발당하였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 | ||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등이 중국에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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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화국 선언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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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월곡, 교세 확장으로 일제 탄압이 심해지자 모친 회갑연을 핑계로 방주들을 모아 회의를 한 뒤, 고향을 떠나 강원도와 경상도 지역으로 포교활동에 나섬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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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도 재무책임자에 김홍규(金烘奎), 남도 재무책임자에 채규철(蔡奎喆)을 각각 임명한 뒤에 24방주 천지에 고명하고 서약 | 1917년 9월 25일 채규일(蔡奎臺)과 김홍규(金烘圭)를 남북도(南北道)의 집리(執理)로 선정하고 교인을 설유(說論)하는 책임은 김형규(金炯奎), 문정삼(文正三)에게 맡긴 뒤에 집을 떠났다. (『普天敎治草史』 上 10面)
김홍규(金烘圭) 겉으로는 보천교의 종교활동을 하였지만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기운이 고조되면서 종교단체인 보천교의 치성금을 가장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0년 전북 김제와 정읍 등지에서 보천교도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범증산교사』68쪽) 한국불교계의 거성 탄허스님의 선친인 율재 김홍규(金洪圭) 선생이 보천교 재무담당으로 차경석을 보좌하는 수석참모였다는 것이다. 김홍규 선생은 보천교 입교 전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서 자신을 국내 독립군 자금책으로 파견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우 열성적인 애국지사였다. 차경석 교주가 그를 보천교 재무담당 겸 자신을 보좌하는 최고위직인 목(木)방주로 임명하였다고 하니 차교주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어떠했는가를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 웹페이지바로가기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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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 문정삼을 남북도를 설유하고 교화하는 설유사로 임명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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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방주를 중심으로 연원체계를 조직하라 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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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교단을 실질적으로 통수하는 권한 장악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7쪽 | ||
러시아 10월혁명 시작(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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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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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이승만 등이 미국 워싱턴에서 신한협회 조직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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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김립, 박진순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조직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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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고판례, 강응칠(姜應七) 등 교인 일부를 데리고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에 교당을 세움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7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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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판례, '태을교(일명 선도교)'라는 이름으로 분교 | 안후상의 논문(1992)에는 고판례가 1919년에 새로운 종교로 분교했다고 나옴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1992) 2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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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고판례가 떠난 뒤 증산교의 제2대 교주, 즉 교단의 일인자가 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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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
김형렬, 1912년에 창도한 태을교를 미륵불교로 바꿈 | |||
일본, 시베리아에 파병 선언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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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장덕수, 조동우, 김구 등이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단 조직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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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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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 차월곡, 국권회복을 내걸고 경상북도 영일군 출신 김연일 등과 모의
- 9월 19일 우란분회(盂蘭盆會)에서 전라북도 제주도 법정사에 교도 30여 명을 모아 일제 세력들과 무장투쟁할 것을 연설함 |
- 일본방위연구소 『조선사건』 「훔치교, 태을교, 선도교의 유래」(1919~1920)
- 『매일신보』 1921년 5월 6일 자 - 『조선일보』 1921년 4월 26일 자 - 『조광』 (1938. 10) 18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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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법정사 항일 투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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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7일 |
제주도 법정사 주지인 김연일(金蓮日)은 스스로 '불무황제(佛務皇帝)'라 칭하며 교도 및 제주도민 400여 명을 이끌고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제주도 내의 일제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일본인 및 개신교인을 공격하는 무력투쟁을 벌임 | 이때 고판례와 차월곡의 동생 차윤칠 등 보천교 교인이 체포되었으며, 일부 교인들이 고문에 못 이겨 24방주의 실체가 드러남.(『범증산교사』 67쪽)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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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2016) 75~79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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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17~421쪽) | ||||
여운형이 파리평화회의와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독립청원서 전달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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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제주도 선도교의 검거가 제주에서 목포까지 확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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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인들의 성금 10만원을 면화 포대 속에 감추어 나오던 교인 문인택(文仁宅), 강대거(姜大擧)가 목포항에서 경찰에 붙잡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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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박종하(朴鐘河)를 체포하여 24방주의 조직 알아내 신기섭(申基燮)∙채규일(蔡奎壹) 등 19명 체포되고, 고판례와 월곡의 아우 윤칠도 체포 구금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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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교의 근간인 24방주제가 탄로 나면서 교인 수백 명이 구속되었다. 일부는 수배를 당하였으며, 구속된 이들 중에는 고문으로 죽은 자도 있었다. |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이 독립운동 진행 논의(대중화, 일원화, 비폭력)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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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
임시정부 대한민국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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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 덕수궁에서 승하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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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청년단, 김규식•여윤형•장덕수 등을 프랑스, 러시아, 일본으로 보내 독립운동 지휘(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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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적으로 3.1운동 일어남(3월)
- 고종 황제 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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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중국의 상하이에서 수립
- 제암리학살사건 - 대한독립단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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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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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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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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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과 24방주의 노력에 힘입어 보천교계 태을교단 교세가 충남까지 확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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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6월 |
박희백 등 2인 ‘태을교인의 독립운동’(경성 복심법원) | |||
- 사이토 마코토, 조선의 제3대 총독 부임
- 김좌진이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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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 차월곡, 출판물 허가를 받고 교단 공개 재가함
(월곡은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 공개에 대한 회유 속에서 고천제가 무산될 것을 우려해 이상호가 요구하는 보천교를 공개한 것으로 보임)
- 일제, 김홍규 등 간부들을 검거하여 압박 - 차경석, 고천제 전날(9월 23일)에 경기도 경찰부 후지모토 고등과장과 김태식으로부터 다시 교단 공개 압박 받음 - 8월 이상호 경성에서 체포 구금됨 - 차경석, 이상호 면담 |
- 월곡이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으로 '보화교'로 할 것을 이상호에게 명령 - 이상호는 보화교라고 하면 생소하고 총독부로부터 반일단체 결성이라는 의혹을 받을까 하여 독단적으로, 고천제에서 선포한 '보화(普化)'의 머리글자와 당시 공인된 종교인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1922년 교명을 '보천교'로 제출하였다. | 안후상 「식민지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 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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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 차월곡, 경북 울진군 서면에서 김홍규, 채규일에게 교단의 조직화를 명함
- 60방주 제도로 개편 지시(보천교의 내부조직 완성) |
- 60인의 방주를 3회로 나누어 매회 2일씩의 간격을 두고 고명 (임명, 해임 따위의 인사에 관한 명령을 적어 본인에게 주는 문서)
- 오행(五行) 중 중앙의 토(土)는 월곡, 60방주 가운데 4인의 교정(수, 목, 화, 금)은 교단의 중추(中樞)가 됨 - 월곡은 60방주에서 발급하는 교첩(敎牒) 등의 문서에도 토자(土字)를 가운데 두고 그 주위에 '무기일월(戊己日月)'의 네 자가 새겨진 중앙인장(中央印章)을 사용 - 중앙인장은 60방주의 중앙에서 후천(後天)시대의 새로운 통솔자를 뜻함 - 교인들은 월곡을 재위로 하는 새 정부의 조각(組閣)이라 여기고, 여기에서 발급하는 인장과 교첩은 곧 관직의 임명장이라 생각 |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6쪽
- 『보천교연혁사』 上 9~19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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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 이상호, 석방시 경기도 경찰부의 후지모토 고등과장의 교단공개 회유를 듣고 경성으로부터 내려와 차경석을 만나 협의함
(8월 경성에서 체포된 이상호가 수감 중 職本 고등과장에게 회유되어 교주와 상의, 본교의 4대 강령(일심, 상생, 해원, 후천선경)을 천명하고 교명을 ‘보천교’로 등록함
- 차월곡, 경남 함양군 서하면 덕기리 대황산 근처 서만식 집에서 제단을 쌓고 고천제를 함 - 고천제에서 '24방주제'를 확대 개편하여 60방주 (정하여)~ 선임 (- 60방주를 선임하는 고천제를 함)~ |
고천제 이후 1919년에서 1923년 사이 수백만 교인 모임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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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보천교를 식민지 종교통제정책의 본보기로 삼아 탄압함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2~23쪽, 15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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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법령상 불교, 기독교, 신도 이외의 종교를 모두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함 |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8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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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친일파를 양성하여 친일조직을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족분열책을 일삼음(예: 민족종교진영 내 보수 대 혁신, 지방세력 대 중앙세력 등의 분열구조 만듦) | 김철수 「일제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2016) 141쪽 | ||
정의단 군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의 북로군정서로 개편(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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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차월곡, 보천교 조직 개편
- 60방주제로 확대 조직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50쪽 | |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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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 |
농악을 보천교의 종교음악으로 지정
- 호남 우도 농악의 기틀 갖춤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79쪽 | ||
조선일보 창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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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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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윤소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훔치교, 선도교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35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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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일, 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됨 | '강원도 경찰부에서 태을교도로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불령선인(不逞鮮人) 17명을 검거하였다. 그들은 1920년 음력 4월에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다’고 하며 신도들을 비밀히 결속하였다. 또 강원도 이천경찰서에서도 태을교도 14명을 검거하였는데, 원래 倚天敎 교도였던 김문하가 排日사상을 갖고 1920년 12월 5일 ‘태을교의 목적은 국권회복에 있으며 태을교도의 수령 차경석은 올해 중에 황제가 된다’고 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고 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9쪽 | ||
- 봉오동 전투
-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명이 조선교육(협)회 발기회 개최 - 민립대학 설립 논의 (6월) - 월간 종합지 <개벽> 창간(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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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음) 태을교인 조준호(趙俊浩) 사건(강원도의 태을교도 독립단원 검거의 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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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에는 60방주 아래에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갖춘 대리 각 1인과 포교에 근면하고 성실한 6인의 임직(任職) ‘대임(大任)’을 선정하였다. | 60방주
- 60방주 아래에 身言書判을 갖춘 대리 각 1인과 '6인의 대임' 선정 - 60방주 x 6임 = 360간부 (1년의 일수) - 6인의 대임의 직명은 경례(敬禮), 교무(敎務), 절의(節義), 집리(執理), 찰이(察異), 행신(行新) - 6임의 각 임 아래 12인의 임직 '12임(任)' (1임은 12시에 해당) - 12임 아래 '8임' (매시 8각(八刻)에 해당) - 8임 아래 '15임'을 선임 (매각 15분) (현재 시의 2시간에 해당) ※ 방주 60명+6임 360명+12임 4,320명+8임 34,560명+15임 518,400명= 55만 7700명 ※ 임직은 각 임에 100명 포교를 기준으로 임명, 이들이 최소 한 사람당 100여 명에게 포교했을 경우 약 600만 교인이 됨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0쪽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29~4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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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보천교의 충남진정원장인 이득년, 조선교육(협)회 발기인 91명에 포함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5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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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오윤선 등 70여 명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
- 자작자급운동 실천 주장 |
임규 임규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을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낸다. 출옥 후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임규는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받았다. 이는 임규가 나용균(羅容均, 제헌의원)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려는 독립운동 자금으로서, 임규는 당시 보천교 진정원의 형평사장(衡平司長)이라는 간부였다. 또한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의 보천교 측 회원이었다. (『범증산교사』 66쪽, 안후상 『보천교연구』 10쪽) |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2016년, 59쪽, 69쪽, 83쪽, 100쪽, 104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0쪽
<구술> - 안후상: 보천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었다는데... - 이강오: 3.1운동 당시 48인의 하나인 임규라는 자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5만원을 받았다. 임규는 금마 출신이다. ....... 임은 상해 임정 수금책인 소병언과 친했다. 송진우, 장덕수의 선배이기도 한 임이 보천교와 관련을 맺었던 것은 바로 동학 때문이었다. 임은 보천교 차경석에게 돈을 받아 장덕수에게 주었고, 하와이에 가서 다시 라영균에게 주었다. (다시)~ 나영균이 받은 즉시 영국 옥스퍼드대학으로 유학했기에, 혹 유학 경비로 쓰지 않았나 추측한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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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이범석(북로군정서) 청산리전투 대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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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3·1운동에 관여한 임규(林圭)가 보천교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나용균(羅容均)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보천교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함 | ||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주석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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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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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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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8월 조선총독부가 특별법을 만들어 전국의 보천교인 1,000여 명 체포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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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차월곡, 정리제도 시행
각 도에 '정리(正理)'라는 직책을 둠 60방주로부터 15임에 이르기까지 인장(印章)과 교첩(敎牒)을 발급 • 정리(正理) • 부정리(副正理): 정리를 보좌하는 업무 • 포정(布正): 정리의 지휘를 받아 교무 집행 • 선정사(宣正師, 부포정): 포정을 보좌하고 교무 협찬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0쪽, 12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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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재판소에서 보천교에 대한 처벌 특별법이 만들어짐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2016) 58쪽, 70쪽 | |||
일제, 태을교인에 대한 본격적인 감시 시작. 보천교도 검거령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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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집리(執理) 김홍규, 평양역에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3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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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 이영조(李英兆), 최선묵(崔善默), 김홍규 등 수명의 교단 간부 체포
- 일제, 거액의 교단 재산 강탈 |
『동아일보』 1921. 5. 13.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태을교인 검거」 "차월곡은 국권을 회복하고 금년 중에 황제가 되려고 운동 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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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월곡, 황제 등극 보도 | |||
자유시참변 독립군인 대한의용군, 러시아 적군 29부대에게 무장해제 당함. 이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 체포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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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김문하 사건 및 태을교도 국권회복운동 | 안후상 「식민지 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 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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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 차월곡, 동광회(東光會, 경기도 경찰부의 김태식(金泰湜)이 조직) 사람들을 만남.
- 차월곡, 이들로부터 교단 조직을 세상에 공개하라고 권유받음. 차월곡, 이에 대한 답변 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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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월 |
- 차월곡, 이상호의 종용으로 교단 공개 결정
- 일제, 이상호를 체포하여 40일간 구류. 차경석에게 교단 공개하도록 종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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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 부대 북만주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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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월 |
- 일제, 김홍규 등 간부들을 검거하여 압박
- 차월곡, 고천제 전날(9월 23일)에 경기도 경찰부 후지모토 고등과장과 김태식으로부터 다시 교단 공개 압박 받음
- 8월 이상호 경성에서 체포 구금됨 - 차월곡, 이상호 면담 - 차월곡, 출판물 허가를 받고 교단 공개 재가함 (월곡은 일제의 탄압과 보천교 공개에 대한 회유 속에서 고천제가 무산될 것을 우려해 이상호가 요구하는 보천교를 공개한 것으로 보임)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2016) 58쪽, 70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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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차경석, 임시정부가 조직한 대태평양외교후원회(외교활동 후원회)에 보천교인 2명 파견 | 대태평양회의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직된 외교지원 단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대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보천교에서는 보천교인 2명을 이곳에 파견함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8쪽 | |
의열단 소속 독립운동가 김익상, 사이토 총독 암살하려 조선총독부에 폭탄 투척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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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9월 24일 경남 함양군 서하면 우건리 황석산에서 고천제 지냄
- 각 도의 정리와 360군의 포장, 60방주를 합하여 1,000여 명 모임 - 보천교 교주가 되는 동시에 '시국'이라는 나라의 황제로 등극함을 하늘에 고함 |
황석산 고천제
제단은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9층을 쌓아 높이는 7척 2촌이고 넓이는 맨 위층이 9척 평방(乎方), 맨 아래층이 15척 평방이며, 매 층면(層面)을 사방 3치씩 줄이되 여섯째 층은 9치를 줄여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고 세째층 자방(子方)을 넉 자 넓이로 늘여서 예배석(禮拜席)을 만들었다. 또 백목(白木)을 연폭하여 사방으로 장막을 두르되 동서남북에 각기 출입문을 두고 공중에는 삼줄을 정자형(井字形)으로 늘여 치고 제단 남쪽 가에는 일월병(日月屏)을 세우고 그 앞에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鑑之位)라고 크게 쓴 위패(位牌)를 세웠다. 또 3촌 직경(直經)인 둥근 백납초(白轉聞) 28개를 28수(宿) 위차(位次)에 맞추어 걸고 60방주와 12정리와 37포장의 촛불을 벌려 밝히고 또 큰 모닥불을 피워 불빛이 하늘에 뻗치었다. 제수는 소 7마리와 돼지 23마리를 비롯하여 산해진수(山海珍需)로 1척 9치 되는 각 제기(察器)에 고배(高杯)로 가득히 고였다. ( 『甑山敎史』 84쪽) - 이때 모인 사람은 60방주와 그 대리 및 6임 480명과 각도(各道)의 정리(正理)와 각군(各那)의 포장(布長) 372명과 그 지방 교인까지 1천여 명이었다. - 김영두(金英斗)의 고발에 의하여 함양군(成陽那) 일본(日本)경찰서 형사대와 밀정대(密價隊)가 황석산 부근 일대를 철통 같이 포위 - 정각신시(申時)에 월곡(日省)이 3층 단위에 올라가서 분향 참신(參神) 세작(洗貼) 헌작(熾貼)을 행한 뒤에(普天敎治草史 上 23面) 교명왈보화(敎名曰普化)의 글귀가 있는 축문(祝文)을 낭독하고 인하여 구헌(九熾)을 마치고 오색(五色) 비단과 백지(白紙)로 폐백(常用)을 불살은 뒤에 사신(謝神)을 행하고 군중을 향하여 일장연설을 행한 뒤에 단을 내려와서 노동복으로 갈아입고 지게에 술통을 짊어지고 경관의 눈을 속여 포위망을 벗어났다. (甑山敎史 84쪽. 普天敎 11~13쪽) - 이강오 교수의 논문(「보천교」(1966) 전북대)에서 '축문에는 '국호왈시'라고 되었다 함'이라는 각주를 달고 있다. 즉 구전을 다시 전한 것임 - 『도전』, 『보천교연혁사』에는 '교명보화'와 괄호로 '축문미상'을 적고 있음 |
- 황선명 「잃어버린 코뮨」 신종교연구 제 2집, 한국신종교학회(2000)
-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 서설」 『보천교 학술대회』(2017) 11~15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01~106쪽, 119쪽, 120쪽 - 이정립 『증산교사』(증산교본부, 1977) 90쪽 - 『보천교연혁사』 - 『도훈』 - 유철「보천교 교리연구」,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보천교 재발견』 (보천교학술대회, 2017) 11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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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천제에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 함
- '보화(普化)'는 '조화를 널리 세상에 편다'라는 뜻임 (보천교 창립사에 있어 포교기구와 행정기구의 조직강화라는 면에서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다 할 것임) - 보천교, 종교에서 정치의 장으로 옮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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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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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월곡의 노모 별세(장례식을 왕자의 예로 행함. 장례에 십 여만 운집) | |||
조선교육협회 인가 (1월)
- 민립대학 설립 본격적으로 공론화 - 일제, 제2차 조선교육령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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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0~16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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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립대학기성준비회의 47명 가운데 보천교 간부인 고용환 참여 (고용환은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 1922년에 보천교 진정원 사무원이 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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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임실에 은거하면서 교인에게 12계명 반포
- '존상제(尊上帝)는 교조 증산대성(甑山大聖)을 숭봉하는 것'이라 밝힘 |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극동인민대표대회 極東人民代表大會)(국사편찬위원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 |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2016) 69쪽
-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2016) 94쪽 - 역사비평(1989년 여름호)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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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 차월곡,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 여운형, 김철, 김상덕, 나용균, 정광호, 장덕수 등을 파견하는 고려공산당에 자금을 대 줌
- 자금은 최팔용, 장덕수 두 사람에게 건네 주어 당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에게 전해주게 함 - 당시 1만 원(현 10억 원)을 지원함 ->11월과 중복-195 |
- 이정립 『증산교사』(증산교본부, 1977)
- 『보천교연혁사(상)』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2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23쪽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 (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상) 27쪽 후~28쪽 후, (상) 49쪽 후 - 『普天敎報』 창간호 1922. 7. 보천교진정원 43쪽) - 안후상 「보천교의 '반일성(反日性) 연구'를 위한 연구사적 검토」 『한국종교』 제39집(2016) 27~55쪽 - 안후상「식민지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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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도시에 기관을 설치하여 포교활동 강화
- 서울과 주요 도시에 진정원(眞正院) 설치 - 각 군에는 정교부(正敎部) 설치 |
- 월곡이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으로 '보화교'로 할 것을 이상호에게 명령
- 이상호는 보화교라고 하면 생소하고 총독부로부터 반일단체 결성이라는 의혹을 받을까 하여 독단적으로, 교명을 변경. 이상호가 수감 중 職本 고등과장에게 회유되어 교주와 상의, 본교의 4대 강령(일심, 상생, 해원, 후천선경)을 천명하고 교명을 ‘보천교’로 등록함 - 고천제에서 선포한 '보화(普化)'의 머리글자와 당시 공인된 종교인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머리글자를 합하여 1922년 교명을 '보천교'로 제출 |
안후상 「식민지 시기 보천교 ‘공개’와 공개 배경」 『신종교연구』 23 (한국신종교학회, 2012) 16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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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교 내 신진지식인이자 간부인 이상호(李祥昊)가 1922년 관청의 양해를 얻고 경성 동대문 밖 창신동에 '보천교(普天敎) 진정원(眞正院)'이란 간판을 걸고 보천교 공개에 앞장섬
- ‘정(井)’자 교기(敎旗) 만들어 사용함 |
- 교기는 황색 바탕에 정자(井字)를 적색으로 아로새긴 것으로 보천교의 7대 치성일 내지 기념일에 교단 본부와 가정에 게양함
- 정자(井字)로 된 교장의 정(井)은 '수원(水源)'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는데 ‘정(井)’ 은 배달국을 기원으로 한다. (-----------------------------------------------------------)-~ - ‘정(井)’은 홍익인간과 이화세계를 건국이념으로 한, 고조선 이전의 국가인 배달국(‘박달국’이라고도 함)의 상징으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도 ‘정(井)’을 고구려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 보천교의 상징인 ‘정(井)’은 십자가 두 개가 나란히 있는 형상 우리 민족이 모든 문명의 중앙이라는 뜻이다. 두 개의 십자가는 인간과 우주이며, 인간과 우주는 하나이고 돌고 돈다는 의미이다. 십자가의 교차점은 인간과 하늘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이 십자가를 돌리면 불교의 ‘만(卍)’자가 된다. - 하나의 십자가는 인간의 윤회사상이요, 또 하나의 십자가는 우주가 돈다는 하늘의 이치를 담고 있다. 돌고 돈다는 것은 윤회를 통하여 인간도 성장하며, 하느님도 성장한다는 뜻이다. 즉, 인간과 우주는 같이 공생하면서 성장한다는 이치가 정(井)이다. - 보천교의 중심지인 정읍을 뜻하는 것이기도 함 1910년, 월곡 선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었다.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 - 정(井)에는 민족 시원의 비밀이 담겨있다. 보천교 교첩의 정(井)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
- 홍범초, 『범증산교사』 한누리출판사(1988) 90쪽.
-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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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통일회 조직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이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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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조선총독부 종무과에 ‘보천교’라는 이름을 등록하면서 '보천교'라는 교명이 공개됨
- 비밀포교에서 공개포교로 포교방식 바뀜 - 공개된 보천교는 일제의 정교한 탄압과 회유의 대상이 됨 |
안원전 『증산도(상)』(대원출판사, 1991) 300쪽 | ||
의열단의 김익상, 오성륜 등이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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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교리 내용을 체계화한 교리강령으로서 사대강령(四大綱領)과 목적을 정리함
- 사대강령(四大綱領)은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 - 존상제(尊上帝), 숭도덕(崇道德), 친목동인(親睦同人), 망난음양(罔亂陰陽), 이재공정(理財公正), 절용후생(節用厚生), 불유탄망(不有誕妄), 무위자존(無爲自尊), 막회탐욕(莫懷貪欲), 신물시기(愼物猜忌), 정직물아(正直勿阿), 물훼타인(勿毁他人) 등 12계명을 정하고, 교중에 선포 |
교기는 황색 바탕에 정자(井字)를 적색으로 아로새긴 것으로 보천교의 7대 치성일 내지 기념일에 교단 본부와 가정에 게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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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5월 15일에 낙성한 십일전의 호천금궐(昊天金闕)에 일월성(日月星)을 상징한 신단을 봉안하고, 이를 '삼광영' 신단이라 함 |
삼광영 삼광영 신단은 단상(壇上)의 후면벽(後面聲)에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의 자연현상을 그려서 옥황상제의 처소인 호천금궐의 내용을 표상(表象)하고 그 앞 우측(右測), 일광영(日光影: 日搭이라고도 함) 중앙에 월광영(月光影: 月落이라고도 함), 좌측에 성광영(星光影: 星搭이라고도 함)이 설치되어 있다. (『普天敎』 41쪽) - 일광영(日光影)은 구천(九天)을 상징하고 - 월광영(月光影)은 옥황상제를, - 성광영(星光影)은 삼태칠성(三台七星)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다. 중앙의 월광영 좌위(座位)가 옥황상제의 성령(聖靈)이라고 신봉하는 것은 옥황상제가 구천의 중앙에서 사방상하(四方上下)를 통솔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월광영은 원수(元帥)를 의미하고 성광영은 행정기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普天敎』 41쪽) - 삼광영의 화면상부(畵面上部) 천공(天空)에 있는 일월성(日月星)의 위치를 보면 태양은 중앙을 약간 벗어나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곧 현대가 선후천(先後天)의 교역기(交易期)인 오운(午運)을 지나서 정운(丁運)에 당하여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普天敎』 41쪽) - 중앙지상에 보이는 산형(山形)은 대흥리(大興里) 앞에 있는 입암산(笠岩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편에 정읍(井色) 내장산(內藏山)과 서편에 고부(古卓)의 방장산(方文山)을 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후천선계(後天仙界)의 개벽운(開關運)이 이 땅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일광영은 황색원판(黃色圓板) 12중(重)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12지지(地支)를 의미하며, 뭘광영은 황색방판(黃色方板) 9중(重)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양수구천(陽數九天)을 의미하고, 좌측 성광영(星光影)은 황색12각판(黃色十二角板) 7중(重)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북두칠성의 7수(數)를 취한 것이다. (『普天敎』 41쪽) - 일탑(日塔)은 본체(本體)가 양(陽)이므로 이것이 화(化)할 때의 음수(陰數) 12지지(地支)에 따라서 12층이 되고, 월탑(月搭)은 본체(本體)7}?음(陰)이므로 용사종수(用事終數) 노양수(老陽數) 9를 따라서 9층이 되고, 성탑(星搭)은 본체가 음(陰)이므로 화(化)할 때의 소양수(少陽數) 7에 따라서 7층이 되어 있으므로 12지지수(地支數)는 가정에 비하면 가옥과 같고, 노양수(老陽數) 9는 부모와 같고, 소양수(少陽數) 7은 자녀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삼광영 신단은 오좌자향(午坐子向: 北向)으로 설치하고 있는데 이는 현재가 후천시대라는 본 교(本敎)의 역리(易理)로 볼 때에 선천의 건남곤북(乾南坤北)이 변하여 곤남건북(坤南乾北)이 되고 또 자북이남(自北而南)이었던 것이 후천에 이르러서는 자남이북(自南而北)으로 되기 때문에 신단의 좌향도 이제는 선천시대의 오향(午向)이 자향(子向)으로 바꿔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삼광영의 화면(畵面)이 약 5미터의 방형(方形)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천역(後天易)의 기본인 낙서(落書)의 상(象)이 방형(方形)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며 또한 후천은 지천태(地天泰)에 해당하므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普天敎』 41쪽) |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자료집(2016) 422~425쪽
- 김재영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자료집(2016) 84쪽 (자료 다시 확인??) - 홍범초 『범증산교사』(한누리출판사, 1988) 93쪽 ▶ 동아일보 - 1921.6.22/ 갑자년 3월15일에 차황제의 출현설 - 1921.10.7/ 갑자년을 기약하고 독립운동, 태을교도 공소 - 1922.2.21/ 怪敎 太乙 -甲子年 4월을 기하여 鷄龍山에 車皇帝 - 1922.10.26/ 자칭 大時國 皇帝 - 태을교주 차경석이 국호와 관제를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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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 1922년 5월 15일 낙성한 십일전(十一殿)의 호천금궐(吳天金厥)에 신단(神壇)을 봉안(奉安), 이를 삼광영 신단이라 일컬음
- 1922년 전북 정읍의 대흥리(大興里)에 보천교 본소가 자리잡으면서 교세가 급격히 확대 - 당시 민족적 좌절감과 열패감에 젖은 민중은 차경석의 보천교를 민족운동의 구심체로 생각 - 3.1독립만세운동의 실패에 따른 신비적이고 복고주의적인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이 당시 민중의 정서적 측면을 자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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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통일회에서 '남만 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통의부)'를 정식 선포하여 '통의부 의용군' 조직 (8월) 광복군사령부, 한족회, 광복군총영, 광한단 등이 '대한통의군부'로 통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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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조선물산장려회' 창설
- 평양의 예수교청년회관에서 회원 50여 명 참석
- 조만식을 회장으로 함 (1920년에 싹을 틔워 1922년에 창설) |
고흥사건
- 1922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보천교인과 경찰 간의 난투극이 벌어져 경찰이 보천교인을 권총으로 사살 - 고흥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의 대(對) 보천교 정책이 바뀜 - 보천교를 사교화 하여 민중이 보천교로부터 멀어지도록 정책을 펼침 |
▶ 조선일보
- 1923.5.1/ 고흥총살사건의 공판. 공무집행 방해라고 징역 6개월 ▶ 매일신보 - 1922.8.21/ 태을교도 폭행 顚末. 교도들이 먼저 경관을 폭행, 생명이 위급하여 권총을 발사 - 1922.8.25/ 태을교도 폭행 사건과 발생전후의 顚末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45~449쪽 |
이상재 등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 조직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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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 차월곡, 최팔용과 장덕수를 통해 모스크바 세계약소민족회의(고려공산당 김규식, 여윤형, 나용균, 장덕진 파견)에 참가 여비 1만 원 지원(지금의 10억 원. 1924년경 창덕궁 대조전 공사 때 쌀 한가마니 값이 5원 30전) -> 2월과 중복
- 보천교(최팔용, 장덕수)에서 제3차 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에게 여비를 직접 전함 -> 2월과 중복-186 |
모스크바 세계약소민족회의
-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단체의 연석회의 -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듦 - 한국의 독립 지지 |
- 안후상,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6) 69쪽
- 역사비평(1989년 여름호) - 김재영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6) 94쪽 국사편찬위원회「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96쪽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1쪽 ▶월곡의 아들 차용남의 口述 - 김철수(주: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 차례에 걸쳐 받았다고 이범재(편자 주:구당) 화실에서,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 내게 말했다... (1991.1.21. 차용남의 자택에서) 안후상 면담 - 김철수(이균영 편) 「김철수 친필유고」 『역사비평』 제5호 (역사문제연구소, 1989) 354쪽 (편자 주: 이때가 1922년 경) -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는 생전에 김효명(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재봉의 친자이자 원불교 교무)에게 당시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증언했고, 그 녹음된 자료(녹음테이프 100여 개가 넘는 분량으로, 일부는 풀어서 자료집 『지운당』을 발간함) 가운데 차경석의 자금지원과 관련한 증언이 여러 번 나온다고 김효명은 증언했다...... ▶『普光』 - 제1호(1923.10.25) 21~47쪽 |
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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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1934년 차월곡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천자 등극설' 유포 |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서」 작성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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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에 고용환, 이득년, 임경호, 주익, 신찬우, 김응두 참여
- 차월곡, 시대일보사 출자 승낙 |
이득년- 1908년 '동경유학생회월보' 주간 및 편집을 맡았으며, 1925년 군자금 모집을 하였고, 1924년 시대일보를 인수하기 위해 임경호와 함께 보천교 측 대표로 파견하여 이사로 활동
임경호 - 한말 의병장 김복한의 문인으로 1919년 호서지방 유림들이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것을 파리강화회의에 발송. 1923년 『산업계』 발간에 참여 주익 -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으로 3.1운동 당시 학생시위 주도. 1922년에 조선민우회 참가. 1924년 보천교가 시대일보를 인수하면서 문제가 일어나자 중재에 나섬 이종익 - 보천교 경성진정원장으로 자본가를 주축으로 1919년 12월 발회한 조선경제회에 참여, 조선민우회 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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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주요 도시에 진정원 건설 교령 내림
- 1923년 집행기관인 총정원(總正院)과 외교기관인 총령원(總領院)이 설치되고, 1927년에는 총정원 내에 육사(六司)의 부서를 두어 육사장(六司長)을 임명하였다. 1931년에는 협의기관으로서 협정원(協定院)이 설치되고, 그 아래에 정의원(正議員) 약간 명이 두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에 월곡의 교령(敎令)에 따라 총정원이 봉쇄되는 조치가 내려지지만, 이를 대신해 '6임 총무소’가 설치되었고, 1932년에는 이것이 ‘인의사총무소停義士總務所)’로 개칭되었다. |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8~172쪽
- 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89.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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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부 내의 복벽파 계열이 이탈하여 '의군부' 조직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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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 1923년 1월20일에 조선물산장려운동 창립총회 열림. 같은 해 4월 30일 제2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보천교 간부 이득년, 임경호, 주익, 고용환 등 4명 포함됨 | -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한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 등의 촉진선언문이 상해에서 발표되고, 그해 4월 북경의 군사통일회가 적극적으로 소집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각지 동포들로부터의 호응 속에서 마침내 국민대표회의준비회를 결성하는 데 이름 |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 자료집』(2016)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57쪽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28쪽 |
천도교소년회, 소년잡지 『어린이』 창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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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차월곡, 보천교 대표를 국민대표 회의 파견
- 1923년 2월 상해에서 열린 한민족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100명의 대표자 중에는 보천교 대표로 보천교 진정원 배홍길(裵洪吉)과 김종철(金種喆), 보천교 청년당 강일(姜逸) 3인이 공식적으로 참가함.
- 특히 강일은 1923년 7월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입단하여 김원봉의 지시로 군자금 모집 임무 수행 - 보천교 교단 자작회(自作會) 만듦 -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가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 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437~441쪽 | |
의열단, 김시현과 유현석 등이 폭탄 반입하다 서울에서 체포됨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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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보광사 출판사·인쇄소를 설립해 『보광(普光)』잡지 발간 |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5쪽
- 『보광』 창간호 (1923. 10. 23) 6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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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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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청년회 설치(진주 보천교 진정원) | 유정근 한말 기호학교, 대동법률전문학교에 재학. 임시정부재무위원·신민부 중앙집행으로 활동 | 박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금과 보천교 - 김좌진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94~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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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의 군대 소속의 유정근(유민식)은 보천교도인 신창우와 함께 국내에 특별 파견 | - 보천교에서는 근대교육을 권장하기보다는 고전교육에 치중할 것을 강조
-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조선의 옛 문화전통을 보전하려는 측면이 강했음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4~165쪽, 174쪽 | ||
김규식, 지청천, 여운형 등이 임시정부를 이탈해 상하이에서 고려공화국을 선포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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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보효여자야학회 설치(진주 진정원)
소년회 조직(진주 진정원, 5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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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동 대지진 발생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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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8월 15일 보천교 敎憲 제정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8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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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
- '보천교 민혁설(民革說)'을 주장하던 서울 보천교 진정원에서 (일제 칭) 불온문서 3종을 인쇄하여 전국 진정원을 통해 배포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됨 |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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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보천교의 정기 간행물 『보광(普光)』 창간
- 보천교 최초의 활자 인쇄물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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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의 진정원에서 '도이왜적(島夷倭敵)'을 주창 | - 김방룡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 26쪽
- 안원전 『증산도(下)』(대원출판사, 1991) 779쪽 -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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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신로(信路) 재정립
- 1909년부터 1922년까지 교조 증산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따름 - 월곡은 교단 자체 내의 분열로 인해 그가 교단의 기본으로 하였던 교리를 재정립함 - 1922년 이상호(李相昊)에 의해 발표된 4대 강령은 자기의 뜻이 아니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교리가 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大道指南』 1~5쪽) - 증산의 탄강일과 화천일을 치성일에서 제외 - 천(天)은 증산이 주장한 신명귀신이 아니라 음양오행의 작용으로써 만물이 생성발육하는 도(道)의 대원(大源)이 되고, 신(神)은 상제로서의 신이 아니라 천(天)에 따라 음양이 작용하는 신묘 불가사의한 힘이 된다고 봄 - 자연과 인간에 대한 원리적인 이해가 심화되었던 성리학적(性理學的) 우주관이 다시 부활된 듯이 보이고 신에 대한 관점에서 상제(上帝)로서의 신은 인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동학에 뿌리를 두고 남을 먼저 사랑하고 인간의 본분을 다하는 인(仁)과 남을 사랑하는(仁)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의(義)를 중심 교리로 선포함(유교의 장점을 취한 것으로 보임) - 기존의 사상과 철학(유교와 기타 종교)이 관념에만 그치고 실제 시대가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의(仁義)'의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관념에만 머물렀던 기존 종교와 사상에서 벗어남. |
※ 차월곡이 무진설법(戊辰說法) 이후에 신로를 변경하여 ‘증산대성(甑山大聖)의 신권(神權)에 의하여 신통묘술(神通妙術)이 나올 것을 믿지 말고 인의(仁義)의 대도(大道)를 준수하는 것이 옳다’고 선언하면서 교체(敎體)와 교무(敎務)를 크게 고친 것은 차교주가 교조 증산대성을 배신한 것이라고 본 것이 이제까지 보천교구파교단(普天敎舊派敎團) 밖의 평(評)이었다.
- 보천교구파교단에서는 갑술(甲戌 1934)년 10월 10일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조선(朝解)의 유사종교(類似宗敎)’를 을해(乙沒 1935)년에 발간한 일본(日本)의 종교학자 ‘촌산지순(村山智順)과 차교주(車敎主)와의 문답기(問答記)’를 들어서 차월곡이 증산대성을 배반한 일이 없으며 보천교의 신로변경이 오히려 교조증산대성을 허황하게 믿는 오류(誤務)에서 벗어나 성훈(聖訓)에 더 가까운 종교생활로 들어서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에 ‘차교주(車敎主)와 촌산지순(村山智順)과의 문답기(問答記)’를 적는다. 「촌산(村山) 묻기를 ‘증산교조(甑山敎祖)를 만나서 3년 만에 교통(敎統)을 전하고 천화(天化)하셨다 하니 그때 제자(弟子)중에 수제자(首弟子)가 되었기 때문에 교통(敎統)을 전하셨습니까? 아니면 전할 만한 자격(資格)이 있어서 전하시게 된 것입니까?’ 차교주 대답하기를 ‘교조(敎祖)께서 나를 만나시기 전에는 삿갓만 쓰고 다니시다가 나를 만난 후부터는 '나도 만날 사람을 만났으니 의관(衣冠)을 하겠다' 하셨고 이곳을 떠나실 때에는 내가 받은 증거(證據)가 있습니다. 기유(己酉) 정월 초 3일 고사치성(告祖致誠)을 올릴 때에 우양제물(牛辛奈物)을 준비하게 하시고 벽(壘)에 설위(設位)하여 배례(拜禮)와 제법(奈法)을 가르치신 후에 나로 하여금 대제(代祭)케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듣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곡(鋼谷)에서 천화(天化)하시기 전에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지신명공판(天地神明公判)에 내가 정읍(井色) 차경석(車京石)을 정하여 실수(失手)가 없게 하였다’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위의 문답기(問答記)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차교주는 증산대성을 자연스럽게 교조로 숭경(宗敬)하고 교통(敎統)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진 차월곡을 보고 증산대성을 배신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차교주는 종전의 증산대성에 대한 신앙태도를 고쳐 새로운 형태의 종교운동(宗敎運動)을 전개하려고 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범증산교사』 109쪽) - 신로를 변경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수운 최제우가 유불선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도 유교의 장점을 이어받았듯이 보천교도 유교의 장점을 취한 것이라고 보아야 함 - 보천교에서 '仁義'를 교리로 삼은 것은 '인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동학에 이은 보천교의 유교버전인 셈이며, 동학의 근본 사상과 교리를 되새긴 것으로 보아야 함. 도덕의 실천성을 강조함 - 유교 정치이념의 최종 지향점은 『예기』에서 제시된 '대동사회'라는 이상향 건설에 있었다. '대동사회'는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예기』는 실현 가능한 사회로서 '대동'에 버금가는 '소강사회(小康社會)'를 제시하는데, 이 사회는 정치주체의 인위적 노력,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행도(行道)에 의한 덕치(德治), 예치(禮治)의 실천에 의한 사회를 목표로 설정한다.(박광수 외,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8) 292쪽) |
- 『범증산교사』 109쪽 - 박광수 외,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2018) 29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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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방주제 조직
- 동서남북에 여방주 주요 간부를 둠 - 그 밑에 각 6명의 방주를 둠. 그 외에는 남자 방주제에 준해(6임, 12임, 8임 등) 60방주제를 만듦 - 부인들로 구성된 이러한 여방주제도는 다른 교단이나 조직체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든 보천교만의 독특한 조직임 |
-1923년 교도 수가 격증하자 여방주제가 조직되어 직제를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 1월에는 각 방주의 육임 중에서 공적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선화사(宣化師)로 임명하여 방주와 동등한 대우
- 1924년 9월에는 28명의 선화사를 4정방(正方)으로 분장하는 조치로 이어졌고, 11월에는 선화사 밑에 두는 6임의 임명을 교령(敎令)으로 제정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 선화사 6임 밑에 방주제의 12임과 같은 12임을 두고 그 밑에 6임인 보수원(保守員: 후에 자강원-自强員으로 개명)을 두는 등 방주제와 동일한 식의 임원을 두었다. 선화사 28명, 6임 168명, 20임 2,016명, 8임 1,612 명, 15임 24,190 명을 합하면 26만260명에 달하는 여성조직이 간부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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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양성운동 전개
- 보효 유치원 개원(1924년 9월경 폐원) |
-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5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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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여방주제 조직
- 동서남북에 여방주 주요 간부를 둠 - 그 밑에 각 6명의 방주를 둠. 그 외에는 남자 방주제에 준해(6임, 12임, 8임 등) 60방주제를 만듦 - 부인들로 구성된 이러한 여방주제도는 다른 교단이나 조직체에서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든 보천교만의 독특한 조직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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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조선물산장려회 초기 기관지 『산업계(産業界)』 발간
-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하는 한편 토산품 자급자족운동 - 보천교의 충남진정원장인 이득년이 『산업계(産業界)』 발간 참여 - 보광사(보천교 인쇄소)에서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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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가 관련된 의열단에 보천교인 강일과 배치문 가입(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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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일본 신흥종교 오오모토와 제휴. 오오모토 간부 보천교 본소 방문(1925. 7. 22. 재차 방문) | |||
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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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만주지역 의열단에 가입 활동하는 강일(姜速)이 태을교 대표로, 裵同知(본명 裵致文, 裵浩告)가 보천교 대표로 북경 국민대표회에 참가 (‘의열단원 검거의 건’ 1923.12.26)
- 『산업계(産業界)』 창간호 나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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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부가 분열할 즈음에 독립군 지도자들이 '전만통일회의 준비회' 만듦. 통의부는 후에 '정의부'가 됨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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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갑자등극설 유포 | 갑자등극설(천자등극설)
- 1922년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주요 일간지 및 개벽 등 잡지를 통해 갑자년(1924) 월곡 차경석이 황석산 고천제를 통해 천자(황제)로 등극한다는 풍설이 대대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함. 즉 갑자년(甲子年) 갑자월(甲子月) 갑자일(甲子日)에 교주 차월곡이 충청남도 계룡산에 또는 전라북도 정읍의 입암산 아래 도읍을 정하고 천자(天子)로 등극한다는 설 - 1894년 동학혁명, 의병의 끊임없는 저항, 1919년 3.1운동 실패 후 민중은 차월곡의 갑자등극설에 희망을 갖고 나라의 독립에 대한 꿈을 키웠다. |
- 『보천교 일반』(전라북도(조선총독부) 1925) 42~46쪽
- 김재영 「보천교 천자 등극설 연구」 『한국종교사연구』 9집(2001) 116쪽
- 홍범초 「보천교 초기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10 (1985) 179쪽 - 노길명 「초기증산종단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일제하 증산종단의 민족운동』(순민사 1997) 61쪽 - 「朝蘇出版警察月報」第106號 (1937. 6)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에서 인용) - 박종렬 『잃어버린 차천자의 꿈』(장문산, 2001) 150~163쪽 (제4장 한.중.일 천자를 꿈꾸다 1. 월곡의 야망과 천자등극설) - 김탁 「보천교의 예언사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정읍역사문화연구소, 2017) 38쪽 -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 서설」 보천교 학술대회 2017년 11월 - 강영한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보천교학술대회, 20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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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영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 『학술대회 자료집』(2016) 40쪽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5-1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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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일간지 ‘시대일보사(1924. 3. 31. 창간, 1926. 8월 종간)’ 인수
- 보천교를 맹렬히 비판하던 『동아일보』와 맞서기 위함 |
동아일보 1924. 4.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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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상해임정에 독립운동자금 모집코자 보천교에 요원 파견하였으나 체포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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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 6~8월까지 이상호, 이정립 『시대일보』 인수 건으로 교금 수만 원 탕진하며 결국 실패
- 이들은 보천교 개혁운동 전개 - 배교자 속출 |
기산조합 -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로 바꾸고 ‘시국(時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여, 신세계의 조화정부건설을 꾀했다. 이때 보천교 본부건설을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였고, 이 노동자들을 바탕으로 기산조합이 형성되었다. |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1992) 48쪽~55쪽
- 김재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후천개벽운동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67쪽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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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차월곡, 기산조합 자치단체 결성
- 직업 소개, 물품 매매 소개, 조합원의 상호 재난 구호 사업 - 각 교도는 푸른 옷을 입고, 수공업에 참여 - 본소의 노동자 편의를 주기 위하여 기산조합소를 둠 - 교인들의 단체 노동을 통해 산업을 진흥시킴 - 자급자족의 경제공동체 - 직물공장, 염색공장, 농기구공장, 유리공장, 옥공장 등을 세움 |
시국대동단
- '시국(時局)'은 1921년 황석산 고천제에서 선포한 국호 시국(時國)에서 따옴 - '대동(大同)은 보천교의 계명(誡名)인 대동친목(大同親睦)에서 따옴 - '대동(大同)'은 인(仁)으로써 상생하고 의(義)로써 서로 붙잡으면 인심이 같게 되어 천하가 대동(大同)이 되리라( 『대도지남』 6쪽) - 차월곡, 시국대동단이라 개칭·결성, 그 취지를 알리기 위해 전국적인 강연회를 계획, 실시함(1924~1925) - 시국대동단을 이끄는 문정삼과 임경호는 연설 내용을 차월곡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만듦 - 차월곡의 '대동'과 일본의 '대동' 개념은 완전히 다름 차월곡의 '대동'은 신분의 귀천이 없고 남녀가 평등하며, 모두 잘살아 공동체가 하나되는 이상사회를 말한 것임 - 교조 강일순의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대동건설론'은 일본이 추진했던 대동아공영과는 차이가 있다고 홍범초(洪凡草)는 말한다. 즉 “겨레와 조국이 대아(大我)라면, 내 겨레와 생활권을 같이하는 다른 민족은 더 큰 내 이웃이요, 온 인류는 지구라는 마을의 대가족이 될 것이다.” (홍범초 『증산교 개설』 창문각, 1982, 98쪽)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박은식의 대동사상과도 유사한 입장을 지니며, 오히려 유교의 대동사상이나 불교의 세계주의보다 우리 민족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 있으며, 단지 일본식민지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가 왜곡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강교구 『한국 근대종교의 민족주의』 집문당, 1992, 134~137쪽) 홍익인간(단군) - 개벽(최제우) - 후천선경(강증산) - 대동(차월곡)으로 이상사회에 대한 사상이 이어짐. - 일본의 '대동'은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맹주적 역할을 강조. 일본을 동양을 침탈하고자 한 서양국가들을 대결하여 국가의 대립과 연합을 넘어선 새로운 형태의 도의적 질서인 대동아공영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이용 (---------------------------------------------------)~ - 이 시국대동단은 원래가 일본 관헌(官憲)의 요구에 의하여 조직되는 어용단체(御用團體)였기 때문에 보천교 측의 주장은 모두 무시된 채 취지서의 문안(文案)조차 사전양해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연사 선정에는 보천교 간부는 한 사람도 채용되지 않고 친일단체(親日團體) 십일연맹(十一聯盟)에 가담한 인사들로 메워졌는가 하면 본소(本所)에서는 발회일(發會日)도 통고받지 못하였는데 시국대동단의 강연 일정이 정해져서 보천교 본소의 명의를 도용(益用)한 통지서가 각지로 발송되었다.(『普天敎治草史』上 86面) (------------------------------------------------------------)~ |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2~113쪽
-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53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12쪽, 213쪽, 230쪽 - 홍범초 『범증산교사』(범증산연구원, 1988) 109쪽 - 홍범초 『증산교 개설』(창문각, 1982) 98쪽 - 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석사논문, 1992, 63쪽 - 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98, 376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45쪽 『보천교연혁사』 상, 102쪽 - 강영한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보천교학술대회(2017) 211~217쪽 - 노종상 「월곡차경석 연구서설」 보천교학술대회(2017) 11~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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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문정삼과 임경호를 일본에 파견
- 일본에 보천교의 취지를 전하고 일본정부의 이해를 촉구 - 문정삼, 임경호는 "보천교의 교강(敎綱)인 인의(仁義)의 도덕을 숭상하고 상생(相生)을 주의로 한 대동단결(大同團結)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리고 '대동(大同)'이야말로 전 인류가 대동단화(大同團和) 하는 것이라고 말함 - 강증산의 핵심 사상 중 하나가 대동단화 - 보천교의 종지 중 하나가 대동 - 일제는 보천교가 일본인과 대동단화할 수 있는 것으로써 '광구단(匡救團)' 조직 요구 - 차월곡, 보천교의 취지나 목적에 부합한 '시국대동단'을 채택 보천교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과 일맥상통 - 임경호와 문정삼, 조선총독부에 순응하는 친일로 돌변 - 시국대동단에서 시국강연회 실시 |
대동사상
'대동(大同)'이라 함은 '서로를 도탑게 하고(상생) 하나 됨'을 뜻한다. 한국과 중국의 이상사회에 대한 꿈은 ‘대동사상(大同思想)’으로 표현되어 왔다. 이러한 이상사회를 수운 최제우는 '개벽', 증산은 '후천선경', 차월곡은 '대동'이라 표현하였다. ‘대동사상’은 유교 사상사 속에서 면면히 지속되었고, 중국 근대기에 이르러 강유위(康有爲)의 존재로 재등장하였다. ‘공(公)’과 ‘평등(均)’을 핵심으로 하는 대동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다시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조소앙(趙素昻) 등도 대동사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이상적 세계를 이루는 사상적 기저로 삼았다. 천하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만민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한 동양의 이상사회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대동사상은 동아시아 전통의 공동체 의식의 사유구조에 의해 탄생된 역사적 실상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공동체 의식이자 사회통합의 원리로 삼을 수 있다. 일본은 무사들을 중심으로 메이지 천황을 옹립하면서 외래 문물을 신속하게 수입하여 서구의 강력한 제국주의 체제를 수용해 발전시켰다. 사상사적 측면에서는 서양의 근대 철학, 기독교 사상, 양명학 등 다양한 사조를 수용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제도를 체계화하였다. 유교적 ‘대동사상’을 ‘대동아’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오랜 동아시아적 이상사회의 질서를 한국,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를 침략하는 사상적 기저로 삼았다. |
박광수 외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2018) 24~35쪽, 29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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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김좌진 장군 군자금 사건
- 청산리 전투(1920. 10. 21∼26.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허룽현[和龍縣] 청산리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싸움)로 대대적인 병력을 이곳에 투입한 일본 때문에 군자금이 부족해 다음 전투 준비를 못하는 상태에 처함 - 보천교에서 받은 2만여 원으로 부하를 소집하여 일본에 맞서 무력행동에 나섬 (亞細亞局第3課關機授 제32743號) |
-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 (2016) 145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2016) 70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97쪽 - 네이버 지식백과 ‘청산리 전투’ - 박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금과 보천교 - 김좌진과 보천교」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95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9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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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월곡, 김좌진의 만주별동대(滿洲別動隊)에 2만 원 군자금 제공
- 포교는 물론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하여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려 함 - 식민지 상황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자각하고 민족적 사명을 망각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임 - 1924년 9월에는 28명의 선화사를 4정방(正方)으로 분장하는 조치로 이어졌고, 11월에는 선화사 밑에 두는 6임의 임명을 교령(敎令)으로 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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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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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여방주의 6임 중에서 공적이 우수한 자를 선화사(선포사)로 임명
- 이때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가 선화사로 임명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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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의 주도로 주식회사 형태의 만주농업사 설립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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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정교부(正敎部) 사건(1924. 12월~1925. 1월)
1924년 12월경 부산 국제관(國際館)에서 시국대동단 강연이 있을 때 청년 수백 명이 이를 듣다가 격분하여 연사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보천교의 교기(敎旗)까지 찢음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2~117쪽 | ||
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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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 발행권과 경영권 포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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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정교부(正敎部) 사건
1월 부산 청년들이 경남 각 군의 청년단들을 연합하여 보천교 부산정교부를 파괴하려 하므로, 정교부에서 부산경찰서장을 만나 청년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알림 |
이상호가 차교주를 만나러 정읍에 내려왔을 때 (일제) 정읍경찰서가 이상호를 보호하는 역할을 못했다. (이에)~ 정읍경찰서는 보천교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보천교에서 부지를 매립하기 위해 흙을 운반할 토거(土車)궤도를 부설코자 도로사용 허가원을 정읍에 제출하자 여러 핑계를 대며 허가를 연기하고 채석용 화약사용 허가원과 장대목 운반도로사용 허가원도 내주지 않아 수백 명의 일꾼이 쉬게 되어 막대한 손해를 입게 하였다. | 『보천교연혁사』 61쪽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68~169쪽
- 안원전 『증산도(下)』(대원출판사, 1991) 765쪽 -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 김재영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행방」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5 (2001)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69쪽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1~496쪽 교본소의 건설과 십일전(十一殿) ▶ 張泰善 編, 『井邑郡誌』(1937.1.20) 19쪽~20쪽/ 보천교 본부...... ▶ 동아일보 - 1922.2.24/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 敎主의 死와 대분열 - 1922.9.18/ 수만명의 태을교도가 정읍에 모여 - 1922.9.19/ 식표만 45만 장 - 1922.12.24/ 보천교 본소에 360동 건축 - 1924.9.29/ 보천교 박멸운동 - 1932.6.16/ 宗敎類似團體 敎徒는 十萬 혹세무민하는 각종종교, 最近 總督府調査 ▶ 조선일보 - 1925.3.29/ (時評)훔치와 경찰(一) - 1925.5.12(석간)/ 훔치교에 誘惑된 60여 호의 농민 - 1925.11.14(석간)/ 高原에 훔치 蔓延, 우매한 농민 600호를 벌써 그들이 붙들다 - 1925.11.19(석간)/ 斷髮은 不能 (시간별 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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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정월 16일 보천교, 성전(聖殿) 십일전(十一殿)의 건축공사 시작
- 십일전 외에도 45채의 전통 와가(瓦家)와 10여 채의 부속건물들로 구성된 교본소를 건설 - 대규모 토목공사로 당시 민중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 - 교본소 토목공사에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150만 원(현 1,500억 원)이라는 거금이 소요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
- 정의부, 만주 개간사업 (막대한 자금 필요로 하여 보천교의 자금에 관심 추정 가능)
- 남만주 화전현의 정의부 임시집행위원회 폐지 - 정의부의 중앙조직(이)~ 새롭게 구성 - 정의부, 중앙행정 위원장(인~) 이탁을 비롯해 현정경, 이진산, 김이대, 김동삼 등을 위원으로 함 - 김이대, '권총단 사건'의 핵심인물인 정찬규의 직속상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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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2월 초에 각 지방 청년들이 모여 시민대회를 열고 보천교 부산정교부 성토(聲討)를 결의함. 보천교에서는 정교부 보호를 위해 수백명의 교인이 농수(籠守), 경찰서에서는 안심하고 해산하라 하여 흩어져 돌아갔는데 2월 7일 오후 2시경에 청년과 시민 수만명이 몰려들어 정교부를 포위하고 돌을 던져 정교부의 건물과 집기가 파괴되고 교도 40여명이 중상을 입음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2~1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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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4월 |
대종(大鐘) 주조(3월 15일)
- 전국 각지에 있는 교도들이 수집한 놋그릇과 숟가락을 녹여 무게 1만 8천근의 종을 만듦 - 직경 8척(尺), 높이 12척(尺)의 거대한 규모로 교단 입장에서는 본소 공사 진행으로 교단의 민심 수습에 큰 효과를 봄 중앙 교당으로 십일전(十一殿) 신축 착공 - 장엄한 규모는 대궁전을 연상하게 되어 세간에서는 이 신축공사를 차천자(車天子)의 대궐 신축공사라고 함 |
조선총독부의 보천교 회유
1925년 전라북도 정읍의 보천교 본소를 찾은 시타오카(下岡忠治)는 시국대동단의 활동 문제 외에도 보천교의 만주 이주를 보천교 측에 요구하였다. 시국대동단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만주 이주를 요구하였지만, 차월곡은 불응하였다. 조선총독부가 보천교의 만주 이주를 요구한 배경은 좀더 궁구해봐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시타오카(下岡忠治)는 자신의 요구에 불응한 차월곡을 문정삼에게 권총을 주어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뒤에 문정삼, 임경호, 이달호 등은 잇달아 탈교해 보천소 본소를 습격하였다. |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 조선일보 1925.3.18/ 보천교의 罪惡은 총독부에서도 認定 ▶ 동아일보 1928.10.10/ 淺利 경찰국장이 보천교주 차천자를 방문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3-11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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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 1925년 음력 4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과 시타오카(下岡忠治), 차월곡 면회 위해 정읍 보천교 본소 방문 - 차월곡, 미쓰야 미야마쓰과 시타오카의 만주 이주 요구에 불응 (당시 보천교 내부에서도 만주 이주에 대한 구상이 대두됨)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1~49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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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5월 24일 보천교 간부들(김형욱·최종호·김승민) 일본에 수일 체재, 오오모토교 왕인심랑/데구찌 오오진사부로(出口王仁郞)와 만남 | 시국대동단 해체 보고서
(주일영국 대표의 외무성 보고서) 1925, 영국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 From Sir C.Eliot, (Tokyo). No. 384 Dated 29th July 1925. Reviewed in registry 27th Aug. 1925. F: Japan Dissolution of the Jikyoku dai do dan Refer to Tokyo dispatch No.99 of 13th March (F 1277/1277/23) and transmits copy Seoul dispatch No.42 of 17th July forwarding extract from "Seoul Press" reporting dissolution of the above association owing to withdrawal of financial support of Futen kyo. Report appears correct as Association's Seoul office has been clos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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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월 |
차월곡, 시국대동단 해체 (6월 30일) | 사이토 총독의 보천교 파괴공작
월곡을 독립운동 단체의 수괴(首魁)로 생각하던 일본 경찰은 보천교운동을 공개적으로 노출시켜 조직을 파악하고 해체시키려는 공작을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벌여왔다. 그리고 마침내 사이토가 직접 월곡을 방문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월곡의 아들 용남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사이토에 이어 온 야마나시도 돈을 밝히는 총독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불교재산을 많이 몰수하는 등 죄악이 큰데 보천교에도 많은 금전을 요구했지요. 특히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과 짜고 종교계를 괴롭혔지요. 강대련은 당시 친일파로 유명했는데 많은 일화가 있는 사람입니다."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30~132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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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7월 해주(亥主) 임경호가 교단을 이탈 8월 화주(化主) 채규일(蔡奎全)이 이탈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4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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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조만식(趙晩植) 권총단 사건
- 정의부 독립운동 자금 사건('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죄 사건'으로 알려진 '정의부 및 보천교의 군자금 모집계획에 관한 건) - 주요인물 (조만식, 한규숙, 정찬규, 정상엽, 최상룡 등) - 조만식, 보천교와 만주의 정의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 조만식은 경성에서 보천교인인 박자혜(신채호의 두 번째 부인)을 만나 한규숙을 알게 되어 보천교 교인이 됨 - 박자혜는 보천교 부인선포사(婦人宣布師)로 신채호의 두 번째 부인이다. 보천교와 만주의 정의부를 연결 - 조만식은 시국대동단으로 친일이라는 오해를 받는 보천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에 관심을 갖자 만주의 정의부와 보천교의 만남을 주선 - 보천교 측이 주는 30만 원으로 만주에 생산기관을 설립. 그 이익금으로 독립운동 자금 활용 계획 - 조만식은 5월경 만주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춘배(李春培, 일제의 밀정)를 만나 경성으로 옴 - 조만식,? 한규숙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정의부의 정찬규에게 건네고 정찬규에게 보천교 측의 약조 내용을 건넴 - 정의부 참의 김정관, 국내에 정찬규 파견 - 차월곡, 군자금을 모금하는 조만식, 정찬규, 한규숙(보천교 북방 방주) 등을 정읍으로 불러들임 - 차월곡, 조만식으로부터 만주 이주 권유 받음 - 이춘배(경기도 경찰부에 소속된 밀정)의 밀고로 조만식 등 체포됨 - 정찬규(鄭燦奎), 정의부 제4중대 임시특파원이라는 견서(肩書)를 받고 만주에서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체포됨. 보천교는 재외 독립운동을 후원할 것, 그 방법으로 만주에서 개척사업을 일으켜 생활이 곤란한 보천교도들을 이동시켜서 생산기관을 조직하고 그 이익금을 독립단에 제공할 것, 이를 위해 자본 30만 원을 지출하며, 보천교는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여 자산가 조사, 길 안내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
조만식(趙晩植, 1886~1931)
- 임시정부의 비밀외곽단체인 천진의 불변단을 조직함(1919. 4. 18) - 천진에서 신한청년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등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불변단 조직 - 보성법률 전문학교 졸업하여 대구와 평양에서 재판소 서기로 일함 - 1920년 8월 조선총독부의 고위관료를 처단하려다 실패하여 9월에 체포 - 1920년 3.1 운동 1주기에 만세운동 계획, 고위관료 암살하기 위해 경성에 잠임했다 체포 - 1923년 석방 후 상해로 망명(상해로 가기 전 보천교 교본소에 1년 가까이 머물렀음. 당시 보천교 수호사장 맡음) (안후상 『보천교운동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2) 42~43쪽) - 1925년 권총을 가지고 국내 잠입했다 체포됨 |
- 안후상,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 118-119, 126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권총단 사건' 연구」 2017 - 안후상 『보천교운동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92) 42쪽. - 김철수 「일제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학술대회자료집』(2016) 150~151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147쪽 ▶ 조선일보 '조만식 씨 별세' 1931. 8. 23 보천교와 정의부 ▶ 동아일보 - 1926.11.14/ 민족운동 자금으로 30만원 반출 ▶ 조선일보 - 1925.11.21/ 보천교 최후의 준동, 금전으로 正義府를 농락, 所謂 36만원 問題와 보천교의 罪惡 - 1925.12.14/ 정의부원 검거 사건 내용 - 정의부를 이용하려는 보천교 일파의 음모 - 1925.12.18/ 제2회 연극에 실패한 妖의 보천교(하나) - 1925.12.19/ 제2회 연극에 실패한 妖의 보천교(둘) ▶ 매일신보 - 1925.11.19/ 道形事課에 檢擧된 拳銃團 2명. 사건내용은 절대 비밀, 시국을 표방한 강도인 모양 - 1925.11.21/ 道形事課에 檢擧된 拳銃團의 내용. 활동 중심지는 정읍, 사건은 전혀 미연에 방지 - 1925.11.19/ 정읍 권총단 사건. 連累 3명 또 捕, 不日內 京城에 移送) - 1925.11.25/ 정읍 권총단 내용. 차경석을 威脅하고 30만 원을 빼앗으려다 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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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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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에현에서 한인 교포 학살, 1000여 명의 한인, 일본인과 충돌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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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1월에 교령(敎令)으로 60방주 조직을 모두 폐지
- 60 방주제의 성공적인 안착이 가속력을 갖게 되자 교단은 기하급수적으로 교세를 확장. 그렇지만 조직상으로 볼 때 방주제에 지방 편중의 폐습이 있다는 비판이 불거짐. 이에 방주제 폐지 - 기존의 방주는 각 지방열이 있어 서로 의견이 불일치하므로 포교관할기관을 대전을 중심으로 북선과 남선으로 분리함 - 북선(北鮮)은 대전 이북, 회장에 임치삼으로 하고 경기, 강원, 황해, 평안, 함경의 교도 관할 - 남선(南鮮)은 회장에 김정곤으로 하고 전라남북, 충청남북, 경상남북 교도는 남선 사무소에서 관할함 |
홍범초의 『범증산교사』(한누리출판사, 1988) 121쪽에는 1월에 수호사(修好司)에 걸었던 남북선사무소 간판을 떼고 성전건축사무소 간판을 걸었다고 나옴 | 안원전 『증산도(下)』(대원출판사, 1991) 773쪽 |
조선총독부, 경복궁 내 청사로 이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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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량형령 공포로 미터법 사용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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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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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 등이 만주에서 고려혁명당 조직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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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 3월에 부채 문제로 유지하기 힘들어 남북선 사무소 간판을 철폐함
- 남북선사무소 대신 '성전신건축사무소' 간판을 걺 |
- 안원전 『증산도(하)』(대원출판사, 1991) 773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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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황제, 창덕궁에서 승하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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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왕위 계승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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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님의 침묵> 간행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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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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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국장, 6.10 만세 운동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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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보흥여자사립수학 설립
- 보천교 본소 부근의 여성들만을 위한 교육기관 - 신지식 교육, 교리 연구 |
김철수 『보천교와 보천교인의 민족운동』 「1920년대 보천교의 실력양성운동」 (2018 한국민족운동 학술회의, 2018. 11. 30) 162~163쪽 | |
조선극우회 조직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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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 이달호, 임경호와 문정삼, 채규일 등과 경성 진정원에 증산교 간판을 걸고 산업주식회사 설립
- 보천교 혁신운동이라는 명목으로 보천교 박멸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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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유한양행 설립(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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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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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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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우 등이 신간회 발족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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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 1월 10일 이달호 일파는 대흥리 본소에서 곤봉과 죽창으로 만나는 교도를 난타하기 시작하였으나 이달호의 누이 이달영(李達榮)의 통기로 이 사실을 알고 대비하였던 수백 명의 교도들이 반격을 가해 일대 혼전이 벌어졌으나 혁신파 측에서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도리어 많은 피해를 입은 채 돌아감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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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 6월3일 방주제 부활되어 이에 따라 60방주의 교첩(敎帖)이 새로 분급됨
- 이 과정에서 여러 부작용이 발생했지만 교도 수는 계속 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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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28선화사 임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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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설치한 총정원 내에 육사(六司)의 부서를 두어 육사장(六司長) 임명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쪽? | ||
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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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서 이동녕, 안창호, 김구 등이 한국독립당 조직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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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300여명을 중앙아시아에 강제 이주시킴 (3월) |
1월 |
이상호 등이 이전에 탈교한 임경호(林敬鎬)와 (김제) 용화동에 東華敎 창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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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 사부로(淺利三郎)가 본소 방문 | 1926년 조선총독의 방문에 이어, 1928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사리 사부로(淺利三郎)가 보천교를 방문하였다. 식민정책에 대한 보천교의 협조를 기대하는 방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탄압과 회유를 번갈아가며 보천교를 농락하였고 당시 지식인들의 보천교에 대한 불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491~49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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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 1월 4일 주송수련(呪頌修鍊)을 금하고 유교에 따른 正坐修心法(무진설법) 선포 - 교도 수백 명이 모인 앞에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걸어 놓고 음양 진퇴소장(陰陽 進退消長)의 이치와 천지인 배합(天地人 配合)의 도(道)를 3일간 설법(說法)함 | ||||
- 남대문 -효자동 간 전차선로 준공 - 박승희 등이 토월회를 재조직 - 장제스,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서 중화민국 국민정부 총통에 취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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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정월 초 3일 치성 후 월곡, 사정방주(四正方主, 金木水火의 男女 方主)에게 말하기를 ‘수십 년 동안 노력해 온 일이 허사(虛事)로 돌아갔으니 수원수구(誰怨誰咎)하리오’ 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6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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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1928년 윤 2월 1일부터 대성전 건축공사를 속행(續行)할 때 사정방사무소(四正方事務所)를 새로 설치하고 각부(各部)를 두어 공사를 분담케 하니 수부(水部)는 토차(土卓), 기와만들기, 기와올리기, 토역(土役) 담쌓기를 맡고, 화부(火部)는 목재(木材) 목역(木役) 일체를 맡고, 금부(金部)는 제지 철물 단청을 맡고, 목부(木部)는 석역(石役) 수도공사를 각각 분담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공사함 | |||
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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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노동연합회 주도로 원산 총파업 시작 (1월) |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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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4대 교리 폐기 | ||||
3월 |
총리원장 민영성·권중기 등 배교 | ||||
여의도비행장 개장 (4월) | 3월 10일경 수석순사부장과 순사 10여 명이 수호사에 와서 경찰관 출장소라는 간판을 걸고 교중의 주식을 축내며 주야로 감시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74쪽 | |||
6월 |
3월 15일 신축성전 내 삼광영 봉안식 거행하려 했으나 정읍경찰서에서 허가하지 않음 | ||||
만주 영안현에서 김좌진 등이 신민부를 토대로 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7월) | 차경석, 정읍검사국에 출정(일본천황 사진에 활을 쏘고, 교주등극 후 벼슬을 준다는 사기취재, 옥새와 곤룡포를 입고 매일 조견례를 받는다고 고발 당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46쪽 | |||
조선총독부 총독에 사이토 마코토 재임명 (8월) | 채규일 배교
- 차월곡으로부터 받은 8만 원의 보관증을 위조하여 고소 - 박종하, 문정삼, 채규상 등이 합동하여 교주에게 보관한 금전 반환하라고 무고. 차 교주 천자등극설 지어냄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46쪽 | |||
광주학생항일운동 발생(11월) | 만주 영안현에서 김좌진 등이 신민부를 토대로 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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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전(十一殿) 완공
(1925년 기공 이후 4년 만에 완공)
- 십일전은 땅과 무극(無極)을 상징한 십(十)과 하늘과 태극을 상징한 일(一)을 적용하여 붙인 이름임. 또는 교주가 60방주 중에서 중앙격인 토주(土主)였기 때문에 궁전을 의당 토전(土殿)이라 하는데, 경찰의 의심을 피해 십일전이라고 했다 함. 즉 十(십) 자와 一(일) 자를 합치면 토(土) 자가 되고, 토전은 곧 이 땅의 주인이 정사(政事)를 펴 나가는 집이라는 뜻 - 역학적으로 보면 십(十)은 역학에서 보는 음(陰)의 최종수(最終數)이고, 일(一)은 양(陽)의 시초(始初)가 되는 수(數)이므로 십일(十一)이라는 수는 음양의 시종(始終)을 뜻함 - 십일전(十一殿)에는 태극수 1과 무극수 10을 합한 11의 조화로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조화사상이 들어있다. 최제우 동학의 조화사상에 뿌리를 둠 - 부지 10,000여 평, 건평 350평, 높이 99척, 제탑(祭塔) 3개, 4대 문루 -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정화당(井華堂)∙총령원(總領院)∙총정원(總正院)∙태화헌(泰和軒)∙연진원(硏眞院) 등 45동의 크고 작은 부속건물로 구성돼 흡사 대궐을 연상케 함 - 중국 천자궁(天子宮)을 본떠 황금색 기아를 사용, 호화의 극치 이룸. 황색은 흙의 정색(正色)으로 천자의 제위를 상징하는 의미(일제의 반대로 황금색 기와를 내리고 청색? 일반 기와? 기와 올림) - 대들보는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의 재목을 군산항을 통해 끌어다 사용 - '한반도에서 독립건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차천자의 천자 등극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 (본소에) 들어갈 때부터 나오기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림 - 공사비용만 150만 원이 듦(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91쪽) - 십일전은 남쪽의 입암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워진 오좌자향(午座子向)임. 현세가 선천(先天)과 달리 운수(運數)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되었다는 의미임 -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보다 2배 넓고 웅장 호화로움 준공식과 삼광영 봉안식 무산 - 십일전(十一殿) 신축공사가 끝나자 3월 15일에 준공식과 아울러 신축된 십일성전(十一聖殿)에 삼광영(三光影, 태극의 본체. 신앙대상으로 모시는 日光影 星光影 月光影, 三靈位)의 봉안식을 거행. 이것이 '차경석이 기사년(己巳年), 기사월(己巳月)에 신축된 궁전에서 천자등극식을 갖는다'는 소문으로 변함 - 신축된 십일전 영위봉안식 거행은 월곡이 기사년인 1929년 기사월(己巳月, 4월) 기사일(己巳日, 16일)에 신축 궁전에서 등극식(登極式)을 거행한다는 ‘기사등극설’로 유포됨 |
십일전과 경복궁
구조: 십일전 - 정면 5칸, 측면 5칸, 길이 100자, 광 50자, 기둥 24자 경복궁 - 정면 5칸, 측면 5칸 벽화: 십일전 - 산 위에 해와 달, 칠성을 그린 벽화 (성탑 내 중앙에 입암산, 왼편에 삼성봉, 오른편에 방장산 그리고 산 위에 해와 달, 칠성을 그림) 경복궁 - 일월오봉도(근정전) 덕수궁 - 일월오봉도(중화전) - 십일전은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2배 정도 컸음 근정전: 7보(椺) 5간(間) 십일전: 9보 7간 - 1910년, 월곡 선생은 일본에 넘어간 한양 대신 전라도 정읍을 조선의 바탕으로 삼고 스스로를 천자(天子)라 칭하고 개국연호를 만들었다. 월곡 선생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큰 대규모 교전인 십일전을 공사하였는데, 전형적인 궁궐건축양식을 따랐으며 기와는 청자기와의 전통을 재현하여 청색으로, 또 십일전에는 중국 황제만 쓸 수 있다는 황기와까지 중국에서 도공을 불러 제조하였다. 그러나 한때 6백만 신도들을 이끌며 교세를 떨치던 보천교는 모종의 세력으로부터 친일행각을 벌인다는 모함을 받았고, 월곡 선생까지 암살로 의심되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철저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십일전의 본전은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으로, 일부 건물은 내장사와 동대문으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 관저 건물의 기와가 되었고, 이후 경무대 건물을 윤보선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다.(『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 (-----------------------------------------------)~ 일제의 탄압과 그 결과 - 1929년에 예정된 삼광영(三光影) 봉안식(奉安式)이 ‘기사년 등극설’로 확산되면서 교세가 일시 확장되었다. 또다시 민중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상황을 일제는 좌시하지 않았다. 일제는 삼광영 봉안식을 불허함과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내란음모’로 규정하였다. - 기사년 등극설 소문은 일본 경찰을 자극하여 경찰은 봉안식 무기 연기를 명령하였다. 이후에도 일제는 온갖 이유를 붙여 십일전의 성령봉안식(聖靈奉安式)을 허가하지 않았다. -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정읍 대흥리의 경제적 종교공동체는 마비되었다. 1,000여 호에 달하는 5천여 명의 교인들은 아사의 위험에 빠졌다. 이때 차경석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연명케 하는 벽곡(辟穀)을 강조하였지만, 벽곡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발생, 배고픔과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기사년 등극설은 침체에 빠진 보천교운동을 활성화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등극 실패는 역설적으로 월곡을 중심으로 한 보천교 세력을 급속하게 위축시킨 원인이 됨 |
- 이강오 『보천교』 27쪽
- 박문기 『본주』 115쪽
-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95~96쪽, 116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46, 172, 295쪽 - 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91쪽, 107쪽 - 안원전 『증산도(下)』(대원출판사, 1991) 778쪽 - 노종상 「월곡 차경석 연구서설」 보천교학술대회」(2017) 상생문화연구소 -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 김재영 「보천교 본소 건축물의 행방」 한국신종교학회, 신종교연구 5권 (2001) - 홍범초 『범증산교사』(한누리출판사, 1988) 120~122쪽 |
조선총독부 총독에 사이토 마코토 재임명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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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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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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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이 북만주 산시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함 (1월) | (김좌진 장군이 북만주 산시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함 (1월)) ~ ---옆 칸과 중복 |
1월 |
1월 23일 월곡이 교단 간부들을 모아 치성 때 흥배기복(興拜起伏)을 법도 있게 하기 위하여 신축한 성전의 연진원(硏眞院) 앞 광장에서 예식(禮式)을 연습하려 함
- 정읍경찰서 고등계 순사부장 마에다 도라요시(前田寅吉)가 와서 서장의 명령으로 새로 건축한 성전의 사용을 금지하여 본소 정침전(正寢殿) 앞뜰에서 배례식(拜禮式) 연습 |
삼광영 봉안식의 실패와 교본소의 황폐화
일제는 삼광영 봉안식을 불허함과 동시에 이러한 행동을 ‘내란 음모’로 규정하였다. 일제가 조작한 ‘내란 음모’ 사건은 전라북도 정읍의 교본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경찰이 교본소에 주재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1933년에 보천교에 대한 일제의 주된 탄압 이유는 ‘사이비 종교의 혹세무민’이다. 이때 정읍경찰서는 교본소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켰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정읍 대흥리의 경제적 종교공동체는 마비되었다. 1,000여 호에 달하는 5천여 명의 교인들은 아사의 위험에 빠졌다. 이때 차경석은 최소한의 곡식으로 연명케 하는 '벽곡(辟穀)‘을 강조하였지만, 그로 인해 죽는 자가 발생하였다. 배고픔과 일제의 탄압으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6쪽
- 김철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70쪽. - 안후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 『학술대회자료집』(2016) 78쪽 |
- 이동녕, 김구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립 (3월)
- 경성 단성사에서 최승희 창작무용발표회 공연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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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단성사에서 최승희 창작무용발표회 공연 (3월) 276 중복 |
5월 |
5월 23일 정읍경찰서 경관 23명이 정읍 대흥리 본소를 방문, 성전 내외와 차교주 가묘(家廟)의 신주독(神主櫝)까지 열어보고, 심지어 차교주 및 교주 형제친척의 거실에 들어가서 천장과 벽장의 벽지까지 찢어보며 교주가 교도들에게 벼슬을 준다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수색하다 그대로 돌아감 | 보천교 잔여세력의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
1930년대 초반에 일제의 탄압으로 수많은 교인이 보천교를 이탈하였다. 이들 일부는 각지에서 비밀리에 조직을 복원해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반국가 단체로 몰리면서 탄압을 받았다. 채경대(蔡慶大)는 인도교(人道敎), 증산교(甑山敎)를 연이어 창립하였고, 과격한 반일사상을 유포시켰다는 이유로 검거, 기소되었다. 보천교 교인이었다가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조직하고 스스로 교주가 된 강승태(姜昇泰) 역시 보천교가 했던 방식대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 강원도 평강의 선도교(仙道敎), 전라북도 부안의 원군교(元軍敎), 전라북도 정읍의 선교(仙敎) 등도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40년대 초반 중대 사상(사상)사건 총31건 중 6건이 보천교의 잔여세력과 관련이 있다. |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2017) 503~527쪽)
▶「警察情報綴 - 平高等祕密文書 第839號」(平高祕第839號 昭和10年(1935) 7.26. 平康警察署 京城地方法院檢事正殿) - 0517쪽/ 선도교의 不穩計劃에 관한 件 - 0518~0525쪽/ 1. 仙道敎의 기원 및 조직 - 0525~0531쪽/ 2. 仙道敎의 목적 및 不穩計劃 - 0531~0532쪽/ 3. 布敎의 수단 방법 - 0532~0533쪽/ 4. 布敎狀況 및 신자의 분포 상황 - 0533~0535쪽/ 5. 仙道敎의 詐取 行爲 - 0535쪽/ 6. 平康郡 내에서 仙道敎의 활동상황 - 0537~0538쪽/ 총독각하에게 드리는 보고서 - 0541~0552쪽/ 仙道敎 劃策 상황 ▶ 光州地方法院 濟州支廳 刑事事件簿(1940年 形公合第2號) - ...위 姜承河(昇泰)에 대한 불경... ▶ 조선일보 - 1935.11.10(석간) / 차경석을 위시 보천교 간부 取調, 최근 포교 방침이 바뀌면서 某種의 嫌疑를 받아 - 1936.7.25/ 平北경찰과장 아연 긴장, 熙寧 兩郡서 活動, 內容은 보천교 事件과 赤色秘社事件, 今後도 擴大될 形勢 - 1937.8.20(석간) / 표면은 종교적. 이면은 정치적. 平康서 京城으로 護送車 중에서 金重燮과 일문일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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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6월 12일 문정삼(文正三)은 한로주(寒露主) 이중창(李仲昌) 등의 내응을 받아 보천교 혁신단이란 이름 아래 교주 토죄문(敎主 討罪文)을 인쇄하여 뿌리고 배교자(背敎者)와 부랑자 등 50여명을 모아 자동차에 분승(分乘) 혹은 도보로 대흥리(大興里) 비룡교(飛籠橋)까지 다가오니 수호사장(修好司長) 원약제(袁若濟) 등 교도들이 폭력을 사용 않고 교유지(敎有地) 통과를 극력 저지하니 출동한 일본 경찰이 오후 5시경 해산령(解散令)을 내려 흩어져 돌아감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6쪽 | |||
9월 |
대흥리 앞 재령봉(宰靈峰)에서 애곡제(哀哭祭, 보천교 망함을 통곡하는 고천제) 지냄 | ||||
11월 |
9월 김중선의 선도교 사건 (선도교도의 불온계획 검거의 건) | ||||
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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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 김언수가 삼성교로 종교를 바꿈 강상백이 제주도에 돌아가 水山敎 창교 | |||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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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강재석은 1922년 여름 하방주(夏方主) 조제승(曺悌承)의 소개로 관작(官爵)을 수여한다고 하여 월곡에게 3천원을 납부했으나 사기당했다고 고발 (증거 서류 미비로 기각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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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정원(協定院) 설치, 그 아래 정의원(正議員)을 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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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교령에 따라 총정원 봉쇄 조치가 내려지고, 이를 대신해 '6임 총무소' 설치됨 ---> | ||||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사퇴, 우가키 가즈시게가 신임 총독으로 취임 (6월) |
4월 |
한병수, 자칭 태을진인이라 하고 경성에 人天敎 별립. 조재승 등 서백일과 함께 구례군 대덕산에 금산사미륵불교포교소 설립 | |||
일본이 봉천 부근에서 남만주 철도를 고의로 폭파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사변을 일으킴 (9월) | 조선총독부에 우가키 가즈시게가 신임 총독으로 취임 (6월) 286 중복 |
윤5월 |
己( )? 조합장 서상근 금산면 청도리에 신단 설치. 설영태 등 일본 천리교와 제휴할 목적으로 교주인장을 위조하여 금전계약, 교도 유인함 | 그리고 같은 해에 월곡의 교령(敎令)에 따라 총정원이 봉쇄되는 조치가 내려지지만, 이를 대신해 '6임 총무소’가 설치되었고, 285중복 | |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도쿄 사쿠라다몬 밖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 (1월) |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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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경찰서 측이 조선총독부령 단발령의 「유고문」을 가지고 와서 각 교도에게 교단 명의로 발송 | ||
- 만주국 건국 (3월)
- <조선일보> 제8대 사장으로 조만식 취임 (6월) |
한인애국단원 이봉창, 도쿄 사쿠라다몬 밖에서 일본 쇼와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 (1월) 288 중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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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중국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져 의거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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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월곡은 교주의 직인을 '인의유신(仁義有信)' 넉자로 새기고 6임을 인의사(仁義士)로 고치고, 1931년에 설치된 '6임 총무소'를 '인의사총무소(仁義士總務所)'로 개칭, 경북 성주(星州)의 유생(儒生) 송호눌을 비롯하여 간부들과 일반 교도들로 하여금 집지례(執贄禮)를 하도록 함 |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74쪽 - 『甑山敎史』 183쪽 | |||
1933년 |
1932 11. ~ 1933. 1? |
1931년에 설치된 '6임 총무소'를 '인의사총무소'로 개칭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74쪽 | ||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취임 (3월) | 조선혁명당의 한중연합군, 싱징현성의 일본만주 연합군을 공격해 점령 (3월) |
3월 |
부안사람 박인택(朴仁澤)이 홍순옥(洪淳玉) 등과 탈교하여 같이하는 교인들을 모아 부안군 산내면(山內面) 지서리(知西里)에 원군교(元君敎)를 세움 | ||
3월 7일 이후 각 도에 정리(正理), 포정(布正), 선정사(宣正士)가 지방 순회하며 교인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는데 지방관청에서는 일종의 유사단체(類似團體)로 취급하여 순회사를 위협, 구타 혹은 고문으로 포교를 방해하고 교기 및 교첩 등을 찢음 | |||||
중국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회의 개최, 대동단 결의조직 및 실현을 강령으로 채택 (3월) 287 중복 |
1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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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한국독립당과 난징의 한국혁명당이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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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이 모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회의 개최, 대동단 결의조직 및 실현을 강령으로 채택 (3월) 295 중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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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이 서울을 방문 (4월) |
5월 |
5월 21일 경북 부정리(副正里) 이달상(李達相)과 포정(布正) 김승렬(金承烈) 2인이 영덕군(盈德郡) 달산면(達山面) 대지동(大枝洞) 이기대 방(方)에서 돈신록을 검열하고, 그달 23일 돌아오는 길에 인사차로 그 군의 경찰서를 방문한즉 불문곡직하고 단발을 안했으니 국적(國賊)이라 하고 순사 10여 인이 달려들어 삭발당한 후 1주일간 구류됨 | - 후기 교단의 교리로 인의(仁義, 1923년 인의도덕 교리 창도)가 제시됨으로 보천교 후기교단의 종교활동이 유교의 부흥운동과 비슷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킴
- 월곡의 말처럼 증산이 말한 대인대의(大仁大義)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보천교 후기 교단이 교의로 표방한 인의(仁義)는 증산의 성훈(聖訓)을 전통적인 유교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고 증산교 측 주장함 - 보천교 강령(교강): 인의(仁義)를 핵심에 두고 교강을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이라 함 - 보천교 주의(主義): 상생(相生) 노인을 편히 하고 어린이를 품에 안으며 만물과 나를 하나로 조화시키면 이 우주를 한 집안 같이 볼 수 있게 된다. - 4강령 경천(敬天), 명덕(明德), 정륜(正倫), 애인(愛人)과 주의(主義) 상생(相生)이 인의(仁義)로부터 나오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나 인의(仁義)를 알고 행하지 아니하면 열매 맺지 아니하는 헛꽃이여 궤 안에 든 명주(明珠)와 같아 모두 공(功)을 볼 수 없는 것이니 4강령과 상생은 인의를 행하는 요령(要領)이다. - 보천교 목적: 대동(大同) - 연중 7대 치성(七大致誠) 1. 정월 1일 2. 정월 3일 3. 춘분(春分) 4. 추분(秋分) 5. 동지(冬至) 6. 하지(夏至) 7. 8월 15일 * 정월 3일: 증산이 교통을 전수해 준 전수일. 증산 탄강일과 화천일은 7대 치성일에 빠짐 (증산의 신권 숭배 중지)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7쪽 | |
전문사(典文司)를 통하여 혁신된 교의강령을 발표, 새 교의강령의 뜻을 설명한 『대도지남(大道指南)』의 내용 공개함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297쪽 | ||||
중국 뤼순 감옥에서 신채호 옥사 (3월) |
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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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뤼순 감옥에서 신채호 옥사 (3월) 300과 중복 |
윤3월 |
월곡, 이영호에게 『보천교연혁사』 편찬 지시 | 교본소와 십일전 훼철
1920년대 후반부터 경찰은 정읍의 보천교 본소에 상주하였다. 조선총독부 간부에서 말단 경찰, 그리고 기자들까지 보천교로부터 금품을 갈취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는 경찰이 노골적으로 보천교 교금을 압수하였다. 보천교는 1929년에 노선의 변경을 한때 시도하였다. 1932년에는 개신 유교에 가까운 노선으로 변경을 시도하였다. 노선 변경의 시도는 신파와 구파로 갈려 격한 대립을 낳게 되었다. 예컨대 강증산을 교조로 차경석을 교주로 하는 쪽과 강증산을 교조에서 배제하려는 쪽으로 갈리어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경찰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교단에 해산 권고 조치를 내렸다. 일제의 탄압과 내분으로 지리멸렬해 있던 1936년 3월 차경석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였다. 차경석의 타계 소식을 접한 전주경찰부와 정읍경찰서 소속 형사대 70여 명은 교의 치성금 수합금지 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중앙본소를 수색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 정읍의 천원주재소 소속 경찰들이 중앙본소에 유숙하면서 건축물 내부를 파헤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또한 협정원장과 수호사장, 경리사장을 불러서 십일전(十一殿)을 위시한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당국에 제공하라고 위협하였다. 1936년 6월 6일 주요 간부 24인을 연행해 보천교 해산, 신건축 포기, 삭발 등을 강요하였다. 경찰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허락없이 십일전 내 개금된 성상과 제기, 신앙대상인 삼광영(三光影) 벽화와 도금된 제단 등을 뜯어갔다. 같은 해 6월 15일 정읍경찰서 소속 경찰 수 십 명이 난입, 중앙 본소 시설물들을 철거해갔다. 정읍경찰서에서 보천교의 중앙본소 건축물들을 경매하려 하자 정읍의 유지들이 '보천교 건물은 역사상 일대생광(一大生光)인즉 이곳에 대학교와 병원을 세우자'며 경매에 참여하려 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보천교의 씨앗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 상징물들의 존재를 목적으로 백만 원에 낙찰을 원한다고 한들 낙찰을 반대하겠다'며 관련 경매를 반대하였다. 경매에 앞서 경찰은 유령단체인 ‘보천교재산처리위원회’로 하여금 재산포기 각서를 쓰도록 하였다. 십일전을 두고서 경매에 들어갔으나 어느 누구도 경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인 강호장차랑(江戶長次郞)이 경매가의 절반인 500원에 십일전을 낙찰 받았다. 십일전의 건축 비용은 50만원인데 비해 경매가는 터무니없는 500원이었던 것. 낙찰자인 강호장차랑은 경찰의 하수인이었으며 그 대금 500원도 경찰로 넘어갔다는 전언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십일전 경매는 정상적인 경매가 아닌 압수였다. 강호장차랑이 낙찰받은 십일전을 조선 불교계가 사들여 서울로 이축하니, 현 조계사(曹溪寺) 대웅전(大雄殿)이다.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 민족운동'」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527~532쪽) (--------------------------------------------------------)~ . 십일전의 본전은 해체되어 조계사 대웅전으로, 일부 건물은 내장사와 동대문으로, 청기와는 조선총독부 관저 건물의 기와가 되었고, 이후 경무대 건물을 윤보선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대통령 관저를 ‘청와대’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다.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 |
- 『대도지남』 1~6쪽
- 『道訓』 108~109쪽 - 박종렬 『차천자의 꿈, 시국』(장문산, 2001) 113쪽, 114쪽, 116쪽, 117쪽, 118쪽, 175쪽, 295쪽 - 김철수 『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상생출판, 2017) 271쪽 - 안후상 「普天敎 十一殿과 曹溪寺 大雄殿」 2001 신종교연구 제4집 - 안후상 「자료로 재구성한 '일제강점기의 보천교운동'」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 527~536쪽 - 『일간스포츠』 「차길진의 갓모닝」 ‘차천자의 비밀’ 2019. 7. 5일 자 ▶ 李英浩 『普天敎沿革史(上⦁下)』(普天敎中央協定院⦁總正院, 1935記 1945發) (속)? 7쪽 전~12쪽 전/ 1936년 3월10일에 聖師主의 병세 더욱 심하사 회춘의 힘이 없으므로 聖母主 명에 의하여 병탑을 정침으로 옮긴 후 下世하시니, 즉 申時라. 부고 및 전보를 각 도 正理所 郡敎約所 布正 집지인에게 발송하다... -? 종교운동의 소멸과 한국의 종교·사상 단체의 위축 ▶ 『最近に於ける朝蘇の治安狀況-昭和 8年. 13年』(朝鮮總督府警務局, 1933.1938) - 106쪽/ 종교 및 종교 유사단체 의 상황 - 111쪽/ 종교 유사단체 ▶ 『조선일보』 - 1935.2.10/ 불교를 중심으로 四大 종교 선택 결정. 60여개 類似 종교단체는 통제 정리, 當局의 宗敎 復興 운동 - 1936.6.10/ 전조선 類似宗敎에 不日 中에 大鐵槌. 普天敎·甑山敎·東華敎 등 종교적 行事의 撤廢를 斷行 - 1936.6.14(석간)/ 民衆을 欺瞞榨取하는 邪敎團體 일제 탄압. 보천교를 위시하여 유사종교는 剿?滅코, 公認宗敎統制도 强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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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차월곡 사망 (윤3월 10일)
- 보천교 해체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 경부 등 경관 50여명 출동하여 장례를 경계함. 전주경찰부 지휘로 교중 회의를 정지시킴. 각 지역의 교도들의 운집을 <보천교에 대한 존폐문제가 결정되기 전>이라는 이유로 돌려보냄 - 총독부 경찰부는 「보천교 교무집행은 일체금지, 정리소 교약소 간판을 철폐, 성의금 취급자 엄벌」 공문 발송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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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애국가 작곡 (6월)
-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자진 휴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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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일제 ‘심전개발정책’ 실시 | |||
6월 |
- 6월에 경찰서장이 '보천교의 해산, 십일전 건물의 포기, 교인의 삭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십일전 경매를 행함 | ||||
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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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의 국내 탈환작전 결정. 총지휘 이범석(7월)
-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 일본, 연합군에 항복 - 우리나라 8.15 광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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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11월 3일
김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우리나라로 돌아오면서 여의도 공항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 그는 "우리가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빚은 정읍 대흥리 본소를 둔 보천교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은 것을 말함 |
남창희 「보천교의 독립국가 정체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학술대회자료집』(2016) 100쪽 |